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의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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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천(山川)】 청평산(淸平山) 일명 경운산(慶雲山)이라고도 한다. 양구현(楊口縣) 사명산(四明山)으로부터 와서 용화산(龍華山)의 주맥(主脈)이 된다. 관문(官門)으로부터 북쪽으로 40리 떨어져 있다. 고려 때 이자현(李資玄)(1)이 이 산에 들어와 문수원(文殊院)(2)을 짓고 살았다. 무척이나 선설(禪說)을 좋아하여 골짜기 안의 그윽하고 외진 곳에 식암을 지었다. 둥글기가 마치 고니 알 같았고 겨우 두 무릎을 움츠릴 정도였는데, 그 가운데 앉아 수개월 동안이나 나오지 않았다. 과거를 함께 급제한 곽여(郭璵)(3)가 부절(符節)(4)을 지니고 관동(關東)으로 와 방문하고 시(詩)를 주기를,

 

청평(淸平)의 산수는 상수(湘水)(5)의 물가와 같은데 / 淸平山水似湘濱

우연히 옛 사람을 만나 보는구나. / 邂逅相逢見故人

삼십 년 전 우리는 함께 급제하였는데 / 三十年前同擢第

이제 천리 밖에서 따로 깃들고 있노라. / 一千里外各棲身

뜬 구름처럼 골짜기에 들어오더니 세상 일이 없고 / 浮雲入洞曾無事

밝은 달이 냇물을 상대하니 티끌에 물들지 않노라. / 明月當溪不染塵

말없이 오래 거처하는 곳을 바라보니 / 目擊無言良久處

담담하게 옛 정신이 서로 비추어 오노라. / 淡然相照舊精神

 

 

이에 자현(資玄)이 화답하기를,

따뜻함이 시내와 산을 두루 돌면서 봄이 돌아왔는데 / 暖遍溪山暗換春

문득 신선 지팡이 짚고 은둔자를 방문하였네. / 忽紆仙仗訪幽人

백이(伯夷)와 숙제(叔齊)(6)가 세상 피한 것은 천성 보존함이요 / 夷齊遁世唯全性

직(稷)(7)과 설(契)이 나라 일에 부지런함은 자신 위해서 아니었네 / 稷契勤邦不爲身

조서(詔書)를 받들고 온 이 때 옥패물(玉佩物)이 쨍그랑 거리나. / 奉詔此時鏘玉佩

어느 날 관을 걸어 두고 옷의 티끌을 떨쳐 버릴는지 / 掛冠何日拂衣塵

어느 때나 이곳에서 함께 은둔하면서 / 何當此地同棲隱

종래의 사그러지지 않는 정신을 길러나 볼까 / 養得從來不死神

이라 하였다. 

 

【사찰(寺刹)】 문수사(文殊寺) 221칸이고 현(縣) 북쪽 40리 청평산(淸平山) 아래에 있다. 일명 청평사(淸平寺)라고 하는데, 즉 이자현(李資玄)이 살던 곳이다.

○ 고려 김부철(金富轍)의 기(記)에, “춘주(春州)의 청평산은 옛날의 경운산(慶雲山)이고, 문수원(文殊院)은 옛날의 보현원(普賢院)이다. 처음에 선사(禪師) 승현(承賢)이 당(唐)나라로부터 신라에 와서는 고려 광종(光宗) 24년에 이르러 처음으로 경운산에 와서 절 백암선원(白巖仙院)을 창건하였다. 이때가 대송(大宋) 개보(開寶) 6년이다. 문종(文宗) 23년 무신년(戊申年)에 이르러,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 이의(李顗) 공(公)이 춘주도(春州道)의 감창사(監倉使)가 되었을 때, 경운산의 좋은 경치를 사랑하여 백암(白巖)의 옛 터에 절을 세우고 보현원이라 하였다. 이때가 희령(熙寧) 원년이다. 그 뒤에 희이자(希夷子)가 벼슬을 버리고 이곳에서 은거하니 도적이 사라지고 호랑이와 이리가 자취를 감추었다. 이에 산의 이름을 고치어 청평(淸平)이라 하고, 원명(院名)을 문수(文殊)라 하고는 이어 단장과 수리를 하였다. 희이자는 곧 이공(李公)의 장남이니, 이름은 자현(資玄)이고, 자(字)는 진정(眞精)이다. 산에 머무른 지가 도합 37년이나 되었다”라 하였다.

 

○ 원나라 태정제(泰定帝)의 황후가 중 성징(性澄)과 윤견(允堅) 등이 바친 불경(佛經)을 이 절에 비치하였다. 이제현(李齊賢)이 왕명을 받들어 비문(碑文)을 지었는데, 그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태정(泰定) 4년 3월 경자(庚子)에 첨의정승(僉議政丞) 신 흡(恰) 등이 중알자(中謁者)로 하여금 왕께 보고하기를, ‘천자(天子)의 근신 사도(司徒) 강탑리(剛塔里)와 중정원사(中政院使) 홀독첩목아(忽篤帖木兒)가 천자의 황후에게서 명령을 받고 사자로 와서 중 성징과 시인(寺人) 윤견(允堅) 등이 바친 불서(佛書) 한 질을 가져다가 청평산 문수사에 귀속·비치시키고, 돈 1만 꾸러미(萬緡)를 시주하여 그 이식(利息)으로 황태자(皇太子)와 황자(皇子)를 위하여 복을 빌며, 황태자와 황자의 탄신을 기하여 중들에게 음식을 대접하고, 경(經)을 열람하게 하는 것을 연중행사로 하라 하셨습니다. 또한 비를 세워 그 뜻을 영원토록 보이게 하라 하셨습니다. 신(臣) 등이 가만히 생각하건대, 불법(佛法)이 중국에 들어와서 세대(世代)를 따라 흥하기도 하고 쇠퇴하기도 한 것이 거의 천여 년이 되었습니다. 원나라 조정에서는 그 도(道)가 무위(無爲)로써 근본을 삼는 것이 성인(聖人)의 다스림에 부합되며 널리 구제함을 마음으로 하는 것이 어진 정치에 도움됨이 있다고 하여, 존숭하고 신망함을 더욱 돈독히 합니다. 이제 이미 역참(驛站)의 전거(傳車)로써 그 불서(佛書)를 수천 리 밖에 있는 깊은 산중까지 수송하고, 또 절을 유지할 재물을 세워서 그 승도(僧徒)들의 생활을 넉넉하게 하였습니다. 이 일은 곧 불도들의 행복입니다. 이름난 산과 복된 땅이 온 천하에 적지 않게 있건만 저희 나라를 비루하게 여기지 않으시고 여기에 황실의 복을 비는 곳을 설치하셨으니 이는 단지 불도(佛徒)들만의 행복이 아니고, 또한 저의 나라의 행복한 일입니다. 장차 크고 특별하게 기록하여 영원무궁하게 자랑하며 빛나게 해야 될 일입니다. 하물며 중궁(中宮)의 전지(傳旨)가 있는데 감히 공손히 받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청컨대 붓을 든 자에게 말씀하여 기(記)를 짓게 하시옵소서’하였습니다. 이에 신(臣) 아무개에게 명(銘)을 지으라고 명령하시니, 신(臣) 아무개는 명을 짓기를, ‘크도다, 이미 원나라의 어진 정치 대대로 내려 왔네, 원나라의 어진 정치는 따뜻한 봄날 같고 때에 알맞은 단비 같아서, 천하의 만물이 순조로이 생성되는구나. 금선(金仙)이 무위(無爲)로써 교화를 삼은 것을 흠모하여, 그 흙부스러기와 지푸라기를 써서 산 것을 이롭게 하고 사나움을 금지하니, 존숭하고 공경할 만하도다. 그 무리들을 후하게 다시 세워 부역도 시키지 않고 세금도 부과하지 않으면서, 불서(佛書)만을 오로지 공부하게 하네. 그 불서는 천 상자도 넘어서 넓고 크기가 안개낀 바다와 같구나. 그 정미하기는 호리(毫釐)를 쪼갠 것과 같고 광대하기는 천지를 포함한 것 같도다. 율(律)은 계(戒)를 쫓아 서고, 논(論)은 정(定)으로부터 일어나니, 불경을 연술(演述)함은 지혜가 밝아지는 길이로다. 크도다, 저 규헌(犪軒)이여. 높도다, 양거(羊車)와 녹거(鹿車)에 실린 훈훈한 그 향기가. 치자꽃이 숲에 가득하도다. 처음 천축(天竺) 땅에서 모은 이는 가섭(迦葉)과 아난타(阿難陀)이었고, 처음으로 진(震) 땅에 전파한 이는 등(騰)과 난(蘭)이었다. 양(梁) 나라에서는 쭉정이를 취하였으나 우리는 그 곡식을 맛보았네. 당(唐)에서는 그것을 돌이라고 짐작하였으나, 우리는 그것을 옥(玉)으로 쪼개었네. 저 중 성징(性澄)과 저 시인(寺人) 윤견(允堅)은 입은 옷은 다르지만 마음은 서로 같아서 이미 불경(佛經)의 서사(書寫)를 성취하고 그 성공을 아뢰니, 천자의 황후가 가상히 여기시고 그것을 간직할 땅을 계책하여 말씀하시기를, ‘삼한(三韓)은 선(善)한 것을 즐기고 의(義)를 돈독하게 지키는데, 고려의 지금 임금은 우리가 낳은 조카이니 복(福)을 빌어 황실에 보답할 그의 정성을 믿는다. 그 나라의 동쪽에 산이 있고 절이 있으니, 길이 막히고 먼 것을 꺼리지 말고 우역(郵驛)을 통하여 가서 베풀지어다. 내탕고(內帑庫)의 꾸러미 돈을 끌어내어 그 승도(僧徒)들을 먹고 살게 하고, 이어서 지키도록 왕과 신하들에게 부탁하라’ 하시었네. 왕이 절하고 머리 조아리며 천자(天子)의 만세(萬歲)를 송축했네. 천자와 황후가 함께 하고, 근본과 자손이 100대(代)를 누리면서 제잠(鯷岑)에 기초가 뭉그러지고 접해(鰈海)에 물이 말라 티끌이 날지언정 이 공덕의 쌓임은 이지러지지 않고 떨어지지 않으리라.”

 

 

○ 신흠(申欽)(8)의 시(詩)에,

게으른 손 절을 찾아 오르니 / 倦客尋初地

드높은 비탈 위에 절간이 있네 / 懸(9)崖闢梵盧

구름 속에 진락공(眞樂公)의 집이 트이고 / 雲開眞樂觀

신령한 용 열경(悅卿)의 글씨 보호해 / 龍護悅卿書

폭포수는 짚신을 뿌려 적시고 / 飛瀑沾芒屐

돌다리 대가마로 건너 간다네 / 危矼住(10)筍輿

동산 위에 개인 달 둥실 떠올라 / 東林看(11)月上

하늘 그림자 텅 빈 못에 떨어져 / 天影落潭虛

라고 되어 있다.

 

선동식암(仙洞息庵) 6칸이다. 현(縣) 북쪽 45리 청평산에 있다.

견성암(見性菴) 6칸이다. 현(縣) 북쪽 45리 청평산에 있다.

흥복사(興福寺)(12) 30칸이다. 현(縣) 서쪽 30리 삼악산(三岳山)에 있다.

반수암(伴睡菴) 28칸이다. 현(縣) 서북쪽 100리 화악산(華岳山)에 있다.

우두사(牛頭寺) 현(縣) 북쪽 15리 우두산(牛頭山)에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 

 

이자현(李資玄) 문하시중(門下侍中) 자연(子淵)(13)의 손자이다. 성품이 총명하고 민첩하며 체격이 크고 훌륭하였다. 과거에 급제하여 대악서승(大樂署丞)이 되었으나, 홀연히 관직을 버리고 춘주(春州) 청평산(淸平山)에 들어가 선도(禪道)로써 스스로 즐겼다. 예종(睿宗)이 여러 번 부르니 자현(資玄)이 말하기를, “신(臣)이 처음에 도성의 문을 나올 때에 다시는 서울의 화려함을 밟지 않겠노라고 맹세하였습니다. 그러니 감히 부르심을 받들지 못 하겠나이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표를 올려 말하기를, “새의 본성대로 새를 길러서 종고(鐘鼓)의 걱정이 없게 하시고 물고기를 관찰하여 물고기를 알아서 강호(江湖)를 좋아하는 물고기의 본성을 이루게 하소서”라고 하였다. 왕이 안동(安東)에 행차하여 다시 불러 청량사(淸凉寺)에 거처하게 하였으나, 얼마 안 있어 청평산(淸平山)으로 돌아왔다가 생을 마쳤다. 시호는 진락(眞樂)이다. 자현(資玄)의 자(字)는 진정(眞精)이고 도호(道號)는 희이자(希夷子)이다. 시종의 사적(事跡)이 청평사기와 비문(碑文) 중에 있다.

김시습(金時習) 자(字)는 열경(悅卿)이고 호(號)는 매월당(梅月堂)이다. 광묘조(光廟朝)에 세상을 피해 은거하였는데, 청평산에서 거처하였다. 또 사탄(史呑)의 산수(山水) 간에 정사(精舍)를 지었다. 정처 없이 유랑하였는데, 생을 어디서 마쳤는지 알 수 없다. 

 

1) 이자현(1061~1125): 본관 인주(仁州). 호는 식암(息庵)·청평거사(淸平居士)·희이자(希夷子) 등이다. 1089년 과거에 급제하여 대악서승(大樂署承)이 되었으나, 관직을 버리고 춘천의 청평산(淸平山)에 들어가서 아버지가 세운 보현원(普賢院)을 문수원(文殊院)으로 고치고 당(堂)과 암자(庵子)를 짓고는 안빈(安貧)으로 일관했다. 시호는 진락(眞樂)이다.

2) 김부철(金富轍)의 기문(記文)에 따르면, 청평산의 고명(古名)은 경운산이며, 문수원의 고명(古名)은 백암선원(白巖仙院)·보현원(普賢院)이었다. 백암선원은 선사(禪師) 승현(承賢)이 당나라로부터 신라로 와서 광종(光宗) 연간에 지은 것이고, 보현원은 이자현의 부 이의(李顗)가 춘천에 감창사(監倉使)로 와서 지은 것이다. 이후 이자현이 청평산(淸平山)에 입거하면서 보현원을 문수원(文殊院)으로 경운산을 청평산으로 개칭하였다.

3) 곽여(1058~1130): 본관은 청주(淸州), 호는 동산거사(東山居士), 시호는 진정(眞靜)이다.

4) 부절(符節): 조선왕조 때 감사(監司), 유수(留守), 대장(大將), 병사(兵使), 통제사(統制使) 등이 지방으로 부임할 때 신임의 표시로 내려주던 수기(手旗)를 말한다.

5) 상수(湘水): 상강(湘江)이라고도 한다. 호남성(湖南省) 최대의 강.

6) 백이(伯夷)와 숙제(叔齊): 전해오는 바에 따르면, 선군(先君)이 생전 동생인 숙제에게 왕위를 물려주고자 하였는데, 사후 숙제와 백이 모두 왕위를 서로에게 사양하다가 결국 둘 다 주(周)나라로 도망하였다 한다.

7) 직(稷) :오곡(五穀)의 신.

8) 신흠(1566~1628).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경숙(敬叔), 호는 현헌(玄軒)·상촌(象村)·현옹(玄翁)·방옹(放翁)으로, 개성도사(開城徒事) 승서(承緖)의 아들이다. 1613년 계축옥사(癸丑獄事)가 일어나자 선조의 유교칠신(遺敎七臣)으로서 파직되었고, 이어 춘천으로 유배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난 후, 다시 기용되어 영의정에까지 올랐다. 이정구(李廷龜), 장유(張維), 이식(李植)과 함께 조선 중기 한문학의 정종(正宗)으로 일컬어진다. 시호는 문정(文貞)이고 인조묘정과 춘천의 도포서원(道浦書院)에 배향되었다. 저서로 『야언(野言)』, 『상촌고(象村稿)』 등이 있다.

9) 문집에는 ‘層’으로 되어 있다.

10) 문집에는 ‘度’로 되어 있다.

11) 문집에는 ‘晴’로 되어 있다.

12) 흥복사(興福寺): 삼악사(三岳寺) 또는 흥국사(興國寺)라고도 한다. 『춘천풍토기(春川風土記)』에 의하면, 신라시대 창건되었던 거찰이었는데, 여러 번 소실되었다가 1998년 중건하였다.

13) 이자연(1003~1061): 본관은 경원(慶源). 자는 약충(若冲)으로, 좌복야(左僕射) 한(翰)의 아들이다. 현종 15년(1024) 과거에 급제하였다. 1052년 그의 세 딸이 차례로 문종의 비가 되어 순종, 선종, 인종이 태어남에 정치적인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또 그의 아들 소현(韶顯)이 금산사(金山寺)의 혜덕왕사(慧德王師)가 되고, 손자 세량(世良)과 증손자 의장(義莊)이 현화사(玄化寺)를 장악하여 법상종(法相宗)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이렇듯 정교(政敎)를 수중에 장악한 이자연은 이후 경원이씨가 고려 최대의 문벌로 성장하는데 기틀을 마련하였다. 시호는 장화(章和)이고, 문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山川】 淸平山 一名慶雲山自楊口縣四明山來 爲龍華山脈自官門北踞四十里 高麗李資玄。入此山。葺文殊院以居之。尤耆禪說。於洞中幽絶處。作息菴。團圓如鵠卵。只得盤兩膝。黙坐其中。數月猶不出。其同年郭璵。持節出關東。訪之。贈詩云。淸平山水似湘濱。邂逅相逢見故人。三十年前同擢第。一千里外各栖身。浮雲入洞曾無事。明月當溪不染塵。目擊無言良久處。淡然相照舊精神。資玄和云。暖遍溪山暗換春。忽紆仙仗訪幽人。夷齊遁世唯全性。稷契勤邦不爲身。奉詔此時鏘玉佩。掛冠何日拂衣塵。何當此地同棲隱。養得從來不死神。

 

【寺刹】 文殊寺 二百二十一間 在縣北四十里 淸平山下 一名淸平寺 卽李資玄所居 高麗金富轍記 春川淸平山者 古之慶雲山而文殊院者 古之普賢院也 初禪師承玄 自唐來新羅 至廣廟二十四年 始來于慶雲山 創蘭若曰白禪院 時大宋開寶六年也 至文廟二十三年 歲在戊申 故左散騎常侍知樞密院事李公爲春州道監倉使 愛慶雲勝景 乃卽白之舊址 置寺曰普賢院 時熙寧元年也 其後希夷子 棄官隱居于玆 而盜賊寢息虎狼絶迹 乃易山名曰淸平 院名曰文殊 而仍加營葺 希夷子卽李公之長男 名資玄字眞精 住山凡三十七年云 ○ 元泰定帝皇后, 以僧性澄, 寺人允堅等, 進佛經藏于此寺, 李齊賢奉王旨撰碑曰

泰定四年三月庚子, 僉議政丞臣恰等, 令中謁者, 復于王曰, 天子之近臣, 司徒剛塔里, 中政院使忽篤帖木兒, 受命天子之后, 伻來以僧性澄, 寺人允堅等, 所進佛書一藏, 歸諸淸平山文殊寺, 施緡錢萬, 令取其息, 爲皇太子皇子祈福, 各取其誕辰, 飯僧閱經, 歲以爲凡, 且曰, 樹碑, 以示永久, 臣等窃惟佛法入中國, 隨世興替, 且千餘歲, 皇朝謂其道無爲爲宗, 有契乎聖理, 廣度爲心, 有補于仁政, 尊信之尤篤, 今旣以傳車, 輸其書數千里窮山之中, 又立食本, 以贍其徒, 斯乃佛者之幸也, 名山福地, 在天下不爲少, 不鄙弊邑, 爰置祝釐之所, 斯則非惟佛者之幸, 亦弊邑之幸也, 將大書特書, 誇耀無極, 況中宮有旨, 敢不祗承, 請付執筆者, 以記, 於是, 命臣某銘, 其銘曰, 於皇有元, 旣世以仁, 陽春時雨, 亭毒九垠, 乃眷金仙, 無爲爲敎。用其土苴, 利生禁暴。是崇是敬, 厚復其徒。不徭不賦, 顓習其書。其書千函, 浩若烟海, 妙析毫釐, 廣包覆載, 律繇戒立, 論自定興, 維經之演, 維慧之明, 路彼犪軒, 卓乎羊鹿, 載薰其香, 一林薝蔔。俶裒于竺, 曰葉與難。俶播于震, 曰騰與蘭, 梁取其秕, 我嚌維穀, 訾石者唐, 我割維玉。伊澄伊堅, 服異心同。旣成法寶, 以奏爾功。天后爾嘉, 載謀之地。(東文選作之), 曰惟三韓, 樂善敦義。維時維王, 我出我甥。祝釐報上, 允也其誠。于國之東, 文殊之寺。(東文撰作山), 毋憚阻脩, 置郵往施。發緡內帑, 俾轉食輸, 可繼以守, 諉王曁臣。王拜稽首, 天子萬歲, 天后是偕, 本支百世。鯷岑石爛, 鰈海塵飛。維功德聚, 不騫不墮。

○ 申欽詩 倦客尋初地。懸厓闢梵廬。雲開眞樂觀。龍護悅卿書。飛瀑霑芒屨。危矼住筍輿。東林看月上。天影落潭虛。

○ 仙洞息菴 六間在縣北四十五里淸平山 ○ 見性菴 六間在縣北四十五里淸平山○ 興福寺 三十間在縣西三十里三岳山 ○ 伴睡菴 二十八間在縣西北一百里華嶽山 ○ 牛頭寺 在縣北十五里牛頭山今無 

 

李資玄,門下侍中子淵之孫,性聰敏,容皃魁偉,登第,爲大樂署丞,忽棄官,入春州淸平山,以禪道自樂, 睿宗累詔徵之 資玄曰 臣始出都門,誓不復踐京華, 不敢奉詔,遂上箋曰,以鳥養鳥,庶無鍾鼓之憂,觀魚知魚,俾遂江湖之性,王復幸, 安東召之使居淸涼寺, 未幾還淸平山, 卒諡眞樂, 資玄字眞精道號希夷子, 終始事跡, 在淸平寺記及碑文中 ○ 金時習字悅卿號梅月堂光廟朝避世隱居栖身於淸平山瑞香院又結舍於史呑山水間雲遊浪跡不知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