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의 불교
사이트 내 전체검색

김상헌(金尙憲), 「청평록(淸平錄)」, 『청음집(淸陰集』

상세정보


■ 김상헌(金尙憲,1570~1652 ): 본관은 안동(安東). 호는 청음(淸陰)이다. 1635년 대사헌으로 재기용되자 군비의 확보와 북방 군사 시설의 확충을 주장하였다. 이듬 해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예조판서로 주화론(主和論)을 배척하고 끝까지 주전론(主戰論)을 펴다가 인조가 항복하자 안동으로 은퇴하였다. 1639년 청나라가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요구한 출병에 반대하는 소를 올렸다가 청나라에 압송되어 6년 후 풀려 귀국하였다. 1645년 특별히 좌의정에 제수되고, 기로사에 들어갔다. 효종이 즉위해 북벌을 추진할 때 그 이념적 상징으로 ‘대로(大老)’라고 존경을 받았으며, 김육(金堉)이 추진하던 대동법에는 반대하고 김집(金集) 등 서인계 산림(山林)의 등용을 권고하였다.


■ 「청평록(淸平錄)」: 1635년 3월 8일부터 14일 사이의 유람을 적은 글이다. 3월 8일에 거처하던 곳에서 출발하여 가평을 지나 안보역에서 숙박을 하였는데, 시 두 편으로 간단하게 서술하고 있다. 9일에 안보역에서 출발하여 춘천에 도착하였고, 10일에 하루 종일 비가 내려 춘천 시내에 위치한 요선당에 갔다 온 사실을 간략히 적었다. 11일부터 13일까지가 청평산 유람에 대한 내용이다. 배를 타고 귀가한 날짜는 14일이다. 「청평록」은 온전히 청평산의 유람을 다루고 있지 않지만, 앞뒤의 내용들은 청평산 유람을 하기 위한 여정의 기록이기 때문에 청평산만의 유산기라고 할 수 있다.


■ 번역문 / 원문  정자에서 내려와 배를 타고 강을 건너는데 물이 맑아서 바닥이 다 보여 모래와 자갈을 하나하나 셀 수 있다. 우두산(牛頭山)을 지나 부복천(扶服遷)-사투리에 잔도(棧道)를 천(遷)이라고 한다.-을 거쳐 청평동(淸平洞)으로 들어갔다. 춘천에서부터 이곳까지의 거리는 40여 리이다. 환희령(歡喜嶺)에 도착하여 말에서 내려 폭포를 보았다. 조카 광환(光煥)과 두 이생(李生) -이득배(李得培)와 이중경(李重慶)이다.-과 두 최생(崔生)-최재형(崔再亨)과 최홍기(崔弘耆)이다.-이 따라왔다. 송단(松壇)에 앉아서 술 몇 잔을 돌려 마셨다. 맑은 시내와 널따란 반석이 있으며, 낙락장송과 고목이 좌우에 줄지어 서 있는데, 비가 내린 뒤라서 산꽃이 만개하고 물살이 더욱 장려하여 맑은 모습을 발하고 있으니, 역시 일대 장관이다.

산으로 들어가다」

숲을 뚫고 골짝 들자 길은 백 번 굽도는데 / 入洞穿林路百廻

꽃 저편에 멀리 신선 사는 누대 보이누나 / 隔花遙見有仙臺

붉은 단애 푸른 절벽 겹겹으로 겹친 곳에 / 丹崖翠壁重重處

한 줄기의 은빛 시내 눈 뿜으며 흘러오네 / 一道銀川噴雪來

  다시 위로 수백 보를 올라가니 영지(影池)가 있는데, 물빛이 맑으면서도 푸르다. 산 중턱에 있는 견성암(見性菴)이 그 속에 비쳤기 때문에 영지란 이름을 얻었다. 연못의 양쪽 모퉁이에 돌을 쌓아 물을 가뒀는데, 물이 새어나가 쉽사리 고갈될 것만 같은데도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고 비가 와도 넘치지 않으니, 이상한 일이다. 연못의 주위에는 붉은 나무 서너 그루 심어져 있는데, 크기가 두 아름은 된다. 고려 때의 중인 나옹(懶翁)이 심은 것이라고 한다.

「영지(影池)」고인 물은 천 년 동안 한 빛깔로 맑았거니 / 止水千年一色淸
(上方) 칠한 고운 단청 허공 꽂혀 빛 밝구나 / 上方金碧倒空明
찾아온 객 허연 머리 비치는 게 부끄러워 / 客來羞照星星鬢
애오라지 연못가에 가서 갓끈 씻어 보네 / 聊就池邊試濯纓

  청평사(淸平寺)는 본디 경운산(慶雲山)의 보현원(普賢院)이었는데, 고려 때 이자현(李資玄)이 관직을 버리고 이곳에서 37년 동안 은거해 있으면서 이름을 청평사라고 고쳤다. 절 앞에는 두 개의 연못과 두 개의 비석이 있는데, 서쪽에 있는 것은 송(宋)나라 건염(建炎) 4년에 김부철(金富轍)이 이자현의 사실을 기술한 것을 승 탄연(坦然)이 쓴 것이고, 동쪽에 있는 비석은 원(元)나라 태정황후(泰定皇后)가 태자를 위하여 이곳에 불경을 보관해 복리(福利)를 구한 사실을 이익재(李益齋)⑵가 찬하고 이행촌(李杏村)⑶이 쓴 것이다. 문(門額)에 경운산청평사(慶雲山淸平寺)라고 쓴 것은 승 보우(普雨)의 글씨이다. 전료(殿寮)⑷와 낭서(廊序)⑸가 빙 둘러 있으면서 화려한 것이 엄연한 하나의 총림(叢林)이었는데, 근세에는 승도(僧徒)들의 부역이 번거로워 절을 지키면서 사는 자가 수십 명도 안 되어서 장차 폐찰(廢刹)이 되게 생겼으니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법당의 서북쪽 모퉁이에는 극락전(極樂殿)이 있는데, 이 역시 보우가 세운 것으로 금벽(金碧)⑹과 단칠(丹漆)⑺이 지나치게 사치스러워 보통 절과는 다르다. 절의 남쪽 골짜기에 세향원(細香院)이 있는데, 청한자(淸寒子)⑻가 머물러 살던 곳으로 지금은 무너졌다.

 

12일 임술(壬戌)

서천(西川)을 보았다. 서천은 절에서 서쪽으로 수백 보 가량 떨어진 곳에 있는데, 반석은 반들반들하고 맑은 시냇물이 서로 비치면서 높고 낮음과 깊고 얕은 형세에 따라 멈추거나 쏟아져 내려 이리저리 둘러보니 마음에 들지 않고 눈에 차지 않는 곳이 없어 즐거운 마음에 돌아가기를 잊었다. 시냇가에는 대()가 있는데, 대에서 부용봉(芙蓉峯)을 쳐다보니 우뚝하게 솟아 하늘을 지탱하고 있으며, 경운봉(慶雲峯)이 서쪽에 있다.

서천(西川)청평산의 산속에서 삼 일 동안 놀았거니 / 淸平山中遊三日

서천 시내 물과 돌은 아주 맑고 깨끗하네 / 西川水石最淸絶

돌 가 따라 구불구불 시냇물이 흐르다가 / 水從石上來蜿蜒

중간에 확 넓어져서 동천 하나 열리었네 / 中間豁然開洞天

은하수는 옥우(玉宇)⑼와 서로 통해 밝게 돌고 / 銀漢昭回通玉宇

경전은 또 현포(玄圃)⑽ 옮겨 온 것과도 비슷하네 / 瓊田仿佛移玄圃

솔 아래의 옛날 단에 푸른 이끼 끼었는데 / 松下古壇凝碧苔

산바람은 막막하고 산꽃 활짝 피어 있네 / 山風漠漠山花開

두세 사람 나를 따라 이곳으로 왔거니와 / 同來亦有二三子

물소리를 들으면서 술 마시고 시 읊누나 / 把酒高吟水聲裡

청평산의 이번 유람 즐겁기가 짝 없나니 / 淸平之遊樂無伍

어찌하면 집 떠나와 예서 살 수 있으려나 / 安得辭家此中住

시냇가를 따라 올라가 오른쪽으로 돌아서 6, 7리 가량 가면 선동(仙洞)이다. 들어가니, 구불구불하고 그윽하며 작은 암자가 하나 있다. 암자 뒤의 석벽(石壁)에는 청평식암(淸平息庵)’이라는 네 개의 큰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진락공(眞樂公)의 글씨라고 한다. 구지(舊誌)⑾식암은 둥글기가 고니의 알과 같아서 겨우 두 무릎을 구부려야 앉을 수가 있는데, 그 속에 묵묵히 앉아 있으면서 몇 달 동안 나오지 않았다.”고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지금의 작은 암자는 바로 후대 사람들이 세운 것이다. 암자 뒤에는 또 나한전(羅漢殿)이 있다. 나한전의 앞에는 계곡 물이 절벽을 타고 흐른다. 석대(石臺) 아래에는 돌을 파낸 곳 두 곳이 있는데, 진락공이 손을 씻던 곳이다. 석대의 북쪽 바위 사이에는 고기(古器)가 보관되어 있었는데, 일찍이 비가 와서 무너졌을 때 열어 보았다. 전해 오는 말로는 진락공의 뼈가 묻힌 곳이라고 한다. 진락공은 바로 이자현의 바뀐 이름이다.

​「식암(息庵)」식암거사 예서 살며 어디에서 놀았던가 / 息庵居士遊何處

오래 전의 정령께선 아득한 데 들어갔네 / 千古精靈入冥漠

절벽 깎고 돌을 파낸 예전 자취 있거니와 / 鑱崖刻石留古跡

지금에도 거기에는 이끼 끼지 아니했네 / 至今未遣莓苔蝕

솔숲 그늘 땅 가득해 사람 모습 안 뵈는데 / 松陰滿地不見人

돌단 위의 복사꽃은 봄에 절로 떨어지네 / 石壇桃花春自落

식암으로부터 산허리를 경유하여 가니, 길이 좁아서 겨우 한 사람만이 갈 수가 있다. 견성암(見性庵)에 도착하였다. 견성암은 부용봉(芙蓉峯) 아래에 있는데, 지세가 아주 높아서 여러 산골짜기들을 굽어볼 수가 있으며, 회나무와 소나무의 끝이 모두 발아래에 있다. 또다시 산등성이 하나를 돌아서 가니 양신암(養神庵)이 있는데, 무너져서 볼 만한 것이 없다. 유람을 여기에서 그쳤다.

13일 계해(癸亥)
아침에 서천을 출발하자니 연연해하는 마음이 들어 훌쩍 떠날 수가 없다. 저녁나절이 되어서 산을 내려왔다. 우두사(牛頭寺)의 유지(遺址)를 들렀다. 강가의 평탄한 곳에 대(臺)를 만들었는데, 형승이 소양정(昭陽亭)에 버금간다.


「산에서 나오다」신선 사는 산 떠나며 고개 몇 번 돌려 봤나 / 仙山欲別幾回頭

강가 따라 난 길 길고 풀은 시름겨워 하네 / 江路迢迢草色愁

숲 밖의 새 우는 소리 전송하는 것 같은데 / 林外鳥聲如送客

골짝 문에 석양 비친 속에 배를 애써 끄네 / 洞門斜日苦鉤輈

1) 상방(上方): 절의 주지(住持)가 거처하는 방을 말하는데, 전하여 절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2) 이익재(李益齋): 이제현(李齊賢)을 말함,

3) ​이행촌(李杏村): 이암(李嵒)을 말함.

​4) 전료(殿寮): 큰 건물과 작은 건물.

5) 낭서(廊序): 행랑과 담.

6) 금벽(金碧): 노란색과 푸른색.

7) 단칠(丹漆): 붉은 옻칠.

8) 청한자(淸寒子):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인 김시습(金時習)의 호이다. 그는 청한자 이외에도 매월당(梅月堂), 동봉(東峰), 벽산(碧山), 췌세옹(贅世翁)이라는 호가 있다.

9) 옥우(玉宇): 천제(天帝)가 있는 곳인 옥으로 장식한 궁전으로, 하늘을 가리킨다.

10) 현포(玄圃): 곤륜산(崑崙山) 꼭대기에 있으며 신선이 산다고 하는 전설상의 장소인데, 그 속에는 기화요초(奇花瑤草)와 기석(奇石)이 있다고 한다.

11) 구지(舊誌): 국역신증동국여지승람46권 춘천도호부(春川都護府)에 나온다.

 

下亭由舟渡江水淸見底沙礫可數過牛頭山歷扶服遷俚言棧道爲遷 入淸平洞自春川至此四十餘里到歡喜嶺下馬觀瀑布阿煥兩李 得培重慶 二崔 再亨弘耆 生隨至坐松壇酌數巡淸流盤石長松古木列于左右正値雨後山花盛開水勢益壯澄映發揮亦一奇也

入洞穿林路百廻隔花遙見有仙臺丹崖翠壁重重處一道銀川噴雪來

又上數百步有影池水色澄渌山腰見性菴寫影其中以此得名池之兩隅築石堰水水若滲漏易竭而旱不枯水不濫亦可異也環池赤木四五株其大連抱麗僧懶翁所植云

影池

止水千年一色淸上方金碧倒空明客來羞照星星鬢聊就池邊試濯纓

淸平寺本慶雲山普賢院高麗李資玄棄官隱居于此者三十七年更名淸平寺寺前雙池二碑西則宋建炎四年金富轍紀李資玄事僧坦然書東則元泰定皇后爲太子藏經于此以祈福利者李益齋譔李杏村書門額慶雲山淸平寺者僧普雨筆殿寮廊序周匝繁麗儼然一大叢林也近歲髡徒役繁居守者無數百指將爲廢刹可惜法堂西北隅有極樂殿亦普雨所建金碧丹漆僭侈異常寺南洞中有細香院淸寒子所棲止今廢

十二日壬戌

觀西川西川在寺西數百步許盤石凝滑淸流映帶高下淺深隨勢停瀉左顧右眄無不會心悅目樂而忘歸川上有臺仰見芙蓉峯突兀撑空慶雲峯在其西

西川

淸平山中遊三日西川水石最淸絶水從石上來蜿蜒中間豁然開洞天銀漢昭回通玉宇瓊田仿佛移玄圃松下古壇凝碧苔山風漠漠山花開同來亦有二三子把酒高吟水聲裏淸平之遊樂無伍安得辭家此中住

由川上右轉六七里入仙洞崎嶇窈窕有小庵庵後石壁刻淸平息庵四大字眞樂公筆云舊誌息庵團圓如鵠卵只得盤兩膝默坐其中數月不出者卽此也今之小庵乃後人所建庵後又有羅漢殿殿前懸流側壁石臺下鑿石二所眞樂公盥盆臺北巖間藏古器嘗雨塌開視流傳眞樂瘞骨處眞樂者李資玄易名也

息庵

息庵居士遊何處千古精靈入冥漠鑱崖刻石留古跡至今未遣莓苔蝕松陰滿地不見人石壇桃花春自落

自息庵由山腰路狹僅容一跡至見性庵庵在芙蓉峯下地位最高俯視諸洞壑檜頂松巓皆在履下又轉一岡有養神庵頹廢不足觀觀止於此矣

十三日癸亥朝出西川依依戀戀至晩下山訪牛頭寺遺址臨江夷岸爲臺形勝亞昭陽亭

出山

仙山欲別幾回頭江路迢迢草色愁林外鳥聲如送客洞門斜日苦鉤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