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의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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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시한(丁時翰), 『산중일기(山中日記)』

상세정보

정시한(丁時翰, 1625~1707):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군익(君翊), 호는 우담(愚潭). 강원도 원주 법천(法泉)으로 낙향하여 평생 벼슬길을 멀리하였다. 오직 이현일(李玄逸이유장(李惟樟) 등과 교유하면서 학문에 힘쓰고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다.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사헌부집의·성균관사업의 벼슬이 내려졌으나, 모두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저서로는 문집인 우담집(愚潭集)을 비롯하여 임오록(壬午錄)·만록(漫錄)·산중일기(山中日記)·관규록(管窺錄)·사칠이기변(四七理氣辨)·변무록(辨誣錄)등이 있다.

정시한은 168787일부터 11일까지 청평산을 유람한 사실을 산중일기에 기록하였다. 그의 일정을 보면 다음과 같다. 淸平山 입구九松亭影池眞樂公重修淸平記법당西行廊仙洞息庵청평사(1,2)진락공이 노닐던 옛 자취와 시내 주변 돌아봄청평사(3)암자 뒤 석대서천선동청평사 西寮(4)영지구송정고개낭천

번역문 / 원문

87일 맑음. 아침에 안개가 짙게 깔렸다. 읍내로 나왔으나 안개 때문에 형세를 보기 힘들다. 소양정에 닿으니 안개가 걷혀서 정자에 올라가 구경했다. 이곳저곳 다니면서 보니 뒤에는 높은 산들이 첩첩이 쌓여 있고, 바위들도 층층이 둘러서 있어 깊숙하고 그윽하다. 아래쪽으로 맑은 강과 닿아 있고 널찍한 들이 넓게 펼쳐져 있으며, 멀찌감치 있는 산들이 둘러 있어 다양한 경관이 실로 절경이다.

나루를 건너 10여 리를 가니 강가에 큰 마을이 있다. 마을 사람들에게 물으니 바로 승지(承旨) 심광수(沈光粹)의 장원이라고 한다. 작은 고개 하나를 넘으니 너른 들이 나온다. 강을 따라 10여리를 가자 큰 마을이 나오고 커다란 집이 있다. 강릉 수령을 지낸 이후(李煦)의 집이다. 길이 매우 험하여 위험하므로 말에서 내려 5리쯤 가서 청평산(淸平山) 입구에 닿았다. 퇴계 선생의 시에, “골짜기 동쪽 강 굽이친 곳에 사다리 비스듬히 걸쳤고, 문득 구름 밖으로 맑은 시내 흐르네.”라고 읊은 것이 바로 이곳을 말하는 것이다.

몇 번인가 시내를 건너고 계속 안쪽으로 들어가서 냇가에서 밥을 지어먹고 쉬며 말도 쉬게 하였다. 조금 있다가 다시 발길을 재촉하여 청평사(淸平寺) 아래 구송정(九松亭)에 닿았다. 폭포와 반석이 있어 경관이 좋다. 여기에 말을 놓고 걸어서 오르니 영지(影池)가 있다. 기문(奇門) 밖에 이르니 돌계단 위에는 진락공중수청평비(眞樂公重修淸平記)가 있다. 이 비는 고려의 김부식(金富軾)⑴이 짓고 탄연(坦然) 스님이 글씨를 쓴 것이다. 이 절에는 스님이 몇 명 살지 않고 사찰도 쇠락한 것이 볼품없다. 노승 영우(靈祐) 스님과 절 문 앞에서 마주 대하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잠시 후 법당 두 곳을 올라가 본 다음, 다시 서쪽 행랑에 내려왔다가 갑성(甲成) 상좌와 함께 선동식암(仙洞息庵)으로 올라갔다. 수좌승 청오(淸悟) 스님이 혼자 앉아 있다가 맞이하는데, 정축생(1637)으로 기운과 외모가 매우 맑은 분이다. 송대(松臺) 위에 앉아서 산중의 고적(古跡)을 이야기했다.

진락공의 유골을 담은 곳을 보여주고 지석(誌石)도 꺼내 보여준다. 글자가 마모되어 다 알아볼 수가 없는데 시작 부분에 공의 이름이 쓰여 있다. 유골은 항아리 안에 있는데 사람들마다 그것을 꺼내 보기도 한다. 청오 스님도 그것을 꺼내 내게 보여주려고 했지만 내가 그만두라고 했다. 스님이 말하기를, "예전에 한 상좌 스님이 손으로 뼈마디 세 개를 찾아서 참관하는 것을 보니 유골은 썩은 색이 없이 희고 깨끗한 것이 마치 새 것 같았다"고 한다. 지석 두 개와 항아리가 돌 틈 사이에 나란히 놓여 있어 오가는 감병(監兵)과 수령들이 혹은 항아리에서 꺼내도록 하여 보고 가기도 한다고 한다. 언제부터 이렇듯 해괴한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 없다. 옛날 현인의 유골을 염하지 않고 이렇게 심하게 무례하니 실로 한심하여 슬프고 한숨만 나올 따름이다.

절 아래는 띠로 얽은 집터가 있고, 그 곁에 폭포와 반석, 그리고 입암(立巖)이 있다. 반석을 다듬어서 아래위로 두 개의 움푹 패인 절구를 만들어 놓았는데 위에 있는 것은 손을 씻는 곳이고 아래는 발을 씻는 곳이라고 한다. 기이하고 묘하니 그 솜씨가 가히 하늘이 빚은 듯하다. 송대(松臺) 위에는 네모난 자리를 놓아두어 언제나 앉아서 노닐 수 있도록 하였다고 한다. 그 터가 깊고 그윽하며 폭포는 세차게 흐르고 돌계단도 네모지고 반듯한 것이 마치 새로 만든 것 같다. 유적을 두루 다녀보니 어렴풋이 진락공과 바위로 이루어진 절벽과 푸른 너무 사이를 두루 다닌 것과 같아 슬픈 감흥이 일어난다.

저녁에 노비 수리(搜理)가 이불을 갖고 왔는데 곧바로 돌아가게 했다. 청오 스님과 함께 묵었다. 청오 스님은 수행에 전념하여 용공(用工)과 절차(節次)에도 능통하다. 50리를 왔다.

88일 흐림.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느지막이 갰다가 저녁에 다시 벼락이 크게 치며 밤까지 비가 내렸다.

아침 일찍 청평사 수승(首僧) 선안(善眼) 스님이 와서 보았다. 수리를 보내 비를 무릅쓰고 쌀과 반찬을 갖고 오게 한 후 곧바로 내려가게 했다. 비가 그친 다음 춘천의 선비 홍도명(洪道明)홍도관(洪道貫)홍도형(洪道衡)홍도익(洪道益) 등 네 명이 왔다가 바로 내려갔다. 어제 큰절에서 만났었기로 잠시 들어와 얘기를 나눈 것이다.

89일 흐린 뒤 갰다. 아침식사 뒤에 청오 스님과 함께 진락공이 노닐던 옛 자취를 돌아보았다. 시내를 따라 여러 곳에 축대가 있고 층층이 쏟아져 내리는 폭포와 반석이 있어 굽이굽이 볼만하고, 깊고 그윽하며 조용하여 세상 밖에 있는 것 같다. 몇 칸짜리 띠집을 짓고 앞서 수양한 사람을 좇아 남은 생을 마치고 싶다. 과연 내 뜻을 이뤄줄 것인가?

사과(司果) 문원건(文元健)이 후립(後立)과 경복(庚福)을 데리고 원주에서 쫒아왔는데, 짐말이 부실해서 길에서 넘어지곤 했다 하여 근심되었다. 저녁에 문원건이 와서 같이 묵었고, 경복이도 왔다.

810일 흐린 뒤 갰다. 아침식사 뒤에 문원건과 같이 암자 뒤에 있는 석대에 올랐다. 문원건이 거문고 여러 곡을 타고 또 피리도 몇 곡조 불렀다. 진락공의 높은 풍취를 생각해 보니, 스스로 백세지감을 느낀다. 저녁식사 뒤에 문원건과 거닐었다. 시내를 따라가 보니 암벽에 청평선동(淸平仙洞)’이라는 글씨 네 자가 커다랗게 새겨져 있다. 굽이마다 폭포와 못이 있어 가히 볼 만하다.

큰절에 가니 그 옆 반석이 평평하게 깔려 있는데, 흐르는 물은 감벽색(紺碧色)이다. 시내의 흐름을 따라 대()를 쌓았는데 곳곳마다 기이한 경승이어서 감상할 만하다. 오랫동안 있다가 돌아와 법당에 앉아 있다가 날이 저문 다음에 일청(一淸) 노스님의 방인 서료(西寮)에서 묵었다.

811일 추웠으며 아침에 안개가 짙었다가 늦게야 맑아졌다. 아침식사 뒤 문원건과 함께 걸어 내려가 영지 주변에 앉았다. 봉우리가 돌로 이루어졌는데, 산의 암자가 못에 또렷이 비취는 것이 마치 그림 같다. 다시 구송정으로 내려가 위아래의 폭포와 반석을 감상했다. 무척이나 맑고 기이한 경관으로 산중의 가장 큰 보물이다. 5리 남짓 더 내려가 비로소 말을 타고 고개 하나를 넘었다. 안팎이 약 20여 리로 산길이 험준하여 사람과 말이 넘어지고 쓰러져 가며 겨우 지나왔다.

날이 저물어서야 낭천(狼川) 읍내에 도착하여 읍내의 노인인 심예봉(池禮鳳)네 집에서 묵었다. 반갑게 맞이해 주며 배 10여 개를 내게 대접한다. 80리를 왔다.


 

1) 김부식(金富軾): 김부철(金富轍)이 지었는데, 작자는 김부식이 지은 것으로 잘못 알고 있다.

初七日晴 朝大霧 由邑內而不能見形勢 至昭陽亭則霧頻收 登眺移時背後疊嶂層巖圍繞深邃 俯臨澄江 大野極目遠山環擁 景態萬千眞絶景也 涉津行十餘里 江邊有盛村 問村人則卽沈旨承光粹庄云 逾小峴又有大野 沿江行十餘里 有大村大家 乃李江陵煦家 由 路路極危險 下馬步五里許 入淸平洞口 退溪先生詩所謂 峽東江盤棧道傾 忽驚雲外出溪淸者 正此地也 累渡溪流 轉入轉深臨溪攤飯抺馬 小時促行 至淸平寺下九松亭 有瀑布盤石之勝 捨馬步上 有影池 至奇門外則石砌上有眞樂公重修淸平記 高麗金富軾所撰 僧坦然所書也 僧徒尠少 寺觀殘破不成見樣 老僧靈祐望門前 與語小時 上見兩法堂 還下西行廊 卽與上佐甲成 上仙洞息巖 首座僧淸悟獨坐迎見 年丁丑生氣貌頻淸 與坐松臺上語 山中古跡 仍見眞樂公藏骨處 出見誌石 字刓未能盡解 面初書公諱 骨在缸中 人人出見 悟欲出以示我 我止之則云 今朝有一上佐手探數三骨節 以見渠亦參見 無腐朽之色 白淨如新云 誌石二葉 與缸幷置石隙中 往來監兵守令或命出缸於坐觀玩云 雖未知自何時有此駭異之事 而前賢遺骨無有斂葬者 褻慢至此極可廖心爲之悼歎不能已 下有茅堂基 傍有瀑流盤石 立巖攻盤石作上下兩臼 上臼洗手 下臼洗足處云 奇巧天成 松臺上置方席 常常坐遊處云 堂基幽邃 瀑流漾湲 石砌方正 完然如新撫 覽遺迹 怳若與眞樂公 周旋於巖崖綠樹之間 悵然興感夕 奴搜理持衾褥來 卽還送與悟同宿 悟頗專於其業 能通用工節次 行五十餘里

初八日陰 自朝雨差晩霽 夕又大雷電雨至夜 早朝大寺首僧善眼來見 卽去奴搜理 冒雨持粮饌來使 卽下去 雨止後春川士人洪道明道貫道衡道益四人來 卽去 昨逢於大寺 故入見暫話

初九日或陰晴 朝食後與淸悟 周觀眞樂公遊賞舊跡 沿溪築臺數處層瀑盤石曲曲可玩 幽邃闃寂若出世外 思欲搆成數間茅屋 追蹤前修以終餘日 天果遂吾願乎 文可果元健率後立庚福 自原州追到 卜馬不實 轉仆道路云 可慮 夕文生來宿 庚福亦來

初十日或陰晴 朝食後 與文生上菴後石臺彈琴數曲美笛數調 像想眞樂公高風 自有百世之感 夕食後與文生步行 沿溪巖壁大書刻淸平仙洞四字 曲曲瀑潭可玩 至大寺傍盤石平鋪 川流紺碧 沿流築臺 處處奇勝愛玩 良久還坐法堂日暮宿西寮 一淸老僧房

十一日寒朝大霧差晩晴 早食後與文生步下坐影池邊 峰巒石壁 山菴倒影池中 歷歷如畵 又下九松亭 觀玩上下瀑流盤石 淸絶奇勝 實一山之最也 又下五里餘 始騎馬踰大峴 內外約二十餘里 山路險峻 人馬顚仆菫菫行邁 日晩始到狼川邑內 宿老人池禮鳳家 頻款接 生梨十餘介 行八十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