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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로, 『파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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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로, 파한집

진락공(眞樂公) 이자현(李資玄)은 재상의 집에서 태어나 비록 한때 관직에 나아갔었으나, 항상 수려한 자연 속에 은거하려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젊어서 학사(學士)들이 모인 곳에서 어울리다가 술사(術士) 은원충(殷元忠)1)을 만나 가만히 산과 계곡이 뛰어나 숨어 살만한 곳을 물으니, 은공(殷公)이 말하기를 "양자강(楊子江) 위로 청산 한 굽이가 있으니 참으로 세상을 피해 살만한 곳이다"고 하였는데, 이 말을 듣고 항상 마음에 간직하여 두었다나이 27세 되던 해에 벼슬이 대악서령(大樂暑令)에 이르렀는데, 갑자기 아내를 잃게 되자, 옷을 떨치고 멀리 떠나 청평산(淸平山)에 들어가 문수원(文殊院)을 짓고 살았다. 선설(禪說)을 좋아하여 학자가 오면 함께 깊숙한 방에 들어가 종일토록 단정히 앉아서 말이 없다가도 때때로 고덕(古德)의 종지(宗旨)를 들고 자세히 논하니 이로 말미암아 마음법(心法)이 해동(海東)에 유포(流布)되었고, 혜조(惠照)와 대감(大鑑, 1070-1159) 두 국사(國師)가 모두 그의 문하에서 놀았다. 골짜기 깊숙한 곳에 식암(息庵)을 지었는데. 둥글기가 고니 알 같아서 단지 두 무릎을 겨우 받칠 수 있을 정도였지만, 그 속에 말없이 앉아 여러 날을 나오지 않기도 했다같이 과거에 급제한 친구 곽여(郭璵, 1058-1130)가 부절(附節)을 지니고 관동(關東)에 왔다가 그를 찾아와 시를 지어 주었다

청평(淸平)의 산과 물은 상수(湘水)의 물가처럼 아름다운데 / 淸平山水似湘濱

우연히 서로 만나 고인(故人)을 반기노라 / 邂逅相逢見故人

30년 전에 우리는 같이 급제하였으나 / 三十年前同得第

천리 밖에 떨어져 각각 사는 몸이로구나 / 一千里外各棲身

뜬구름처럼 동학(洞壑)에 들어오더니 이로부터 세상일이 없었고 / 浮雲入洞曾無事

밝은 달이 냇물에 비치니 티끌에 물들지 않네 / 明月當溪不染塵

그대 말없이 오래 앉아 있는 곳을 보니 / 目擊無言良久處

담담하게 옛 정신이 서로 비치는구나 / 淡然相照舊精神

 

이자현도 다음과 같은 화답시를 지었다.

 

따뜻한 기운이 시내와 산에 가득하면서 가만히 봄으로 바뀌는데 / 暖逼溪山暗換春

홀연히 신선의 의장(儀仗)이 굽혀 그윽히 사는 사람을 찾아주셨네 / 忽紆仙杖訪幽人

백이(伯夷)와 숙제(叔齊)가 세상을 피한 것은 오직 성품(性稟)을 보전하고자 함이요 / 夷齊遁世惟全性

()과 설()이 나라 일에 부지런함은 제 몸을 위해서가 아니었네 / 稷契勤邦不爲身

왕명을 받들고 온 이때에 옥패물(玉佩物)이 쟁그랑거리는구나 / 奉詔此時鏘玉佩

어느 날 벼슬을 그만두고 옷의 티끌을 떨쳐 버리려는가 / 掛冠何日拂衣塵

어찌 이곳에 함께 숨어 살며 / 何當此地同棲隱

종래에 지니고 있는 불사(不死)의 정신을 길러 얻지 않는가 / 養得從來不死神

 

예종(睿宗, 1079-1122)이 그의 진풍(眞風)을 목마르게 숭앙하여 누차 조서(詔書)를 보내 불렀으나, 사자(使者)를 보고 이르기를 "()이 처음 도성(都城) 문을 나설 때 다시는 화려한 서울 땅을 밟지 않겠다는 맹세를 하였으므로 감히 조서를 받들지 못하겠습니다" 하고는 표()를 지어 보냈는데 이르기를 "당우(唐虞) 시대에 요순(堯舜)의 신하로 기()와 용()은 나라를 다스리는 지모를 펼쳤지만, 소부(巢父)와 허유(許由)는 산림(山林)에 은거할 뜻을 가졌습니다. 새가 새를 기르게 하여 종()이나 북소리에 놀라는 일이 없도록 하고, 고기를 보고 고기의 마음을 알아 강호(江湖)의 천성(天性)을 따르도록 하옵소서"라 하였다. 왕은 그의 뜻을 굽힐 수 없음을 알고, 특별히 남도(南都, 현재의 서울)로 행차하여 그를 불러서 만나보고, 수신(修身)과 양성(養性)의 요점을 물었다. 그는 "옛사람은 성품을 기르는 데는 욕심을 적게 가지는 것보다 나은 것은 없다(養性莫善於寡欲)고 하였으니, 폐하께서는 이 점에 유의하십시오"라고 대답하였다. 왕은 찬탄하기를 마지않으며 "말은 들을 수 있으나 도()는 전해 받을 수 없고, 몸은 볼 수 있으나 뜻을 굽히게 할 수는 없으니, 진실로 허유(許由) 소부(巢父)와 같은 부류의 사람이다"라고 하고는 차()와 약()을 하사하고 산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이어 그가 세상을 떠나자 진락공(眞樂公)이라 시호를 내렸다. 

 

 

1) 은원충(殷元忠): 호는 무등산처사(無等山處士). 원중(元中)이라고도 한다. 청평거사 이자현(李資玄)과는 두터운 교우관계를 지니고 산천승지(山川勝地)를 탐방하여 도풍(道風)을 즐겼으며, 가야산에 은거하던 이중약(李仲若)을 월출산으로 인도하기도 하였다. 1105(예종 즉위년)에는 지녹연(智祿延) 등과 함께 동계산천(東界山川)을 순시하는 등, 풍수지리설에 일가를 이루었다. 예종 때에 도선밀기(道詵密記)에 근거하여 남경(南京: 서울)천도를 주장하였다.

眞樂公資玄 起自相門 雖寓跡簪組 常有紫霞逸想 少遊金閨 從術士殷元忠 密訪溪山勝地可以卜隱 殷公云 楊子江上有靑山一曲 眞避世之境 聞之常掛於心 年二十七仕至大樂暑令 忽致叩盆之患 拂衣長往 入淸平山葺文殊院以居之 尤嗜禪說 學者至則輒與之入幽室 竟日危坐忘言 時時擧古德宗旨商論 由是心法流布於海東 惠照大鑑兩國師 皆遊其門 乃於洞中幽絶處作息庵 團圓如鵠卵 只得盤兩膝 而默坐其中 數日猶不出 其同年友郭璵 持節出關東 見訪 贈詩云 淸平山水似湘濱 邂逅相逢見故人 三十年前同得第 一千里外各棲身 浮雲入洞曾無事 明月當溪不染塵 目擊無言良久處 淡然相照舊精神 公次韻云 暖逼溪山暗換春 忽紆仙杖訪幽人 夷齊遁世惟全性 稷契勤邦不爲身 奉詔此時鏘玉佩 掛冠何日拂衣塵 何當此地同棲隱 養得從來不死神 睿王渴仰眞風 累詔徵之 對使者曰 臣始出都門 有不復踐京華之誓 不敢奉詔 遂附表云 唐虞之代 堯舜之臣 虁龍陳廊廟之謨 巢許抗山林之志 以鳥養鳥 庶無鍾鼓之憂 觀魚知魚 俾遂江湖之性 上知其不可屈致 特幸南都召見 問以修身養性之要 對曰古人云 養性莫善於寡欲 惟陛下留意焉 上嗟賞不已曰 言可聞 而道不可傳 身可見 而志不可屈 眞潁陽之亞流也 賜茶藥還山 及卒諡眞樂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