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의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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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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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 용문사 회전문
상세정보
1) 개요
신라 선덕여왕 때 당나라 태종의 딸인 평양공주가 있었는데 청년이 그를 사랑하였다고 한다. 이에 황제는 일반 백성인 청년이 황제의 딸을 사랑하다는 노여움을 받아 처형되었다. 청년은 죽어서 뱀으로 변해 공주의 몸에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상사뱀의 이름은 이런 이유로 생기게 되었다). 황제는 점술가와 의원을 불러 치료를 부탁하였으나 모든 방법이 듣지 않았다. 또한 중국의 여러 사찰을 돌며 부처님께 빌어 보았으나 효험이 없자 신라에서 온 스님에게 말을 듣고 신라의 산하를 두루 다녔다. 그렇게 다니던 중에 청평사에 도착한 공주는 공주굴에서 하룻밤을 지낸 뒤 아침 종소리를 듣고 뱀에게 절에 가서 밥을 얻어 올 테니 기다려 달라고 하였다. 그런데 그동안 공주의 몸에서 떨어지지 않던 상사뱀이 공주의 몸에서 떨어져 공주는 절로 올라 갔다. 마침 절에서는 가사불사를 하고 있었는데 공주는 공주탕에서 목욕재계를 하고 가사에 서너 바늘을 든 다음 법당에 들어가서 염불을 하고 있었다. 가다리다 지친 상사뱀이 공주를 찾아 정문을 두러가려 할 때 뇌성벽력과 함께 소나기가 쏟아져 물에 떠내려가고 말았다. 후세 사람들은 이 문을 회전문이라 부르게 되었다, 공주가 밥을 얻어 동굴로 돌아와 보니 상사뱀이 죽어 폭포에 떠 있었다. 공주는 시원하기도 하고 가련하기도 하여 청년의 화신인 상사뱀을 묻어 주고 이 사실을 본국에 알렸다. 당나라 태종은 재상 저수량에게 공주 혼인 때 쓰려고 비축해 두었던 금덩어리 세 개를 주어 화려한 법당을 세우게 하였다. 저수량은 금 한 개로 법당과 공주 이궁 및 저수량 봉교서비를 세우고 또 한 개는 장차 중건할 때 쓰라고 어디에 묻었으며 나머지 한 개는 공주의 귀국 여비로 주고 떠났다. 공주는 구성폭포 위에 삼층석탑을 세워 부처님 공덕을 찬양하고 귀국하였다. 그런 이유로 이 탑을 공주탑이라고 한다. 이로 말미암아 신라와 당나라는 급속히 친밀해져 삼국통일에 큰 기여를 하였다.

2) 설화의 진실과 허구

설화란 반드시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허구에서 출발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공주설화는 어디까지 사실이고, 어디까지 허구인가라는 의문이 남는다. 공주설화는 청평사의 연기(緣起)설화인데 대강을 짧게 정리하면 이렇다.

당나라 태종의 딸인 평양공주를 평민의 청년이 사랑하자 황제는 청년을 처형하고 처형된 청년은 상사뱀이 되어 공주의 몸에 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이에 황제는 공주를 신라의 청평사로 보내서 사랑의 병을 치유하게 한다. 공주의 몸에 붙은 상사뱀과 함께 청평사에 온 평양공주는 공주탕에서 목욕재계를 한 후 옷을 만드는 가사불사를 하고 염불로 공덕을 쌓자 상사뱀은 죽어서 해탈을 하여 공주는 상사뱀으로부터 해방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이는 이렇게 생각된다. 원나라 태정제의 부인이 청평사에 대장경과 돈을 보내 청평사를 번창하게 했고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문수사장경비를 세우는 일이 공주설화가 생겨나게 되는 계기가 된 것이 아닌가 한다.

공주설화에 등장하는 여러 화소를 보면 당나라 태종은 원나라 태정제이고 평양공주는 태정제의 부인이라고 생각된다. 금덩이를 가져온 저수량은 왕희지 글씨를 모은 당나라 태종대의 명필가인데 청평사의 문수원기는 대감국사 탄연이 왕희지체로 쓴 유명한 비석이다. 이로 인하여 탄연의 글씨로 인하여 저수량이 등장하게 되고 고려시대 건립된 3층석탑이 공주탑이 되었으며 자연적으로 생긴 서천계곡 자연암반의 원통형 바위홈이 공주탕으로 된 것으로 보인다. 상사뱀이 공주의 가사불사 공덕으로 윤회를 벗어나 해탈하였다는 회전문은 부석사·대승사·용문사와 같이 윤장대가 있는 사찰의 중문이 회전문이었던 것을 화소로 삼았다. 가사불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