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의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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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석경(安錫儆), 「유청평산기(遊淸平山記)」, 『삽교집(霅橋集)』

상세정보

안석경(安錫儆, 1718~1774):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숙화(淑華). 호는 완양(完陽삽교(霅橋). 아버지는 중관(重觀)이다. 안중관은 김창흡(金昌翕)의 문인으로 이병연(李秉淵민우수(閔遇洙) 등 당시 노론계 인사 및 홍세태(洪世泰) 같은 중인 출신 시인과도 교유한 노론계 학자였다. 안석경은 세 차례 과거에 응하지만 모두 낙방하였다. 1752(영조 28)은 과거에 응한 마지막 해이기도 하지만, 그 해 아버지가 죽자 그는 곧 강원도 두메산골인 횡성 삽교(霅橋)에 은거한다. 삽교를 중심으로 시작되는 후반기는 도회적인 생활을 떠나 벼슬을 단념한 채 산중에 은거하는 처사적인 생활이었다. 저서로는 삽교집(霅橋集)·삽교만록(霅橋漫錄)이 있다.

■ 「유청평산기(遊淸平山記): 173954일과 5일 이틀 동안의 산행을 기록한 글이다. 그는 청평산은 본래 뛰어난 경치로써 이름이 났는데, 이자현이 거처하면서 더욱 알려졌고, 김시습과 김창흡이 찾아 들어 더욱 유명해졌다고 하였다. 이러한 청평산의 명성을 알고 있던 차에 소양강을 지나며 청평산을 보고 산행을 하게 되었다고 토로하고 있다. 안석경은 여러 인물들로 인하여 명성이 자자해진 청평산을 동경하고 있다가, 청평산을 지나가게 되자 아픈 몸임에도 불구하고 산행을 하였던 것이다. 그의 일정은 다음과같다. 소양정牛首村泉田村瑾亞棧九松臺폭포영지청평사견성암식암나한전서천松壇진락비청평사 禪堂(1)영지용담구송대

번역문 / 원문

청평산은 춘주(春州)에 있는데, 뛰어난 경치로써 이름이 났다. 식암(息菴) 이공(李公)⑴이 거처하고부터 산이 더욱 알려졌다. 뒤에 청한자(淸寒子)⑵와 백연옹(百淵翁)⑶이 때때로 와서 보곤 차마 떠나지 못하고, 남아 있는 정취를 깊이 느끼어 탄식하며 높이 노래해서 산과 골짜기를 빛냈다. 이에 청평산의 이름을 사람들이 말하게 되었다.

이해 한 여름에 나는 춘천으로 가는 길에 병이 들었다. 그러나 소양강을 한 번 지나고자 하여 돌아가는 길에 소양정에 이르렀다. 정자는 강에 임하여 있어서 환하게 터져있다. 멀리보이는 산으로 동북방에 위엄 있는 산이 많은데, 물가의 사람이 저것이 청평산이라 한다. 나는 눈이 열리고 심장이 뛰어서 술이 깨듯 아픈 것이 흩어지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드디어 북쪽으로 강을 건넜다. 강가에 우수촌(牛首村)이 있는데 옛날 맥()의 도읍이다. 마을은 크고 들은 멀리까지 펼쳐져 있어, 보리 이삭이 수십 리에 펼쳐져있다. 이미 우수촌을 지난 뒤 동으로 천전촌(泉田村)을 지나니 역시 언덕과 들판이 펼쳐졌다. 들판을 지나 돌로 만든 잔도(棧道)⑷를 건넜다. 잔도는 그림자를 강에 비치며 북쪽으로 벼랑을 끼고 돌았다. 분석(奔石)이 오리에 걸쳐 솟아있는데 근아잔(瑾亞棧)이라 한다. 잔도를 지나 강을 뒤로 하고 골짜기로 들어갔다.

골짜기는 좁지만 나무가 우거졌으며 물은 얕다. 물을 밟으며 구불구불하게 십리를 가니, 물이 갑자기 달라지고 구름 낀 나무가 울창하다. 이곳이 산문(山門)이다. 걸을 때마다 볼만하다. 수백 보를 가서 구송대(九松臺)에서 쉬었다. 대 아래에는 흰 돌이 넓고 평평하다. 물은 잔물결을 일으키며 폭포를 받아들인다. 폭포는 두 갈래로 떨어지는데 높이가 모두 세 길이다. 폭포 위에는 용담(龍潭)이 있고 용담 위는 벼랑이 있다. 벼랑에는 또 두 갈래로 떨어지는 폭포가 있다. 폭포에서 아래를 내려 보는 것이 더욱 뛰어나다. 비스듬히 위로 수백 보를 오르면 영지(影池)가 있다. 못의 깊이는 한 자 정도인데 푸르고 깨끗하며 잔잔해서 사방의 산 그림자가 보여 가느다란 털도 모두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이다. 고목이 둘러싸고 서 있는데, 붉은 나무 네 그루는 바로 나옹(懶翁)이 심었다고 한다. 절에 들어가 밥을 먹었다. 강선각(降仙閣)의 작약이 바야흐로 폈다. 신우(信祐), 묘심(竗心) 두 승려가 와서 알현하는데, 단아하고 수려하여 새겨둘만하다. 내가 꽃을 가리키며 공()과 색()에 대하여 물으니 대답을 한다. 함께 불전(佛殿)을 보았다. 오래된 석감(石鑑), 철장(鐵杖)을 보여주며 말하기를 "이것은 나옹의 물건입니다."라고 한다. 마침내 신우(信祐)를 앞세우고 묘심(竗心)을 뒤로 하여 걸어서 견성암(見性庵)으로 올라갔다. 암자의 주지승 일화(一和)가 절하며 맞이한다. 암자는 바위를 파고 외롭게 있다. 멀리 굽어보니 노니는 새가 큰 노송나무에 있는데 바야흐로 바람이 분다. 세상을 벗어나서 여기에서 십년 동안 책을 읽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게 여겨진다. 홀로 신우(信祐)와 더불어 식암(息菴) 옛터를 찾아갔다. 바위 사이 작은 암자에 이르니, 암자 뒤 돌에 청평식암(淸平息庵)이란 글자가 새겨있다. 대개 식암(息庵)의 터에 뒷사람이 암자를 지은 것이다. 암자 옆에는 돌이 서있는데 네 길 정도이며, 맑으며 푸른색을 띠고 있다. 위에는 송단(松壇)이 있는데 매우 높고도 빼어나다. 한참을 앉아 있다가 서쪽으로 수십 보 가니 나한전(羅漢殿)이다. 돌 위 세숫대야는 아직 마모되지 않았으니 바로 식옹이 판 것이라고 한다. 왼쪽으로 가면 골짜기 옆에 돌 상자가 있는데, 상자 가운데 와부(瓦缶)⑸에 식옹의 유해가 있으며 물이끼가 끼어 있다.

! 바야흐로 고려가 어지러웠을 때, 공은 척리(戚里)⑹임에도 초연하여 물들지 않고 여기에서 몸을 마쳤다. 여기에 남겨진 자취가 있으나 세월은 아득하여 자세히 알 수 없다. 오랫동안 앉아 있으니 바람은 찬데 새가 홀로 운다. 신우와 같이 작은 길을 따라 돌아왔다. 왕왕 물과 돌을 보았으나 선동(仙洞)을 보지 못했다. 서천을 보니 냇가에 송단(松壇)이 있다. 단에 올라 산을 보니 산중의 가장 높은 것이 세 봉우리이다. 섞여서 하나로 되어 있고 깍은 듯 떨어질 듯 하며 험준한 것은 향로봉(香爐峰)이고, 떨어질 듯이 쌓인 돌무더기가 여름 구름이 피어오르는 모습 같은 것을 경운봉(慶雲峰)이라 하고, 우뚝 솟아있으면서 연꽃의 꽃받침이 장차 펼쳐지려고 하는 것 같은 것은 부용봉(芙蓉峰)이라 한다. 봉우리들은 모두 푸르고 흰 돌로 이루어졌으며, 나무들은 단풍나무와 삼나무, 노송나무, 잣나무 등인데 나무는 공경하는 듯 하고 돌은 위태로워 떨어질 듯하다. 해는 다투어 반짝반짝 빛나니 기쁠 뿐이다. 저녁에 돌아와 김부식(金富軾)이 지은 진락비(眞樂碑)를 읽었다. 비에서 두 자는 떨어져나갔고 어두워서 읽을 수 없다.

선당(禪堂)에서 잤다. 초승달이 누운 곳을 비춘다. 그때 늙은 중의 말을 들었는데연옹(淵翁)⑺을 언급하는 것이 이어지면서 그치지 않는다. 대나무 갓과 갈포, 지팡이 하나인 깨끗한 풍채를 생각할 수 있다. 또 이백년 전에 긴 수염을 기른 두타가 이 절에 왔었다고 말한다. 내가 이 사람은 청한자(淸寒子)이다. 모든 나무에 서리가 맺히고 온 산에 눈이 쌓인 것을 비유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천년 뒤에 나의 평소에 품은 뜻의 말을 알아주기를 바라니 한스러워 눈물이 흐르려고 한다.

대개 매월옹(梅月翁)은 중년에 곡운(谷雲)⑻에 거처했고 만년에는 설악(雪岳)에 거처했다. 연옹(淵翁)은 중년에 설악에서 살았고, 만년에는 곡운에서 거처했다. 이 산은 곡운과 설악의 사이에 있다. 그러므로 두 분이 이 산에서 놀며 즐겼던 것이다. 새벽종이 울리자 신우(信祐)가 촛불을 밝힌다. 내가 시를 지어 주었다. 절을 나와 홀로 신우와 같이 영지에 앉았다. 연못은 흰 빛을 발하고, 어둠은 나무에 드리워져 있어서, 특별히 맑고 엉기어 멀리 있는 듯한 정취가 났다. 내가 손수 경쇠를 한 번 치니 산이 모두 울린다.

이로부터 산을 나와 서성거리며 돌아보니 거의 마음을 다스릴 수 없다. 마지못해 용담과 구송대를 나오니 일화스님이 배웅한다. 내가 또 앉아 경쇠를 치고 탄식하며 말하길 여기에서 노는 자가 뒷사람 중 누가 있겠는가? 나는 알지 못하겠다. 예전에 세 군자가 있었는데 나는 도리어 미치지 못한다. 홀로 왔다가 홀로 가고 홀로 그 자취를 어루만지며 홀로 바람 부는 소나무와 흐르는 물 사이에서 잊지 못하여 마음이 괴로움을 얻으니 슬프도다. 내가 연옹보다 늦고 연옹은 매월옹보다 늦고 매월옹은 식옹보다 늦으니 아득히 때가 같지 않아, 경운봉 위에서 서로 뜻이 맞아, 웃고 즐기며 이야기 할 수 없으니 한스럽다. 뒷사람 또한 이 한을 같이 하는 자가 있겠는가?” 어떤 늙은 스님이 말하길 이는 곧 그러합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청평산이 명산입니까? 여러 봉우리가 돌로 이루어져 있고 목석(木石)이 빛나는 것이 아름다운 옥에 버금가는 자주 빛을 얻은 것 같고, 절벽은 높고 강은 축소된 것이 절 주변 몇 걸음 안에 있고, 나아가 우수(牛首)의 들을 소양의 정자와 마주하고 있으니, 또한 좋은 것 중에 좋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 땅은 멀고 가까움이 있어 뛰어난 것을 모을 수 없는 것이 이와 같으니, 하물며 시간은 멀고 가까움이 있고 인사(人事)는 함께 하지 못함이 있으니 다시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 산을 보고자하면 산을 볼 수 있고, 물을 보고자 하면 물을 볼 수 있습니다. 옛사람이 이와 같았고 지금 사람이 이와 같습니다. 뒤에 오는 자 또한 이와 같을 것입니다. 무릇 이와 같으면 가하지, 오히려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나는 그렇다고 말하였다.

구송대로부터 골짜기에 있는 돌 가운데로 옮겨 앉았다가, 한참 지난 후 일어났다. 때는 기미년(己未年)⑼ 천중절(天中節)⑽이다.

 

 

1) 이공(李公): 이자현을 가리킨다.

2) 청한자(淸寒子): 김시습의 호.

3) 백연옹(百淵翁): 김창흡을 가리킨다.

4) 잔도(棧道): 산골짜기에 높이 가로질러 놓은 다리.

5) 와부(瓦缶): 토제의 장군, 오지장군, , 물 같은 것을 담음.

6) 척리(戚里): 임금의 외척.

7) 연옹(淵翁): 김창흡을 말한다.

8) 곡운(谷雲): 화천군 영당리를 말한다.

9) 기미년(己未年): 1739.

10) 천중절(天中節): 단오.

淸平山在春州以殊勝名自息菴李公居之而山逾聞後有淸寒子 若百淵翁 時時來見 不忍去感慨高歌餘情耿山壑 於是乎山之名 殆人人誦之矣是年中夏余之春州道病欲一過昭陽而歸及昭陽亭 亭臨江豁然多遠山其東北而隱然者水人曰彼所謂淸平山也余則目開而心揚 不覺醒然而疾散也遂北渡江 江上牛首村 古貊都也村巨而野遠 麥秀數十里旣渡而東過泉田村 亦原野 野盡而踐石棧 棧照江而北轉崖奔石聳可五里 名瑾亞棧棧盡而背江入谷谷蒼狹 谷水來濺濺 踏水屈曲行十里水忽殊異雲木蔚然 是爲山門步步生耳目數百步息九松臺臺下白石寬平水淪漣受瀑 瀑則雙飛 長皆三丈 瀑上龍潭 潭上崖 崖又雙飛瀑 瀑視下者更勝迤上數百步有影池池深尺 綠淨不擾 四見山影 纖毫 可悉 有古木繞立而赤木四 乃懶翁所種云 入寺 食 降仙閣 芍藥 方花 有信祐竗心二上人來見端秀 可念 余指花而問空色 有荅語 因與觀佛殿 有示古石鑑鐵杖曰 此懶翁之物也 遂前信祐而後竗心步上見性庵 庵主一和拜迎 庵刳巖而居忒孤 㢠俯視游鳥 有大檜 方作風 恨不脫世 讀書十年於此 獨與信祐訪息菴舊墟 至石間一小庵 庵後石刻淸平息庵字 盖息庵之墟 而後人搆庵也 庵傍石立四丈 淡蒼色 上爲松壇 極㢠絶 余爲坐良久 西數十步爲羅漢殿 而石上盥盆尙不盡磨 乃息翁所鑿云 左而磵涯有石函 函中瓦缶貯息翁遺骸 水苔翳然 嗚呼 方麗朝穢亂 公以戚里超然 不點染 畢身於此 此其有遺躅 而世顧遠已不可詳矣

久坐風冷冷 有鳥單啼 與信祐遵小徑歸往往見水石而獨仙洞不得見見西川 川上松壇登壇而見山山最三峯 其磅礡刻落而崟然者 曰香罏其硉凡磊砢如夏雲之騰者 曰慶雲其嵳嵳㱀㱀如蓮萼將展者曰芙蓉峰峰皆蒼白石 其木楓杉栝栢 木竦而石崒方落 日爭映發 可喜已暮歸讀金富軾所撰眞樂碑 又斷碑二字晦不可讀宿禪堂細月照臥 時聞老釋言 言及淵翁 瀏瀏不能已 竹笠葛袍一笻 灑然其風標可想也 又言二百年前長髥頭陀來往是寺云 余曰此淸寒子也 因諷其萬樹凝霜 千山積雪云云 冀千載之下知余之素志之語 恨然欲涕下 盖梅月翁中年 居谷雲 晩居雪嶽 淵翁中年居雪嶽 晩居谷雲 是山也 在谷雲雪嶽之間 故二公之游喜於是山耳 曉鍾信祐明燭 余題詩留贈 出寺獨與信祐坐影池 池光生白 而夜色垂木 別有澄然凝邈之趣 余手磬一敲 山皆響 自此將出山 彷徨顧視 殆不能爲心 强而出龍潭九松臺 一和追送 余又坐敲磬已而 歎曰 游於此者 在後人當有誰耶 吾不得而知矣 在古有三君子而吾顧不及矣 獨來 而獨去 獨撫其躅 獨得耿耿於風松流水之間 悲夫 余晩於淵翁 淵翁晩於梅月翁 梅月翁晩於息翁 漠然不同時 不得於慶雲峰上逢迎偕言笑 可恨 後之人亦有同此恨者耶 有老釋曰 是則然矣 抑奈何淸平是名山也 數峰确然 木石閃映 若得瑾亞之紫 崖大江縮在山門 數步 前之以牛首之野 對之以昭陽之亭 則不亦善之善者乎 顧乃地 而有遠近不得聚英會秀 如此 况於時之有遠近 而人事之不偕者 復何異哉 噫 見山則見山 見水則見水 古人而如是 今人而如是 後之來者 亦如是夫 如是則可矣 尙可何說耶 余曰 然 自九松臺 移坐磵石中 久之乃起 時己未天中節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