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의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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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金楺), 「유풍악기(游楓嶽記)」, 『검재집(儉齋集)』

상세정보

김유(金楺, 16531719): 본관은 청풍(淸風). 자는 사직(士直), 호는 검재(儉齋). 박세채(朴世采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다. 일찍이 학문에 조예가 깊어 박세채가 그의 후계자로 지목하였으며, 송시열도 그의 재주를 중히 여겼다. 저서로 소학집주(小學集註)·증보주자외기(增補朱子外記)·존주록(尊周錄)·검재집(儉齋集)등이 있다.

■ 「유풍악기(游楓嶽記): 1709년 금강산을 향해 가다가 춘천을 지나가면서 청평산을 유람한 과정을 기록을 남겼다. 심중량(沈仲良)이 부사였을 때 비로소 이자현의 부도를 세웠다고 스님의 말을 전한 대목은 중요한 사료로 판단된다.

번역문 / 원문

26일 정묘일(丁卯日) 맑음. 류생(柳生)의 아버지 류배(柳培), 형 류명겸(柳明謙), 고양(高陽) 사람 최상중(崔尙重)이 다시 와서 인사하는데, 모두 예전에 알던 자이다. 일찍 출발해 포복판(匍匐阪)에 이르렀다. 의원인 한후성(韓後成)이 둑을 쌓는 일로 와서 머무른 지 벌써 3개월이 되었다. 말에서 내려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남여(藍輿)로 포복판을 지났다. 류생(柳生)의 형제가 따라왔다.

청평사 계곡 입구에 이르자 물과 바위를 사랑하여 곳곳마다 가마에서 내렸다. 스님은 구송정(九松亭)이 제이 기이하다고 말한다. 구송정은 환희령(歡喜嶺) 아래에 있다. 드디어 앞으로 나가 정자에 이르렀다. 스님들이 석단(石壇) 위에 둥근 방석을 펼치고 기다렸다. 옛날엔 아홉 그루 소나무가 있었으나 지금은 하나가 없다. 이 층의 폭포가 있는데 비록 크지 않더라도 또한 볼만하다. 계곡으로 가서 술을 조금 마셨다. 영지(影池)를 지났는데, 영지는 절의 계곡 입구 1리쯤 되는 곳에 있다. 물빛은 맑고 푸르다. 깊이는 정강이를 적시지 못한다. 못의 아래 양쪽 귀퉁이에 돌을 쌓아 흐르는 물을 막았다. 가물거나 장마에도 늘거나 주는 것을 볼 수 없으니 기이하다. 옆엔 아름드리 적목(赤木) 몇 그루가 있다. 고려시대 나옹화상이 심은 것이라 한다. 절 북쪽 부용봉의 견성암이 영지 속으로 거꾸로 비춰 이름 붙였으나, 내가 본 것은 다만 산이 둘러싸고, 땅은 평평해 바람이 없어 물결이 고요한 것뿐이어서 달리 기이한 것이 없다. 서천(西川)의 수석(水石)을 지나가다 봤다. 6~7리를 구비 돌아 식암(息菴)에 올랐다. 고려 사람 이자현(李資玄)이 도를 닦던 곳이다. 옛날 바위에 의지해 방을 만들었는데 둥근 것이 고니 알과 같아서 단지 두 무릎을 펼 수 있었다. 글이 지지(地誌)에 보인다. 지금의 조그만 암자는 뒷 사람이 지은 것이다. 암자 뒤 석벽엔 청평식암(淸平息菴) 네 자를 새겼는데, 진락공(眞樂公)의 글씨다. 암자 앞 시냇가 바위 위에 확을 만든 것이 두 곳이다. 진락공의 세숫대야다. 북쪽 바위 아래 부도 하나가 있는데, 진락공 유골을 묻었다. 상서(尙書) 정두원(鄭斗源)이 방백(方伯)이었을 때 돌 두 조각에 새겨 그 일을 기록하였다. 뼈는 처음에 돌 상자에 보관했는데 유람 온 사람이 번번이 열어 보았다. 심중량(沈仲良)이 부사였을 때 버릇없음을 싫어하여 비로소 부도를 세웠다고 스님이 말한다. 절로 돌아오니 수령이 또 사람을 보내 음식을 베풀었다. 천전리(泉田里)부터 이곳까지 40리다.

 

 

 

二十六日丁卯晴柳生之父培兄明謙高陽人崔生尙重來見皆舊識也早發至匍匐阪韓醫後成以築堰事來留已三箇月矣下馬立與之語遂以藍輿過阪柳生兄弟隨之至淸平寺洞口愛其水石處處下輿僧言九松亭最奇亭在歡喜嶺下遂前進至亭僧徒設蒲團石壇上以候之舊有九松今亡其一有二層瀑布雖不甚長亦可觀臨溪小酌, 歷影池影池在寺之洞口一里許水色淨綠深不浸脛池之下兩隅築石以堰流旱澇不見增减爲可異其側有赤木數株大連抱麗僧懶翁所植云寺北芙蓉峰見性菴倒影池中故名而以余所見只以其山回, 地平無風波靜故耳無他奇也歷見西川水石又轉六七里登息菴乃麗人眞樂公李資玄養道處舊依巖作室團圓如鵠卵只得盤兩膝語見地誌今之小菴後人作也菴後石壁刻淸平息菴四字眞樂公筆菴前溪邊石上石作臼凡二所眞樂公盥盆也其北巖下有浮屠一坐眞樂公瘞骨也鄭尙書斗源爲方伯時刻石二片記其事骨初藏石凾遊客輒發視沈君仲良之爲府使惡其褻始立浮屠居僧云, 還寺則主倅又送人供食自泉田至此凡二十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