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의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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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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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평산(淸平山) 일명 경운산(慶雲山)이라고 한다. 부의 동쪽으로 44리에 있다. 고려 때 이자현(李資玄)(1)이 이 산에 들어와 문수원(文殊院)(2)을 짓고 살았다. 무척이나 선설(禪說)을 좋아하여 골짜기 안의 그윽하고 외진 곳에 식암을 지었다. 둥글기가 마치 고니 알 같았고 겨우 두 무릎을 움츠릴 정도였는데, 그 가운데 앉아 수개월 동안이나 나오지 않았다. 과거를 함께 급제한 곽여(郭璵)(3)가 부절(符節)(4)을 지니고 관동(關東)으로 와 방문하고 시(詩)를 주기를,

청평(淸平)의 산수는 상수(湘水)(5)의 물가와 같은데 / 淸平山水似湘濱

우연히 옛 사람을 만나 보는구나. / 邂逅相逢見故人

삼십 년 전 우리는 함께 급제하였는데 / 三十年前同擢第

이제 천리 밖에서 따로 깃들고 있노라. / 一千里外各棲身

뜬 구름처럼 골짜기에 들어오더니 세상 일이 없고 / 浮雲入洞曾無事

밝은 달이 냇물을 상대하니 티끌에 물들지 않노라. / 明月當溪不染塵

말없이 오래 거처하는 곳을 바라보니 / 目擊無言良久處

담담하게 옛 정신이 서로 비추어 오노라. / 淡然相照舊精神

 

 

○ 자현이 화답하기를,

따뜻함이 시내와 산을 두루 돌면서 봄이 돌아왔는데 / 暖遍溪山暗換春

문득 신선 지팡이 짚고 은둔자를 방문하였네. / 忽紆仙仗訪幽人

백이(伯夷)와 숙제(叔齊)(6)가 세상 피한 것은 천성 보존함이요 / 夷齊遁世唯全性

직(稷)(7)과 설(契)(8)이 나라 일에 부지런함은 자신 위해서 아니었네 / 稷契勤邦不爲身

조서(詔書)를 받들고 온 이 때 옥패물(玉佩物)이 쨍그랑 거리나. / 奉詔此時鏘玉佩

어느 날 관을 걸어 두고 옷의 티끌을 떨쳐 버릴는지 / 掛冠何日拂衣塵

어느 때나 이곳에서 함께 은둔하면서 / 何當此地同棲隱

종래의 사그러지지 않는 정신을 길러나 볼까 / 養得從來不死神

 

 

○ 퇴계(退溪) 선생이 청평산을 지나면서 ‘회청평산인유감시(懷淸平山人有感詩)’를 지으니,

산협 사이 감도는 물 잔도는 구불구불 / 峽束江盤棧道傾

홀연히 구름 밖에 맑은 시내 흐르네 / 忽逢雲外出溪淸

지금까지 사람들이 여산사를 말하는데 / 至今人說廬山社

이곳에서 그대는 곡구 밭을 갈았다네 / 是處君爲谷口耕

허공 가득 하얀 달에 그대 기상 남았는데 / 白月滿空餘素抱

맑은 이내처럼 자취 없이 헛된 영화 버렸구나 / 晴嵐無跡遣浮榮

우리나라 은일전(隱逸傳)을 누가 지어 전하려나 / 東韓隱逸誰修傳

조그만 흠 꼬집어서 흰 구슬을 타박 말라 / 莫指微疵屛白珩

가정(嘉靖) 임인년 8월 재상어사(災傷御使)일 때 짓다.

 

 

○ 이주(李冑)의 시에,

진락(眞樂)(9)이 일찍 놀던 땅 / 眞樂曾遊地

문수도 하늘에서 살진 않았네 / 文殊不住天

객이 와서 세속의 생각을 잊으니 / 客來休俗念

비로소 잠깐에 선을 깨닫네 / 始覺片時禪 

 

청평계(淸平溪)는 물의 근원이 경운산에서 나온다. 반석(盤石), 팔송대(八松臺), 용담폭포(龍潭瀑布), 서천(西川), 선동(仙洞)은 모두 절승이요 경관이 기이한 곳이다.

 

청평사(淸平寺)는 청평산 아래에 있다. 문정대비(文定大妃) 때 승 보우(普雨)가 문수원(文殊院)을 중수하였는데, 그 옛 제도는 더욱 높고 커졌으며 그 넓고 화려함이 지극하였다. 이름을 고쳐 경운산만수성청평선사(慶雲山萬壽聖淸平禪寺)라 하고, 법전의 이름은 능인전(能仁殿)이라 하였다. 전의 동쪽에는 구광전(九光殿)과 사성전(四聖殿)이 있는데, 구광전은 일월성신을 그려서 벌여 놓았으며, 사성전에는 유불선도(濡佛仙道)의 네 가지 책을 가져다가 수장해 놓았다.

고려 김부철(金富轍)의 기에, “춘주의 청평산은 옛날의 경운산이며, 문수원은 옛날의 보현원(普賢院)이다. 처음에 선사 승현(承賢)이 당나라로부터 신라로 왔다. 광묘 24년에 처음 경운산에 와서 난야(蘭若)을 창건하고 백암선원(白巖仙院)이라 하였다. 때는 대송 개보(開寶) 6년이다. 문종 23년 무신년에 고 좌산기상시추밀원사(左散騎常侍樞密院事) 이의(李顗)가 춘주도감창(春州道監倉)이 되었는데 경운산의 경치를 사랑하여 이에 곧 백암의 옛 터에 절을 짓고 보현원이라 하였다. 때는 희녕(熙寧) 원년이다. 그 후 희이자(希夷子)가 관직을 버리고 여기게 은거하니 도적이 없어지고 호랑이와 이리도 자취가 끊어졌다. 이에 산 이름을 바꾸어 청평이라 하였으며 원의 이름은 문수라 하고 집을 더 지었다. 희이자는 곧 이공의 장남으로 이름은 자현(資玄)이고, 자는 진정(眞精)이며, 산에 머무른 지 모두 37년이라고 한다. 대송 건염(建炎) 4년 경술년 11월 일, 문인(門人) 정국(靖國)이 안화사(安和寺)에서 법을 전하고, 사문(沙門) 탄연(坦然)(10)이 썼으며, 문인 계주(繼住 )가 법을 전하고, 사문 조원(祖遠)이 세웠으며, 문인 대사 지원(知遠)이 글자를 새기다.

 

원(元) 태정(泰定) 연간에 제황후(帝皇后)가 중 성징(性澄)과 시인(寺人)(11)윤견(允堅) 등으로 청평사에 불경을 바치고 보관하게 했다. 이제현이 왕의 명을 받들어 비를 지었는데 다음과 같다.

태정(泰定) 4년 3월 경자일에, 첨의정승(僉議政丞) 신(臣) 흡(恰) 등이 중알자(中謁者)로 하여금 임금께 복명하기를, “원 나라 천자의 근신(近臣) 사도 강탑리(司徒剛塔里)와 중정원사 홀독 첩목아(中政院使忽篤帖木兒)가 천자의 황후로부터 명령을 받고 사람을 보내와서, ‘중 성징(性澄)과 시인(寺人) 윤견(允堅) 등이 진공(進供)한 불서(佛書) 한 벌을 청평산(淸平山) 문수사(文殊寺)에 바치고, 꿰미 돈 만금(萬金)을 시주하여 그 이식(利息)을 받아쓰게 하되, 황태자의 황자(皇子)를 위하여 복을 빌게 하고, 각각 그들의 생신날을 택하여 중들에게 음식 대접을 하며, 경(經)을 열독(閱讀)하게 하는 것을 매년의 행사로 하라’ 하시고, 또 말하기를, ‘비석을 세워서 영구히 보이라’ 하였습니다. 신 등이 가만히 생각하오니, 불법이 중국에 들어와 시대에 따라 성하고 쇠하여 가면서 천여 년이 되었습니다. 중국의 조정에서는 그 도(道)가 무위(無爲)로 으뜸을 삼는 것이 성인의 다스림에 부합됨이 있으며, 널리 제도(濟度)하려는 마음을 먹는 것이 어진 정치에 도움이 있다고 하여 높임과 믿음이 가장 돈독합니다. 이제 이미 전거(傳車)로써 그 경(經)을 수 천리 밖 깊은 산중에 수송하고, 또 먹고 살 근본이 되도록 원금(元金)을 적립하여 그 무리들의 생활을 넉넉하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곧 중들의 행복이옵니다. 이름난 산과 복된 땅이 온 천하에 적지 않건만 우리 고을을 더럽다고 하지 않고 이에 축복의 처소를 두었으니, 이것은 다만 중들의 행복만이 아니고, 또한 우리 고을의 행복입니다. 장차 대서특필하여 자랑하고 빛내기를 끝이 없게 하고자 합니다. 하물며 중궁(中宮)의 명령이 있었으니, 감히 공경하여 받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청하건대 붓 잡는 자에게 시켜서 기록하게 하소서.” 하였다. 이에 신 모(某)에게 명하시었다. 그 명에 이르기를, 성하신 원 나라가, 이미 대대로 어질게 세상을 다스리니, 따뜻한 봄철 맞은 비가, 구은의 만물을 화육하였다. 이에 부처의 도가, 무위로 가르침을 삼은 것을 돌보고, 그의 나머지를 써서, 삶을 이롭게 하고 사나움을 금하여, 이것을 숭상하며 공경하여, 그 무리까지 후하게 대우하여, 부역도 시키지 않고 세금도 부과하지 않으며, 오로지 그 글을 익히게 하였네. 불경은 1천 상자, 호한하기가 연기의 바다 같건만, 묘함은 터럭을 분석하고, 넓기는 천지를 덮네. 율은 계를 따라 성립되었고, 논은 정에서부터 일어났네. 경을 강연하고, 지혜로 밝히도다. 저 흰 소 수레를 타고, 양거(12)보다 녹거(13)보다도 우뚝 뛰어나네. 그 향기 찌는 듯하니, 온 숲이 담복이던가. 천축에서 처음 모이니, 가섭과 아난이 있었고, 진단(지나)에 처음 전파해 오니, 등과 난이 있었도다. 양 나라에선 쭉정이만 씹더니, 우리는 곡식을 맛보았네. 당에서는 돌인 줄 짐작하더니, 우리가 쪼갠 것은 옥이었네. 중 성징과 시인 윤견은, 옷은 다르나 마음은 같아서, 그들이 이미 법보(14)를 서사하고, 완성함을 주상하니, 황후가 가상하게 여기어, 봉안할 땅을 선택하여 말하기를, 삼한은 선을 즐겨하고 신의가 두터우며, 지금의 임금은 우리의 외손이니, 축희보상할 그의 정성을 믿는다. 청평산 문수사가 있으니, 길이 험하고 요원한 것을 꺼리지 말고, 우체를 통하여 싣고 가서 시주하라 하시고, 내탕의 돈을 내주어, 중들의 먹을 길을 열어 주게 하였네. 오래도록 계속하여 지킬 수 있도록, 국왕과 신하에게 맡기어 부탁하네, 국왕은 머리 조아려 절하면서, 천자만세 축수하시네. 천자와 국왕의 뜻을 같이 하시니, 본과 지는 백세에 흥왕하리다. 제잠(鯷岺)(15)의 돌이 닳아 없어질 때까지, 접해(鰈海)(16)에 물이 말라 먼지가 날릴 때까지, 공과 덕이 모여서 이 비석은 이지러지지도 넘어지지도 않으리라.

‘태정 4년 5월 일, 사문 신 성징과 봉사신 불화첩목아(不花帖木兒) 등이 비석을 세우고, 사문 신 계비(戒非)가 글자를 새기다’라고 하였다.

법정(法庭) 가까운 북쪽에 극락전이 있는데 또한 보우가 세운 것이다. 그 굉장히 화려하고 문체만은 비할 데가 없다. 황금을 써서 불좌를 조성하고, 집의 사면 기둥과 서까래는 모두 먼저 가는 모시로 짜고 다시 전체를 옻칠하고 마지막으로는 주홍으로 윤색하니 접촉하는 물상이 비치는 바 빛나는 것이 거울과 같았다. 당초의 물력(物力)의 비용을 어찌 헤아릴 수 있으리오. 법당의 남쪽에는 누각 하나를 세웠는데 강선각(降仙閣)이라 한다. 선왕 세 분의 위판을 여기에 봉안하였는데, 북쪽으로 불전을 향하고 있으며 이것도 곧 보우가 지은 곳이다. 그릇된 무리들이 허탄하고 망령되며 거만하고 버릇없이 굶이 심해도 말하는 이가 없었고, 90년 동안 무릇 (보우가) 천맹(賤氓)인지도 알지 못하였으며, 우부우부(愚夫愚婦)도 마음대로 출입하면서 절을 유희의 장소로 여기었으니, 식자들이 근심하지 않음이 없었다. 그러나 당초에 베푼 것은 비록 허탄하더라도 위호가 엄중하기 때문에 사사로이 혁파하지 못하고 지금 아직도 존재하기까지에 이르렀다. 요승의 해가 여기에 이르렀으니, 진실로 통탄할 만하다. 이절은 보우가 창설하고 살았는데 이름난 꽃과 이상한 풀들이 모두 궁원(宮苑)에서 옮겨다 심은 것이다. 한여름에는 대나무로 와상(臥床)을 만드는데 사면에 금환(金環)을 붉은 끈으로 매어놓고 그 속에 누우면 큰 놋쇠동이에 얼음을 채워서 비치게 하고, 네 사람이 일시에 들어서 네 모퉁이에 걸어놓아 벼룩이나 빈대가 침범하지 못하게 하였다. 무릇 스스로 받들고 드러내는 바가 이러하더니 얼마 안 있어 죄를 입어 제주의 유배 장소에서 장에 맞아 죽었다. 나옹철장(懶翁鐵杖)은 청평루 위 창고에 있다. 서향원(瑞香院)의 옛터는 영지(影池)의 서쪽 골짜기에 있는데 김시습이 살던 곳이다.

 

 

○ 이주의 시

내 매월당을 아노니 / 吾知梅月老

일찍이 이 산중에서 놀았네 / 曾遊此山中

혼이 있어 없어지지 않았다면 / 有魂如不滅

응당 노릉(魯陵)(17)과 통하리라 / 應與魯陵通

 

 

영지는 절 아래 1리에 있는데, 못물은 장마가 지고 크게 가물어도 늘지도 줄지도 않는다. 견성암(見性菴)은 먼 봉우리에 있는데 그림자가 비치며, 중이 지나가도 못 속에 있는 듯하였다. 고골(古骨)은 선동(仙洞)에 있는데 질그릇에 담았다. 그릇 속 네 모퉁이에는 건곤감리(乾坤坎离)의 괘(卦)를 새기고 주홍색으로 메워서 돌 사이에 갈무리하여 두었다. 전설에 이르기를, 진락의 유해는 정두원(鄭斗源)(18)이 방백일 때 기와와 벽돌에 명을 새기고 승 문옥(文玉)으로 하여금 개장하게 하였다고 한다.

 

[제영(題詠)]

 

 

○ 유영길(柳永吉)의 시

서쪽 개울에 봄 지나며 그윽한 정 기약하니 / 西溪春盡愜幽期

소나무와 바위의 맑고 기이함 시 속으로 들어오네 / 松石淸奇並入詩

배꽃 같은 산에 뜨는 달 기다리면서 / 直待梨花山月白

창 아래 자지 않고 쌍지(雙池)를 굽어보네 / 高窓不寐俯雙池

 

 

○ 이정형(李廷馨)(19)의 시

늙은 몸으로 네 아들을 데리고 / 老人携四子

흥을 따라 우연히 와서 노네 / 乘興偶來遊

가을이 늦어가니 단풍잎은 떨어지고 / 秋晩楓林脫

구름은 희미한데 돌길은 길구나 / 雲迷石路修

쌍폭 아래서 갓끈을 빨고 / 濯纓雙瀑下

영지 머리에서 산책을 하노라 / 散策影池頭

문득 청한자 생각나는데 / 却憶淸寒子

높은 발자취 멀어 짝할 수 없네 / 高蹤邈寡儔

 

어제 청평사에 와서 / 昨到淸平寺

오늘 선동암(仙洞庵)에서 노노라 / 今遊仙洞庵

진정(眞精)(20)은 간 지 이미 오래고 / 眞精去已久

텅 빈 감실엔 이슬만 가득하네 / 宿霧鎻空龕

 

 

○ 유몽인(柳夢寅)(21)의 시

아름다운 배필 구하려면 / 欲求宓妃聘

어찌 중매 버리리오 / 那舍謇修媒

일찍이 서향원(瑞香院) 보았으니 / 曾見瑞香院

진헐대(眞歇臺)에 부끄러움 없네 / 不慙眞歇臺

가을바람에 푸른 잎 시드니 / 金風凋翠葉

붉은 잎 흐르는 물에 옥 술잔 띄운다 / 紅澗泛瓊盃

말 몰아 바위 길 가기 피곤하다고 / 鹿馭疲岩逕

신선 놀이 재촉하지 마시게 / 仙遊且莫催 

 

○ 서천(西川)을 읊은 시

옥대는 얽히고설켜 늘어지다 끊기고 / 玉帶縈紆嚲截昉

기림(琪林)(22)은 그늘져 빛나는 구슬 숨기네 / 琪林掩翳秘明璫

산신령이 어찌 놀다간 객을 알리오만 / 山靈豈識曾遊客

검은 머리에 구월 서리 내렸네. / 烏首今添九月霜

 

 

○ 신상공(申相公) 흠(欽)의 시

게으른 손 절을 찾아 오르니 / 倦客尋初地

드높은 비탈 위에 절간이 있네 / 懸(23)崖闢梵盧

구름 속에 진락공(眞樂公)의 집이 트이고 / 雲開眞樂觀

신령한 용 열경(悅卿)의 글씨 보호해 / 龍護悅卿書

폭포수는 짚신을 뿌려 적시고 / 飛瀑沾芒屐

돌다리 대가마로 건너간다네 / 危矼住(24)筍輿

동산 위에 개인 달 둥실 떠올라 / 東林看(25)月上

하늘 그림자 텅 빈 못에 떨어져 / 天影落潭虛

 

 

○ 유숙(柳潚)(26)의 팔영시(八詠詩)

옛 절은 천상계에 있는 듯하고 / 古寺諸天界

낡은 비석엔 오묘한 글씨들 / 荒碑幼婦辭

향로봉에 구름 걷히자 / 香爐雲捲後

기수(琪樹)(27)에 달은 밝아 오고 / 琪樹月明詩

바람을 탄 종소리는 멀어 가자 / 風挾鍾聲遠

맑은 시내 물소리 나직이 들려오네 / 溪淸碓響遲

향을 태우며 방장(方丈)(28)에 앉아 / 燒香坐方丈

고요하게 쌍지(雙池)를 대하노라 / 寂寂對雙池 (청평사)

 

멀리 천 길의 벽을 보니 / 遙看千仞壁

중간에 두어 칸 암자가 있네 / 中有數間庵

청정(淸淨)은 구름 끝 먼 곳에서 일어나고 / 梵起雲端逈

등불은 거울 속 깊은 곳에서 빛나네 / 燈明鏡裡涵

얼음을 뚫고 동자는 물을 나르고 / 敲氷童子汲

눈에 막혀 늙은 중은 참선하네 / 閉雪老禪叅

소요할 땅에 이르자 / 得到逍遙地

뱁새 같은 삶 부끄럽구나 / 方知斥鷃慚 (견성암)

 

홀로 계문(薊門)(29)에서 휘파람 불며 / 獨發薊門嘯

진락공(眞樂公)을 찾아오니 / 來尋眞樂翁

신선은 옥동(玉洞) 속에서 살고 / 仙居玉洞裡

필적만 푸른 절벽에 남아 있네 / 筆跡翠岸中

학은 사라지고 찬 솔만 늙고 / 鶴去寒松老

중이 없어지고 옛 절은 비었네 / 僧殘古寺空

벼슬 그만두고 나무 아래서 잠깐 쉬다가 / 休官林下少

천 년의 고상한 풍모에 읍하네 /千載揖高風 (선동)

 

식암(息庵)이 여기서 쉬었으니 / 息庵息於此

만사가 뜬구름 같구나 / 萬事等雲浮

주위는 도(道)와 함께 고요하니 / 境與道俱靜

몸은 마음과 함께 쉬었네 / 身將心共休

하늘의 기미는 원래 고요하고 / 天機元寂寂

인간 세상은 부질없이 아득하구나 / 人世漫悠悠

내가 그 쉼을 배우고자 / 我欲學其息

벼슬 버리고 자연에서 노니네 / 投簪江海遊 (식암)

 

늘어선 산봉우리 서로 껴안듯 / 列峀勢如拱

아침마다 서천 물 내뿜네 / 來朝西澗濆

움푹 패인 곳 돌구멍을 만드니 / 窪樽開石竇

헌 장삼의 얼룩을 씻노라 / 壞衲洗雲紋

흐르는 물은 용같이 구비치고 / 流水龍屈曲

노니는 고기는 먹이를 잡아서 나누네 / 遊魚拖食分

꽃폈다고 골짜기서 나가게 하지 말아라 / 莫敎花出谷

세상 사람들이 들을까 근심이로다 / 愁殺世人聞 (서천)

 

사랑하노라 남지(南池)의 정결함을 / 爲愛南池淨

일찍이 몇 번이나 불탔던가 / 曾經幾刧灰

신선 돌아가니 세향원이 냉랭하고 / 仙歸香院冷

중이 가니 계수나무 꺾이네 / 僧去桂枝摧

고기떼는 꽃을 엿보러 나오고 / 魚隊窺花出

오리새끼는 비를 맞으며 오네 / 鳧雛帶雨來

부용봉 그림자가 있으니 / 芙蓉峯影在

몇 개 꽃 가지 심을 필요 없네 / 數朶不須栽 (남지)

 

여기와 노는 것이 어찌 그리 늦었는가 / 玆遊何太晩

아름다운 경치가 장차 다하려 하네 / 勝地勢將窮

구름이 고요하니 용은 구렁에 숨고 / 雲靜龍藏壑

우레 시끄러우니 폭포는 허공에 뿌리네 / 雷喧瀑灑空

일찍 듣기에 얼음기둥 있었더니 / 曾聞冰作柱

지금 보기에는 옥으로 궁을 만든 듯 / 要見玉爲宮

돌아가는 길에 시인 어깨 위로 높아지니 / 歸路詩肩聳

우거진 산봉우리 눈 속에 바람 부네 / 林巒雪裡風 (용담]

 

늘어진 소나무 곧게 섰는데 / 偃蹇松形直

너럭바위는 평평하구나 / 盤陀石勢平

맑게 흐르는 물은 가로로 흰 색이요 / 淸流橫練色

날아오르는 물거품은 옥을 부수는 소리라 / 飛沫碎珠聲

지친 나그네는 구름 사이에 앉고 / 倦客披雲坐

돌아가는 중은 달을 좇아가네 / 歸僧趁月行

참으로 계곡 위 학은 / 丁寧溪上鶴

나를 기억했다 다시 와서 보내네 / 記我更來迎 (반석) 

 

○ 조우인(曺友仁)(30)의 팔영시

움직이다 그치는 것을 고요하다 하는데 / 止勳之謂靜

공(空)과 색(色)은 본래 자취가 없네 / 空色本無跡

이 형상을 끝까지 관찰하니 / 觀破此形象

스스로 사람과 하늘의 안목이 있구나 / 自有人天目 (식암관정(31)(息庵觀靜))

 

 

한 송이 푸른 연꽃 / 一朶靑蓮花

물에서 낳어도 물에 집착하지 않네 / 生水不着水

묻노니 선정 중의 사람은 / 借問定中人

참으로 이것을 볼 수 있는지 / 眞能見得此(32) (견성입정(見性入定))

 

 

깨끗이 제단의 눈을 쓸어내고 / 淨掃瑤壇雪

향을 피우고 중진(衆眞)에 예불드리네 / 焚香禮衆眞

밤이 깊어 바람과 이슬이 겹치자 / 夜深風露重

차가운 달빛이 옷에 가득하구나 / 凉月滿衣巾 (33)(천단예몽(天壇禮夢))

 

 

선녀가 난새를 타고 가니 / 仙侶乘鸞去

안개와 노을만이 골짜기에 가득하다 / 烟霞洞府深

벽도(碧桃) 익고 봄은 늦어 가는데 / 碧桃春欲老

어느 곳에서 옥피리소리 들리네 / 何處玉簫音(34) (선동심진(仙洞尋眞))

 

 

사랑스럽다 맑고 깨끗이 물이여 / 愛此淸凈流

시원하게 옥구슬 쏟아 내누나 / 泠泠瀉環玦

돌아다니는 스님 가사를 세척하자 / 洗出雲衲衣

얽혀 있던 선심(禪心)도 깨끗해지네 / 着來禪心潔(35) (서천세납(西川洗衲))

 

 

부용봉이 참모습을 / 芙蓉眞面目

연못에 그림자를 보내니 / 送影一湫水

볼 수 있어도 건질 수 없네 / 可見不可撈

만일 가진다면 그대에게 주리라 / 若爲持贈子(36) (남지조영(南池照影))

 

 

처음엔 진주가 흩어지나 의심했다가 / 始訝眞珠散

도리어 흰 비단 나는가 의심했네 / 還疑素練飛

정신없이 보는데 날은 이미 저물고 / 耽看日己暝

용의 기은 사람의 옷을 적시네 / 龍氣濕人衣(37) (용담관폭(龍潭觀瀑))

 

그대 머무르게 잡아두지 못하고 / 未挽荷衣住

헤어짐에 안타까워하노라 / 還堪惜別離

잠깐 골짜기 나가는 걸 바라보나니 / 纔看出洞去

천 갈래 길을 어찌하리오 / 其奈有千歧(38)(반석송객(盤石送客))

 

○ 관찰사 정광성(鄭廣成)(39)의 시서(詩序)에 이르기를, 가군(家君)(40)이 관동(關東)의 안찰사로 나갔다가 청평사에 머물고 계셨다. 그때 내 나이 16세였는데 서울에서 와 뵈었다. 하루는 아버지를 따라 냇가에서 놀다가 찰방을 만났는데 키가 크고 춤도 잘 추는 사람이 있었다. 아버지가 재미삼아 한 구절을 읊기를,

 

 

풍채와 자세는 들의 학을 닮았고 / 風姿偸野鶴

멋진 춤은 큰 소나무에서 배운 듯 / 頎舞學長松

여산(廬山)의 폭포를 본 것뿐만 아니라 / 政對廬山瀑

이백(李白)의 얼굴도 보았네 / 添觀李白容

 

 

내가 매양 크게 외웠는데, 지금 다행히 성은을 입어 본도를 관찰하게 되어 옛터를 찾아보니 완연히 지난날과 같았다. 지난날을 생각하자 감회가 참으로 깊지만 아침저녁 문안 인사 오래 걸려 실로 바라보며 한탄하다가 삼가 앞의 시에 차운하여 벽 위에 써 붙이길,

 

 

그윽한 시내에는 깨끗한 물이요 / 幽澗泠泠水

가파른 언덕에는 늘어진 소나무라 / 懸崖落落松

성상(星霜)이 몇 번이나 바뀌었어도 / 星霜知幾換

옛 모습을 고치지 않았네 / 不改舊時容 

 

○ 정호선(丁好善)(41)의 시

한가히 푸른 지팡이를 짚고 가을 하늘 아래 서니 / 閒携綠杖倚秋空

몸은 부용봉(芙蓉峰) 제일 높은 봉우리에 있네 / 身在芙蓉第一峰

절 그림자 땅에 떨어져 별천지 감추고 / 梵影落地藏別界

아름다운 무지개 골짜기에 떠 신의 솜씨 드러냈다 / 玉虹開峽見神工

생각해보니 진락공 있던 곳은 지금 어디인가 / 緬懷眞隱今何處

선원(仙源) 거슬러 올라가고픈 생각 끝도 없다 / 欲沂仙源意未窮

사계절마다 시객과 짝하는 것에 힘입어 / 賴有四時詩客伴

동문(洞門)에 머물며 멀리 떠돌던 자취 얻어본다 / 洞門留得遠遊蹤

 

 

만고의 깨끗한 거울이지만 / 萬古開寒鏡

몇 척의 깊이도 되지 않네 / 而無數尺深

높다란 부용봉이 / 芙蓉千萬仞

못 속에 잠겨 있고 / 涵泳一池心

암자마다 또렷하며 / 歷歷金仙宇

옥녀의 비녀 가득하네 / 盈盈玉女簪

숲속의 바람 물결을 일으키지 마라 / 林風莫吹浪

부침(浮沈)이 있을까 두렵기만 하네 / 却恐有浮沈

 

 

○ 안숭검(安崇儉)의 시

이내 신세가 갈매기 같아 세속을 멀리하고 / 身世沙鷗與俗踈

수레타고 이날 마음먹은 곳 찾아왔네 / 驂鸞此日訪如如

부용봉 아래 푸른 구름 저물고 / 芙蓉峰下碧雲暮

피리소리 울리는데 산비는 여전하구나 / 長笛一聲山雨餘

 

흐린 날씨 앞개울에 들더니 / 風色入前溪

옅은 안개 저녁 나무에 생기네 / 輕陰生暮樹

산승은 약을 캐 오는데 / 山僧採藥來

그 위로 산마다 비 내리네 / 衣上千峯雨 

 

우두사(牛頭寺)는 우두산에 있다. 민간에 전하기를, 어떤 도승(道僧)이 있었는데 그 이름은 잊어버렸다. 우두산에 올라서 강 가운데의 바위 위에 늙은 중이 홀로 앉아 있는 것을 바라보고 곧 강변으로 내려가 찾았으나 없었다. 도승이 손을 깍지 끼고 무릎을 꿇고 앉아 사흘 밤낮을 기도하며 뵙기를 원하였으나 끝내 볼 수가 없었다. 도승이 범어(梵語)로 “우두(牛頭)문수”라고 부르짖자 한 석불(石佛)이 물 위로 몸을 내밀고 나와 바위 위에 앉았다. 도승이 이에 절하며 발원(發願)하고 쌀을 구걸하고 재목을 모아 절을 지어서 그 불상을 안치하였다 한다. 지금은 문수석불이 우두산 꼭대기에 비도 가리지 못한 채 앉아 있다. ○ 절을 창건할 때 지내촌(枝內村)의 삼성당(三聖堂)에서 밤마다 잔치를 열어 즐기는 소리가 들렸는데, 이 절이 불에 타 없어진 첫날 밤, 곡을 하며 울고 슬픔에 젖어 탄식하는 소리가 들렸다.

삼회사(三檜寺)는 경운산의 서쪽에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이 절은 소양정과 함께 모두 삼한시대에 세워졌는데 천 년된 옛 집이 조금도 기울거나 틈이 생긴 곳이 없으며, 섬돌은 잡석으로 어지러이 쌓았는데 조금도 미세한 틈으로 물이 샐 곳이 없으니, 보는 자가 기이하게 여겼다. 을해년에 화전으로 개간하여 모두 타 없어졌다.

 법화사(法華寺)는 용화산의 서북쪽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

 양화사(楊花寺)는 서상면 양화 언덕에 있었는데 지금은 석탑만 있고 집은 없어졌다.

 조면사(造麵寺)는 서상면 수정동(水精洞)에 있었는데 다만 주초석과 섬돌만이 남아 있다. 고정암(孤淨菴)은 삼악산의 동암 아래에 있다.

 삼악사(三岳寺)는 삼악산에 있다.

 안화사(鞍化寺)는 안화산에 있다.

 전방사(箭防寺)는 전방산에 있다.

 충원사(沖圓寺)는 봉의산 서쪽에 있었는데 터도 찾을 수가 없다. 계해년의 반정(反正) 초에 충원현감(忠原縣監) 유정립(柳鼎立)이 화를 입어 태거되어 와서 우거하였는데, 터를 닦을 때 땅을 파다가 불기(佛器)를 얻었다. 그 명에 ‘신라충원사(新羅沖圓寺)’라 쓰여 있어서 비로소 절의 옛터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충원(忠原)과 음이 같아서 매우 싫어하였는데 얼마 안 있어 죽으니 문득 혹 그 사이에 징험이 있었던가. 괴이한 일이다.

 식암(息庵)은 경운산에 있다. 이자현이 살던 곳으로 바위 위에 식암 두 글자가 남아 있는데 곧 자현이 손수 새겼다고 한다.

 견성암(見性菴)은 부용봉(芙蓉峰) 아래에 있다. 그림자가 영지에 비친다.

 양신암(養神菴)은 부용산의 동쪽 산록에 있다.

 은선암(隱仙庵)은 삼회동(三檜洞) 서석봉(西石峰) 아래에 있다.

 심곡사(深谷寺)는 독산(禿山)의 서지(西枝)인 퇴곡(退谷)의 북쪽 봉우리 아래에 있다. 문을 열고 앉아서 보면 고산, 봉산, 우평(牛坪), 소양, 노주 등이 모두 눈 안에 들어온다.

 사자사(獅子寺)는 화악의 동지(東枝)인 조잔(鳥棧)에 있는데 험준하여 우마가 다니지 못하기 때문에 병자란 때 사람들이 많이 이곳으로 병란을 피하여 온전하였다. 도승 성정(性靜)이 중수하였다. 

 

이자현(李資玄). 문하시중 자연(子淵)의 손자이다. 성품이 총민하고 용모가 뛰어났다. 과거에 합격하여 대악서승(大樂署丞)(42)이 되었으나, 갑자기 관직을 버리고 춘주의 청평산(淸平山)에 들어가 스스로 선도(禪道)를 즐겼다. 예종(睿宗)이 누차 조서를 내려 부르니, 자현이 이르기를, “산이 처음 도성 문을 나서면서 다시는 서울 땅을 밟지 않으리라 맹세하였으므로 감히 명을 받들지 못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드디어 전문을 올려 이르기를, “새의 본성대로 새를 길러서 종고(鐘鼓)의 걱정이 없게 하시고 물고기를 관찰하여 물고기를 알아서 강호(江湖)를 좋아하는 물고기의 본성을 이루게 하소서”라고 하였다. 왕이 다시 안동에 행차하여 불렀다. 청량사(淸凉寺)에 기거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청평사로 돌아와 죽었다. 시호는 진락(眞樂)이다. 자현의 자는 진정(眞精)이며, 도호(道號)는 희이자(希夷子)이다. 처음부터 끝까지의 사적(事跡)은 청평기(淸平記) 및 비문 가운데에 있다.

김시습(金時習). 자는 열경(悅卿)이며 도호는 매월당(梅月堂)이다. 광해군 때 속세를 피하여 숨어 살았다. 자취를 숨기고 청평산 서향원(瑞香院)에서 살았으며, 또 사탄의 산과 물 사이에 집을 지어 살았다. 시에,

머리 깎고 티끌 같은 세상을 도망하였으나 / 削髮逃塵世

수염은 그대로 두어 장부임을 보이네 / 存髥表丈夫

라 하였다. 그 후 구름처럼 떠돌며 흘러 다닌 자취가 어느 곳에서 마쳤는지를 알지 못하겠다. 

1) 이자현(1061~1125): 본관 인주(仁州). 호는 식암(息庵)·청평거사(淸平居士)·희이자(希夷子) 등이다. 1089년 과거에 급제하여 대악서승(大樂署承)이 되었으나, 관직을 버리고 춘천의 청평산(淸平山)에 들어가서 아버지가 세운 보현원(普賢院)을 문수원(文殊院)으로 고치고 당(堂)과 암자(庵子)를 짓고는 안빈(安貧)으로 일관했다. 시호는 진락(眞樂)이다.

2) 김부철(金富轍)의 기문(記文)에 따르면, 청평산의 고명(古名)은 경운산이며, 문수원의 고명(古名)은 백암선원(白巖仙院)·보현원(普賢院)이었다. 백암선원은 선사(禪師) 승현(承賢)이 당나라로부터 신라로 와서 광종(光宗) 연간에 지은 것이고, 보현원은 이자현의 부 이의(李顗)가 춘천에 감창사(監倉使)로 와서 지은 것이다. 이후 이자현이 청평산(淸平山)에 입거하면서 보현원을 문수원(文殊院)으로 경운산을 청평산으로 개칭하였다.

3) 곽여(1058~1130): 본관은 청주(淸州), 호는 동산거사(東山居士), 시호는 진정(眞靜)이다.

4) 부절(符節): 조선왕조 때 감사(監司), 유수(留守), 대장(大將), 병사(兵使), 통제사(統制使) 등이 지방으로 부임할 때 신임의 표시로 내려주던 수기(手旗)를 말한다.

5) 상수(湘水): 상강(湘江)이라고도 한다. 호남성(湖南省) 최대의 강.

6) 백이(伯夷)와 숙제(叔齊): 전해오는 바에 따르면, 선군(先君)이 생전 동생인 숙제에게 왕위를 물려주고자 하였는데, 사후 숙제와 백이 모두 왕위를 서로에게 사양하다가 결국 둘 다 주(周)나라로 도망하였다 한다. 주무왕이 상나라의 주왕(紂王)을 토벌하려 하자 말고삐를 잡고 만류하였고, 주무왕이 상나라를 멸망시키자 수양산(首陽山)에 들어가 고사리를 뜯어 먹으며 살다 죽었다 한다.

7) 직(稷): 오곡(五穀)의 신.

8) 설(契): 상족(商族)의 시조인 제곡(帝嚳)의 아들. 우순(虞舜)의 신하로서 치수(治水)하는데 공을 세워 사도(司徒)가 되었다.

9) 진락(眞樂): 진락공 이자현을 가리킨다.

10) 탄연(坦然): 고려시대의 고승(高僧), 성은 손씨(孫氏), 호는 묵암(黙庵). 밀양출신. 교위(校尉) 숙(肅)의 아들이다. 1085년(선종 2) 명경과(明經科)에 합격하였다. 1104년(숙종 9) 대선(大選)에 합격하여 왕명에 따라 중원(中原) 의림사(義林寺) 주지가 되었으며 은퇴한 뒤 많은 제자들을 양성하여 선교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후에 국사(國師)로 추증(追贈)되었고 시호는 대감(大鑑).

11) 시인(寺人): 후궁의 사무를 맡은 환관.

12) 양거: 소승불교의 성문승을 비유함.

13) 녹거: 소승불교의 연각승(緣覺乘)을 비유함.

14) 법보: 불법의 경전.

15) 제잠(鯷岺): 우리나라의 별칭.

16) 접해(鰈海): 우리나라의 별칭.

17) 노릉(魯陵): 노산군(魯山君) 즉 단종(端宗)의 능(陵)을 말한다.

18) 정두원(鄭斗源):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光州). 자는 정숙(丁叔), 호는 호정(壺亭). 정자 명호(明湖)의 아들이다. 1612년(광해군 4) 생원시에 합격, 1616년 문과에 급제하고, 벼슬은 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1631년(인조 9) 사신으로 명나라에 가서 화포(火砲)·천리경(千里鏡)·자명종(自鳴鐘) 등 현대적 기계와 함께 서적을 신부 육약한(陸若漢)으로부터 얻어가지고 돌아왔는데, 화약의 제조법도 이때에 전하여졌다고 한다.

19) 이정형(李廷馨):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덕훈(德薰), 호는 지퇴당(知退堂) 또는 동각(東閣). 사직서령(社稷署令) 탕(宕)의 아들이다. 1567년(명종 22) 사마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별시 문과에 갑과로 급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우승지로 왕을 호종하였다. 1600년 강원도관찰사가 되었고, 1602년 예조참판이 되어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20) 진정(眞精): 이자현을 가리킨다.

21) 유몽인(柳夢寅): 본관은 고흥(高興). 자는 응문(應文), 호는 어우당(於于堂)·간재(艮齋)·묵호자(默好子). 사간 충관(忠寬)의 손자, 진사 당(榶)의 아들로, 서울 명례방(明禮坊)에서 태어났다. 왜란중 그는 문안사(問安使) 등 대명외교를 맡았으며 그뒤 병조참의·황해감사·도승지 등을 지냈다. 1623년 인조반정 때 화를 면하였으나 그해 7월 현령 유응경(柳應㓏)이 무고하여 국문을 받았다. 마침내 역률(逆律)로 다스려져 아들 약(瀹)과 함께 사형되었다.

22) 기림(琪林): 선경(仙境)에 있다는 옥수(玉樹)를 말한다.

23)『상촌집』에는 ‘層’으로 되어 있다. 

24)『상촌집』에는 ‘度’로 되어 있다. 

25)『상촌집』에는 ‘晴’로 되어 있다.

26) ​유숙(柳潚):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흥양(興陽). 자는 연숙(淵叔), 호는 취흘(醉吃). 아버지는 사섬시부정(司贍寺副正) 몽표(夢彪). 1588년(선조 21)에 생원시에 합격함. 사간원정언·사헌부집의를 거쳐 예조참의·대사간·대사성 등의 청직을 지냈다. 1632년 인조반정이 일어나 청하(淸河)로 귀양갔으나 곧은 선비라 하여 바로 방환되었고, 병조참판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27) 기수(琪樹): 옥을 드리우고 있다는 선계의 나무.

28) 방장(方丈): 사원(寺院)의 장로(長老)나 주지승(住持僧)이 거처하는 곳을 말한다. 후에 사원에서 주지를 맡은 사람이나 사원에서 귀한 손님을 접대하는 장소를 가리킨다.

29) 계문(薊門): 북경의 서북에 있는 문.

30) 조우인(曺友仁):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여익(汝益), 호는 매호(梅湖)·이재(頤齋). 경상도 예천 출생. 1588년(선조 21)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지내다가 1616년(광해군 8)에는 함경도 경성판관을 지냈다. 광해군의 잘못을 풍자하였다가 필화를 입어 3년간 옥고를 치르고, 인조의 등극으로 풀려나 상주의 매호에서 은거하며 여생을 마쳤다. 시·서예·음악에 뛰어나 삼절(三絶)이라는 평을 받기도 하였다.

31)『이재집(頤齋集)』에 실린 시를 따른다. 『춘주지』에 다음과 같이 실렸다. “止動之謂靜。空色泯無迹。覷破此形相。自有天人目。”

32)『이재집(頤齋集)』에 실린 시를 따른다. 『춘주지』에 다음과 같이 실렸다. “一朶靑蓮華。生水不着水。借問定中人。眞能見得此。

33)『이재집(頤齋集)』에 실린 시를 따른다. 『춘주지』에 다음과 같이 실렸다. “淨掃瑤壇雪。焚香禮像眞。夜深風露重。凉月滿衣巾。右天壇禮夢”

34)『이재집(頤齋集)』에 실린 시를 따른다. 『춘주지』에 다음과 같이 실렸다. “仙侶乘鸞去。煙霞洞府深。碧桃春自老。何處玉簫音。”

35)『이재집(頤齋集)』에 실린 시를 따른다. 『춘주지』에 다음과 같이 실렸다. “愛此淸淨流。泠泠瀉瑤玦。洗出雲衲衣。着來禪心潔”

36)『이재집(頤齋集)』에 실린 시를 따른다. 『춘주지』에 다음과 같이 실렸다. “芙蓉眞面目。送影一梵水。可見不可撈。若爲持贈子。”

37)『이재집(頤齋集)』에 실린 시를 따른다. 『춘주지』에 다음과 같이 실렸다. “始訝眞流發。還疑素練飛。耽看日已暝。龍沫濕人衣。右龍潭”

38) 『이재집(頤齋集)』에 실린 시를 따른다. 『춘주지』에 다음과 같이 실렸다. “難挽荷衣住。那堪惜別離。纔看出洞去。其奈有千歧。”

39) 정광성(鄭廣成, 1576~1654):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수백(壽伯). 호는 제곡(濟谷). 좌의정 창연(昌衍)의 아들. 1601년(선조 34) 진사가 되고, 식년문광 병과로 급제, 검열·대교 등을 거쳐, 정자·수찬·교리·지평 등 초년에 주로 삼

40) 가군(家君): 자기 아버지.

41) 정호선(丁好善):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사우(士優), 호는 동원(東園). 대사헌 윤복(胤福)의 아들이다. 1601년(선조 34) 진사가 되고, 이해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이어 이조정랑·직강·사예·지평·정언·응교 등을 역임하였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났을 때 파수대장(把守大將)으로 좌도의 병사를 죽령(竹嶺)에 진을 쳤다가 강화가 성립되어 철수, 이듬해 병으로 사임하였다.

42) 대악서승(大樂署丞): 고려시대 음악의 일을 맡기 위하여 설립된 관서의 하나. 일명 전악서(典樂署)·대악관현방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淸平山。一名慶雲山。在府北四十里。高麗李資玄。入于此山。葺文殊院以居之。尤耆禪說。於洞中幽絶處。作息菴。團圓如鵠卵。只得盤兩膝。黙坐其中。數月猶不出。其同年郭璵。持節出關東。訪之贈詩云。淸平山水似湘濱。邂逅相逢見故人。三十年前同擢第。一千里外各棲身。浮雲入洞曾無事。明月當溪不染塵。目擊無言良久處。淡然相照舊精神。資玄和云。暖遍溪山暗換春。忽紆仙仗訪幽人。夷齊遁世唯全性。稷契勤邦不爲身。奉詔此時鏘玉佩。掛冠他日拂衣塵。何當此地同棲隱。養得從來不死神。

退溪先生過淸平山懷淸平山人有感詩云 峽東江盤棧道傾 忽逢雲外出溪淸 至今人說廬山社 是處君爲谷口耕 白月滿空餘素抱 晴嵐無跡遣浮榮 東韓隱逸誰修傳 莫指微疪屛白珩 嘉靖壬寅八月災傷御使時作

李冑詩云 眞樂曾遊地 文殊不住天 客來休俗念 始覺片時神 

 

淸平溪。源出慶雲山。盤石。八松臺。龍潭瀑布。西川。仙洞。皆絶勝奇觀處

 

淸平寺 在淸平山下 文定大妃時 僧普雨重修文殊院 增其舊制敞而大之極 其宏麗 更號慶雲山萬壽聖淸平禪寺 法殿名曰能仁殿 殿之東有九光殿 四聖殿 九光殿 則盡日月星辰而張之 四聖殿則取儒佛仙道四書而藏之 高麗金富轍記 春川淸平山者 古之慶雲山 而文殊院者 古之普賢院也 初禪師承玄 自唐來新羅 至廣廟二十四年 始來于慶雲山創蘭若曰白巖禪院 時大宋開寶六年也 至文廟二十三年 歲在戊申 故左散騎常侍知樞密院事 李公顗爲春州道監倉使 愛慶雲勝景 乃卽白巖之旧址 置寺曰普賢院 時熙寧元年也 其後希夷子 棄官隱居于玆 而盜賊寢息虎狼絶迹 乃易山名曰淸平 院名曰文殊 而仍加營葺希 夷子卽李公之長男 名資玄字眞精 住山凡三十七年云矣 ○大宋建炎四年庚戌十一月日門人靖國安和寺傳法沙門坦然書門人繼住傳法沙門祖遠立門人大師知遠刊字 

○ 元泰定帝皇后, 以僧性澄, 寺人允堅等, 進佛經藏于此寺, 李齊賢奉王旨撰碑曰 泰定四年三月庚子, 僉議政丞臣恰等, 令中謁者, 復于王曰, 天子之近臣, 司徒剛塔里, 中政院使忽篤帖木兒, 受命天子之后, 伻來以僧性澄, 寺人允堅等, 所進佛書一藏, 歸諸淸平山文殊寺, 施緡錢萬, 令取其息, 爲皇太子皇子祈福, 各取其誕辰, 飯僧閱經, 歲以爲凡, 且曰, 樹碑, 以示永久, 臣等窃惟佛法入中國, 隨世興替, 且千餘歲, 皇朝謂其道無爲爲宗, 有契乎聖理, 廣度爲心, 有補于仁政, 尊信之尤篤, 今旣以傳車, 輸其書數千里窮山之中, 又立食本, 以贍其徒, 斯乃佛者之幸也, 名山福地, 在天下不爲少, 不鄙弊邑, 爰置祝釐之所, 斯則非惟佛者之幸, 亦弊邑之幸也, 將大書特書, 誇耀無極, 況中宮有旨, 敢不祗承, 請付執筆者, 以記, 於是, 命臣某銘, 其銘曰, 於皇有元, 旣世以仁, 陽春時雨, 亭毒九垠, 乃眷金仙, 無爲爲敎。用其土苴, 利生禁暴。是崇是敬, 厚復其徒。不徭不賦, 顓習其書。其書千函, 浩若烟海, 妙析毫釐, 廣包覆載, 律繇戒立, 論自定興, 維經之演, 維慧之明, 路彼犪軒, 卓乎羊鹿, 載薰其香, 一林薝蔔。俶裒于竺, 曰葉與難。俶播于震, 曰騰與蘭, 梁取其秕, 我嚌維穀, 訾石者唐, 我割維玉。伊澄伊堅, 服異心同。旣成法寶, 以奏爾功。天后爾嘉, 載謀之地。(東文選作之), 曰惟三韓, 樂善敦義。維時維王, 我出我甥。祝釐報上, 允也其誠。于國之東, 文殊之寺。(東文撰作山), 毋憚阻脩, 置郵往施。發緡內帑, 俾轉食輸, 可繼以守, 諉王曁臣。王拜稽首, 天子萬歲, 天后是偕, 本支百世。鯷岑石爛, 鰈海塵飛。維功德聚, 不騫不墮。 泰定四年五月日沙門臣性澄奉使臣不花帖木兒等立石沙門臣戒非刊字法庭 近北有極樂殿 亦普雨之所建也 其宏麗華彩無 與爲比用黃金造佛座 屋四面柱棟 皆先以細苧裹之再以全漆漆之 終以朱紅潤色之所觸物象照耀如明鏡焉 當初物力之費何可量也 法堂之南建一樓名曰降仙閣造 先王三位板奉安於此北向佛殿此乃普雨之所爲也 非徒誕妄慢瀆之甚無謂也 九十年來凡無知賤氓愚夫愚婦恣意出入以爲佛寺遊賞之地 識者莫不病焉然而當初設施雖誕位號嚴重故不得私自廢革以致迄今尙存 妖僧之害一至於此良可痛也 此寺普雨創設仍居名花異草皆自宮苑移種盛夏則以竹造臥床四面金環繫以紅繩臥其中大鍮盆盛氷照之四人一時幷擧掛於四隅使蚊蚤不侵凡所自奉稱是 未幾被罪杖死濟州配所 懶翁鐵杖在淸平樓上庫

瑞香院舊基 在影池西洞裏金時習隱居處 李冑詩吾知梅月老曾遊此山中有魂如不滅應與魯陵通

影池在寺下一里池水大水大旱不增不減

見性菴在遠峰而影落照僧行如在池中

古骨在仙洞而盛於陶器中四隅刻乾坤坎离卦塡以朱紅藏於石間 傳云眞樂遺骸鄭斗源方伯時刻銘瓦甎使僧文玉改葬之 

 

[題詠] ○ 柳永吉詩 西溪春盡愜幽期松石淸奇幷入詩直待梨花山月白高牕 不寐俯雙池

○ 李廷馨詩老人携四子乘興偶來遊秋晩楓林脫雲迷石路脩濯纓雙瀑下散策影池頭却憶淸寒子高蹤邈寡儔 昨到淸平寺今遊仙洞菴眞精去已久宿露鎻空龕 ○ 柳夢寅詩。欲求宓妃聘。那捨謇脩媒。曾見瑞香院。不慙眞歇臺。金風凋翠葉。紅澗泛瓊盃。鹿馭疲巖徑。仙遊且莫催。詠西川詩 玉帶縈紆嚲。截昉琪林掩。翳閟鳴瑭山。靈豈識曾遊。客烏鬢今添。九月霜 ○ 申相公欽詩 倦客尋初地。懸厓闢梵廬。雲開眞樂觀。龍護悅卿書。飛瀑霑芒屨。危矼住筍輿。東林看月上。天影落潭虛。○ 柳潚八詠詩 古寺諸天界荒碑幼婦辭香爐雲捲後琪樹月明時風挾鍾聲遠溪淸灘響遲 燒香坐方丈 寂寂對雙池 右淸平寺 遙看千仞壁中有數間菴梵起雲端逈燈明鏡裡涵敲氷童子汲閉雪老禪參到得逍遙地方知斥鷃慙 右見性菴 獨發門嘯來尋眞樂翁仙居玉洞裏筆跡翠崖中鶴去寒松老僧殘古寺空休官林下少千載揖高風 右仙洞 息菴息於此萬事等雲浮境與道俱靜身將心共休天幾元寂寂人世漫悠悠我欲學其息投簪江海游 右息菴 列峀勢如拱來朝西澗瀆窪樽開石竇壞衲洗雲紋流水龍屈曲游魚拖息分莫敎花出谷愁殺世人聞 右西川 爲愛南池淨曾經幾劫灰仙歸香院冷僧去桂枝摧魚隊窺花出鳧雛帶雨來芙蓉峰影在 數朶不須裁 右南池 玆遊何太晩勝地勢將窮雲靜龍藏壑雷喧瀑灑空曾聞氷作柱要見玉爲宮歸路詩肩聳林巒雪裡風 右龍潭 偃蹇松形直盤陀石勢平淸流橫練色飛沫碎珠聲倦客披雲坐歸僧趂月行丁寧溪上鶴記我更來迎 右盤石 ○ 曺友仁八詠詩 止動之謂靜。空色泯無跡。觀破此形象。自有天人目。右盤石。一朶靑蓮花。生水不着水。借問定中人。眞能見得此。右見性入定。淨掃瑤壇雪。焚香禮象眞。夜深風露重。凉月滿衣巾。右天壇禮象。仙侶乘鸞去。煙霞洞府深。碧桃春自老。何處玉簫音。右仙洞尋眞。愛此淸淨流。泠泠瀉瑤玦。洗出雲衲衣。着來禪心潔。右西川洗衲。芙蓉眞面目。送影一梵水。可見不可撈。若爲持贈子。右南池照影。始訝珠流發。還疑素練飛。耽看日已暝。龍㳭濕人衣。右龍潭看瀑。難挽荷衣住。何堪惜別離。纔看出洞去。其奈有千歧。右盤石送客。○ 觀察使鄭廣成詩序云 家君出按關東 駐笻淸平 余年十六 自京來覲 一日陪遊川上 適察訪有長身善舞者 家君戱吟一絶曰 風姿偸野鶴 頎舞學長松 政對廬山瀑 添觀李白容 余每莊誦 今幸蒙荷聖恩 忝察本道 來尋舊址 宛然如昨日 追思往日 感懷良深 定省久曠 寔用瞻歎 謹吹前顔 留寄壁上云 幽澗冷冷水 懸崖落落松 星霜知幾換 不改舊時容 ○丁好善詩 閑携綠杖倚秋空 身在芙蓉第一峰 梵影落池藏別界 玉虹開峽見神工 緬懷眞隱今何處 欲沂仙源意未窮 賴有四明詩客伴 洞門留得浪遊蹤 萬古開寒鏡而無數尺 芙蓉千萬仞涵泳一池心歷歷金仙宇盈盈玉女簪林風莫吹浪却恐有浮沈 ○ 安崇儉詩。身世沙鷗與俗踈。驂鸞此日訪如如。芙蓉峰下碧雲暮 長笛一聲山雨餘。 風色入前溪。輕陰生暮樹。山僧採藥來。衣上千峰雨。

 

○ 牛頭寺在牛頭山 諺傳有道僧望其名 登牛頭山 望見江中巖上 老僧獨坐 卽下至江邊尋之 無有道僧叉手跪坐三日三夜 請禱願見終不見焉 道僧作梵音呼曰 牛頭文殊有一石佛挺身水上出坐巖上道僧乃拜祝發願化米鳩材作蘭若而安其佛云 今文殊石佛露坐牛頭山頂 牛頭寺創設時枝內村三聖堂夜夜聞張樂宴樂之聲 此寺火燼之初夜夜聞哭泣悲歎之聲云云 三檜寺在慶雲山西 世傳此寺與昭陽亭皆三韓時幷建而千年古屋 少無欹隙處堦砌 則以雜石亂築而少無細罅納水之處 觀者異之 乙亥之歲爲火墾者所煨燼 法華寺在龍華山西北今無 楊花寺在西上面楊花岸 今則有石塔無屋 造麵寺在西上水精洞只有柱礎砌石 孤淨菴在三岳山東巖下三岳寺在三岳山鞍化寺在鞍化山箭防寺在箭防山冲圓寺在鳳儀山西無形基可尋癸亥反正初忠原縣監柳鼎立被汰來寓修基之際 掘地得佛器銘曰新羅冲圓寺始知寺舊基地也 忠原以音同甚惡之 未幾坐死抑或有符驗於其間耶可怪也已 息庵在慶雲山李資玄所居石上所存息庵二字乃資玄手刻云 見性菴在芙蓉峰下影落影池 養神菴在芙蓉山東麓隱仙庵在三檜洞西石峰下 深谷寺在禿山西枝退谷北峰下開門坐觀則孤山鳳山牛坪昭陽鷺州等 皆在眼前 獅子寺在華岳東枝鳥棧絶險牛馬不通故丙子亂人多避兵得全道僧性靜重修

 

李資玄,門下侍中子淵之孫,性聰敏,容皃魁偉,登第,爲大樂署丞,忽棄官,入春州淸平山,以禪道自樂, 睿宗累詔徵之 資玄曰 臣始出都門,誓不復踐京華, 不敢奉命,遂上箋曰,以鳥養鳥,庶無鍾鼓之憂,觀魚知魚,俾遂江湖之性,王復幸, 安東召之使居淸涼寺, 未幾還淸平寺, 卒諡眞樂, 資玄字眞精道號希夷子, 終始事跡, 在淸平寺記及碑文中 ○ 金時習字悅卿道號梅月堂光廟朝避世隱居秘跡棲身於淸平山瑞香院又結舍於史呑山水間有詩曰 削髮逃塵世存髥表丈夫其後雲遊浪跡不知終於何處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