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의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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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평산(淸平山) 부 동쪽 44리에 있고 옛 이름은 경운산(慶雲山)이다. 골짜기와 계곡, 시내, 바위의 아름다움이 대관령 서쪽에서는 비견할만한 것이 드물다. 고려(高麗) 이자현(李資玄)이 이 산에서 30여 년간 은거하였다.

 

○ 본조(本朝) 이우(李堣)(1)의 시(詩)에,

길이 청평원(淸平院) 접어드니 / 路過淸平院

  산은 높고 물은 푸르고 얕으며 / 山高水淸淺

  가을색은 양 기슭에 모여 있고 / 秋氣集兩岸

바람소리 높은 산 울리네 / 颼飅響翠巘

천년토록 홀로 그윽함 지켜 / 千年尙幽獨

덕 높은 선비의 자취 생각게 하니 / 可想高士踐

  희이자(希夷子)는 재상가의 손인데 / 希夷相門冑

  표연히 비녀 관 벗어 던지고 / 飄然謝簪冕

  한번 가 서른 봄을 보내며 / 一去三十年

  천길 바위와 고상하게 지냈네. / 千仞同偃蹇

  라고 하였다.

 

 

○ 본조(本朝) 허목(許穆)(2)의 시(詩)(3)에,

청평산 푸른 산 빛 사방으로 이어지며 밝고 / 淸平積翠連四明

맑게 갠 날씨에 푸른 연꽃을 깎아서 세워 놓은 듯 / 天晴削出靑芙蓉

석문에 내 걷히니 동천이 고요하고 / 石門烟開洞天靜

선궁의 푸른 기와 광채가 영롱하네 / 禪宮碧瓦光玲瓏

영지는 담담하게 맑은 거울 잠겨 있고 / 靈池澹澹涵虛鑑

서른여섯 성인은 영정 도리어 공허하네 / 三十六聖影還空

산중의 폭포는 산중의 돌을 씻고 / 山中瀑布灑山石

늙은 용 수염 드리워 흰 무지개 토해내네 / 老龍垂鬣吐白虹

새벽에 선동에 가서 천단에 예배하고 / 曉從仙洞禮天壇

길게 휘파람 불며 높은 봉우리에 기댔네 / 㗲然長嘯倚高峯

희이노인 지금은 가고 없으나 / 希夷老人今不在

내 이제 와서 그 뒤를 따를거나 / 我來可以追遺蹤

일평생 세상 영화 싫어했으니 / 平生頭掉世間榮

늘그막에 높은 소나무 아래 숨어 살고 싶네 / 且欲白首巢雲松

  라고 되어 있다. 

 

문수사(文殊寺) 청평산(淸平山) 아래에 있으니, 곧 이자현(李資玄)이 거처하던 곳이다. ○ 고려(高麗) 김부철(金富轍)(4)의 기(記)에, “춘주(春州)의 청평산은 옛날의 경운산(慶雲山)이고, 문수원(文殊院)은 옛날의 보현원(普賢院)이다. 당초 선사(禪師) 승현(承賢)이 당나라로부터 신라로 와서는 고려 광종(光宗) 24년(973)에 이르러 처음으로 경운산에 백암선원(白巖仙院)을 창건하였다. 이때가 대송(大宋) 개보(開寶) 6년이었다. 문종(文宗) 23년(1069) 무신년(戊申年)에 이르러, 좌산기상시추밀원사(左散騎常侍樞密院事)(5)이의(李顗) 공(公)이 춘주도(春州道) 감창사(監倉使)(6)가 되었을 때, 경운산의 좋은 경치를 사랑하여 백암(白巖)의 옛터에다 절을 세우고 보현원이라 하였다. 이때가 희령(熙寧) 원년(元年)이다. 그 뒤에 희이자(希夷子)(7)가 벼슬을 버리고 이곳에서 은거하니 도적이 사라지고 호랑이와 이리가 자취를 감추었다. 이에 산의 이름을 고치어 청평(淸平)이라 하고, 원명(院名)을 문수(文殊)라 하고는 이어 단장과 수리를 하였다. 희이자는 곧 이공(李公)의 장남(長男)이니, 이름은 자현(資玄)이고 자(字)는 진정(眞精)이다. 산에 머무른 지가 도합 37년이나 되었다”라고 되어 있다.

 

○ 절에 장경비(藏經碑)가 있다. 원(元)나라 태정제(泰定帝)(8)의 황후(皇后)가 중 성징(性澄)이 바친 불경(佛經)을 이 절에 비치하게 하였다. 충숙왕(忠肅王)이 이제현(李齊賢)(9)으로 하여금 비문(碑文)을 짓게 하였다.

   우두사(牛頭寺) 우두산(牛頭山)에 있었으나, 지금은 폐하여지고 유지(遺址)만이 남아 있다.(10) 강(江) 임한 기슭이 편평하니 대(臺)모양을 이루었고 경치가 소양정(昭陽亭)에 비길 만하다.(11)

 

이자현(李資玄) 고려(高麗) 인주(仁州)(12)​ 사람이다. 성품이 총명하고 민첩하였다. 과거에 급제하여 대악서승(大樂署丞)(13)​이 되었으나, 홀연히 관직을 버리고 춘주(春州) 청평산(淸平山)에 들어가 성긴 나물을 먹고 베옷을 입고서 선도(禪道)로써 스스로 즐겼다. 예종(睿宗)이 차(茶)와 향(香)을 하사하며 여러 번 부르니 자현(資玄)이 말하기를, “신(臣)이 처음에 도성의 문을 나올 때에 다시는 서울의 화려함을 밟지 않겠노라고 맹세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표(表)를 올려 말하기를, “새의 본성대로 새를 길러서 종고(鐘鼓)의 걱정이 없게 하시고 물고기를 관찰하여 물고기를 알아서 강호(江湖)를 좋아하는 물고기의 본성을 이루게 하소서”라고 하였다. 왕이 부를 수 없음을 알고서는 남경(南京)(14)​에 행차하여 자현(資玄)의 아우 상서(尙書)(15)​ 자덕(資德)(16)​에게 시(詩)를 내려 뜻을 전달하였다. 자현(資玄)이 임금이 행차한 곳에 오니 왕이 말하기를 “오랫동안 이 늙은이의 도덕(道德)을 사모하였노라”하고는, 임금의 윗자리에 앉게 하고 절을 하였다. 왕께서 성(性)을 기르는 요체(要體)에 대해서 물으니, (資玄이) 대답하기를 “욕심을 줄이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라고 하고는 『심요(心要)』 1편(篇)을 바치었다. 얼마 후 산으로 돌아가기를 청하니 (왕이) 도복(道服)을 하사하고는 돌아가게 하였다. 청평(淸平)에서 생을 마치니, 시호는 진락(眞樂)이다.

 

 

 

1) 이우(1469~1517): 본관은 진보(眞寶), 자는 명중(明仲), 호는 송재(松齋)로, 진사(進仕) 계양(繼陽)의 아들이고,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숙부이다. 문장이 맑고 전아(典雅)하나는 평을 받았다. 시에 뛰어나 『관동록(關東錄)』, 『귀전록(歸田錄)』과 같은 기행시집을 남기기도 하였다. 청계서원(淸溪書院)에 배향되었고, 저서로 『송재집(松齋集)』이 있다.

2) 허목(1595~1682). 본관은 양천(陽川)이고 자는 문보(文甫)·화보(和甫). 호는 미수(眉叟)저서로 『동사(東事)』, 『방국왕조례(邦國王朝禮)』, 『경설(經說)』, 『경례유찬(經禮類纂)』, 『미수기언(眉叟記言)』 등이 있다. 마전(麻田)의 미강서원(嵋江書院), 나주(羅州)의 미천서원(眉川書院), 창원(昌原)의 회원서원(檜原書院)에 배향되었다.

3) 허목의 『기언』에 실린 것과 순서가 다르다. 문집을 따른다.

4) 김부철(金富轍): 김부의(金富儀, 1079~1136)를 말한다. 본관은 경주(慶州), 초명은 부철(富轍), 자는 자유(子由)로, 국자좨주 좌간의대부(國子祭酒左諫議大夫) 근(覲)의 아들이고, 부식(富軾)의 동생이다.

5) 좌산기상시추밀원사(左散騎常侍樞密院事): 고려시대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의 정3품직.

6) 감창사(監倉使): 고려시대 중추원의 종2품직.

7) 희이자(希夷子): 이자현의 호이다.

8) 태정제(泰定帝): 원나라 제10대 임금 진종(晋宗)을 말한다. 1324~1328년간에 걸쳐 재위하였다.

9) 이제현(1287~1367): 본관은 경주, 초명(初名)은 지공(之公), 자는 중사(仲思), 호는 익재(益齋) 또는 역옹(櫟翁)으로, 겸교시중(檢校侍中) 진(瑱)의 아들이다. 시호는 문충(文忠)이고 공민왕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경주의 구강서원(龜岡書院), 김천(金川 )의 도산서원(道山書院)에 배향되어 있다.

10) 이첨(李詹, 1345~1405)의 시 중에 우두사가 고적(古跡)으로 언급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최소한 고려말 이전에 창건되었던 것 같다.

 

11) 우두산은 비록 고도가 낮지만 주위로 산이 둘러 있지 않고 너른 평야가 펼쳐져 있어 정상에 서면 사방이 모두 조망된다. 우두산에서 조망되는 곳으로는 우두평야, 신매리평야, 백로주, 소양강 및 자양강, 봉의산, 고산대 등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경치란 바로 이러한 사망(四望)을 의미하는 것이다.

 

12) 인주(仁州): 현재의 인천(仁川).

13) 대악서승(大樂署丞): 고려 때의 관직명. 음악에 관한 업무를 주관하였음. 전악서(典樂署), 아악서(雅樂署)라고도 일컬어짐.

14) 남경(南京): 지금 서울의 엣 이름이다.

15) 상서(尙書): 고려 때의 관직명으로 정3품직. 6부의 장(長).

16) 이자덕(1071~1138): 본관은 인주, 자는 관지(觀之)로, 자연(子淵)의 손자이며 재상 의(顗)의 아들이다.

 

 

 

 

 

淸平山 在府東四十四里 古名慶雲山 洞壑泉石之美 大嶺以西罕有比 高麗李資玄隱居此山三十餘年 ○ 本朝李堣詩 路過淸平院。山高水淸淺。秋氣集兩岸。颼飀響翠巘。千年尙幽獨。可想高士踐。希夷相門胄。飄然謝簪冕。一去三十年。千仞同偃蹇 ○ 本朝許穆詩。 淸平積翠連四明。天晴削出靑芙蓉。山中瀑布灑山石。老龍垂鬣吐白虹。石門煙開洞天靜。靈池澹澹涵虛空。曉從仙老禮天壇。㗲然長嘯倚高峯。希夷老人今不在。我來可以追遺蹤。

禪宮碧瓦光玲瓏。三十六聖影還空。 

 

文殊寺 在淸平山下卽李資玄所居 ○高麗金富轍記春川淸平山者古之慶雲山而文殊院者古之普賢院也 初禪師承玄自唐來新羅至廣廟二十四年始來于慶雲山創蘭若曰白嚴禪院時大宋開寶六年也至文廟二十三年歲在戊申故散騎常侍李公顗爲春州道監倉使愛慶雲勝景乃卽白嚴之舊址置寺曰普賢院時熙寧元年也 其後希夷子棄官隱居于玆而盜賊寢息虎狼絶迹乃易山名曰淸平院名曰文殊而仍加營葺希夷子卽李公之長男名資玄字眞精住山凡三十七年云 ○寺有藏經碑 元泰定帝皇后以僧性澄所進佛經藏于此寺忠肅王令李齊賢撰碑文 牛頭寺 在牛頭山今廢爲遺址臨江夷岸爲臺形勝恧於昭陽亭

 

李資玄,高麗仁州人 性聰敏,登第,爲大樂署丞,忽棄官,入春州淸平山,蔬食布衣,以道自樂, 睿宗, 賜茶香,累詔徵之,資玄曰,臣始出都門,誓不復踐京華,遂上表曰,以鳥養鳥,庶無鍾鼓之憂,觀魚知魚,俾遂江湖之性,王知不可致,爲幸南京,遣其弟尙書資德,賜詩諭意,資玄赴行在,王曰,久慕此老道德,命上殿拜坐,上問養性之要,對曰,莫善於寡欲,乃進心要一篇, 未幾, 固請還山, 賜道服以還,卒於淸平, 賜諡眞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