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의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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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장원(朴長遠), 「유청평산기(遊淸平山記)」, 『구당집(久堂集)』

상세정보

박장원(朴長遠, 1612~1671):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중구(仲久), 호는 구당(久堂)이다. 외할아버지인 심현(沈誢)을 따라 강화도에 피난하였다. 1639년 검열(檢閱)이 되고, 1640년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으로 춘추관기사관이 되어선조수정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춘천부사를 역임했으며 강원도관찰사를 지냈다.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 「유청평산기(遊淸平山記): 처음 산행은 신묘년(1651) 팔월 정묘일부터 다음날 무진일까지 이틀 동안이었다. 박장원은 청평산이 관동 지방에서 명산으로 명성을 떨쳤는데, 그 이유는 경치가 뛰어난 까닭도 있지만 예로부터 널리 알려진 이자현과 김시습 같은 인물들이 살았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이들의 고결한 기풍과 운치로 인하여 청평산은 다른 산과 차별화된다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직접 보고자 산을 오른다고 밝히고 있다. 박장원의 여행동기는 아름다운 산을 감상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자현과 김시습 같은 인물들로 인하여 고결한 기풍과 운치를 지닌 산을 직접 보기 위해서였다. 그의 일정을 보면 다음과 같다. 소양나루狐峴起落棧龍潭歡喜嶺影池청평사(1)서천息庵羅漢殿선동귀가

번역문 / 원문

춘주(春州)⑴의 청평산은 본디 소봉래(小蓬萊)로 불렸으니 관동 지방에서 일대 명산이다. 그러나 온 나라에서 명성을 떨칠 수 있었던 것은 어찌 단지 산수(山水)가 뛰어나고 기이하다는 것 때문이겠는가? 예로부터 널리 알려진 인물들이 머물러 살았기 때문이다. 고려조에는 이자현(李資玄)⑵이 있고, 이조에는 김열경(金悅卿)⑶ 같은 이가 있으니, 전기(傳記)에서 살펴볼 수 있다. 그들의 고결한 기풍과 뛰어난 운치는 지금 듣는 사람들까지도 흥기시킬 만하니, 이는 진실로 다른 산에서는 자주 찾아보기 힘든 일이다. 근세에는 퇴도(退陶) 이선생(李先生)⑷과 백사(白沙) 이상국(李相國)⑸이 소의(繡衣) 차림에 부절을 지니고서 축융(祝融)⑹의 시를 남기기도 했고, 참소를 입고 서울을 떠나면서 서호(西湖)의 유람을 다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들 두 분이 두루 탐방(探訪)한 것은 산에 있지 않고 사람에 있었으니, 또한 생각할 만하다.

나는 들은 것만으로도 부족할 것이 없지만, 백번 듣는 것이 한번 보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여겨, 항상 한 번이라도 산을 오르고자 했지만 기회가 없었다. 다행히 춘천 땅에 수령으로 부임하여 삼년을 머무르게 되었다. 그런데 많은 돈을 들여서도 유람을 하지 않은 것은 늦춘 것이 아니라 때를 기다렸기 때문이다.

드디어 신묘년(辛卯年)⑺ 팔월 정묘일(丁卯日)에 새매를 그린 깃발을 물리치고 단지 술병과 술통을 가지고 말 한 마리와 사내종 둘을 데리고 떠났다. 이는 실로 번거로운 것이 싫어 간소함을 택한 것이다. 두 아들 빈()과 전(), 사위 이민채(李敏采), 생질 이제황(李齊黃)이 수행했다. ()과 제황(齊黃)은 아직 관례를 올리지 않은 미성년자다. 일천(一千)이라는 이름을 가진 적공(笛工)도 수행했다. 소양나루를 건너고 여우고개(狐峴)를 넘어 북쪽으로 가다 길가에서 몇 리 쯤 떨어진 한 마을을 가리켰으니, 이곳이 진사 최홍기(崔弘耆)가 사는 곳임을 알아서이다. 곧바로 사람을 보내 그를 불렀다. 그 사람은 비록 소자(蘇子)⑻가 아니고, 땅은 담이(儋耳)⑼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어찌 늙은 수재(秀才) 부림(符林)⑽이 없겠는가? 일행이 기락잔(起落棧)을 지나 길을 찾아 계곡으로 들어가다가 시냇가에서 잠시 쉬었다. 한 두 나무의 잎사귀에 단풍이 붉게 물들어 있다.

나를 뒤따라 온 한 스님이 있어 살펴보니, 청평사의 스님 충익(忠益)인데, 항상 관청으로 나를 방문하던 자이다. 그가 온 것이 반가워서 어디서 오느냐고 물으니, “저는 동쪽 마을에서 탁발을 하고 있다가, 공께서 산에 오셨다는 말을 전해 듣고, 걸음을 재촉하여 왔습니다.”라고 한다. 이에 나를 인도하여 앞장서게 했다. 비스듬히 산등성이를 오르자 폭포소리가 점점 귀에 다가온다. 스님이 용담(龍潭)에 가까이 왔다고 하자, 문득 잔도(棧道)를 지나자 고요히 우거졌더니, 골짜기를 들어서자 깊고도 울창하네라는 싯구가 떠올랐으나 적절히 안배하지 않았으니, 그 마음이 시를 짓는데 있는 것은 아니다. 용담에 이르러 잠시 쉬었다.

용담은 위와 아래에 있는데, 푸른 절벽은 깎아지른 듯하다. 용담 옆에 첩석(帖石)으로 대를 만들었는데, 열 사람 정도가 앉을 수 있다. 소나무 몇 그루가 구름 사이에 의젓하게 서 있고, 가을 꽃과 비단 같은 잎사귀가 좌우에서 서로 맞 비추니 매우 유쾌하다. 다만 수량이 줄어 물소리가 크지 않은 것이 아쉽다. 절의 스님 대여섯 명이 남여(藍輿)를 준비해 영접해서 비로소 말에서 내렸다. 가마를 타기도 하고 걷기도 하면서 영지(影池)에 이르렀다. 영지와 용담은 떨어져 있는데, 그 사이에 환희령(歡喜嶺)이 있고, 대략 수백 보 쯤 된다.

영지의 둘레는 수십 보 쯤 되고, 영지의 표면으로 샘이 솟는다. 북쪽은 돌 벽돌로 둘러져 있다. 네모진 것은 땅을 형상한 것이다. 연못 주변에는 진귀한 수목들이 빽빽하게 심어져 있었는데, 모두 백 아름은 된다. 늙은 스님이 이를 가리키면서 이 나무는 나옹(懶翁)⑾이 손수 심었습니다.”라고 한다. 산의 북쪽에 있는 한 봉우리를 보니, 봉우리의 정상에 있는 작은 암자가 물밑으로 거꾸로 비친다. 문과 창문이 선명하고 머리털이 비치는 듯하여 봉우리와 암자의 이름을 물으니 부용봉(芙蓉峰)과 견성암(見性庵)이라고 한다. 또 말하기를 암자의 스님이 금란가사(金襴袈裟)를 입고 경()을 울리며 예불을 드릴 때 그림자가 가장 기이합니다. 연못의 이름에 '()'자가 있는 것은 본래 이 때문입니다.”라고 한다. 또 이 연못의 물은 일찍이 가뭄과 홍수에도 불어나거나 줄어들지 않아 더욱 기이한 일이라고 한다. 풀을 깔고 앉아 마른 풀명자나무 가지를 줍고 연못의 물을 길어 차를 끓였다. 차향이 피어오를 때 석양은 이미 서쪽 산봉우리를 넘어가고 있었다.

황혼 무렵 절에 도착했다. 걸어서 법당으로 올라가니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서쪽 켠에 있는 선방(禪房)을 돌아 나와서 쉬는데, 최생(崔生)이 그제서 도착한다. 이윽고 어린 사미승(沙彌僧)을 양신암(養神菴)으로 보내 휴양(休糧)하고 있는 장로(長老) 의천(義天)에게 안부를 물었다. 의천은 첩건(氎巾)을 쓰고 방포(方袍)를 걸친 채 급히 왔다. 함께 좌정하여 현묘지도(玄妙之道)를 말하는데 들을 만하다. 들으니 그의 선친은 본래의 유학자로 성대곡(成大谷)⑿의 족서(族壻)가 되어 그에게서 깊이 학문을 익혔다고 한다. 성대곡이 죽자 손수 글을 지어 제문을 올렸는데, 그 글은 지금도 상자 속에 있다고 한다. 자못 대곡(大谷)이 살던 종산(鍾山)의 풍치를 말하는데 감동할 만하다. 그의 얼굴 모양은 출중하고 눈빛은 사람을 쏘는 듯하여 보통의 승려는 아닌 듯하다. 그러나 이 정도에서 자리를 끝내다 보니 수많은 감회가 되살아난다.

시각은 한밤중이 다 되어 외로운 촛불만이 밝게 타오르고, 개울 가까이 창가에는 소나무가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그때 물레방아 소리를 듣고서 숲속에 비가 내리는 것을 알았다. 황태사(黃太史)⒀의 시에, “밤 창가에 물소리 나는 것은 비바람이 때문이네라고 한 것은 반드시 이런 상황을 선점하고 그 흥취를 표현한 것이리라. 달이 잠시 보이다가 하늘에서 사라질 때, 나도 잠자리에 들었다. 스님들이 이리저리 각처를 떠돌아다닐 것을 속으로 생각하니 슬픈 마음이 든다.

아침에 일어나니 비가 내리는데, 곧 무진일(戊辰日)이다. 누군가 돌아가는 길에 말을 타는 것은 곤란하다고 염려하는 탓에 급히 관청의 벼슬아치를 시켜 배를 가지고 와서 기다리라고 했다. 앉아서 흰 구름이 뭉게뭉게 비를 뿌리는 것을 바라보는데, 갑자기 비단결 같은 초목 사이에서 사라진다. 이에 하늘이 나에게 많은 것을 제공하고 있음을 또 한 번 알게 되었다. 잠시 후 비가 조금 개이자 곧바로 극락전(極樂殿)으로 향했다. 극락전은 요승(妖僧) 보우(普雨)⒁가 창건했다. 경내 건축물의 기둥과 주춧돌은 갖은 기교를 부린 것으로 처음 보는 것이다. 극락전은 사치스럽고도 화려했는데, 노란색과 푸른색, 붉은 옻으로 칠하여 막대한 재력을 들인 것이다. 보우를 죽였다고 해서 어찌 흡족하겠는가? 당시의 불사가 이 지경까지 이르게 된 것이 참으로 애석할 따름이다.

개울은 서쪽에 있는데 가로지른 반석은 위아래가 거의 1리가 된다. 세차게 쏟아지는 폭포 소리는 마치 거문고와 축을 연주하는 듯하여 듣기에도 매우 좋다. 승려가 말하기를 여름에 빗물이 많으면 그 모양은 마치 여러 용들이 노해서 싸우는 듯 하고, 그 소리는 마치 바람과 우레가 숲으로 내뿜는 듯 합니다. 벼랑과 골짜기는 이 때문에 진동하고 숲과 나무도 쓰러져 흔들립니다. 이곳에 임하여 두려워 넋을 잃지 않은 이가 없으니, 이때가 제일 장관입니다. 태수의 행차는 시기를 놓쳐 방문한 아쉬움이 없지 않습니다.”라고 한다. 판자를 개천에 걸쳐놓고 맨발에 옷을 걷고 건너니, 서쪽에 석단(石壇)이 있다. 석단에는 한그루의 소나무가 있는데, 앉아 쉬는 이에게 그늘을 만들어 준다. 사방이 모두 가지런하여 그 형상이 마치 수레의 덮개 같다.

스님이 나를 향해 북쪽 구름 위로 솟아 오른 산봉우리들을 가리키며 경운봉(慶雲峰), 부용봉(芙蓉峰), 향로봉(香爐峰)이라 한다. 연이어 솟아 있는데 암석의 모양은 기이하고 험준하다. 일찍이 서천(西川)이 온 산의 허리에 해당한다고 들었는데, 이제야 헛된 말이 아닌 줄을 알았다. 잠시 후 저녁밥이 준비되었다고 알려왔다. 돌아올 때 두 개의 비석을 살펴봤다. 비석은 원해문(圓解門) 앞 쪽에 동서로 마주하고 있다. 하나는 검은색이고 하나는 흰색이다. 흰 비석은 품격이 검은 비석에 미치지 못하다. 검은 비석은 광택이 흘러 아직도 이끼가 끼거나 깨진 곳이 없으니 참으로 기이하다. 검은 비석은 건염(建炎)⒂ 연간에 세워진 것으로 스님 탄연(坦然)(16)의 필적이 있다. 흰 비석은 원() 나라 태정황후(泰定皇后)가 세운 것으로 모관(某官) 이군해(李君侅)(17)가 전서체(篆書體) 글자를 썼고 수서(首書)는 모관(某官) 이제현(李齊賢)(18)이 찬하였다. 문지르기도 하고 매만지기도 했지만 바빠서 전부 읽어보지 못했으니, 잘못한 일이다.

비석으로부터 남쪽으로 몇 리 쯤 떨어진 곳에 서향원(瑞香院)의 옛 터가 있다. 동봉(東峯)(19)이 살던 곳으로 등나무와 잡초가 우거져 찾을 수 없다. 식사를 마치고 개울을 따라 4, 5리를 올라가 식암(息庵)에 도착했다. 건물은 벼랑 위에 걸린 듯 한데, 보아도 높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높아서 어지럽고 가슴을 두근거리게 한다. 방은 겨우 두세 사람이 들어갈 정도인데, 내가 훌륭하다 생각하는 스님 문옥(文玉)이 여기에 살고 있다. 내가 방문한 것을 기뻐하여 수박을 대접한다. 암자 가까운 서쪽 모퉁이에 돌로 이루어진 절벽이 우뚝 서 있는데, 돌 표면에 선동식암(仙洞息庵)이란 네 글자가 새겨져 있다. 김씨(金氏)의 글씨라고도 하고 이씨(李氏)의 글씨라고도 하는데, 제대로 식별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 ()에게 네 글자의 조금 서쪽에 동행한 이들의 성명을 쓰게 했다.

최생(崔生)은 일찍부터 관람하는 것을 싫어했으므로 뒤에 남았다. 곧바로 암자 뒤쪽에 있는 석대(石臺)에 올랐다. 석대는 암자의 기와와 잇닿아 있는데, 기와 이음새는 오히려 석대 아래에 있다. 수십 리에 걸쳐 동남쪽의 산봉우리가 저 멀리에 보인다. 서북쪽으로 몇 걸음을 올라가자 나한전(羅漢殿)이 있다. 나한전 앞으로 몇 걸음 나아가자 골짜기는 고요히 숨겨져 있는 듯 하다. 희이자(希夷子)가 편안히 여기던 고니 알처럼 생긴 방의 터가 아직도 남아 있다. 조금 앞쪽 돌 위에 네모 모양으로 판 것이 두 개 있는데, 희이자가 손과 발을 씻던 곳으로 전해지고 있다. 물고기가 통과하여 다닌다. 길 옆 돌 표면에 또 청평선동(淸平仙洞)이라고 새진 네 글자가 있는데, 자체(字體)는 선동식암(仙洞息菴)의 글자와 같다.

이틀간 두루 여행하면서 더욱 잊혀지지 않는 것은 서천(西川), 영지(影池), 용담(龍潭) 세 곳이다. 돌아오는 길은 오로지 도보에 의지하였다. 배회하다가 돌아갈 시간을 잊어서, 날이 저무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잔도를 지나면서 주리(州吏)에게 샛 강에 배를 대기시켜 놓았는지를 물었다. 강의 날씨는 고요한데, 바람이 불어 소용돌이가 일어나자 술에서 깨어났다. 술을 찾았건만 없고, 과일 안주 또한 바닥이 나서 배 안에 포개어 누우니 옛사람의 일화와 단지 노 저으며 내려가는 것만 같을 뿐이다. 여우고개 가까이 배를 댄 후 말을 타고 돌아오는데, 우촌(牛村)(20)과 봉악(鳳嶽)(21)은 멀리까지 낀 어둑어둑한 안개 속에 있고, 나루터에 늘어진 등불은 점점이 물속에 잠겨 있다. 관사(官舍)로 돌아와 옷을 벗으니, 밤은 이미 이경(二更)을 알리고 있다.

이번 기행에서는 피리를 담당한 이는 피리를 불게 하고, 술을 담당한 이는 술을 담당하게 하여 즐거움을 얻었다. 그러나 피리는 때에 맞추어 세 번 정도 연주했을 뿐이었고, 술은 번번이 몇 잔에 그쳐 기이한 즐거움에까지는 이르지 않았다. 이는 산행의 뜻이 술에 있지 않았고, 악기를 연주하는데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나라 안의 명산(名山)을 많이 보아 왔다. 두 손을 마주 잡고 마치 읍하듯 하고, 사면으로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비거나 부족함이 없으며, 형용이 온화하고 기색(氣色)이 빼어나며 기이하기로는 이 산만한 것이 없다. 이것이 예전부터 기인(畸人)과 현사(賢士)들이 이 산을 사랑하여 외면하지 않았던 까닭이었던가! 대저 동쪽의 산악지대는 땅이 한랭하여 남쪽 지방의 산물은 적당하지 않다. 그런데 절 가운데에 심어진 두 그루의 감나무는 가지와 낙엽이 무성하여 결실을 보기까지 했다. 이는 비록 소략하나마 기록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다음날 기사일(己巳日)에 구옹(久翁)이 기록한다.

 

 

1) 춘주(春州): 춘천의 옛 이름.
2) 이자현(李資玄): 1061(문종 15)∼1125(인종 3). 고려 중기의 학자. 본관은 인주(仁州)이며, 자는 진정(眞靖), 호는 식암(息庵)·청평거사(淸平居士)·희이자(希夷子)이다. 과거에 급제하여 대악서승(大樂署丞)이 되었으나 관직을 버리고 춘천의 청평산(淸平山)에 들어가서 아버지가 세웠던 보현원(普賢院)을 문수원(文殊院)이라 고치고 당(堂)과 암자를 지어 이곳에서 나물밥과 베옷으로 생활하며 선(禪)을 즐겼다. 시호는 진락(眞樂)이다.
3) 김열경(金悅卿): 김시습을 말한다.
4) 퇴도(退陶) 이선생(李先生): 이황을 가리킨다.
5) 백사(白沙) 이상국(李相國): 이항복을 가리킨다.
6) 축융(祝融): 형산(衡山)의 72개 봉우리 중 가장 높은 봉우리. 여기서는 청평산을 의미함.
7) 신묘년(辛卯年): 1651년.
8) 소자(蘇子): 소동파를 가리킨다.
9) 담이(?耳): 소식이 거처하던 곳.
10) 부림(符林): 소식이 찾아갔을 때, 사람은 모두 없고 부림만 있어서 술을 먹고 왔다는 일화가 있다.
11) 나옹(懶翁): 1320(충숙왕 7)~ 1376(우왕 2). 고려 말의 승려. 혜근(慧勤)이라고도 한다. 속성(俗姓)은 아씨(牙氏). 초명은 원혜(元惠). 호는 나옹(懶翁)·강월헌(江月軒). 나옹화상(懶翁和尙)이라는 호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보우(普愚)와 함께 고려말의 위대한 고승으로 일컬어지며, 조선 불교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그림과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노래를 많이 지어 문집인 〈나옹집〉에 보존하고 있다.
12) 성대곡(成大谷): 성운(成運, 1497∼1579).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건숙(健叔), 호는 대곡(大谷). 시문에 능하였으며 은둔과 불교적 취향을 드러낸 시를 많이 남기고 있다. 서경덕(徐敬德)·조식(曺植)·이지함(李之?) 등과 교유하며 학문에 정진하였다. 그가 죽자 선조가 제문을 내려 애도하였으며, 뒤에 승지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대곡집』 3권 1책이 있다
13) 황태사(黃太史): 황정견(黃庭堅, 1045년~1105년)을 말한다. 중국 북송의 시인으로, 자는 노직(魯直), 호는 산곡(山谷) 또는 부옹이며 소식 문하인의 제1인자이다. 소식의 시학을 계승하였으며, 그의 시는 소식의 작품보다 더욱 내향적이었다. 소식과 함께 소·황(蘇·黃)으로 칭해져서 북송 시인의 대표적 존재가 되었다. 12세기 전반은 황정견 일파의 시풍이 세상을 풍미하였는데, 황정견이 강서(江西) 출신이었기 때문에 ‘강서파’라 칭해졌다.
14) 보우(普雨): 1509(중종 4)∼1565(명종 20). 조선 중기의 승려. 호는 허응(虛應) 또는 나암(懶庵). 법명은 보우(普雨). 문정대비(文定大妃)의 외호 아래, 도첩제도(度牒制度)와 승과제도(僧科制度)를 부활시키는 등 억불정책 속에서 불교 중흥을 위해 힘썼다. 1555년 9월 각종 제도적 장치의 결과로 종단이 안정된 기반을 갖게 되자 판사직과 봉은사 주지직을 사양하고, 춘천의 청평사(淸平寺)에 머물렀다.
15) 건염(建炎): 남송(南宋) 고종(高宗)의 첫 번째 연호로 1127~1130년의 4년간 사용되었다.
16) 탄연(坦然): 1070(문종 24)∼1159(의종13). 고려 중기의 승려. 서예에 뛰어나 왕희지의 필체를 따랐는데, 춘천청평사(淸平寺)문수원(文殊院)의 중수비와 예천군의 복룡사비, 삼각산 승가사중수비 등을 썼다. 서거정(徐居正)이 동국의 필법은 김생(金生)이 제일이고 요극일(姚克一)·탄연·영업(靈業)이 다음 간다고 평할 만큼 그의 글씨는 뛰어났다. 국사(國師)로 추증(追贈)되었고 시호는 대감(大鑑)이다.
17) 이군해(李君?): 이암(李?, 1297∼1364).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고성(固城). 초명은 군해(君?). 자는 고운(古雲), 호는 행촌(杏村). 글씨에 뛰어나 동국(東國)의 조자앙(趙子昻)으로 불렸으며, 특히 예서와 초서에 능했다. 필법은 조맹부(趙孟?)와 대적할 만하며, 지금도 문수원장경비(文殊院藏經碑)에 글씨가 남아 있다. 그림으로는 묵죽에 뛰어났다.
18) 이제현(李齊賢): 1287(충렬왕 13)~ 1367(공민왕 16). 고려 후기의 문신·시인. 그의 저술로는 〈익재난고〉 10권과 〈역옹패설〉 2권이 전한다.
19) 동봉(東峯): 김시습의 호이다.
20) 우촌(牛村): 우두동을 가리킨다.
21) 봉악(鳳嶽): 봉의산의 별칭. 

春州之淸平素稱小蓬萊蓋亦關東之一名山也然其擅名於國中者豈徒以山水之瑰奇已哉自古多爲聞人之所盤旋在麗有若李資玄在我朝有若金悅卿前後相望於傳記其高風逸韻至今聞者猶足以興起則此固他山之所稀有也近世退陶李先生及白沙李相國或以繡衣持斧留祝融之吟或以遭 讒去國縱西湖之遊茲二公之所探歷必皆不以山而以人亦可想矣余以所聞亦非不足而百聞不如一見常欲足一及山而無繇也幸守茲土已及三年而顧未能爲百錢之遊者非緩也蓋有待也遂於辛卯八月丁卯悉屛旟隼只提壺榼一馬二童以行實厭煩而取約也二子鑌銓及坦腹郞李敏采載仲姊子李齊黃從焉銓與齊黃乃未冠者笛工名一千者亦隨焉渡昭陽津踰狐峴北指一村距道傍數里許知是進士崔弘耆所居卽遣人招之雖人非蘇子地非儋耳亦豈無老符秀才也行過起落棧取路入洞小憩川邊楓葉或有一株兩株赤者後有一衲子追我而至者視之乃淸平寺僧忠益常所訪我於府中者也喜其來問自何來則云貧道乞米於東村傳聞令公入山急步而至矣乃命引我而前邐迤登麓漸覺瀑響來耳僧云龍潭近矣忽得度棧已悄蒨入谷轉森邃之句而亦不費安排意不在詩也及潭又少歇鞍潭有上下靑壁劖削潭傍各帖石爲臺臺可坐十許人有松數株儼立干雲秋花錦葉左右映帶已極愉快心目所恨水涸而聲低也寺僧五六人備籃輿來迎始捨馬或擔或步至影池池距龍潭其間有 歡喜嶺約數百步許池周數十步泉涌池面北邊繚以石甃其方象地池邊雜植珍木皆可百圍老僧指以言曰此懶翁手植云俯見山北一峯峯頂小菴倒影於水底戶牖粲然毛髮可鑑問其峯與菴之名則曰芙蓉也見性也又云菴僧披金幱袈裟鳴磬禮金仙時其影最奇池名得影本爲此云且此池水曾不加損於旱澇尤可異云仍藉草而坐拾枯査汲池水煮茶茶煙起時落日已窺西峯矣到寺曛黑步上法堂無所見回抵西邊禪房歇泊崔生始來矣仍送小沙彌於養神菴問休糧長老義天無 天也便以㲲 巾方袍顚倒而來相與坐定談玄說妙亹亹可聽聽其先故本一善儒士爲成大谷族壻甚習於大谷大谷歿而手爲文以祭之其文至今在於巾笥中云頗說大谷所居鍾山風致亦足以相感也觀其肖貌軒然目光射人似非常僧而然亦終是動底意思多也時夜將半孤燭明滅窓臨絶澗松檜交陰時聞水碓之聲認爲滿林之雨黃太史詩所謂水作夜窓風雨來者必是先占此境界而發也須臾月出天已辭歸余亦就枕暗想飛錫飄然爲之一悵朝起値雨日則戊辰或慮歸路難於騎馬急令州吏挐舟來待坐見 白雲陣陣拖雨變滅於錦樹之間亦知天公餉我多矣俄而少霽尋向極樂殿去殿是妖僧普雨所創也寺中柱礎之窮極奇巧固亦創見而至於此殿之奢麗金碧朱漆費了無限財力彼普雨何足誅可惜當時事佛之至此也有川在西盤石橫亘上下幾一里飛流激射聲如琴筑聽之可愛僧云暑雨水盛則形如群龍鬪怒聲如風雷噴薄崖谷爲之震動林木隨以披靡臨之者鮮不凜然失魄此時最爲壯觀而明府之來不無後時之歎矣跨川以板跣揭以渡則西有石壇壇有獨松庇覆坐人四面均停狀如車蓋僧 向余北指雲表數峯曰慶雲芙蓉香爐羅列呈露石狀奇峭曾聞西川爲一山肯綮今不虛矣俄告晩飯已具歸時歷尋兩碑碑在圓解門前東西對峙一則黑色一則白白者品不及黑黑者色滑至今無苔蘚蝕處眞異石也黑則建炎建而僧坦然蹟白是元泰定所立而具官李君侅所書篆而首書具官李齊賢撰爲之摩挲忙未盡讀此爲欠事尤可欠者自碑南去幾里許有瑞香院舊基乃是東峯所住而藤卉莽蒼無復可尋飯訖循谿而上四五里抵息菴菴屋掛在崖頂俯視不辨尋丈使人眩悸房室劣容兩三人吾所善釋子文玉者居之喜余過餽以西瓜近菴西隅崖石擁立石面刻仙洞息菴四字或云金筆或云李筆無能辨識&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