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의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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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인영(趙寅永), 「청평산기(淸平山記)」, 『운석유고(雲石遺稿)』

상세정보

조인영(趙寅永, 1782~1850):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희경(羲卿), 호는 운석(雲石). 국구(國舅) 만영(萬永)의 동생이다. 김정희(金正喜)와 함께 우리 나라의 금석문(金石文)을 수집, 금석학 연구에 정진하였다. 문장·글씨·그림에 모두 능했고 시문과 소차(疏箚)를 모은 운석유고20권이 전하고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 「청평산기(淸平山記): 금석문의 대가답게 본문에서 김부철(金富轍)이 기()의 오류를 지적하는 부분이 이채롭다. 구송대를 팔송대(八松臺)로 부른다는 것을 알려주는 자료이기도 하다. 또한 조인영은 나옹화상에 대해서는 뛰어난 스님이라고 칭찬하면서도, 보우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보우를 요승이라고 부르면서, 지나치게 사치스럽게 불사를 일으켰다고 지적하였다. 박장원과 동일한 내용으로 비판을 하였고, 이후의 비판적 입장을 취하는 사람도 대체로 동일한 모습을 보인다.

번역문 / 원문

바로 춘천부(春川府)의 북쪽을 소양강 물이 관통한다. 강을 거슬러서 40리를 가면 산이 있는데, 그 산을 청평산이라 한다. 여지고(輿地考)에 이르기를, 구렁과 샘과 돌의 아름다움은 영서지방에서 유일한데, 춘천의 명칭이 산수읍(山水邑)인 것은 청평산 때문이다. 청평산은 옛날의 경운산(慶雲山)이다. 신라 말에 스님 승현(承玄)이 당나라에서 돌아와 보현원(寶賢院)을 지었는데, 이것이 문수사(文殊寺)가 되었다. 고려 때 희이처사(希夷處士) 이자현이 그 속에 은거하여 37년 동안 청정하게 수도(守道)하니, 사람과 만물이 모두 교화되어 산에 도적이 없어지고 계곡과 숲속에는 맹수가 물러갔다. 그래서 이름을 고쳐 청평(淸平)이라 했다고 한다. 기록의 내용이다. 문성지당(聞性之堂), 견성지암(見性之庵) 및 선동(仙洞)의 식암(息庵)은 편안히 쉬는 곳이다. 암자 아래의 돌에 두 개 우묵한 것은 예전의 대야이다. 암자 왼쪽에 질항아리가 있는데, 내용물은 유해를 묻은 것이다. 계곡에는 선동식암(仙洞息庵)이라는 네 자를 새겼는데 손수 남긴 자취이다. 부지(府誌)에 기록한 것이 대개 이와 같다. 절에는 유허갈(遺墟碣)이 있는데, 김부철(金富轍)이 기()를 지었고, 이자현의 문도인 탄연이 썼다. 문장에는 어긋나는 것이 있는데, 승현(承玄)은 영현(永賢)이라 쓰고, 보현(寶賢)은 보현(普賢)이라 써야한다. 보현(普賢) 앞에는 백암원(白巖院)이 있었는데, 실제로 영현(永賢)이 창건한 것이다. 보현은 송나라 희영(熙寧) 원년에 창건되었는데, 춘천의 부사 이의(李顗)가 백암의 옛 터에 세웠다. 문수(文殊)는 희이자(希夷子)가 바꾼 것이며 희이는 의()의 아들이라고 한다. 부철은 당시 사람이어서, 그 일을 알고 있는 것이 자못 상세하여 징험할 수 있었을 것이니, 아마 부지(府誌)가 잘못된 것 같다. 원나라 사람이 불교를 숭상하여 절에 불경을 수장해 두고 비에 새겼으니, 익재(益齋)의 문장이요 행촌(杏村)의 글씨이다.

나옹(懶翁)은 뛰어난 선승이다. 이 산에 머무른 것이 오래되었으며, 입적하자 부도를 세웠다. 조선에 들어와 요승(妖僧) 보우(普雨)가 공사를 일으켜 중건하였는데 강화도의 돌과 화국(和國)⑴의 단청으로 칠하여 장대하고 화려하다. 이것이 헤아릴 수 없는 절의 시말이다. 별원(別院)은 세향원(細香院)이라 하는데, 청한자(淸寒子)가 세상을 도피하여 살던 곳이다. 불보(佛寶)로는 양신암(養神庵)이 있는데, 부용봉 옆에 있다. 지금은 모두 없어졌다. 학등(鶴燈)과 안경(卵鏡), 철장(鐵杖)이 있는데, 철장은 나옹의 물건이다.

팔송대(八松臺)는 계곡 입구에 있으며, 형제폭포가 다음에 있다. 바위가 두 개로 층져 각각 몇 척 정도 된다. 층 사이를 용담(龍潭)이라 부르고, 위와 아래는 두 갈래로 나뉘어져 물이 떨어져 내리는데 서로 견줄 만하다. 서천(西川)은 산의 가운데에 웅거하고 있으며, 폭포의 상류에 있다. 부용봉은 가장 높은 봉우리이며, 영지는 절의 문 앞에 있다. 깊이는 한 자가 되지 않고 사방은 10보가 채 안 된다. 가물어도 줄지 않으며, 장마에도 불어나지 않는다. 물은 매우 맑다. 하늘에 달이 환하면 견성암은 산중턱에서 그림자를 드리우는데, 풀 한 포기도 분별할 수 있다. 이로 말미암아서 그 이름을 얻었다. 대저 대령(大嶺)의 서쪽으로 산은 한계(寒溪)보다 높은 것이 없고, 물은 곡운(谷雲)보다 성한 것이 없으니, 이 산을 두고 말이 많은 것은 어찌 수석(水石) 때문에 말하는 것이겠는가? 고준한 선비가 머물렀던 자취가 유독 많아서다. 땅은 사람으로써 이름나니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희이(希夷)는 사신(史臣)이 많이 폄하하여 번영(樊英)⑵이 헛된 명성을 도적질한 것과 충방(种放)⑶이 만절(晩節)에 연루된 것과 비교하는데, 이 말을 믿는다면 기영(箕穎)⑷이 부끄러울 만하다. 퇴계 이선생이 홀로 차례대로 열거하여 역사의 잘못을 변론해서 그 어짊을 밝게 드러내고 이어서 시를 짓기를, "동한(東韓)의 은일(隱逸)을 누가 지어 전하던지, 작은 허물을 가지고 아름다움을 내치지 마라."하며 탄식하고 애석해 하였다.

태사공(太史公)이 이르기를, 백이(伯夷)가 비록 어질어도 공자로 인하여 이름이 더욱 빛났다고 하였다. 또 이르기를, 허유(許由)⑸와 무광(務光)⑹은 의리가 지극히 높다고 하지만, 그들이 공자의 글에는 조금도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대개 희이자 이자현이 무광에게 칭송되는 것을 볼 수 있으니 다행이다. 근대에 은거하는 자가 아직도 있으나, 영현(永賢), 나옹(懶翁)의 무리는 또한 볼 수가 없다. 산천은 일찍이 변하지 않았으며, 절의 비갈(碑碣)도 비록 훼손되었으나, 다시 수리하지 않아도 옛일은 오히려 생각할 만하다. 길은 더욱 황폐해지고, 중들은 날로 드물어져서, 이 산에 매몰된 것이 삼백 년이 되었다. 성하고 쇠함이 진실로 운수의 일이구나! 이 때문에 방황하면서 떠날 수 없었고, 초연히 속세를 떠날 생각이 들 뿐이다.

 

1) 화국(和國): 일본의 옛 이름.

2) 번영(樊英): 후한 남양(南陽) 노양(魯陽) 사람. 자는 계재(季齋). 경씨역학(京氏易學)을 익혔고 오경(五經)에도 밝았다.

3) 충방(种放, ?~1015): 도서학(圖書學)으로 알려진 사람.

4) 기영(箕穎): () 임금 때 허유가 기산(箕山)에 숨어 영수(穎水(에 귀를 씻은 고사.

5) 허유(許由): 고대 중국의 전설상의 인물. 자는 무중(武仲)이다. () 임금이 왕위를 물려주려 하였으나 받지 않고 기산(箕山)에 들어가 은거하였으며, 또 자신을 구주(九州)의 장()으로 삼으려 하자 그 말을 듣고 자기의 귀가 더러워졌다며 영수(潁水) 강물에 귀를 씻었다고 한다.

6) 무광(務光): 황제 혹은 요임금 때의 선인(仙人). 은의 탕왕이 만년에 왕위를 물려주겠다고 했을 때 돌을 업고 강물에 들어가 버렸다.

 

直春川府北昭陽之水貫焉 㴑流行且四十里 其名山曰淸平 輿地考曰 洞壑泉石之美 嶺西罕有 春之號山水邑以淸平故 淸平古慶雲也 新羅末釋承玄 自唐還作普賢院 是爲文殊寺 高麗之際 希夷處士李氏資玄者 隱其中 三十七年 淸淨守道 人與物俱化之 山無盜賊 谷藪屛猛獸 故改名以淸平 志實也 聞性之堂見性之庵及夫仙洞息庵閒燕之所也 庵之下石二窪舊時盥盆也 庵之左瓦缶而函者瘞遺骸也 洞鐫仙洞息庵四字手蹟也 府誌盖如此 而院有遺墟碣 金富轍爲之記而希夷之徒坦然書之 其文有互出者 承玄作永賢 寶賢作普賢 普賢之前有白巖院 實永賢所刱也 普賢刱於宋熙寧元年本州使李凱 因白巖故基而設置也 文殊希夷子易之 希夷凱之子云 富轍當時人識其事頗詳足徵也 其府誌之訛乎 逮元人崇佛藏經于寺銘之碑 益齋之文杏村筆也 懶翁高禪也 住此山者久 寂而浮圖存焉 入本朝妖僧普雨興工役重建 沁都之石和國之丹漆窮壯麗 無度院之始末也 別院曰細香院者淸寒子之逃世也嘗居之 佛寶曰養神庵者在芙蓉峰側 今俱廢 鶴燈卵鏡鐵杖 鐵杖懶翁物也 八松臺在谷口 兄弟瀑次之 石二級級數丈 級間稱龍潭 級上下分兩行懸流 若比肩焉 西川據一山之中 瀑之上流也 芙蓉峰最高峻而影池寺門前也 深不能尺方不能十步 旱之不縮 霪亦無以加焉 其水淸澈 空明而見性庵從半山裏瀉影一草可辨 由是得其稱 夫大嶺以西 山莫尊於寒溪 水莫盛於谷雲 而是山甲乙者 豈水石云乎 高士尊宿之蹟爲獨多也 地以人名不其然乎 然而希夷 史臣多貶之 比之樊英之盜虛名 种放之累晩節 信斯言也 箕潁可羞也 退溪李先生獨序列之 辨史誣而表章其賢 繫以詩曰 東韓隱逸誰修傳 莫持微疵屛白珩 盖嗟惜之也 太史公云 伯夷雖賢得夫子而名益彰 又曰由光義至高其文辭不少槪見 希夷之見稱于光幸矣 近代隱居者尙矣 永賢懶翁之徒亦不可得而見歟 山川未嘗變也 寺院碑碣雖殘毁不復葺古事猶可想 路愈荒緇徒日以鮮少 使玆山埋沒者三百年 于玆盛衰固氣數歟 爲之彷徨而不能去 悄然有曠世之思云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