춘천의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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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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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평사 전경(2010년대)
상세정보
1장 춘천지역의 불교사

강원지역에는 신라시대에 불교가 전래되어 강원지역 전역에는 많은 사찰이 건립되었고 건립된 사찰을 중심으로 불교문화가 꽃피웠다. 그러나 이러한 사찰들 중에서 경영되고 있는 사찰보다 경영되지 못하고 폐찰되어 현재는 절터寺址로 남아 있는 예가 더 많다. 특히 강원지역은 1945년 남북으로 분단될 때 그 경계선상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휴전을 전후한 시기에는 남·북한군의 격전지였기 때문에 강원도내의 3개 본사였던 유점사·건봉사·월정사가 모두 폭격과 방화로 소실되었고, 청평사·낙산사·심곡사를 비롯한 많은 사찰이 폐허가 되는 큰 피해를 입었다. 이러한 피해로 여러 사찰이 복구가 진행되고 있지만 대부분의 사찰은 복구가 되지 못하였다. 특히 대규모의 사찰이 집중적을 건립되었던 금강산 일원의 사찰들은 대부분 파괴된 후 신계사를 제외하고는 복구되지 못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강원지역은 자장과 원효의 일화가 전하는 낙산사와 평창의 수다사를 비롯하여 신라시대의 주요 사찰이 여러 곳에 있으나 한국불교사에서 강원지역이 주목받는 시기는 신라말 선종(禪宗)이 도입되면서 그 빛을 발하고 있다. 59산으로 불리는 9산선문 중에서 양양의 진전사와 선림원지는 가지산문의 개산조와 2·3조인 도의와 염거 그리고 보조선사가 수학하였고, 강릉의 굴산사와 보현사는 굴산산문의 개산조와 2조인 범일국사과 낭원대사가 머물렀던 사찰이다. 영월의 법흥사흥녕선원는 사자산문의 개산사찰로 징효대사가 머물렀다. 또한 초기 선승은 성주산문의 개산조 무염국사는 양양의 오색석사에서, 실상산문 개산조와 2조인 홍척과 수철은 설악산에서, 봉림산문 개산조인 심희도 설악산에서 수행하였다. 이외에도 희양산문 지중도헌은 원주 거돈사에서 수행하고 입적하였으며 사자산문 개산조 징효의 스승인 철감도윤도 금강산에서 수행하였다. 이와 같이 강원도는 금강산과 설악산을 배경으로 백두대간이 한국 선종불교의 요람으로 자리매김하였고 이는 고려와 조선시대에도 금강산을 중심으로 불교가 성행하였다.

불교가 춘천지역에 언제 전래되었는지 명확히 알려져 있지 않으나 늦어도 신라시대에는 전래되었을 것이지만 기록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자료는 굴산산문의 범일국사 제자인 낭공이 삭주(朔州)에 건자야(建子若)를 짓고, 처음으로 굴산문을 개산하여 불교를 전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시기는 춘천의 박유(朴儒)가 궁예의 태봉국을 돕고 있을 시기이기도 하다. 건자야의 위치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춘천지역에서 신라말의 불교유적으로 보여지는 대규모 절터는 용화산의 양통마을에 있는 법화사지인데 낭공이 건자야를 짓고 머물자 사람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는 기록으로 볼 때 사찰의 규모나 남아 있는 석조물로 볼 때 법화사지가 가장 유력해 보인다.

이후에는 청평사가 창건되어 춘천불교의 중심지가 되었다. 또한 고려시대에는 양화사, 상원사, 흥국사, 법화사, 전방사, 조면사 등이 창건되어 번창하였으며 절 이름은 알 수 없지만 소양로 7층석탑, 근화동 당간지주가 있는 곳과 물로리 등에 사찰이 있어서 각 지역에 불교문화를 꽃피웠다. 조선시대에는 우두사, 사자사, 삼화사, 삼한골에 여러 사찰들이 건립되어 이 지역에도 불교의 문화가 자리하게 되었다.

현재까지 춘천지역의 불교문화를 정리한 연구가 없어서 그 모습을 제대로 반영할 수 없지만 이 기회를 삼아 춘천불교문화를 재정리하고 문화의 특성을 찾는데 노력할 예정이다.

 

 

2장 청평사

 

청평사는 영현(永玄)선사에 의하여 973(광종 24)에 백암선원(白巖禪院)으로 창건된 사찰로 이자현(李資玄)이 문수원(文殊院)으로 절 이름을 고치고 중창하여 고려 중·후기에 불교계의 한축으로 활동하는 거사불교(居士佛敎:스님이 아닌 일반 속세의 남자)의 요람이 되었다. 이후 이암(李嵓)이 은거하여 또다시 거사불교의 맥을 이었으며,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설잠(雪岑) 김시습이 스님이 되어 이곳에서 수행하였다. 이처럼 거사불교가 번창하던 시기에 대감(大鑑)국사 탄연(坦然)이 쓴 진락공중수문수원기(眞樂公重修淸平山文殊院記)와 이암이 쓴 문수사장경비(文殊院藏經碑)가 건립되었고, 이는 후대에 한국의 거사불교와 더불어 서예사적으로 주목받는 사찰이 되었다.

또한 이자현은 청평사에 37년간 주석하면서 굴산문의 혜소(慧炤)국사와 그의 제자였던 대감국사 탄연과 교유하였고, 원진국사 승형(承逈)에게도 영향을 주어 굴산문의 법맥을 잇고 있다. 그리고 청평사의 10여 곳에 건물을 짓고 영지(影池)를 조성하여 고려시대 별서문화(別墅文化)의 한단면을 보여주었다.

고려 후기에는 태정황후의 지원으로 중흥기를 맞이하면서 원()나라 황실의 원찰이 되었고,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보우(普雨)가 주석하면서 명종의 원찰이 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영향은 가람배치에도 영향을 주어 산지중정형의 기본 가람형태를 띠면서도 조선시대 원찰들이 갖는 「□」자형 가람배치를 따르고 있다. 가람배치는 청평사 경내에 잔존하는 유구와 발굴성과를 토대로하여, 문헌자료를 보완하고 종합하면 조선 중·후기 청평사의 가람배치가 좀 더 구체적으로 밝혀질 수 있을 것이다.

법맥(법맥)을 보면 보우가 폐지되었던 승과를 부활하고 이를 통하여 등장한 휴정의 법맥을 이은 고승들이 주석하게 된다. , 부용영관(芙蓉靈觀)의 법맥인 부휴선수(浮休善修)와 청허휴정(淸虛休靜)계에서 환적의천(幻寂義天)은 청허휴정-편양언기-환적의천으로 이어지는 법계도를 보여주고, 환성지안은 청허휴정-편양언기-풍담의심-월담설제-환성지안의 법맥을 가지고 있다. 이는 휴정의 수제자로 각기 편양언기와 월담설제의 법을 이어 청평사를 사상사적으로 한층 승격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외에도 많은 고승이 청평사에 주석하지만 부휴계로 보이는 승려는 확인되지 않았다.

가람 역시 보우에 의하여 일신 중건된 후 임진왜란 당시에도 소실되지 않았으며, 지안(志安)에 의하여 대대적인 보수를 이루어져 법맥도 끊이지 않았다. 이러한 출가승과 거사의 주석은 청평사가 폐사되지 않고 존속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고려 중기에는 거사불교의 중심지와 탄연의 진적이 남아 있는 사찰로, 고려말에는 원나라의 원찰로서 기능하면서 이암의 진적이 남는 사찰이 되었다.

이러한 면을 볼 때 청평사는 영서지역에 가장 오래된 고찰일 뿐 아니라 사상사와 서예사에서 매우 주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으며, 또한 거사불교와 굴산문의 법맥을 이해하는데 있어서도 중요성을 인정받고 있다. 조선시대의 원찰형 가람배치를 유구를 통해 살필 수 있는 사찰이도 하다. 또한 고려 중기에 예종이 차()를 여러 차례 이자현에게 하사하여 현대인들이 이자현과 차()문화를 재조명하고자 하는 시도가 있기도 하다.

이렇게 청평사는 춘천과 강원도를 넘어 한국불교문화사에서 주목을 받는 사찰이다. 그럼에도 여기서 정리되는 자료는 청평사의 일부를 드러내는 작업에 불과하다. 앞으로 청평사를 찾는 방문객들께 보다 충실한 자료가 되도록 자료를 재정리하여 꾸준히 수정 보완해 나갈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