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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평사역사서(淸平寺歷史序)」

상세정보

서문(序文)

 

청평산(淸平山)은 옛날의 경운산(慶雲山)이다. 신라 시대에 스님 영현(永玄)이 당나라에서 와서 고려 광종(光宗) 때 이르러 비로소 경운산 속에 백암선원(白巖禪院)을 지었으니, 실로 이산에 절을 지은 시초이다. 100여년 뒤에 희이자(希夷子)⑴가 보현원(普賢院)에 은둔하자 도적이 사라지고 호랑이와 이리가 없어졌다. 이에 이 산은 청평(淸平)이란 이름을 얻게 되었다. 영현(永玄)이 처음 절을 지은 이후부터 그 사이는 940여년의 오랜 시간이 되어서, 절의 이름이 드러나기도 하고 잊히기도 해서 헛소문이 꼬리를 물어 실제의 유적이 자세하지 않게 되어, 둘도 없이 청정한 곳이 곧 사라 없어져 살필 수 없는 곳이 되었다. 지사(志士)와 유명한 스님이 절에 가서 노닐어도 전해져 오는 말을 의심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모두 영험한 곳에 실질적인 자취가 없음을 애석히 여겼다.

신규선(申圭善)⑵은 옛 것을 좋아하는 자다. 춘천군에 부임한지 여러 해 되자 온갖 피폐해졌던 것이 흥성해졌는데, 오래된 절이 황폐해진 것을 근심하여 주지 변혜암(邊惠庵)에게 재물을 모아 고쳐 수리하도록 했다. 대개 신규선이 찬성(贊成)한 힘이 다수를 차지한다. 일찍이 주묵(朱墨)이 흐릿해진 것에서 고적을 다니며 찾다가 진락공중수문수원비(眞樂公重修文殊院碑)를 거두어 오래된 전각에 보관하며 여러 스님들에게 말하길, “절에 사적(事蹟)이 있는 것은 나라에 역사가 있으며, 집에 가승(家乘)이 있는 것과 같다. 하물며 이 절의 창건은 거의 천 년에 가까우며 이름 있는 스님이 석가를 말하며 의발(衣鉢)을 이어온 것이 대대로 끊이지 않았으나 사적 중 고찰할만한 것이 없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여러 스님들이 합장하며 말하길, “태수의 질문이 좋습니다. 하늘이 신령스런 공간을 열어 이름난 선원을 처음 세웠으니, 예전부터 불타고 수리하는 것에 어찌 사람이 없겠습니까? 보우(普雨)가 재앙을 입어 명산(名山)은 드디어 빼앗겨 재가 되고 혼란스런 굴이 되자, 고승들은 자취를 피하니 예전 일은 알려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 후 탁발하며 산문에 있는 자는 밥을 먹는 스님에 지나지 않았을 뿐이니, 문헌을 어찌 구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진실로 불가의 큰 재앙이 낀 운수입니다.”

신군수가 이것을 듣고 슬퍼하였다. 마침내 군 서기(書記) 길보(吉甫)와 함께 옛 역사를 찾아 탐구하고 책 한 권을 편찬하였다. 처음은 연혁부터 시작하여 국보 명승고적, 역대 유명한 유학자의 시까지 이르렀다. 이자현의 세상을 피한 옛 자취와 스님 보우의 숨고 쫓긴 옛 일을 구비하여 싣지 않은 것이 없었다. 제목을 지어 청평역사(淸平歷史)’라 하고 나에게 보여주고 서문을 구하였다. 내가 그것을 받고 읽어보고 신군수가 고적을 보존하는데 고심한 것에 깊이 감동하고 길보군이 돕는 것을 진실한 마음으로 해서 완성 한 것에 더욱 찬탄하였다.

! 사물이 드러나고 숨는 것은 진실로 사람을 기다리는 것이 있다. 이 절이 있은 이후부터 이 군을 다스린 자가 거의 백 명에 가깝다. 그러나 절을 돕고 수리하는 임무가 있는 자는 손가락으로 꼽을 수 없다. 한편 이 절을 위해 자취를 묶어 먼 세대로 전한 이도 없었다. 지금 신군수와 길보는 능히 앞사람이 하지 못한 것을 한 것이다. 이 책은 뒤에 이 절을 유람하는 자가 한 번 책을 펼쳐보면 손바닥 안에 있는 것 같이 명료할 것이니, 어찌 옛 사적을 수고롭게 탐구하겠는가. 춘주에 명산 고찰이 많지만, 이 책으로부터 숨겨진 것을 드러나게 한 것은 마땅히 다른 사림에게 양보해서는 안 된다. 나의 서문 쓰는 것이 어찌 여기에 그치겠는가. 마땅히 붓을 잡고 기다릴 것이다.

 

대정(大正) 4(1915) 1월 하순.

강원도참여관(江原道叅與官) 이학규(李鶴圭) 쓰다.

 

 

1) 희이자(希夷子): 이자현을 가리킨다.

2) 신규선(申圭善): 일제강점기 때 춘천군수를 역임했다. 1915년 청평사(淸平寺)를 정비하고 청평사지(淸平寺誌)를 편찬하도록 하였다.

 

淸平史歷史序

淸平山卽古之慶雲山也 在新羅時, 衲子永玄, 自唐來至, 高麗光宗時, 始刱白巖禪院於慶雲山中, 實此山刱寺之嚆矢也, 後百餘年, 希夷子遯隱于普賢之院, 盜賊息而虎狼絶, 於是乎, 是山得淸平之名焉, 自永玄肇刱蘭若之後, 其間爲九百四十餘年之久, 而寺之名, 或顯或晦, 以訛傳訛, 眞蹟莫詳, 遂使淸淨不二之境, 便成闉滅無稽之域, 志士名釋, 徃遊其寺, 無不以傳說爲疑, 咸惜其靈境之無實蹟焉, 申侯圭善, 好古之士也, 莅郡數禩, 百廢俱興, 悶古寺之荒廢, 使住持邊惠庵, 鳩財而改修之, 盖申侯贊成之力居多, 嘗於朱墨之晦, 行尋古蹟, 收眞樂公重修文殊院碑, 藏之古殿, 語于僧衆曰, 寺之有事蹟, 如國之有史, 家之有乘, 況此寺之刱建, 幾近千年, 名僧道釋, 相承衣鉢者, 代不乏絶而事蹟無可考者, 此曷故焉, 僧衆合掌曰, 善哉, 太守之問也, 天開靈區, 肇建名院, 古之焚修, 豈無其人, 一自普雨橫被厄會, 名山遂成劫灰亂窟, 高僧避跡, 徃事無聞, 其後托鉢山門者, 不過粥飯之僧而已, 文獻何足徵也, 此誠佛家之一大劫運, 申侯聞之, 慨然於心, 遂與郡書記吉山君, 搜探古史, 編纂一書, 始自沿革, 以至國寶名勝古蹟, 歷代名儒題詠, 與夫李資玄遯世之舊跡, 僧普雨竄逐之徃事, 無不備載, 題之曰淸平歷史, 示余而求弁卷之文, 余受而讀之, 深感申侯之苦心於保存古蹟, 而益嘆吉山君之實心於佐以爲治也, 嗚呼, 物之顯晦, 固有待於其人也, 目有此寺以後, 來宰是郡者, 凡幾百人, 而在佐治之任者, 亦指不勝屈, 一未嘗有爲此寺編實蹟, 而傳久遠者, 今申侯與吉山君, 乃能發前人之所未發, 作爲此書, 使後之遊覽此寺者, 一開卷, 瞭然如指掌, 何勞探求古蹟乎哉, 春州多名山古刹, 從此而闡發幽晦, 應不讓於他人也, 余之序事豈止於此而已哉, 當執筆而竢之

大正四年一月下浣 江原道叅與官 李鶴圭 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