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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수사(文殊寺)」, 『신증동국여지승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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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수사(文殊寺), 신증동국여지승람

문수사(文殊寺) 청평산(淸平山) 아래에 있다. 즉 이자현(李資玄)이 살던 곳이다. 고려 김부철(金富轍)의 기(), “춘주(春州)의 청평산은 옛날의 경운산(慶雲山)이며, 문수원(文殊院)은 옛날의 보현원(普賢院)이다. 처음에 선사(禪師) 승현(承賢)이 당() 나라로부터 신라에 와서 고려 광종(光宗) 24년에 처음으로 경운산에 절을 창건하고 백암선원(白巖禪院)1)이라 하였다. 그때는 송() 나라의 개보(開寶) 6년이었다. 문종 23년 무신년에 이르러 좌산기상시 지추밀원사(左散騎常侍 知樞密院事) 이두(李頭)가 춘주도(春州道)의 감창사(監倉使)가 되었을 때, 경운산의 좋은 경치를 사랑하여 백암선원의 옛터에 절을 짓고 보현원(普賢院)이라 하였다. 그때는 송() 나라의 희령(熙寧) 원년이었다. 그 뒤에 희이자(希夷子)가 벼슬을 버리고 와서 여기에 숨어 사니 도적이 그치고 호랑이와 이리가 자취를 감추었다. 이에 산의 이름을 고쳐 청평(淸平)이라 하고, 원명(院名)을 문수(文殊)라 하였다. 이어서 다시 경영하고 수리하였다. 희이자는 이공(李公)의 장남이니 이름은 자현(資玄)이고 자()는 진정(眞精)이다. 산에 머문 지가 37년이나 되었다.” 하였다.

() 나라의 태정황제(泰定皇帝)의 황후가 중 성징(性澄)과 윤견(允堅) 등이 바친 불경을 보내서 이 절에 수장(收藏)하였다. 이제현(李齊賢)이 왕명으로 비문을 지었다. 비문에 말하기를, “태정(泰定) 43월 경자일(庚子日)에 첨의정승(僉議政丞) () () 등이 중알자(中謁者)로 하여금 임금에게 보고하기를, ‘천자(天子)의 근신 사도(司徒) 강탑리(剛塔里)와 중정원사(中政院使) 홀독첩목아(忽篤帖木兒)가 천자의 황후에게서 명령을 받고 사자로 와서 중 성징과 시인(寺人) 윤견 등이 바친 불서(佛書) 한 질을 청평산 문수사에 귀속시키고, 돈 만 꾸러미를 시주하였습니다. 그것으로 이식(利息)을 취하여 황태자(皇太子)황자(皇子)를 위하여 복을 빌며, 각각 그들의 탄신을 기하여 중들에게 음식을 대접하고, ()을 열람하게 하는 것을 연중행사로 삼도록 했습니다. 또 비를 세워 영구히 뒷세상에 보이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신등은 가만히 생각하니 불법이 중국에 들어와서 세대(世代)를 따라 흥왕하기도 하고 쇠미하기도 한 것이 거의 천여 년입니다. 원 나라 조정에서는 그 도()가 무위(無爲)로써 근본을 삼는 것이 성인(聖人)의 정치에 부합되며 널리 제도(濟度)함을 마음으로 하는 것이 어진 정치에 도움됨이 있다고 하여, 존숭(尊崇)하고 신앙함이 더욱 돈독합니다. 이제 이미 역참(驛站)의 전거(傳車)로써 그 불서(佛書)를 수천 리 밖에 있는 깊은 산중까지 수송하고, 또 절을 유지할 재물을 세워서 그 무리들의 생활을 넉넉하게 하였습니다. 이 일은 곧 불도들의 행복입니다. 이름난 산과 복된 땅이 온 천하에 적지 않게 있건만 우리나라를 비루(鄙陋)하게 여기지 않고 여기에 황실(皇室)의 복을 비는 곳을 설치하였습니다. 이것은 오직 불도(佛徒)들만의 다행이 아니고, 또한 우리나라의 다행한 일입니다. 장차 대서특필하여 영원무궁하게 자랑하며 빛나게 해야 될 일입니다. 하물며 중궁(中宮)의 전지(傳旨)가 있으니 감히 공손히 받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청컨대 집필자에게 부탁하여 기를 쓰게 하소서.’ 하였다. 이에 신 아무개에게 명()을 지으라고 명령하였다. 신 아무개는 명을 짓기를, ‘크도다, 이미 원() 나라의 어진 정치 대대로 내려왔네. 따뜻한 봄날 같고, 때에 알맞은 단비 같아서, 천하의 만물은 생성한다. 이에 금선(金仙) 무위(無爲)를 교화(敎化)로 한 것을 흠모하여 그 흙 부스러기와 지푸라기를 써서 중생을 이롭게 하고 사나움을 금지할 제 이것을 존숭하고 공경하네. 그 무리들을 후하게 복호(復戶)하여 부역(賦役)도 시키지 않고 세금도 부과하지 않으면서 그 불서(佛書)만을 오로지 공부하게 하네. 그 불서가 천 상자도 넘어서 방대하기가 안개 낀 바다 같도다. 그 글이 정미(精微)하기는 터럭 끝을 쪼듯 하고, 광대하기는 천지를 포함할 만하다. ()은 계()를 좇아 서고, ()은 정()으로부터 일어난다. 불경을 연수(演修)함은 지혜의 밝아짐이로다. 크도다, 저 규헌(犪軒)이여. 높도다, 양거(羊車)녹거(鹿車)에 훈훈한 그 향기, 담복화(薝蔔花; 치자꽃) 가득한 숲 같구나. 처음 천축(天竺) 땅에서 모은 이는 가섭(迦葉)과 아난타(阿難陀)이었고, 처음으로 우리나라에 전파한 이는 등()과 난()이었다. () 나라에서는 그 쭉정이를 취하였고, 우리는 곡식을 맛보았네. () 나라에서는 그것을 돌이라고 짐작하였으나, 우리는 그것을 옥으로 쪼개었네. 저 중 성징(性澄)과 시인(寺人) 윤견(允堅)은 입은 옷은 다르지만 마음은 서로 같아서 이미 불경(佛經)의 서사(書寫)를 성취하여 그 성공을 아뢰었다. 천자의 황후가 가상(嘉尙)하게 여기시고 그것을 간직할 땅을 계책하여 말하기를, 삼한(三韓)은 선()을 좋아하고 의()를 돈독하게 지킨다. 고려의 지금 임금은 우리가 낳게 한 우리의 생질이다. ()을 빌어 황실(皇室)에 보답할 그의 정성을 믿는다. 그 나라의 동쪽에 청평산이 있고 문수사가 있다. 길이 막히고 먼 것을 꺼리지 말고 역전(驛傳)을 통하여 가서 베풀지어다. 내탕고(內帑庫)의 돈꿰미를 끌어내어 그 무리들을 먹여 살리고, 이어서 지키도록 왕()과 신하들에게 부탁하라.하였다. 임금이 절하고 머리 조아리며 천자의 만세수(萬歲壽)를 송축했네. 천자와 황후가 함께 하고, 근본과 자손이 백대(百代)를 누리면서 제잠(鯷岑)2)에 기초가 뭉그러지고 접해(鰈海)3)에 물이 말라 티끌이 날릴지언정 이 공덕의 쌓임은 이지러지지 않고 떨어지지 않으리라하였다.” 한다. 

 

1) 백암선원(白巖禪院):원문에는 백엄선원(白嚴禪院)으로 되어 있으나 백암선원으로 고쳤다.

2) 제잠(鯷岑): 우리나라의 별칭.

3) 접해(鰈海): 우리나라의 별칭.

​文殊寺 在淸平山下 卽李資玄所居 高麗金富轍記 春川淸平山者 古之慶雲山 而文殊院者 古之普賢院也 初禪師承玄 自唐來新羅 至廣廟二十四年始來于慶雲山創蘭若 曰白禪院 時大宋開寶六年也 至文廟二十三年 歲在戊申 故左散騎常侍知樞密院事李公爲春州道監倉使 愛慶雲勝景乃卽白之舊址置寺曰普賢院 時熙寧元年也 其後希夷子 棄官隱居于玆 而盜賊寢息虎狼絶迹 乃易山名曰淸平 院名曰文殊 而仍加營葺 希夷子卽李公之長男 名資玄字眞精 住山凡三十七年云云

元泰定帝皇后 以僧性澄允堅所進佛經 藏于此寺 李齊賢奉王旨撰碑曰 泰定四年三月庚子 僉議政丞臣恰等令中謁者復于王曰 天子之近臣司徒剛塔里中政院使忽篤帖木兒 受命天子之后伻來 以僧性澄寺人允堅等所進佛書一 藏歸諸淸平山文殊寺 施緡錢萬 令取其息爲皇太子皇子祈福 各取其誕辰 飯僧閱經歲 以爲凡 且曰樹碑 以示永久 臣等竊惟佛法入中國 隨世興替且千餘歲 皇朝謂其道無爲爲宗有契于聖理 廣度爲心有補于仁政 尊信之尤篤 今旣以傳車輸其書數千里窮山之中 又立食本以贍其徒 斯乃佛者之幸也 名山福地在天下不爲少 不鄙弊邑 爰置祝釐之所 斯則非惟佛者之幸 亦弊邑之幸也 將大書特書誇耀無極 況中宮有旨 敢不祗承 請付執筆者以記 於是命臣某 臣某銘曰 於皇有元旣世以仁 陽春時雨亭毒九垠 乃眷金仙無爲爲敎 用其土苴利生禁暴是崇是敬 厚復其徒 不徭不賦 顓習其書 其書千函 浩若烟海 妙析毫釐 廣包覆載 律繇戒立 論自定興 維經之演 維慧之明路 彼犪軒卓乎羊鹿 載薰其香 一林薝蔔 俶裒于竺 曰葉與難 俶播于震 曰騰與蘭 梁取其秕 我嚌維穀 訾石者唐 我割維三 伊澄伊堅 服異心同 旣成法寶 以奏爾功 天后爾嘉 載謀之地 曰惟三韓 樂善敦義 維時維王 我出我甥 祝釐報上 允也其誠 于國之東之山之寺 無憚阻脩 置郵往施 發緡內帑 俾轉食輸 可繼以守 諉王曁臣 王拜稽首 天子萬歲 天后是偕 本支百世 鯷岑石爛 鰈海塵飛 維功德聚 不騫不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