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의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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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정보

 청평산(淸平山) 일명 경운산(慶雲山)이라고 한다. 부의 동쪽으로 44리에 있다. 고려 때 이자현(李資玄)(1)이 이 산에 들어와 문수원(文殊院)(2)을 짓고 살았다. 무척이나 선설(禪說)을 좋아하여 골짜기 안의 그윽하고 외진 곳에 식암을 지었다. 둥글기가 마치 고니 알 같았고 겨우 두 무릎을 움츠릴 정도였는데, 그 가운데 앉아 수개월 동안이나 나오지 않았다. 과거를 함께 급제한 곽여(郭璵)(3)가 부절(符節)(4)을 지니고 관동(關東)으로 와 방문하고 시(詩)를 주기를,

청평(淸平)의 산수는 상수(湘水)(5)의 물가와 같은데 / 淸平山水似湘濱

우연히 옛 사람을 만나 보는구나. / 邂逅相逢見故人

삼십 년 전 우리는 함께 급제하였는데 / 三十年前同擢第

이제 천리 밖에서 따로 깃들고 있노라. / 一千里外各棲身

뜬 구름처럼 골짜기에 들어오더니 세상 일이 없고 / 浮雲入洞曾無事

밝은 달이 냇물을 상대하니 티끌에 물들지 않노라. / 明月當溪不染塵

말없이 오래 거처하는 곳을 바라보니 / 目擊無言良久處

담담하게 옛 정신이 비추어 오노라. / 淡然相照舊精神

라고 했다.

 자현이 화답하기를,

따뜻함이 시내와 산을 두루 돌면서 봄이 돌아왔는데 / 暖遍溪山暗換春

문득 신선 지팡이 짚고 은둔자를 방문하였네. / 忽紆仙仗訪幽人

백이(伯夷)와 숙제(叔齊)(6)가 세상 피한 것은 천성 보존함이요 / 夷齊遁世唯全性

직(稷)(7)과 설(契)(8)이 나라 일에 부지런함은 자신 위해서 아니었네 / 稷契勤邦不爲身

조서(詔書)를 받들고 온 이 때 옥패물(玉佩物)이 쨍그랑 거리나. / 奉詔此時鏘玉佩

어느 날 관을 걸어 두고 옷의 티끌을 떨쳐 버릴는지 / 掛冠何日拂衣塵

어느 때나 이곳에서 함께 은둔하면서 / 何當此地同棲隱

종래의 사그러지지 않는 정신을 길러나 볼까 / 養得從來不死神

라고 했다.

 

문수사(文殊寺) 청평산(淸平山) 아래에 있는데, 곧 이자현(李資玄)이 살던 곳이다.  고려 때 김부철(金富轍)(9)의 기문(記文)에,

“춘주(春州)의 청평산이라는 것은 옛날의 경운산(慶雲山)이며, 문수원(文殊院)이라는 것은 옛날의 보현원(普賢院)이다. 당초 선사(禪師) 승현(承賢)이 당나라로부터 신라로 와서 광종(光宗) 24년(973)에 경운산으로 들어와 절을 짓고는 백암선원(白巖仙院)이라 했다. 당시는 송(宋)의 개보(開寶) 6년이었다. 문종(文宗) 23년(1059) 무신년(戊申年)에 좌산기상시추밀원사(左散騎常侍樞密院事) 이두(李頭)(10)가 춘주도(春州道) 감창사(監倉使)(11)가 되었는데, 경운산의 빼어난 경치를 사랑하여 백암선원의 옛터에다 절을 짓고 보현원이라 했다. 당시는 송의 희녕(熙寧) 원년(元年; 1068)이었다. 그 뒤에 희이자(希夷子)(12)가 벼슬을 버리고 여기에 은거하니 도적이 그치고 호랑이와 이리가 자취를 감추었다. 이에 산은 청평산(淸平山)으로, 원은 문수원(文殊院)으로 고쳐 부르고 지붕을 수리하였다. 희이자(希夷子)는 곧 이공(李公)의 장남(長男)으로 이름은 자현(資玄), 자는 진정(眞精)인데, 모두 37년 동안 이 산에 살았다”고 한다.

 

  원나라 태정황후(泰定皇后)(13)가 승려 성징(性澄)과 윤견(允堅)이 바친 불경을 이 절에 소장토록 하였다. 이제현(李齊賢)(14)이 왕명을 받들어 지은 비명(碑銘)에, ”태정(泰定) 4년(1327) 3월 경자(庚子)에 첨의정승(僉議政丞) 신(臣) 흡(恰) 등이 궁중의 알자(謁者)를 시켜 왕에게 복명(復命)하기를, ‘천자의 근신(近臣)인 사도(司徒) 강탑리중(剛塔里中)과 정원사(政院使) 홀독첩목아(忽篤帖木兒)가 황후(皇后)의 명령을 받고 와서 승려(僧侶) 성징(性澄)과 시인(寺人) 윤견(允堅) 등이 바친 불경 한 질을 청평산 문수사에 귀속시키고, 돈 일만 냥을 보시(普施)하여 그 이자를 가지고 황태자(皇太子)와 황자(皇子)의 복을 빌고, 각각 그 탄신일(誕辰日)에 승려들에게 음식을 먹이고, 불경을 열람하게 하는 것을 세세(世世)의 범례로 하게 하셨습니다. 또 비(碑)를 세워 이를 영구(永久)하게 하는 뜻을 보이라 하셨습니다. 신(臣) 등이 생각하건대, 불법(佛法)이 중국(中國)에 유입된 이래 세대에 따라 융성하기도 하고 침체하기도 한 것이 천여 년이나 되었습니다. 황조(皇朝)에서는 ’불도(佛道)가 무위(無爲)를 종지(宗旨)로 삼는 것이 성인(聖人)의 이치에 부합하고, 널리 구제하는 것을 마음으로 삼는 것이 인정(仁政)에 도움이 된다‘하여 매우 돈독하게 존숭하고 신봉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미 전거(傳車)(15)로서 불경을 수천 리 떨어진 궁산(窮山)에까지 수송하였으며, 또 자산(資産)을 세워 그 무리들을 후족(厚足)하게 하였으니, 이는 불자(佛者)에 있어서도 다행한 일입니다. 천하에 명산(名山)과 복지(福地)가 적지 않지만 우리나라를 비천하게 여기지 않고 복을 비는 장소를 마련하였으니, 이는 불자의 다행일 뿐만 아니라 저희나라의 다행이기도 합니다. 장차 이를 대서(大書)하고 특서(特書)하여 영원토록 가르치고 빛내야 할 것입니다. 하물며 황후 (皇后)의 유지(有旨)가 있었으니 감히 공경스럽게 받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집필자(執筆者)에게 맡겨 사실을 기록할 것을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신(臣)아무개에게 명(銘)을 지을 것을 명하니 신(臣) 아무개가 명(銘)을 짓기를, ’거룩하신 대원(大元)이여, 이미 대대로 인정(仁政)을 펴니, 봄날의 볕과 같고 단비와 같아 천하의 만물이 생성한다. 금선(金仙)(16)이 무위(無爲)를 교화로 한 것을 그리워하여, 그 흙과 풀을 써서 중생을 이롭게 하고 포악함을 막았도다. 이를 존숭하고 공경하되 후히 그 무리들을 복호(復戶)(17)하여, 부역(賦役)과 세금을 면해주고 오로지 불서(佛書)를 익히게 하였도다. 불서는 천 상자에 달해 넓기가 안개 낀 바다와 같은데, 정묘(精妙)하기는 호리(毫釐)(18)를 쪼개듯 하고 넓기는 천지를 포괄하듯 하였도다. 율(律)은 계(戒)를 따라 서고 논(論)은 정(定)에서 나왔는데, 오직 불경을 연통(演通)하고 오직 지혜를 밝혔도다. 타고 온 저 규헌(犪軒)(19)은 양거(羊車), 녹거(鹿車)보다 우뚝하고, 그 향기가 훈훈하여 온 산에 담복화(薝蔔花) 향이 가득하도다. 천축(天竺)(20)에서 모은 이는 섭(葉)(21)과 난(難)(22)이며, 중국에 전파한 이는 등(藤)(23)과 난(蘭)(24)이었네. 양(梁) 나라에서는 쭉정이를 취하였지만 우리는 곡식을 맛보았고, 당(唐)에서는 돌이라 했지만 우리는 옥을 캐내었네. 성징과 윤견은 복장(服裝)은 다르지만 마음은 같아, 불경을 완성하여 준공을 아뢰었네. 황후가 가상히 여기고 간직할 곳을 도모하기를, 삼한(三韓)은 선한 것을 즐기고 의리를 돈독히 하고, 지금의 왕은 우리에서 나온 우리의 외손이니, 복을 빌어 황제에 보답할 그 정성을 믿는다 하고, 이 나라 동쪽에 있는 청평산의 문수사가 험하다고 꺼리지 않고 역(驛)을 통하여 보시(普施)하시었네. 내탕고(內帑庫)(25)의 돈을 풀어 중들을 먹여 살리고, 왕과 신하들에게 부탁하여 오래도록 지켜지게 했네. 임금은 절을 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천자의 만세(萬歲)를 부르고, 천자와 황후가 해로(偕老)하고 근본과 지엽(枝葉)이 백세를 누리기를 기원했네. 제잠(鯷岑)(26)에 토대가 이그러져 접해(鰈海)(27)에서 먼지가 날지라도, 공덕(功德)이 모여 손상되지도 않고 추락하지도 않으리라”고 했다.

 

 

1) 이자현(1061~1125): 본관 인주(仁州). 호는 식암(息庵)·청평거사(淸平居士)·희이자(希夷子) 등이다. 1089년 과거에 급제하여 대악서승(大樂署承)이 되었으나, 관직을 버리고 춘천의 청평산(淸平山)에 들어가서 아버지가 세운 보현원(普賢院)을 문수원(文殊院)으로 고치고 당(堂)과 암자(庵子)를 짓고는 안빈(安貧)으로 일관했다. 시호는 진락(眞樂)이다.

2) 김부철(金富轍)의 기문(記文)에 따르면, 청평산의 고명(古名)은 경운산이며, 문수원의 고명(古名)은 백암선원(白巖仙院)·보현원(普賢院)이었다. 백암선원은 선사(禪師) 승현(承賢)이 당나라로부터 신라로 와서 광종(光宗) 연간에 지은 것이고, 보현원은 이자현의 부 이의(李顗)가 춘천에 감창사(監倉使)로 와서 지은 것이다. 이후 이자현이 청평산(淸平山)에 입거하면서 보현원을 문수원(文殊院)으로 경운산을 청평산으로 개칭하였다.

3) 곽여(1058~1130). 본관은 청주(淸州), 호는 동산거사(東山居士), 시호는 진정(眞靜)이다.

4) 조선왕조 때 감사(監司), 유수(留守), 대장(大將), 병사(兵使), 통제사(統制使) 등이 지방으로 부임할 때 신임의 표시로 내려주던 수기(手旗)를 말한다.

5) 상강(湘江)이라고도 한다. 호남성(湖南省) 최대의 강.

6) 상(商)나라 동북방에 위치하고 있던 고죽국(孤竹國)의 왕자. 전해오는 바에 따르면, 선군(先君)이 생전 동생인 숙제에게 왕위를 물려주고자 하였는데, 사후 숙제와 백이 모두 왕위를 서로에게 사양하다가 결국 둘 다 주(周)나라로 도망하였다 한다. 주무왕이 상나라의 주왕(紂王)을 토벌하려 하자 말고삐를 잡고 만류하였고, 주무왕이 상나라를 멸망시키자 수양산(首陽山)에 들어가 고사리를 뜯어 먹으며 살다 죽었다 한다. 지조와 절개를 상징하는 인물로 전통시대 자주 언급되었다.

7) ​오곡(五穀)의 신. 한(漢)나라 채옹(蔡邕)의 『독단(獨斷)』상에 “직이 오곡의 최고인 까닭에 직으로서 신의 이름을 삼았다(以稷五穀之長也, 因以稷名其神也)”라고 되어 있다.

8) 상족(商族)의 시조인 제곡(帝嚳)의 아들. 우순(虞舜)의 신하로서 치수(治水)하는 데에 공을 세워 사도(司徒)가 되었다.

9) 김부철(1079~1136): 김부식(金富軾)의 아우로 1097년 문과에 급제했다. 그는 특히 문장에 뛰어나 문한직을 주로 담당하였다. 1134년 형 김부식과 함께 묘청 등의 서경천도를 극히 반대하였고, 이듬해 묘청의 난을 평정하여 금대를 하사받았다. 시호는 문의(文懿)이다.

10) 頭는 顗의 오자다.

11) 감창사(監倉使): 고려 양계(兩界)에 두었던 관직으로 매년 봄, 가을 두 차례 파견되었다. 대체로 창고와 조세를 관리하였다.

12) 희이자(希夷子): 이자현의 호이다.

13) 태정황후(泰定皇后): 원나라 진종(晉宗)의 황후이다. 고려의 광주(光州) 사람으로 화평부원군(和平府院君) 김심(金深)의 딸이다.

14) 이제현(李齊賢, 1287~1367): 고려 후기의 학자, 정치가. 본관은 경주, 초명은 지공(之公), 자는 중사(仲思), 호는 익재(益齋)·역옹(櫟翁)이다. 공민왕(恭愍王)의 묘정(廟廷)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15) 전거(傳車): 역마(驛馬)와 같은 말이다.

16) 금선(金仙): 석가여래(釋迦如來)의 미칭이다.

17) 복호(復戶): 호(戶)에 부과하는 요역(徭役)을 감면해 주는 제도.

18) 호리(毫釐): 원래 자(尺)의 눈 또는 저울 눈의 호와 리를 말한다. 매우 적은 분량 또는 짧은 거리의 의미로 쓰인다.

19) 규헌(犪軒): 소가 끄는 초헌(軺軒)이다. 불가에서는 우거(牛車), 녹거(鹿車), 양거(羊車)를 삼거(三車)라고하여 대승(大乘), 중승(中乘), 소승(小乘)에 비유한다.

20) 천축(天竺): 중국에서 이르는 인도(印度)의 고칭이다.

21) 섭(葉): 석가의 십대 제자의 한 사람으로 석가가 죽은 뒤 불교의 장로(長老)가 된 가섭(迦葉)을 말한다.

22) 난(難): 석가의 종제(從弟)이며 십대 제자의 한 사람인 아난(阿難)을 말한다. 그는 견문이 넓고 기억력이 뛰어나 석가가 죽은 뒤 경전의 대부분이 아난의 기억에 의해 수집되었다.

23) 등(藤): 인도(印度)의 고승인 가섭마등(迦葉摩騰)을 말한다. 후한 때 명제(明帝)의 요청으로 중국에 와서 불경을 번역했다.

24) 난(蘭): 인도의 고승인 축법란(竺法蘭)을 말한다. 후한 명제(明帝)의 요청으로 중국에 와서 불경을 번역했다.

25) 내탕고(內帑庫): 황실(皇室)의 재산과 재물을 관리하는 황실 직속 창고.

26) 제잠(鯷岑): 우리나라의 별칭이다.

27) 접해(鰈海): 한국의 근해(近海), 즉 우리나라를 말한다.

 

淸平山。一名慶雲山。在府東四十四里。○高麗李資玄。入此山。葺文殊院以居之。尤耆禪說。於洞中幽絶處。作息菴。團圓如鵠卵。只得盤兩膝。黙坐其中。數月猶不出。其同年郭璵。持節出關東。訪之贈詩云。淸平山水似湘濱。邂逅相逢見故人。三十年前同擢第。一千里外各栖身。浮雲入洞曾無事。明月當溪不染塵。目擊無言良久處。淡然相照舊精神。資玄和云。暖遍溪山暗換春。忽紆仙仗訪幽人。夷齊遁世唯全性。稷契勤邦不爲身。奉詔此時鏘玉佩。掛冠何日拂衣塵。何當此地同棲隱。養得從來不死神。

 

在淸平山下卽李資玄所居 ○ 高麗金富轍記 春川淸平山者 古之慶雲山而文殊院者 古之普賢院也 初禪師承玄 自唐來新羅 至廣廟二十四年 始來于慶雲山 創蘭若曰白禪院 時大宋開寶六年也 至文廟二十三年 歲在戊申 故左散騎常侍知樞密院事李公爲春州道監倉使 愛慶雲勝景 乃卽白之舊址 置寺曰普賢院 時熙寧元年也 其後希夷子 棄官隱居于玆 而盜賊寢息虎狼絶迹 乃易山名曰淸平 院名曰文殊 而仍加營葺 希夷子卽李公之長男 名資玄字眞精 住山凡三十七年云云 ○元泰定帝皇后, 以僧性澄, 寺人允堅等, 進佛經藏于此寺, 李齊賢奉王旨撰碑曰

 

泰定四年三月庚子, 僉議政丞臣恰等, 令中謁者, 復于王曰, 天子之近臣, 司徒剛塔里, 中政院使忽篤帖木兒, 受命天子之后, 伻來以僧性澄, 寺人允堅等, 所進佛書一藏, 歸諸淸平山文殊寺, 施緡錢萬, 令取其息, 爲皇太子皇子祈福, 各取其誕辰, 飯僧閱經, 歲以爲凡, 且曰, 樹碑, 以示永久, 臣等窃惟佛法入中國, 隨世興替, 且千餘歲, 皇朝謂其道無爲爲宗, 有契乎聖理, 廣度爲心, 有補于仁政, 尊信之尤篤, 今旣以傳車, 輸其書數千里窮山之中, 又立食本, 以贍其徒, 斯乃佛者之幸也, 名山福地, 在天下不爲少, 不鄙弊邑, 爰置祝釐之所, 斯則非惟佛者之幸, 亦弊邑之幸也, 將大書特書, 誇耀無極, 況中宮有旨, 敢不祗承, 請付執筆者, 以記, 於是, 命臣某銘, 其銘曰, 於皇有元, 旣世以仁, 陽春時雨, 亭毒九垠, 乃眷金仙, 無爲爲敎。用其土苴, 利生禁暴。是崇是敬, 厚復其徒。不徭不賦, 顓習其書。其書千函, 浩若烟海, 妙析毫釐, 廣包覆載, 律繇戒立, 論自定興, 維經之演, 維慧之明, 路彼犪軒, 卓乎羊鹿, 載薰其香, 一林薝蔔。俶裒于竺, 曰葉與難。俶播于震, 曰騰與蘭, 梁取其秕, 我嚌維穀, 訾石者唐, 我割維玉。伊澄伊堅, 服異心

同。旣成法寶, 以奏爾功。天后爾嘉, 載謀之地。(東文選作之), 曰惟三韓, 樂善敦義。維時維王, 我出我甥。祝釐報上, 允也其誠。于國之東, 文殊之寺。(東文撰作山), 毋憚阻脩, 置郵往施。發緡內帑, 俾轉食輸, 可繼以守, 諉王曁臣。王拜稽首, 天子萬歲, 天后是偕, 本支百世。鯷岑石爛, 鰈海塵飛。維功德聚, 不騫不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