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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락공중수청평산문수원기(眞樂公重修淸平山文殊院記)」

상세정보

비문(碑文)

춘주(春州)의 청평산(淸平山)이란 것은 옛날 경운산(慶雲山)이요, 문수원(文殊院)이란 옛날의 보현원(普賢院)이다. 처음에 선사(禪師) 영현(永賢)이 당나라에서 신라국(新羅國)에 왔었는데, 태조(太祖)께서 즉위하신 지 후 18년 되는 을미(乙末)에 신라의 경순왕(敬順王)이 영토를 우리 나라에 바쳤으니, 이 때는 후당(後唐)의 청태(淸泰) 2년이었다. 광종(光宗) 24년에 선사가 처음 경운산에 이르러 절을 창건하고, ‘백암선원(白巖禪院)’이라 하였다. 이때는 송나라의 개보(開寶) 6년이었다. 문종(文宗) 23년 무신(戊申)에 전() 좌산기상시지추밀원사(左散騎常侍知樞密院事)인 이공(李公) ()가 춘주도감창사(春州道監倉使)가 되어서 왔다가, 경운산의 좋은 경치를 사랑하여 백암선원의 옛터에다 절을 짓고 보현원(普賢院)’이라 하였는데, 이때는 희령(熙寧) 원년이었다. 그 뒤에 희이자(希夷子)가 벼슬을 버리고, 여기에 숨어서 지내면서부터 도둑도 없어지고 호랑이도 종적을 감추었다. 마침내 산 이름을 청평산(淸平山)’이라 고쳤다. 또한 문수보살(文殊菩薩)이 나타난 것을 두 번 이나 보고, 불법의 요의(要義)를 마땅히 자문하여 결정해야 된다고 하여, 마침내 원()의 이름을 문수(文殊)’로 바꾸고 인하여 다시 수리하였다. 희이자는 곧 이공(李公)의 맏아들로 이름은 자현(資玄)이며, ()는 진정(眞精)인데, 용모가 헌칠하며 천성이 담박(淡泊)하였다. 원풍(元豐) 6년에 진사과(進士科)의 과거에 합격하여 원우(元祐) 4년에 대악서승(大樂署丞)에 있다가, 벼슬을 버리고 세상을 피하여 다니다가 임진강(臨津江)에 이르러서 강을 건너면서 스스로 맹세하기를, “이제 가면 다시는 서울에 들어가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그의 학문은 대개 공부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나, 깊이 불교의 이치를 연구하였고, 특히 참선을 좋아하였다. 스스로 말하기를, “일찍이 설봉어록(雪峰語錄)을 읽었는데 모든 천지가 모두 눈[]이다. 너는 어디에 쭈그리고 앉아 있느냐는 말이 있었다. 이 말에 바로 번쩍 깨달은 바가 있었다. 이때부터 부처님의 가르치심에 대하여 다시는 의심하거나 막히는 것이 없었다.” 하였다. 그리고 나서 우리나라의 명산을 두루 돌아다니며 옛날 성현(聖賢)의 유적(遺跡)을 탐방하였다. 뒤에 혜조국사(慧照國師)가 이웃한 산의 화악사(華岳寺) 주지로 있었기 때문에 왕래하면서 선()의 교리를 질문하였다. 산에 있으면서 다만 채소 음식과 누비옷으로 검소하고 절제하며 청정한 것을 낙으로 삼았다. 절 이외의 다른 골짜기에 한가롭게 거처하는 집을 지었는데, 그 암자불당정자 등이 모두 10여 개소나 되었다. 불당은 문성(聞性)이라 하였고 암자는 견성(見性), 선동(仙洞), 식암(息庵) 등으로 각기 그 이름이 있었다. 날마다 이 속에서 생활하는데 어떤 때는 홀로 앉아서 밤이 깊도록 자지 아니하기도 하며, 어떤 때는 반석 위에 앉아 하루가 지나도록 돌아오지 아니하기도 하며, 어떤 때는 견성암(見性菴)에서 입정(入定)하였다가 7일 만에 나오기도 하였다. 일찍이 문인에게 말하기를, “내가 대장경(大藏經)을 다 읽고 여러 서적을 두루 보았으나, 능엄경(楞嚴經)을 제일로 치니, 이는 마음의 근본을 새겨주고 중요한 방법을 발명한 것인데, 선학(禪學)을 공부하는 사람이 이것을 읽는 사람이 없으니, 진실로 한탄할 일이라.” 하고 드디어 제자들에게 이것을 공부하게 하니, 배우는 자들이 점점 많아졌다.

예종(睿宗)께서 두 번이나 내신들에게 명하여 차와 향과 금으로 수놓은 비단을 특별히 내리시고, 인하여 대궐에 들어오라고 명하였으나, 공은 강을 건널 때에 처음 먹었던 마음을 저버리고 싶지 않아 끝내 교명(敎命)을 받들지 아니하였다. 정화(政和) 7년에 임금의 행차가 남경(南京)에 거둥하시는데, 공의 아우인 상서(尙書) 자덕(資德)을 보내어 임금이 행차하시는 곳에 나오기를 청해서, 인하여 임금께서 지으시고 손수 쓰신 시 한 편을 그에게 내렸다. 이르기를

평소에 보기를 원하였더니 / 願得平生見

날이 갈수록 생각이 더하여라 / 思量日漸加

어진 이 높은 뜻을 빼앗긴 어려우나 / 高賢志難奪

나의 마음 간절함은 어이 하려나 / 其奈予心何

공은 표문을 올리어 이를 사양하였으나, 임금의 간절하신 마음을 돌이킬 수는 없었다. 마침내 그 해 8월에 남경(南京)에 나아가서 뵈었다. 임금께서는, “도덕이 높은 노인을 여러 해 동안 사모하였는데, 신하의 예절로 보아서는 안 된다.” 하고 인하여 궁전 위에 올라서 절할 것을 명하고, 임금께서도 답례로 절하셨다. 자리에 앉아 차를 내어 놓고 조용히 얘기하시고, 인하여 잠시 삼각산(三角山) 청량사(淸凉寺)에 머무르게 하고, 임금께서 내왕하시며 선학(禪學)의 교리를 질문하셨다. 공은 마침내 심요(心要)한 편을 저술하여 올렸다. 그리고 나서 산으로 돌아갈 것을 굳이 청하였다. 그러자 차, , 도구, 의복을 내리시어 그가 떠나는 길을 돌봐주시고, 왕비와 공주도 의복으로 선물하는 예절을 차렸다. 선화(宣和) 3년에 이르러 상서(尙書)는 다시 왕의 명을 받들고 산중에 나아가서 특별히 능엄강회(楞嚴講會)를 개최하게 하시니, 여러 곳에서 학자들이 모여들어 강의를 들었다. 4년에 지금 임금께서 즉위하시어 특별히 측근의 신하인 이봉원(李逢原)을 보내어 간곡히 위문을 베푸시고 인하여 차와 향과 의류를 내리었다. 7년에 공의 건강이 조금 안 좋아지자 나라에서는 내시인 신하와 국의(國醫)를 보내어 문병하시고 겸하여 차와 약을 내리었다. 공은 장사지낼 곳을 미리 예정해 두었는데 하루는 문인에게 말하기를 나는 오래 살지 못할 것이다. 내가 죽은 뒤에는 문인인 조원(祖遠)이 계속하여 이 절에 머무르고, 조원 이후에는 다시 도와 행실이 있는 사람을 택하여 서로 계속하여 주장이 되게 하라.” 하였다. 이 해 421일에 또 문인에게 이르기를, “인생의 목숨이란 덧없는 것이어서 나면 반드시 죽음이 있는 것이니, 부디 슬퍼하지 말고 도에 정신을 두어라.” 하더니, 말을 마치고 신시(申時)에 입적(入寂)하였다. 죽을 때에 임해서도 정신이 혼미하지 아니하여 보통 때처럼 웃으며 이야기하였다. 입적할 때에 이상한 향기가 방안에 자욱하더니, 차츰 온 산골에 두루 퍼져서 사흘 동안이나 그치지 않았다. 온 몸이 옥같이 깨끗하였고 몸을 움직이는 것이 살아 있을 때나 마찬가지였다. 23일에 모두 유언대로 장사를 지냈다. 원우(元祐) 4년부터 선화(宣和) 7년까지 산에 거주한 것이 17년이고, 나이는 65세를 누리었다. 건염(建炎) 4년 가을 8월에 특별히 시호(諡號)를 진락공(眞樂公)이라고 내렸다. 저술한 문장으로는 추화백락공락도시(追和百樂公樂道詩), 남류시(南遊詩), 선기어록(禪機語錄)1, 가송(歌頌)1, 포대송(布袋頌)1권이 있다.

이에 대하여 논하여 본다면 예부터 고상한 사람으로 숨어서 지낸 군자는 많았다. 대개 외로운 신하나 불행한 사람이 궁벽하게 지내면서 출세할 희망이 없는 자라야 이렇게 할 수 있었다. 또 당초에는 산중에서 생활하는 것을 만족스럽게 여기다가 마침내 뜻을 굽히고 몸을 욕되게 하는 자도 있었다. 그러나 왕과 연혼한 세력 좋은 집 사람으로서 산림에서 일생을 마친 사람은 아직 듣지 못하였다. 공은 부귀의 세력을 가졌고, 또한 문장으로 높은 과거에 급제하고 좋은 벼슬에까지 올랐으니, 조정에 들어가서는 대신 노릇 하며, 나가서는 장군이 되는 것은 땅에서 지푸라기를 줍는 것과 같을 뿐이다. 그런데도 부귀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신세를 뜬구름과 같이 생각하여 영원히 산중에 들어가서 다시는 서울에 돌아오지 아니하였으니, 또한 이상스럽지 아니한가. 또한 더구나 공의 집안은 여러 세대에 걸쳐 임금의 외척으로 삼한(三韓)의 으뜸가는 양반인데, 공만이 홀로 속세를 떠나 자유롭게 노닐며 세속적인 귀찮은 일에 미치지 않았다. 인격과 명망이 더욱 높았으니, 어찌 지식 있는 사람들만이 칭찬하며 탄식할 뿐이겠는가. 시골에서 농사짓는 백성들까지도 소문을 들은 사람이면 누구나 사랑하며 존경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대개 충심으로 사람을 일깨우고 믿음으로 일을 대하면 그 지극한 정성이 인간과 귀신에게까지 감동되지 않는 법이 없는 것이다. 이것이 산중에 있을 적에는 도둑이 없어지고 호랑이가 종적을 끊은 이유가 아닌가. 옛적에 양홍(梁鴻)이 패릉산(覇陵山)에 들어갈 때에는 고상한 선비라 할 수 있었으나, 그의 아내인 맹광(孟光)과 함께 숨어서 살았고, 방공(龐公)이 현산(峴山)의 남쪽에 거처하면서 성중에 들어간 적이 없었다 하나, 오히려 처자를 데리고 있었으니, 어찌 공이 기욕(嗜欲)에 대한 감정을 잊어버리고 아무 것도 없는 세계에 몸을 둔 것과 같겠는가. 담박하고 고결하여 일반 사람으로 서는 맛볼 수 없는 것을 맛보고, 처음부터 끝까지 흔들린 바가 없어 확고한 높은 절조가 세력에 의하여 변하지 아니하였다. 서늘한 맑은 바람은 언제나 사람의 마음속을 비쳐 주고 있으니 정말로 고상한 인품이며, 숨어 있는 군자로서는 아마 고금에 한 사람뿐이리라.

문인(門人)인 조원(祖遠)이 공의 행장(行狀)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기()를 지어 주기를 청하였다. 그의 청이 간절하였으므로, 마침내 이 기를 쓰면서 아울러 공의 약력을 이렇게 자상히 말하였다. 그 청평산(淸平山)의 산과 물과 골짜기의 좋은 경치는 실로 우리나라에서 아름다운 곳이지만, 이것은 장차 문장에 능한 사람을 기다려서 짓게 하도록 하고, 여기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정의대부국자감대사성보문각학사지제고(正議大夫國子監大司成寶文閣學士知制誥) 김부철(金富轍) 쓰다.

대송(大宋) 건염(建炎) 4(1130) 경술(庚戌) 11월 일

문인(門人) 정국안화사주지(靖國安和寺住持) 전법사문(傳法沙門) 탄연(坦然) 쓰다.

문인(門人) 계주(繼住) 전법사문(傳法沙門) 조원(祖遠) 돌을 세우다.

문인(門人) 대사(大師) 지원(知遠) 글자를 새기다.

비음(碑陰)

청평산거사(淸平山居士) 진락공(眞樂公)을 제사지내는 글

강서견불사(江西見佛寺)⑴ 사문(沙門) 혜소(惠素) 짓고, 정국안화사(靖國安和寺)⑵ 주지(住持) 탄연(坦然) 글씨 쓰고, 승법사문(承法沙門) ()이하 빠졌다

 

을사년(乙巳年) 8월 일, 문인 탄연(坦然) 등은 삼가 차와 과일과 음식 등의 제물로써 청평산 농서(隴西)이하 빠짐! 도는 언제나 이름 할 수 없나니, 말을 하게 되면 도가 아니며 상고 시대보다 오래 되었어도 늙지 아니합니다. 영산회상에서 꽃을 들어 요체를 보이시자 오직 대가섭만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습니다. 우주는 텅 비어있고 오묘한 도는 고요하니, 정법안(正法眼)⑶ 속에는 금가루조차 남기지 아니합니다. 이 일이야말로 정교하고 은미한 것, 하나같이 어찌 그리도 기이합니까? 마치 큰 화로 속에 한 송이 눈송이 떨어진 듯합니다.

유마거사가 한 번 침묵하자 방장(方丈)이 텅 비었고, 방공 또한 말과 침묵이 스스로 여여(如如)했습니다. 두 분 대사(大士)께서는 사물의 처음에서 노닐었으니, 우리 거사께서는 그 일을 듣고 기뻐하셨습니다. 벌열 가문에서 태어나 자랐지만 그 정에 빠지지 않고, 부귀를 술지게미처럼 여기고 높은 관직을 개미처럼 생각했습니다. ()로 자신을 장식했을 뿐 높은 벼슬을 영광스럽다 여기지 않았으며, 산림과 들판에서 평생을 보냈습니다. 조사(祖師)의 심인(心印)을 높이 잡고 올바른 명령으로 마땅히 수행하여, 천지를 움켜쥐고 스스로 주관하는 맹주가 되었습니다. 운문(雲門)⑷의 정수와 설두(雪竇)⑸의 꽃부리, 오묘한 기틀을 움켜잡아 밝은 도리를 완전히 드러내셨습니다. 단정히 앉아 마음을 모으니 담장과도 같고 벽과도 같아서, 텅 비고 침묵하여 그 정신에는 어떤 욕망도 없으셨습니다. 인간 세상의 어떤 지식도 모두 잊으며 선과 악도 모두 풀어버리고, 오직 고요하게 덕()의 집을 지키셨습니다. 배가 고프면 향기로운 밥을 먹고 목이 마르면 이름난 차를 마시니, 오묘한 쓰임이 종횡으로 이루어져 그 즐거움이 끝이 없으셨습니다. 현사(玄沙)의 언계(偃溪)와 영설(靈雪)의 도화(桃花), 귀를 기울이고 눈을 머무르게 하여 불사(佛事)가 떠들썩하게 일어났습니다. 비록 혼자 자리에 서 계셔도 사물에 의해 번거롭게 되는 일이 없었으며, 배우는 사람들이 뜰에 가득하게 모여 베풀어 주시는 불법의 은혜 입기를 원하였습니다. 조계(曹溪)의 물방울 하나가 그릇을 따라 널리 은택을 미치니, 이미 사람들에게 준 것이 잠깐 사이에 끝이 없었습니다. 밝은 거울이 경대 위에 갖춰져 있으니 오랑캐든 중국 사람이든 여기에 나타나니 기미를 타고 응하여 변화함은 번개처럼 빨랐습니다. 때를 벗겨내고 빛이 나도록 갈아내니 쇠를 갈아 매끈하게 만든 듯하고, 망상을 녹여 없애니 마치 눈이 녹은 뒤 밝은 해가 나타나는 듯합니다. 남들과 달라서 모가 난 행실을 하지 않고, 그 빛에 어울려 살았습니다. 나무꾼들과 더불어 자리를 다투고 새의 무리 속으로 들어가 함께 행동하였습니다. 풀 우거진 들판에서 서성거리고 산 속 집에서 시를 읊조리면서, 형체와 덕을 온전히 보존하니 어떤 외물도 공을 손상시키지 못했습니다. 한가롭게 남은 것들을 펼쳐서 문장을 지었으며, 마음이 편안하고 담박하여 날카로운 칼끝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혹은 노래 부르고 혹은 송축하였으되 오직 도()만을 드날렸으며, 근원을 믿고 나아가니 그 흐름은 아득히 바다처럼 일렁였습니다. 인간 세상을 싫어하여 버리고 정신은 아득한 우주 속에서 노닐었으니, 어느 곳에 의지하는가? 천당과 극락입니다. 죽음에 임해서도 마음이 고요하여 말투는 평상시와 같았으니 때 맞춰 오고 때에 맞춰 가매 천지의 조화와 주고받았습니다.

나와 몇몇 사람은 예부터 공의 문하에서 노닐어 가르침을 받아 조금이나마 깨닫는 바가 있었습니다. 우리의 죄를 쉬게 해 주셨고 우리의 어둠을 깨우쳐 주시니, 내리는 비에 촉촉함을 입은 듯하고 난초 옆에 있었던 덕에 아름다운 향기가 몸에 밴 듯합니다. 태산이 무너지고 대들보가 망가져서 온 세상이 텅 비었으니, 저희는 누구를 의지해야 합니까? 때에 맞는 과일과 음식으로 제사를 마련하고 제문을 올리나니, 애정을 이곳에 모아 주소서.(이하 빠짐)

 

위 비는 대정(大正) 3(1914) 1219일 군수(郡守) 신규선(申圭善), 군서기(郡書記) 조전직부(朝田直夫), 고원(雇員) 강한구(姜漢求) 입회 아래 함 가운데 넣어 국보로 극락보전(極樂寶殿)에 보관한다.

 

1) 강서견불사(江西見佛寺): 예성강의 서쪽에 있기 때문에 강서사라 하였고, 절에서 주위를 보면 부처를 보는 듯한 경치라 하여 견불사라고도 하였다. 신라 말기에 도선(道詵)이 양씨(梁氏) 성을 가진 부자에게 권하여 그 집을 절로 삼았다. 고려 때에는 대각국사의천의 제자로 경전에 밝고 시문에도 능했던 혜소(惠素)가 주지로 있었기 때문에 김부식(金富軾) 등을 비롯한 시인묵객들이 자주 찾았으며, 1092(현종 9)선종의 왕태후가 이곳에서 천태종 예참법(禮懺法)1만일 동안 열었던 사실로 미루어보아 천태종의 종찰(宗刹)이었던 국청사(國淸寺)와 깊은 관련이 있었던 절임을 알 수 있다.

2) 정국안화사(靖國安和寺): 개경에 있던 절. 고려 시대의 사찰 가운데 유수한 사찰로, 역대 왕의 행행(幸行)이 잦았을 뿐만 아니라, 숙종(肅宗)과 순덕왕후(順德王后)의 진영(眞影)이 이곳에 있어서 격이 높은 사찰이었다.

3) 정법안(正法眼): 부처님이 지혜의 눈으로 갈무리한 올바른 법이란 뜻.

4) 운문(雲門): 당나라의 선승, 이름은 문언(文偃).

5) 설두(雪竇): 북송대 운문종의 선승이며, 설두송고(雪竇頌古)를 비롯한 그의 어록은 문자선의 정수로 잘 알려져 있다.

 

眞樂公重修淸平山文殊院記 【◦東文選하야 加入 

春州淸平山者, 古之慶雲山而文殊院者, 古之普賢院也, 初禪師承玄(東文選作賢), 自唐來于新羅國, 至廣庙二十四年, 歲在乙未, 新羅敬順王納土, 是時後唐淸泰二年也, 至光廟二十四年, 禪師始來于慶雲山, 刱蘭若, 曰白岩禪院, 時大宋開寶六年也, 至文廟二十三年歲在戊申, 故散騎常侍知樞密院事李公顗, 爲春州道監倉使, 愛慶雲勝境, 乃卽白岩之舊址, 置寺曰普賢院, 時熙寧元年也, 其後希夷子棄官隱居于此, 而盜賊寢息, 虎狼絶迹, 乃易山名曰淸平, 又再見文殊㝠應, 咨決法要, 乃易院名曰文殊, 而仍加營葺, 希夷子, 卽李公之長男, 名資玄, 字眞精, 容貌瑰偉, 天性恬淡, 元豊六年, 登進士第, 至元祐四年, 以大樂署丞, 棄官逃世, 行至臨津, 過江自誓曰, 此去不復入京城矣, 其學盖無所不窺, , 深究佛理而偏愛禪寂, 自稱嘗讀雪峯語錄云, 盡乾坤是箇眼, 汝向甚處蹲坐, 於言下豁然自悟, 從此以後, 於佛祖言敎, 更無疑滯, 旣己徧遊海東名山, 尋訪古聖賢遺迹, 後遇慧炤(東文選作照)國師, 住持山隣華岳寺, 往來諮問禪理, 居山惟蔬食衲衣, 以儉約淸淨爲樂, 院外別洞, 構閒燕之所, 其庵堂亭軒, 凡十有餘處, 堂曰聞性, 庵曰見性, 曰仙洞, 息庵等, 各有其名, 日以逍遙於其中, 或獨坐, 夜艾不寐, 或坐盤石, 經日不返, 或入定見性庵, 七日乃出, 嘗謂門人曰, 吾窮讀大藏, 遍閱群書, 而首楞嚴經, 乃符印心宗, 發明要路, 而禪學人, 未有讀之者, 良可歎也, 遂令門弟, 閱習之而學者寢盛, 睿廟再命內臣等, 以茶香金繒, 特加賜予, 仍命赴關, 公不欲負過江初心, 竟不奉詔(東文選作敎)政和七年, 乘輿幸于南京, 遣公之舍弟尙書資德, 請赴行在, 仍以親製手書詩一首, 賜之曰, 願得平生見, 思量日漸加, 高賢志難奪, 其奈予心何, 公上表辭之, 而上意(東文選無上意二字)懇切不回, 乃以其年八月, 謁于南京, 上曰, 道德之老, 積年傾慕, 不可以臣禮見之, 固命拜于殿上, 上亦答拜, 旣坐, 進茶湯, 從容說話, 仍命蹔止于三角山淸凉寺, 上乃往返, 諮問禪理, 公於是, 述進心要一篇, 旣而固請還山, 乃賜茶香道具衣服, 以寵其行, 而王后(東文選作妃)公主, 亦以衣服, 各致餽獻之禮, 至宣和三年, 尙書再奉王命, 詣于山中, 特開楞嚴講會, 而諸方學者, 來集聽受, 四年, 今上卽位, 特遣近臣李逢原, 曲加存問, 仍賜茶香衣物, 七年, 公有微疾, 遣內臣御(東文選作國)醫問疾, 兼賜茶藥等, 公豫占安葬之地, 一日謂門人曰, 吾不久住, 吾沒後, 門人祖遠, 繼住山門, 自遠以後, 亦擇有道行者, 相繼爲主, 是年四月二十一日, 又謂門人曰, 人命無常, 生必有死, 愼勿爲戚, 以道爲懷, 言訖, 申時入寂, 臨終, 聰明不亂, 談笑如平生, 入寂時, 異鄕滿室, 漸徧山洞, 三日不歇, 擧體潔白如玉, 屈伸如(東文選有一平字), 二十三日, 襄事, 並如遺敎自元祐四年, 至宣和七年, 住山凡三十七年, 享年六十五, 至建炎四年秋八月, 特賜諡曰眞樂公, 所著文章有追和百藥(東文選作樂)公樂道詩一卷, 南遊詩一卷, 禪機語錄一卷, 歌頌一卷, 布袋頌一卷, 嘗試論之, 自古高人隱君子多矣, , (東文選無然字)大抵孤臣孽子, 窮僻不遇者而後, 能之, 又始則甘心於山林, 終則降志辱身者有之, 若夫王親勢家, 而能終身於林下者, 未之聞也, 公以富貴之勢, 又以文章, 取高第登美仕, 其入相而出將, 如拾地芥耳, 而棄富貴如弊屨, 觀身世如浮雲, 長往山中, 不復京城, 顧不異哉, 又況公之族親, 累世外戚, 爲三韓之甲族, 而公獨逍遙乎塵垢之外, 而世累不及, 德譽愈尊, 豈特爲有識者, 咨嗟歎息而已哉, 至於村野畎畝之氓, 苟聞德風者, 無不愛而敬之, 盖諭人以忠, 待物以信, 而至誠感乎人神,

此所以居山中, 盜賊寢息, 虎狼絶迹者歟, 昔者, 梁鴻之入覇陵山也, 可謂高土, , 有孟光之俱隱, 龐公之居現山之陽也, 未嘗入城府, , 有妻子之携, 豈若公忘情於嗜欲, 放身於無何, 恬淡高潔, 味乎人之所不味, 而始終無所撓, 確乎高節, 不爲世遷移, 凜然淸風, 常照人心膽, 眞可謂高人隱君子, 盖古今一人而已, 門人祖遠, 以公行狀, 請余爲記, 其請勤勤, 乃爲之記, 而兼詳言公之終始本末如此, 若夫淸平山水洞壑之幽勝, 實東方之美者, 將以待能文之士賦之, 此不及焉, 正議大夫國子監大司成寶文閣學士知制誥金富轍記

大宋建炎四年庚戌十一月日 門人靖國安和寺住持傳法沙門 坦然 書

門人繼住傳法沙門 祖遠 立石

門人大師 知遠 刊字

 

 

(碑陰)

祭淸平山居士眞樂公之文

江西見佛寺沙門惠素 述 靖國安和寺住持坦然 書 承法沙門祖(已下缺)

維乙巳年八月 日, 門人坦然等, 謹以茶果肴饌之奠, 敬告于淸平山隴西(已下缺)嗚呼, 道常無名, 言而非道長於上古, 而不爲老靈山一會, 拈花示要唯大迦(已下缺)葉無物, 希夷寂滅正法眼中, 不留金屑, 玆事精微, 一何奇絶如洪爐中, 一點(已下缺)萬丈空虛亦有龐公, 語黙自如是三大士, 遊物之初, 繄我居士, (已下缺), 粃糠富貴, 螻蟻公卿道與之飾, 軒冕非榮山林皐壤, 適我(已下缺)乾坤, 自爲主盟雲門之髓, 雪竇之英, 囊括玄機, 終始發明(已下缺)端神無卻智照皆忘, 善惡都釋惟寂惟寞, 守德之宅飢餐香飯, (已下缺)玄沙偃溪, 靈運桃花側耳寓目, 佛事喧譁雖立於獨, 物所煩累(已下缺), 隨器普被旣以與人, 而已不匱當臺, 胡漢斯現乘機應變, 迅乎(已下缺)經鍊消融妄想, 如雪見眼行不崖異, □□其光爭席, 入鳥同行(已下缺)形全德, 勿莫之像間以緖餘, 發爲文章恬和平湛, 不露鋒鋩或歌或頌, 惟道(已下缺) 其流茫洋厭人棄世, 神遊寥廓何方之依, 天堂極樂臨絶從容, 辭氣(已下缺)顧予數子, 舊遊門庭獲聞謦欬, 稍有惺惺息我之鯨, 曉我㝠㝠, 行雨蒙潤, (已下缺)其頹, 梁木其毁世界空虛, 吾將疇倚我果維時, 我肴惟旨設祭陳辭, 情鍾於此(已下缺)

右碑大正三年十二月十九日郡守申圭善, 郡書記朝田直夫, 雇員姜漢求立會下櫃中하여 國寶로써 極樂寶殿藏置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