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의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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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휴(尹鑴), 「풍악록(楓嶽錄)」 , 『백호전집(白湖全集)』

상세정보

윤휴(尹鑴, 1617~1680): 본관은 남원(南原). 초명은 갱(). 자는 희중(希仲), 호는 백호(白湖하헌(夏軒). 그는 본래 당색에 구애됨이 적었으나, 예송으로 서인 측과 틈이 생겨 출사 뒤에는 남인으로 활약하였다. 일생의 대부분을 포의로서 보내어 정치적인 면보다도 학문적인 업적이 더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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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자가 직접 답사한 것은 아니지만 대화 속에 청평사와 관련된 부분을 자세하게 수록하였다.

번역문 / 원문

21(계해) 아침날씨가 음산하더니 이어 가랑비가 내린다. 조반 후 출발하여 부창현(富昌峴)을 넘어 부창역 마을에서 말에게 꼴을 주었다. 가랑비 때문에 늦게 출발하여 기락이천(祈樂伊遷)을 지나는데, 기락이는 방언으로 기어서 나온다는 말로서, 그 천()의 길이 너무 좁고 또 바위 구멍이 있어서 누구나 그 곳을 가는 자는 반드시 기어서 나와야 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천전(泉田)의 길가 큰 시냇가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그날은 하루 내내 산골 험한 길만을 걸었는데, 여기에 이르자 산들이 확 트이고 그 가운데 큰 평야가 펼쳐 있었으며 강물이 굽이치고 돌아가 가슴이 탁 트이는 것을 느꼈다. 북쪽을 바라보니 높다란 산이 하나 있고 그 아래 민가 수십 호가 있었으며 뒤에는 소나무숲이 울창하고 느릅나무가 사이로 간간이 보인다. 유군의 말로는 강릉 부사(江陵府使) 이후(李煦)가 살고 있는 곳이라고 한다. 시냇가에 작은 시장이 하나 있어 이생 후평(李生后平)이 집에 있는가 물었더니, 지금 양양(襄陽)을 가서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20여 리를 가면서 북으로는 청평산(淸平山)을 바라보고 남으로는 소양정(昭陽亭)을 가리키며 오다가 배로 앞 강을 건너 소양정에서 잠시 쉬었다. 그 곳 벽 위에는 여러 사람들이 남긴 시가 걸려 있는데, 그 중에서 월봉(月峯)청음(淸陰)백헌(白軒) 그리고 유창(兪㻛)의 것을 보았다. 드디어 춘천(春川) 읍내로 들어와 유군 종의 집에다 여장을 풀고 수령에게 소식을 전했더니, 수령은 병이 있어 나오지 못하고 비장(裨將) 신완(申椀)을 보내 왔다. 그리고 조금 뒤에 수령의 형 이석(李錫)이 왔고, 또 최남(崔男)의 아들 상인(喪人)인 이억(爾嶷)도 왔으며, 이생을 통해 서울에 있는 집안 소식도 대강 들었다. 유군이 이르기를, “듣기에 청평산에 이자현(李資玄)의 식암과 영지가 있다는데 식암은 자현이 홀로 앉았던 곳으로 동사(東史)에 이른바, ‘둥글둥글하기가 곡란(鵠卵)과 같다.’고 한 것이 그것이고, 영지는 식암 아래 있는 겨우 반묘(半畝)밖에 되지 않는 작은 못으로, 해 뜨는 아침, 달 돋는 밤이면 식암의 풍경과 사람의 동정까지도 모두 그 못 속에 비친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현이 죽었을 때 불가의 법대로 화장을 하여 불에 탄 그 뼈를 아직까지 그 곳 중이 간직하고 있는데 빛이 푸르른 청옥(靑玉)과 같습니다. 그리고 용마루에는 또 김열경(金悅卿) 친필이 있습니다. 그래서 신상촌(申象村)의 송인시(送人詩), ‘이자현 유골은 풍류가 대단하고[李資玄骨風流遠], 김열경 글씨는 유일의 자취로세[金悅卿書逸躅存]’라고 하였으니, 그 모두가 다 값진 고적들이 아니겠습니까.” 하기에, 내가 이르기를, “이자현으로 말하면 능히 세리(勢利)의 길에 초연하여 몸을 운수(雲水)에 의탁하고 거기에서 일생을 마쳤던 것이다. 퇴계(退溪)는 그를 위해 억울함을 밝혀 주고 그 사실을 영탄(咏嘆)했으며, 열경(悅卿)은 국가 위난을 평정한 세상에서 임금을 섬기지 않았던 뜻을 높이 샀는데, 사실은 동방(東方)의 백이(伯夷)인 것으로, 그의 청고한 풍도와 모범을 남긴 행위는 백세의 스승이 되기에 족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이번 길에 그 유적지를 찾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다만 내가 탄 말이 걸음이 더디고 바탕이 둔해서 외삼촌을 따라가야겠기에 마음대로 못하겠네.” 하고, 서로 말이 나쁘다고만 탓했다. 내가 웃으면서, 재상 상진(尙震)의 소에 관한 얘기를 들어 보았느냐고 물었다. 유군이 못 들었다기에 내가 얘기하기를, “상진공이 언젠가 들을 지나는데 어느 늙은 농부가 쟁기로 밭을 갈면서 쟁기 하나에다 소 두 마리를 메워가지고 아주 힘들게 밭갈이를 하고 있더라네. 상진공이 한참 구경하다가 이어 말하기를, ‘농사일을 참 잘하시는구려, 그런데 그 소 두 마리 중에도 우열(優劣)이 있습니까?’ 했더니 그 농부가 대답을 하지 않더라는 거야. 그래서 상진공이 농부 앞으로 다가갔더니 그 늙은이가 이쪽으로 와서 귀에다 대고 말하기를, ‘공이 물은 대로 두 소 중에 한 마리는 힘이 세고 옹골찬데 한 마리는 힘도 약하고 미련한데다 늙기까지 했지요.’ 하더라는 거야. 상진공이 말하기를, ‘그렇습니까. 그런데 처음에는 대답을 않고 지금 와서 귀에다 대고 말하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하니, 그 늙은이 말이, ‘소는 큰 짐승이어서 사람 말을 알아듣고 또 부끄러워할 줄도 알지요. 내가 그 힘의 덕을 보고 그 놈을 부려먹으면서 그 놈 부족한 점을 꼬집어 그 놈의 마음을 상하게 해주고 싶지 않아서 그런 거라오.’ 하더라는 거야. 상진공은 그 말끝에 크게 반성을 하고 그때부터는 한평생 남의 과실 말하기를 부끄럽게 여겨 장점만 말하고 단점은 말하지 않았으므로 마침내 장후(長厚)한 군자가 됐다는 거야. 지금 우리들이 그 말들 힘으로 천리 길을 두루 돌면서 온갖 험난한 곳을 다 지나 여기까지 왔으니 그 말이 병들었거나 둔함을 그렇게 헐뜯을 일이 아닌데, 더구나 그들이 듣는 데서 그래서야 되겠는가. 사람도 꾸짖고 욕설을 하면 풀이 죽고 치켜세우면 흥을 내는 법인데, 저 말들이 오늘은 뽐내면서 달릴 기운이 더욱 없겠네. 그것은 우리가 대우를 잘못한 소치가 아니겠는가.” 했더니, 외삼촌이 말씀하기를, “참으로 소나 말이 사람이 하는 말을 알아듣나 보다.” 하여, 서로 한바탕 웃었다. 22(갑자) 맑음. 아침에 이생 석이 왔고, 최이억도 왔다. 조반을 먹고 출발하여 유군과 함께 봉의루(鳳儀樓)에 올라가 보았다. 그 고을 뒷산이 날아가는 봉황의 형국이기 때문에 산 이름이 봉산이고 누대 역시 그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고을이 모양은 매우 그럴싸했으나 살고 있는 백성이 100호도 안 되는데다 성지(城池)도 목석(木石)도 없어 국가를 지킬 요충지는 못 된다. 만약 삼악산(三岳山)에다 관()을 설치하여 그 삼면을 막고 지킨다면 이 나라의 한 보장(保障)이 될 법하다. 우리들이 봉의루에 올라 있음을 수령이 듣고 술과 배를 가지고 와 행장에 챙겨준다. 외삼촌을 뒤좇아 신연(新淵) 나룻가에 와서 만나고 신완(申椀)과도 서로 만났으며 만호(萬戶) 반예적(潘禮積)이라는 자도 만나 동행하게 되었다. 석파령(席破嶺)을 넘는데 산 이름은 삼악(三岳)이다. 재가 매우 높아 길은 평평했어도 길가로는 깎아지른 절벽이라 말에서 내려 걸었다. 재 너머 서쪽은 전부 산 아니면 깊은 골짜기뿐이고, 그 재에서 군()까지의 거리는 20여 리였다. 거기에서 또 20리를 더 가 안보역(安保驛)에 다다르니 청풍부부인(淸風府夫人) 묘가 있고, 그 아래 있는 재사(齋舍)가 매우 조용하여 거기에서 잤다. 저녁에는 나와 강가를 거닐었다.이 날은 춘천(春川)을 떠났다. 이는 대개 청평산에 들어가 진락옹(眞樂翁)과 매월당(梅月堂)의 유적을 찾아보려고 했던 것인데 계획대로 되지 않아 시 한 수를 읊어 유군에게 화답을 청했다.

춘주가 수려하기로 이름난 고을인데 / 春州素號水雲鄕

더구나 청평학사 별장까지 있음이랴. / 况有淸平學士莊

청연에 물이 고여 둥실둥실 배 떠있고 / 水積靑淵舟泛泛

구름 덮인 화악에는 바위 빛이 푸르다네 / 雲霾華岳石蒼蒼

희이자 뼈 푸르다니 신선 상징 분명하지 / 希夷骨碧仙蹤杳

매월당이 남긴 글씨 그 체취가 풍긴다네 / 梅月書留道韻長

서운하게 식암 영지 바라만 보단말가 / 惆悵菴池空入望

그들이 남긴 향기 누가 가서 맡으라고 / 澗蘅誰復嗅遺香

춘천(春川)과 잿마루와의 거리는 멀지 않은데, 물이 급류에다 여울이 얕다. ()의 북쪽에 청연(靑淵)이라는 곳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수심이 배를 띄울 만한데 여기는 바로 소양강(昭陽江) 상류이다. 그 강이 양구(楊口)의 강과 합류하여 신연도(新淵渡)를 이루고 평야 가운데로 굽이굽이 흘러 파강(巴江)의 형국을 이루고 있다. 경운(慶雲)의 북치(北峙) 서쪽에는 백운산(白雲山)이 있는데 일명 화악산(華岳山)이라고도 한다. 가파른 바위산이 구름 높이 솟아 있어 영서(嶺西)에서는 화악만큼 높은 산이 없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경운은 청평의 원래 이름이다. 유군의 화답시는 이러하다.

진락공 그 명성이 이 고을에 자자한데 / 眞樂公名表此鄕

더구나 청평하면 그 있던 곳 아니던가 / 淸平況是故時莊

예스러운 못과 누대 지원처럼 경개 좋고 / 祗園勝槪池臺古

보지(寶池)의 가을 풍경 나무들이 푸르러라 / 寶池秋容樹木蒼

치솟은 바위산과 겨룰 만한 높은 절의 / 淸節漫爭山骨聳

고상한 풍류는 장강유수 그것이라네 / 高風直與水流長

선경을 지척에 두고 계획이 틀려서 / 仙區咫尺違心賞

선생께 판향 하나 피워 올리지 못한다오 / 未薦先生一瓣香

 

二十日日癸亥朝陰有霡霂之雨 早飯而發 踰富昌峴 秣馬于富昌驛里 小雨遲發 歷祈樂伊遷 祈樂伊 方言言匍匐而出也 蓋遷路狹甚 有石穴 人之行者 必匍匐而出 故名云少憩于泉田路邊大川之上 是日盡日峽路棧遷 至此則群山豁然 大野中開 一江灣環 甚覺舒暢 北瞻一山嵬然 下有民家數十 背負松林 隱以楡 柳云是江陵府使李煦之所居 濱川有小市 問李生后平在否 云方往襄陽未還 逶迤而行二十餘里 北望淸平 南指昭陽亭 舟渡前江 少憩于昭陽亭 觀壁上諸人題詠 月峯淸陰白軒兪瑒 遂入邑內 寓柳君奴家 送言于主倅 主倅以病不得出 送裨申梡來 俄主倅之兄李生錫來見 崔男之子喪人爾嶷亦來見 因李生略聞京奇家信 柳君曰聞淸平山有李資玄之息菴影池 息菴者 資玄之所獨坐 東史所謂團團如鵠卵者也 影池者 在息菴之下小池 纔半畝 每日朝月宵 凡息菴之簷宇 人物之動靜 無不照影於池中 資玄之死 用浮屠火化之法 其化之餘骨 尙爲居僧所藏 色碧如靑玉 又脊有金悅卿親筆 故申象村送人詩有曰 李資玄骨風流遠 金悅卿書逸躅存 皆勝跡也 余曰資玄能超然於勢利之道 託身於雲水而終身焉 退老爲之卞誣而咏嘆之 悅卿能高不事之志於靖難之世 實東方之伯夷也 其淸風懿範 尤足爲百世之師 吾輩此行 豈可不訪其遺蹤也 但以余所乘 足蹇材鈍 從舅氏行 不能如計 相與訾馬之不才 余笑曰 亦嘗聞尙震相公聞牛之說乎 柳君曰 否也 曰尙公嘗行野 見(一有一字)老人執耒耕野 一犂兩牛 開墢甚力 尙公觀之 仍曰田事甚可賞 其兩牛中有優劣者之可言者乎 老父不應 尙公前行 老父趨詣之 附耳語曰 公之所問兩牛一則力健而材 一則力脆而材劣 年亦老矣 尙公曰然 然老父之初不應 今乃附耳語之 何哉 老父曰牛大畜 能解人言 有恥惡之性 吾不欲賴其力委任使 而眥其不材 以傷其心也 尙公言下大省 自是平生恥言人過失 言其長 不言其短 卒爲長厚君子 今吾輩所乘之力 得以周行千里 備歷險阻 以至于此 此馬之病鈍 未可厚訾之 況於其聽聞也 凡人詬叱則沮 推譽則興 此馬今日 益無奮迅之氣 殆吾輩之失之相待也 舅氏曰信乎牛馬之解人言語也 相與一笑

二十二日甲子晴 朝李生錫來見 崔爾嶷亦來 朝食而發 與柳君登鳳儀樓 蓋郡之後岡有飛鳳之形 故名鳳山 樓亦以是名 邑居甚有形勢 而居民不滿百戶 無城池木石 非關防之地也 若築關三岳 阻三面而守之 則亦可謂東方一保障也 主倅聞余登鳳儀 以壺酒生梨來 令付行中 追及舅氏于新淵津頭 與申梡相値 有潘萬戶禮績者 相遇而共行 踰席破嶺 山名三岳嶺甚峻 路雖平 邊於絶壑 下馬而步 踰嶺而西 則皆亂山深峽 嶺去郡二十餘里 又行二十里 至安保驛 淸風夫人之墓下 有齋舍甚靜便 仍宿焉 夕出步于江上 是日行春川 蓋欲入淸平山 尋眞樂翁梅月堂遺跡 而計不諧 作一律 請柳君和之 春州素號水雲鄕 况有淸平學士莊 水積靑淵舟泛泛 雲霾華岳石蒼蒼 希夷骨碧仙蹤杳 梅月書留道韻長 惆悵菴池空入望 澗蘅誰復嗅遺香 春川去嶺脊不遠 急流淺灘至州北 有名靑淵者 水深始可使舟 卽昭陽之上流也 與楊口江合 而爲新淵渡 屈注野中 而爲巴江之形 慶雲北峙西有白雲山 一名華岳 石骨巉巖 高入雲漢 人言嶺西之山 高莫如華岳云 慶雲 淸平本號也 和詩 眞樂公名表此鄕 淸平況是故時莊 祗園勝槪池臺古 寶池秋容樹木蒼 淸節漫爭山骨聳 高風直與水流長 仙區咫尺違心賞 未薦先生一瓣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