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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평산문수사고사기(淸平山文殊寺故事記)」

상세정보

기문(記文)

나의 고향은 옛날부터 관람하는 아름다움이 많다고 칭하였는데, 더욱 드러나면서도 깊은 것은 청평산 뿐이다. 청평산의 승경은 울창한 숲과 험한 바위에 있지 않고, 반드시 문수사(文殊寺)에서 구해야 한다. 그러나 지금 절은 폐해져 잡초가 무성해진지 오래되었다.

내가 잔도가 있는 바위틈을 따라 10여리를 와서 문수사 터를 보니 경운산의 빼어난 산기슭이며, 영지(影池)는 신령스럽고 기이하다. 절벽에 걸린 것은 폭포가 되고 땅에 깔린 것은 바위가 되었다. 그윽하면서 깊고 가파르며 험하면서 가늠할 수 없는 것은 골짜기이다. 화려한 것은 철쭉이 계곡을 가득 채워서이다. 나무는 단풍나무와 녹나무가 계곡을 따라 있다. 외지고 그윽한 곳에 의거해 정수를 기를 수 있어서, 사회를 벗어나 혼자 사는 선비는 즐겨 은둔처로 삼으니 누추한 것이 아니고 마땅한 것이다.

절이 세워지고 만들어진 것은 그 연대를 살필 수 없다. 그러나 신라와 고려의 옛 제도를 칭하며 절의 스님은 서로 이야기를 전한다. 옛날에 만불도(萬佛圖) 두루마리 한 본이 있었는데, 당나라 평양공주(平陽公主)가 준 것이라 한다. 지금 절 문 앞에 저수량(褚遂良)⑴이 명령을 받들고 쓴 비가 있으니, 어떻게 해서 이와 같이 중국에 큰 이름을 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겠다. 고려의 이자현이 이자겸의 불법을 피하여 여기서 은거하였다. 도산시집(陶山詩集) 가운데 우리나라 은일전(隱逸傳)을 누가 지어 전하려나[東韓隱逸誰修傳]”가 이것이다. 조선에 이르러 김시습이 단종이 지위를 내려놓을 때 북한산에서 와서 이 절에 은거하였다. 이때부터 명성을 흠모하고 일을 좋아하는 무리들이 번갈아 아름다움을 칭하였고, 절의 명칭은 성 안에 알려졌다. 몇 백 년 지나 철종(哲宗) 말년에 불타는 재앙을 만나 전각과 선방은 거의 타서 없게 되었다. 법당(法堂)과 산문(山門)만 남아 경치 좋은 곳이 못쓰게 되었고 단청을 다시 세울 수 없음을 애석하게 여기지 않는 자가 없었다. 변고가 있기 전에 절 뒤에서 처절한 소리가 들려서 절의 스님이 괴이하게 여겼는데, 가서 살펴보니 보이지 않았다. 이와 같은 것이 삼 일되자 재앙이 일어났고, 마침내 구할 수 없는 데 이르렀다. ! 기이하구나! 지금 남겨진 터에 스님이 재물을 모으고 일을 감독하며 십여 개의 서까래를 세우고 난간과 기와를 덮고 스님들이 지키니, 쓸쓸한 것이 다시 예전의 모습이 없게 되었다.

! 절의 흥하고 폐함은 쇠하여 사라지는 것과 성하여 자라는 이치에 관계되는가. 지금 우리 황제가 문명의 빛나는 단서를 열어 신라 고려의 지극한 정치를 본떠 일찍이 끝없는 복을 쓰니 이 절의 흥성을 날짜를 가리켜 기다릴 수 있었다. 다만 앞 사람의 유적은 우리 고향의 아름다운 경관이지만 점차 사라졌으니 이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순조(純祖) 계사년(癸巳年; 1833) 선황고(先皇考)⑵ 효암공(曉庵公)이 일찍이 이 산에서 노닐다가 드디어 여기에 이름을 썼다. 다음 해인 갑오년(甲午年; 1834)에 대과(大科)에 뽑혔으니 지금도 먹물을 적신 것이 완연하다. 슬프다! 못난 내가 또한 지금 임금 계사년(癸巳年; 1893)에 이 산에 와서 노닐다가 이름을 기록하였고, 다음 해 갑오년(甲午年; 1894)에 외람되이 대과에 뽑혔다. 전후 햇수가 딱 들어맞는다. 조금도 착오가 없으니 산의 영험함이 이와 같이 우리 집안을 돌봐주신 것이다. 지금 이 산의 동쪽 10여리에 있는 부창리(富昌里)⑶ 뒷산 건좌(乾坐)⑷ 선친 신조(新厝)가 있으니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이에 적는다.

 

대한(大韓) 광무(光武) 5(1901) 신축년(辛丑年) 5

통훈대부홍문관시독(通訓大夫弘文館侍讀) 완산(完山) 이수인(李守寅)⑸ 삼가 쓰다.

1) 저수량(褚遂良): 당나라 초기의 서예가

2) 선황고(先皇考): 황제의 죽은 아버지.

3) 부창리(富昌里):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상건천리와 병합하여 청평리가 되었다.

4) 건좌(乾坐): 북서쪽을 등진 자리.

5) 이수인(李守寅): 생몰년미상, 조선후기 문신으로 춘천출신, 본관은 전주, 호는 순당(純堂), 고종때 문과에 급제하여 승지를 지냈다.

 

淸平山文殊院故事記

吾鄕古稱多臨觀之美, 而其尤著而深邃者, 淸平山是已, 淸平之勝, 不在乎茂林嵁岩, 必於文殊寺求之, 今寺亦廢蕪久矣, 余從棧道岩石間, 至十數里, 求覩其所謂文殊寺遺址則慶雲之秀麓也, 影池之靈異也, 懸崖者爲瀑, 薦地者爲岩, 窈而深峭, 險而不可測者, 洞壑也, 其華則躑躅盈谷, 其材則楓柟椽溪, 足可以挹窮幽而養眞腴, 遺世獨立之士, 樂爲之隱, 非陋, 宜也, 寺之刱設制度, 未攷其年代, , 稱羅麗之舊制而寺僧相傳說, 古有萬佛圖錦軸一本, 唐朝平陽公主所賜云, 今寺門前, 有褚遂良奉敎書碑, 則未知何以得大名於中國如此, 勝國時李公資玄, 避資謙之不軌, 隱居于此, 卽陶山詩集中, 東韓隱逸是誰傳者是也, 逮我朝, 金公時習, 莊陵遜位時, 自北漢來, 隱於此寺, 自是慕名好事之徒, 迭相稱美, 寺之名, 聞於域中, 歷屢百年, 哲廟末年, 遭回綠之災, 殿宇禪房, 殆無餘燼, 惟法堂及山門在, 人莫不嗟惜其勝地之廢棄, 丹雘之不可重建也, 其變出之前, 自寺後, 聞有聲凄絶, 寺僧怪之, 往尋則不現, 如是三日禍作, 竟至不救, 吁亦異哉, 今其遺址, 寺僧鳩財蕫役, 搆十數椽, 覆以櫟瓦, 其徒守之, 蕭然無復有昔日之狀, , 寺之興廢, 有關於消長之理歟, 今我 皇上, 啓文明之赫緖, 倣羅麗之至治, 嚮用無量之福則, 此寺之興, 指日可待而但其前人之遺蹟, 吾鄕之美觀, 漸至泯沒, 則是可惜也已, 純廟癸巳, 先皇考曉庵公嘗遊於此山, 遂題名於此, 粤明年甲午, 擢大科, 今漬墨宛然, 悲夫, 不肖亦以, 今上癸巳, 來遊此山, 仍爲題名, 又明年甲午, 猥忝大科, 其前後紀年符合, 毫無錯誤則抑山之靈, 眷顧吾家如是歟, 今玆山之東十數里, 富昌里後麓乾坐, 有先人新曆則何可忘也, 是以誌

大韓光武五年辛丑五月 通訓大夫弘文館侍讀 完山 李守寅 謹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