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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협(金昌協), 「동정기(東征記)」, 『농암집(農巖集)』Ⅱ

상세정보

김창협(金昌協, 1651~1708):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중화(仲和), 호는 농암(農巖삼주(三洲). 좌의정상헌(尙憲)의 증손자이고, 영의정을 지낸 창집(昌集)의 아우이다. 아버지는 영의정수항(壽恒)이다. 청풍부사로 있을 때 기사환국으로 아버지가 진도에서 사사되자, 사직하고 영평(永平: 지금의 경기도 포천시)에 은거하였다. 1694년 갑술옥사 이후 아버지가 신원됨에 따라 호조참의·예조참판·홍문관제학·이조참판·대제학·예조판서·세자우부빈객·지돈녕부사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직하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 「동정기(東征記): 816일 농암(農巖)을 출발하여 30일에 아침을 먹고 나서 가마에 올라 만경대(萬景臺)로 향하는 일정을 기록한 기문이다. 19일과 20일은 청평산 유람에 대한 것이다. 그의 일정은 다음과 같다. 소양정扶服遷九松臺雙瀑影池청평사西川松壇仙洞息菴羅漢殿見性庵청평사(1)影池西川九松臺牛頭亭 옛 터소양정

번역문 / 원문

19. 새벽에 비가 잠시 그치는가 싶더니 다시 내렸다. 오후에는 날씨가 쾌청하였다. 아침에 출발하여 소양정에 올라 잠시 동안 앉아서 술 한 잔을 마셨다. 내려와 배를 타고 강을 건너 20리를 가니 부복천(扶服遷)이다. 양쪽의 산이 협속(峽束)한 탓에 왕왕 잔도가 매우 위험하다. 잔도를 다 지나자 비로소 강에서 떠났다. 골짜기로 들어가 10리 정도를 가니 산승(山僧)들이 남여(藍輿)를 가지고 와서 맞이한다. 나무와 숲이 울창하고 물소리도 활발하여 들어갈수록 그윽한 곳이다. 남여에서 내려 구송대(九松臺)에 앉았다. 대는 돌을 쌓아 만들었는데, 구송은 지금 없어졌다. 그 중 한 그루는 절의 중이 새로이 어린 소나무를 심어 보충하였다. 대 아래는 흰 바위가 넓고 평평하며 계곡 물은 잔잔하다. 쌍폭(雙瀑)이 벼랑 위쪽에서 아래로 떨어지는데, 그 길이가 거의 3()이나 된다. 폭포 위는 용담(龍潭)이고, 용담 위에는 또 쌍폭이 있었는데, 몹시 높다. 그 길이가 아래쪽의 폭포에 비해 장관이고, 더욱 단정하고 좋다. 대 위에 앉아 술을 가져오게 하여 한잔 마셨다. 조금 앞쪽으로 수백 보를 가면 영지(影池)이다. 그 깊이는 한 자가 채 못 되지만 담담하며 푸르고도 맑다. 작은 돌 서너 개가 그 가운데에 여기저기 놓여 있는데, 이끼가 끼어 더욱 사랑스럽다. 영지로 이름 지워진 이유는 선조(先祖)의 기행문에 다 실려 있다. 나옹(懶翁)이 심은 적목(赤木) 네 그루가 아직도 남아 있다. 그 중 하나는 크기가 거의 50 아름이나 된다. 세월이 오래되어 중간이 썩어서 입을 벌리듯 갈라져 있는데 두 그루 조그만 나무의 움이 자라고 있다. 큰 것은 역시 10 아름이 된다. 그루터기 가운데를 뚫고 올라와, 그루터기 꼭대기보다 더 자라서 가지와 잎을 드리운 것이 매우 기이하다. 절에 도착하여 조금 쉬고는 서천(西川)을 구경했다. 송단(松壇)에서 밥을 먹고 남여를 타고 선동(仙洞)에서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옛 식암(息菴) 자리로 올라갔다. 돌로 만든 섬돌이 아직도 남아 있고, 돌에 새긴 네 글자도 또렷하다. 그 옆에 있는 몇 칸의 작은 암자가 첩석(疊石) 위로 간들간들하게 세워져 있는데, 매우 고절(孤絶)하다. 이것은 후세 사람들이 지은 것으로 예전의 식암은 아니다. 암자 뒤로는 푸른 절벽이 깍은 듯이 서 있다. 그 위에 송단을 만들었는데, 단촐하면서도 아득하여 좌정할 만하다. 서쪽으로 수십 보를 돌아가면 나한전(羅漢殿)이다. 돌 위의 세수대야가 아직도 남아 있다. 샘물이 졸졸 떨어지지만 웅덩이를 메울 정도는 아니다. 나한전의 왼편 개울에는 돌 상자가 있고, 그 가운데에 질그릇을 두어 진락(眞樂)의 유골을 묻었다. 동쪽으로 수백 보를 돌아가면 견성암(見性庵)이다. 암자는 부용봉(芙蓉峰) 아래에 있는데, 지세가 특별히 청고(淸高)하다. 암자가 비어 승려는 없다. 그때 날이 저물어 산바람이 소삽하게 불어온다. 몹시 피곤하여 돌을 베고 누우니 노승(老僧) 명헌(明憲)이 따라 와서 마주 보고 누웠는데, 참으로 그림을 그려도 좋을 만하다. 돌아오는 길에 극락전(極樂殿)을 구경하고 선당(禪堂)에서 잤다.(절은 청평사라고 한다.)

20. 새벽에 일어나니 달이 밝다. 한 승려를 따라 영지(影池)를 구경했다. 나무 그림자가 음삼(陰森)하고 물과 달빛이 잘 어우러져 별도로 그윽하고 특이한 경치를 이룬다. 술 한 잔을 따라 마시고 돌아왔다. 밥을 먹고 다시 서천(西川)을 구경했다. 김부식(金富軾)⑴이 지은 진락(眞樂)의 비문을 읽는데 돌 빛은 맑고 깨끗했으며 자획은 조금도 닳은 데가 없다. 다만 윗면의 서너 뼘 정도가 겨울철에 크게 손상을 입고, 염천에 벗겨지고 균열이 생긴 것이 안타깝다. 용담(龍潭)의 구송대에 이르러 한참 동안 앉아 있다가 산을 나섰다. 승려 명헌(明憲), 선휘(善暉), 천호(天浩)가 여기까지 따라 와서 송별한다. 그 길로 우두사(牛頭寺)의 옛 터를 찾았다. 민가에 들러 말에 꼴을 먹이고 가다가 다시 소양정에 올랐다. 문소각(聞韶閣)에 들려 쉬는데, 부백(府伯)이 와서 인사한다. 밤에 박씨(朴氏) 성을 가진 사람의 집에서 묵었다

1) 김부식(金富軾): 김부철(金富轍)이 지었는데, 작자는 김부식이 지은 것으로 잘못 알고 있다. 

 


 

十九日曉雨乍止復作午後快霽朝發行登昭陽亭少坐飮一杯下舟渡江行廿里爲扶服遷兩山峽束棧道往往絶險棧盡始舍江入谷行十許里寺僧持籃輿來迎樹林翳鬱水聲濺濺漸入幽境下輿坐九松臺臺築石以成九松今亡其一寺僧新種稚松補之臺下白石寬平溪水淪漣雙瀑從崖上墜下長僅三丈瀑上復有龍潭潭上又有雙瀑懸焉其長視下者而壯尤更端好坐臺上呼酒飮一杯稍前數百步爲影池池深不盈尺湛然綠淨有小石數四離立其中苔草被之更可愛池所以得名者具在先祖記中懶翁所植赤木四株尙在其一大幾五十圍歲久中朽呀然拆裂有二小樹蘖生大亦十圍貫心腹以上出于其顚布枝葉甚奇到寺少憩觀西川飯于松壇籃輿上息菴舊墟在仙洞最深處石砌猶存石刻四字宛然其傍小菴數楹疊石危構極孤絶此卽後人所構非息菴也菴後蒼壁削立其上爲松壇孤迥可坐轉而西數十步爲羅漢殿石上盥盆尙存泉流涓滴不能盈科矣殿左澗中有石函中置瓦缶瘞眞樂遺骨轉而東數百步爲見性菴在芙蓉峰下地特淸高菴空無僧時日且夕山風颯然倦甚枕石而臥老僧明憲隨至對睡眞堪作畫也歸路觀極樂殿夜宿禪堂寺謂淸平寺二十日曉起月明從一僧往觀影池木影陰森水光沖融別有一段幽異之景酌酒一杯而歸飯後復見西川讀金富軾所撰眞樂碑石色瑩膩字畫無少泐獨上面數掌大爲冬月打者火灸剝裂可惜至龍潭九松壇坐良久出山僧明憲善暉天浩隨至此送別歷見牛頭寺舊基入民家秣馬而行再登昭陽亭歷憩聞韶閣府伯出見夜宿朴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