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의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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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읍지(春川邑誌)

상세정보

청평산(淸平山) 일명 경운산(慶雲山)이다. 양구(楊口)의 사명산(四明山)으로부터 나와서 용화산(龍華山)의 주맥(主脈)을 이룬다. 부 북쪽 40리에 있다. 천석(泉石)이 매우 빼어나다. 선동(仙洞), 서천(西川), 팔송대(八松坮), 김시습(金時習) 옛 터가 있다. 고려의 이자현(李資玄)이 이 산에 은거하였다. 선설(禪說)을 좋아하여 선동에다 식암(息庵)을 지었다. 고니 알처럼 둥글고 겨우 양 무릎을 움츠릴 정도였는데, 간혹 여러 달 동안이나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동년(同年)인 곽여(郭璵)가 사명(使命)을 받들고 관동(關東)으로 나와 시를 주기를,

 

청평(淸平)의 산수는 상수(湘水)의 물가와 같은데 / 淸平山水似湘濱

우연히 옛 사람을 만나 보는구나. / 邂逅相逢見故人

삼십 년 전 우리는 함께 급제하였는데 / 三十年前同擢第

이제 천리 밖에서 따로 깃들고 있노라. / 一千里外各棲身

뜬 구름처럼 골짜기에 들어오더니 세상 일이 없고 / 浮雲入洞曾無事

밝은 달이 냇물을 상대하니 티끌에 물들지 않노라. / 明月當溪不染塵

말없이 오래 거처하는 곳을 바라보니 / 目擊無言良久處

담담하게 옛 정신이 서로 비추어 오노라. / 淡然相照舊精神

라고 했다.

 

 

 자현이 화답하기를,

따뜻함이 시내와 산을 두루 돌면서 봄이 돌아왔는데 / 暖遍溪山暗換春

문득 신선 지팡이 짚고 은둔자를 방문하였네. / 忽紆仙仗訪幽人

백이(伯夷)와 숙제(叔齊)가 세상 피한 것은 천성 보존함이요 / 夷齊遁世唯全性

직(稷)과 설(契)이 나라 일에 부지런함은 자신 위해서 아니었네 / 稷契勤邦不爲身

조서(詔書)를 받들고 온 이 때 옥패물(玉佩物)이 쨍그랑 거리나. / 奉詔此時鏘玉佩

어느 날 관을 걸어 두고 옷의 티끌을 떨쳐 버릴는지 / 掛冠何日拂衣塵

어느 때나 이곳에서 함께 은둔하면서 / 何當此地同棲隱

종래의 사그러지지 않는 정신을 길러나 볼까 / 養得從來不死神

라고 했다.

 

 

○ 이황(李滉)의 시에,

산협 사이 감도는 물 잔도는 구불구불 / 峽束江盤棧道傾

홀연히 구름 밖에 맑은 시내 흐르네 / 忽逢雲外出溪淸

지금까지 사람들이 여산사를 말하는데 / 至今人說廬山社

이곳에서 그대는 곡구 밭을 갈았다네 / 是處君爲谷口耕

허공 가득 하얀 달에 그대 기상 남았는데 / 白月滿空餘素抱

맑은 이내처럼 자취 없이 헛된 영화 버렸구나 / 晴嵐無跡遣浮榮

우리나라 은일전(隱逸傳)을 누가 지어 전하려나 / 東韓隱逸誰修傳

조그만 흠 꼬집어서 흰 구슬을 타박 말라 / 莫指微疵屛白珩

라고 했다.

 

 

○ 이주(李冑)의 시에,

진락공이 일찍 놀던 땅 / 眞樂曾遊地

문수도 하늘에서 살진 않았네 / 文殊不住天

객이 와서 세속의 생각을 잊으니 / 客來休俗念

비로소 잠깐에 선을 깨닫네 / 始覺片時禪

라고 했다.

 

 

○ 신득연(申得淵)(1)의 시에,

세상 밖에도 또한 인사(人事)가 있으니 / 世外亦人事

산중에도 오히려 이별이 있네 / 山中猶別離

예전부터 삼영(三英)(2)의 우호(友好)를 알았으니 / 從知三英好

서로 갈라진들 한탄하지 마시게 / 且莫恨分岐

라고 했다.

 

 

서천(西川)을 읊은 시에,

담담한 그림자 유리처럼 푸르고 / 湛影碧琉璃

맑은 물결은 수정같이 맑구나 / 淸流白玉瑛

하얀 옷 본래 티끌이 없던 것 / 雪衲本無塵

세탁하자 다시 깨끗해지네 / 洗來還皎潔

라고 했다.

 

 

남지(南池)를 읊은 시에,

그림자가 있을 때는 푸른 것이 산이더니 / 影來綠有山

그림자 사라지니 다시 물로 변하네 / 影滅還成水

색즉시공(色卽是空) 이치 비추어 보니 / 照見色始空

일찍이 불승에게 들은 적 있네 / 嘗聞舍利子

라고 했다.

 

 

용담(龍潭)을 읊은 시에,

계곡에서 내뿜는 물소리 우레와 같고 / 濆壑濘雷吼

온 하늘 가득히 어지러이 눈이 흩날리네 / 登空亂雪飛

신이로운 공력은 만물을 이롭게하니 / 神功行利物

옷깃에 먼저 물 뿌리네 / 先試洒人衣

라고 했다.

 

 

반석(盤石)을 읊은 시에,

법신(法身)(3)은 원래 환령(幻靈)한 것 / 法身元是幻

공(空)과 상(相) 어느 것이 진리에 가까운가? / 空相孰爲眞

예(禮)를 마친 요단(瑤壇)(4)에 고요함이 깃드는데 / 禮罷瑤壇靜

가득이 두건 속으로 천향(天香)이 잦아드네 / 天香湿滿巾

라고 했다.

 

 

○ 김창흡(金昌翕)의 시에,

시내 옆길에서 스님 만나 어렴풋한 종소리를 물으니 / 逢僧溪路問微鐘

10리 밖 강 소리는 구송대(九松臺)에서 멎는다 하네 / 十里江聲限九松

말 머리의 구름과 산기운 자주 생겼다 사라지는데 / 馬首雲嵐頻起滅

식암(息庵)은 몇 겹 봉우리 너머에 있네 / 息菴猶隔數重峰

라고 했다.

 

 

서천(西川)을 읊은 시에,

청평에는 기이한 봉우리 있으니 / 淸平有奇岫

경운봉(慶雲峰)과 부용봉(芙蓉峰) 바로 그것이로다 / 慶雲與芙蓉

구름이 부용봉으로 돌아가자 / 雲歸芙蓉峰

향로봉(香爐峰)에는 달이 떠오르네 / 月臨香爐峰

구름과 달은 어찌 붙잡을 수 있나 / 雲月我何宿

졸졸졸 예전처럼 물만 흐르네 / 濺濺古時水

산중의 나무는 울창한데 / 山木鬱穇穇

이끼는 자주 말라 죽는구나 / 女蘿屢枯死

아름다운 꽃 핀 산 아래 질풍이 불고 / 瑤華山下飄

석란(石蘭)은 촉촉이 이슬을 머금는다 / 石蘭露上委

소나무와 전나무 누구와 감상하나 / 松杉與誰玩

밤에도 바람은 불어대누나 / 夜風其吹矣

근심하며 옷깃 가지런하게 하나 / 陫側整塵衿

어둑어둑한 속에 생각은 끝 없네 / 曖曖增想似

라고 했다.

 

 

영지(影池)를 읊은 시에,

견성암(見性庵) 앞에 소낙비 내리다가 / 見性菴前白雨低

칡덩굴 헤치며 까마득한 사다리 타고 내려오네 / 捫蘿百級下雲梯

선승의 옷은 붉은 난간 위에 걸쳐 있고 / 禪衣只在朱欄上

하나하나 연못에 논둑이 보이네 / 一一池心見稻畦

라고 했다.

 

 

○ 조유수(趙裕壽)(5) 시에(6)

여산(廬山)은 높지 않으니 / 廬山不足高

제일 높은 건 청평산이네 / 最高唯淸平

청평산 스스로 높지 않으니 / 淸平不自高

희이(希夷) 선생(7) 때문에 높네 / 其以希夷一先生

고려에 은자가 없었으나/ 麗代無隱者

희이자 홀로 맑은 마음 드날렸네/ 希夷獨抗淸高情

조그만 암자서 굽히길 40년 / 彎跧小菴四十年

알처럼 둥글고 하늘도 둥글었네 / 卵裏團團天不傾

경운산의 조그만 언덕도 본래는 평평했었으나 / 慶雲小丘本平平

지금 산은 더욱 높고 물은 더욱 맑은 것 같네 / 今焉山若增高水益淸

편안히 하늘 중간에 절벽이 서있는 모양인데 / 居然天半壁立勢

풍악산 높다고 낮게 평가하지 말라 / 莫高楓嶽還低評

뼈를 벗고 어찌 북망산의 흙이 되겠는가 / 蛻骨寧作北邙土

누각은 우뚝한 바위에 있네 / 閣在巖㟼之崢嶸

마음 비록 달과 영지 가운데 있으나 / 心雖與月印在影池中

옛날 견성암에 의지해 여러 층을 만들었네 / 依舊見性層九成

중간에 보우(普雨)를 만나 낮아지지 않았으니 / 中經普雨亦不卑

촉산(蜀山)의 무거움을 어찌 사람이 가볍게 할 수 있나 / 蜀山之重豈以人去輕

어떤 사람이 이걸 이어 삼고(三高)가 되었나 / 何人繼此作三高

뒤에 자익(子益)(8)이 있고 앞에 열경(悅卿)(9)이 있네 / 後有子益前悅卿

아아! 동봉(東峯)(10)이 있던 설악산이 어찌 높지 않으랴마는 / 嗚呼東峯雪嶽豈不高

이 산에 양보하고 부형(父兄)으로 추대하길 / 終讓玆山推父兄

 

 

○ 오원(吳瑗)의 영지(影池)를 읊은 시에,

들쭉날쭉 산의 그림자들 / 參差萬山影

네모난 연못에 고요히 비치니 / 照此方池靜

굳이 암중(庵中)에 선정(禪定)하리오 / 何必菴中定

여기도 견성(見性)할 수 있어라 / 於斯可見性

라고 했다.

 

 

서천(西川)을 읊은 시에,

서천에 앉으니 해지려하는데 / 西川坐將夕

옷깃 속에 산 기운이 가득하네 / 山氣滿人衣

희끗희끗 넓고 흰 바위에 / 磷磷多白石

맑은 여울에 노을이 흐르고 / 淸瀨蕩餘暉

선동(仙洞)으로 가는 희미한 오솔길 / 仙洞有微徑

노을 속에 어둑어둑 자취를 묻네 / 暮霞掩依依

솔바람 속 노래 부르는데 / 高歌倚松風

깃드는 새는 나를 앞질러 돌아가네 / 棲禽先我歸

라고 했다. 

 

이자현(李資玄) 자는 진정(眞精), 호는 희이자(希夷子)이다. 본성이 총명하고 민첩하였다. 과거(科擧)에 급제하여 서승(署丞)이 되었으나 벼슬을 버리고 청평산(淸平山)으로 들어갔다. 누차의 부름에도 부응하지 않고 전(箋)을 올리기를 “새의 본성대로 새를 길러서 종고(鐘鼓)의 걱정이 없게 하시고 물고기를 관찰하여 물고기를 알아서 강호(江湖)를 좋아하는 물고기의 본성을 이루게 하소서”라고 했다. 사망하자 진락(眞樂)의 시호를 내렸다.

김시습(金時習) 자(字)는 열경(悅卿), 호(號)는 매월당(梅月堂)이다. 광묘조(光廟朝)(11)에 세상을 피해 은거하여 청평산(淸平山)에서 몸을 깃들여 살았다. 또한 산수간(山水間)에 집을 짓고 중이 된 뒤 설잠(雪岑)으로 개명하였다. 

 

문수사(文殊寺) 221칸이다. 부 북쪽 40리 청평산(淸平山) 아래에 있다. 일명 청평사(淸平寺)이다. 이자현(李資玄)이 살던 곳이다. 고려 때 김부철(金富轍)의 기문(記文)에, “춘주(春州)의 청평산은 옛날의 경운산(慶雲山)이며, 문수원(文殊院)은 옛날의 보현원(普賢院)이다. 당초에 선사(禪師) 승현(承賢)이 당나라로부터 신라로 와서 광종(光宗) 24년 처음 경운산에 와서 절을 짓고는 백암선원(白巖仙院)이라 했다. 당시는 송(宋)의 개보(開寶) 6년이었다. 문종(文宗) 23년 무신년(戊申年)에 좌산기상시추밀원사(左散騎常侍樞密院事) 이두(李頭)(12)가 춘주도(春州道) 감창사(監倉使)가 되었는데, 경운산의 빼어난 경치를 사랑하여 백암선원의 구터에다 절을 짓고 보현원이라 했다. 당시는 송의 희녕(熙寧) 원년(元年)이었다. 그 뒤에 희이자(希夷子)가 벼슬을 버리고 여기게 은거하니 도적이 그치고 호랑이와 이리가 자취를 감추었다. 이에 산은 청평산(淸平山)으로, 원은 문수원(文殊院)으로 고쳐 부르고는 지붕을 수리하였다. 희이자(希夷子)는 곧 이공(李公)의 장남(長男)으로 이름은 자현(資玄), 자는 진정(眞精)인데, 모두 37년 동안 이 산에 살았다고 한다.

 

원나라 태정황후(泰定皇后)가 승려 성징(性澄)과 윤견(允堅)이 바친 불경을 이 절에 소장케하였다. 이제현(李齊賢)이 왕명을 받들어 지은 비명(碑銘)에, ”태정(泰定) 4년 3월 경자(庚子)에 첨의정승(僉議政丞) 신(臣) 흡(恰) 등이 궁중의 알자(謁者)를 시켜 왕에게 복명(復命)하기를, ‘천자의 근신(近臣)인 사도(司徒) 강탑리중(剛塔里中)과 정원사(政院使) 홀독첩목아(忽篤帖木兒)가 황후(皇后)의 명령을 받고 와서 승려(僧侶) 성징(性澄)과 시인(寺人) 윤견(允堅) 등이 바친 불경 한 질을 청평산 문수사에 귀속시키고, 돈 일만 냥을 보시(普施)하여 그 이자를 가지고 황태자(皇太子)와 황자(皇子)의 복을 빌고, 각각 그 탄신일(誕辰日)에 승려들에게 음식을 먹이고, 불경을 열람하게 하는 것을 세세(世世)의 범례로 하게 하셨습니다. 또 비(碑)를 세워 이를 영구(永久)하게 하는 뜻을 보이라 하셨습니다. 신(臣) 등은 적이 생각하건대, 불법(佛法)이 중국(中國)에 유입된 이래 세대에 따라 융성하기도 하고 침체하기도 한 것이 천여 년이나 되었습니다. 황조(皇朝)에서는 ’불도(佛道)가 무위(無爲)를 종지(宗旨)로 삼는 것이 성인(聖人)의 이치에 부합하고, 널리 구제하는 것을 마음으로 삼는 것이 인정(仁政)에 도움이 된다‘하여 매우 돈독하게 존숭하고 신봉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미 전거(傳車)로서 불경을 수천 리 떨어진 궁산(窮山)에까지 수송하였으며, 또 자산(資産)을 세워 그 무리들을 후족(厚足)하게 하였으니, 이는 불자(佛者)에 있어서도 다행한 일입니다. 천하에 명산(名山)과 복지(福地)가 적지 않지만 우리나라를 비천하게 여기지 않고 복을 비는 장소를 마련하였으니, 이는 불자의 다행일 뿐만 아니라 저희나라의 다행이기도 합니다. 장차 이를 대서(大書)하고 특서(特書)하여 영원토록 가르치고 빛내야 할 것입니다. 하물며 황후 (皇后)의 유지(有旨)가 있었으니 감히 공경스럽게 받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집필자(執筆者)에게 맡겨 사실을 기록할 것을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신(臣)아무개에게 명(銘)을 지을 것을 명하니 신(臣) 아무개가 명(銘)을 짓기를, ’거룩하신 대원(大元)이여, 이미 대대로 인정(仁政)을 펴니, 봄날의 볕과 같고 단비와 같아 천하의 만물이 생성한다. 금선(金仙)이 무위(無爲)를 교화로 한 것을 그리워하여, 그 흙과 풀을 써서 중생을 이롭게하고 포악함을 막았도다. 이를 존숭하고 공경하되 후히 그 무리들을 복호(復戶)하여, 부역(賦役)과 세금만 면해주고 오로지 불서(佛書)를 익히게 하였도다. 불서는 천 상자에 달해 넓기가 안개 낀 바다와 같은데, 정묘(精妙)하기는 호리(毫釐)를 쪼개듯 하고 넓기는 천지를 포괄하듯 하였도다. 율(律)은 계(戒)를 따라 서고 논(論)은 정(定)에서 나왔는데, 오직 불경을 연통(演通)하고 오직 지혜를 밝혔도다. 타고 온 저 규헌(犪軒)은 양거(羊車), 녹거(鹿車)보다 우뚝하고, 그 향기가 훈훈하여 온 산에 담복화(薝蔔花) 향이 가득하도다. 천축(天竺)에서 모은 이는 섭(葉)과 난(難)이며, 중국에 전파한 이는 등(藤)과 난(蘭)이었네. 양(梁) 나라에서는 쭉정이를 취하였지만 우리는 곡식을 맛보았고, 당(唐)에서는 돌이라 했지만 우리는 옥을 캐내었네. 성징과 윤견은 복장(服裝)은 다르지만 마음은 같아, 불경을 완성하여 준공을 진달했네. 황후가 가상히 여기고 간직할 곳을 도모하기를, 삼한(三韓)은 선한 것을 즐기고 의리를 돈독히 하고, 지금의 왕은 우리에서 나온 우리의 외손이니, 복을 빌어 황제에 보답할 그 정성을 믿는다 하고, 이 나라 동쪽에 있는 청평산의 문수사가 험하다고 꺼리지 않고 역(驛)을 통하여 보시(普施)하시었네. 내탕고(內帑庫)의 돈을 풀어 중들을 먹여 살리고, 왕과 신하들에게 부탁하여 오래도록 지켜지게 했네. 임금은 절을 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천자의 만세(萬歲)를 부르고, 천자와 황후가 해로(偕老)하고 근본과 지엽(枝葉)이 백세를 누리기를 기원했네. 제잠(鯷岑)에 토대가 이그러져 접해(鰈海)에서 먼지가 날지라도, 공덕(功德)이 모여 손상되지도 않고 추락하지도 않으리라”고 했다. 

 

○ 승(僧) 보우(普雨)(13)가 중수하였다. 극락전(極樂殿)을 매우 웅장하고 아름답게 건립했으며, 황금을 사용하여 부처를 만들기도 했다. 그리고 자신 또한 매우 사치하게 지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죄를 입고 주살되었다. 또 나옹(懶翁)(14)이라는 승려가 있었는데, 그의 쇠 지팡이가 아직도 소장되어 있다.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이 지은 비석은 넘어져 끊어지고, 자획(字劃)도 검고 흐려졌다. 비문(碑文)은 익재집(益齋集)에 실려 있다. 또 진락공(眞樂公)의 비도 글자가 벗겨지고 떨어졌는데, 절문 앞에 서 있다.

 

 

○ 유영길(柳永吉)의 시에,

  서쪽 개울에 봄 지나며 그윽한 정 기약하니 / 西溪春盡愜幽期

  소나무와 바위의 맑고 기이함 시 속으로 들어오네 / 松石淸奇並入詩

  배꽃 같은 산에 뜨는 달 기다리면서 / 直待梨花山月白

  창 아래 자지 않고 쌍지(雙池)를 굽어보네 / 高窓不寐俯雙池

  라고 했다.

 

 

○ 이정형(李廷馨)의 시에,

  늙은 몸으로 네 아들을 데리고 / 老人携四子

  흥을 따라 우연히 와서 노네 / 乘興偶來遊

  가을이 늦어가니 단풍잎은 떨어지고 / 秋晩楓林脫

  구름은 희미한데 돌길은 길구나 / 雲迷石路修

  쌍폭 아래서 갓끈을 빨고 / 濯纓雙瀑下

  영지 머리에서 산책을 하노라 / 散策影池頭

  문득 청한자 생각나는데 / 却憶淸寒子

  높은 발자취 멀어 짝할 수 없네 / 高蹤邈寡儔

  라고 했다.

 

 

○ 신흠(申欽)(15)의 시에,(16)

게으른 손 절을 찾아 오르니 / 倦客尋初地

드높은 비탈 위에 절간이 있네 / 懸(17)崖闢梵盧

구름 속에 진락공(眞樂公)의 집이 트이고 / 雲開眞樂觀

신령한 용 열경(悅卿)의 글씨 보호해 / 龍護悅卿書

폭포수는 짚신을 뿌려 적시고 / 飛瀑沾芒屐

돌다리 대가마로 건너간다네 / 危矼住(18)筍輿

동산 위에 개인 달 둥실 떠올라 / 東林看(19)月上

하늘 그림자 텅 빈 못에 떨어져 / 棲禽先我歸天影落潭虛

  라고 했다. 

 

 

선동식암(仙洞息庵) 6칸이다. 부 북쪽 45리 청평산 북쪽에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 진락(眞樂)의 유해를 질그릇에 담아 둔 곳이 있는데, 네 모퉁이에 건곤감리(乾坤坎离)를 새기고 주홍(朱紅)으로 채워서 보관하였다. 돌 사이에는 방백(方伯) 정두원(鄭斗源)의 각석(刻石)과 와전(瓦磚)이 있는데, 승려 문옥(文玉)을 시켜 개장했다고 한다. 지금도 석함(石函)과 석벽(石壁)에 ‘청평진락(淸平眞樂)’의 넉자가 새겨져 있는데, 진락(眞樂)의 필적이라 한다.

 

 

○ 김창흡의 시에,

푸른 하늘 축대와 고송(古松) 사이에 보이는데 / 靑冥坮砌古松間

식노(息老)(20)가 못다 한 정취 작은 산에 가득하네 / 息老餘情滿小山

바위 아래 흰 구름 신선이 몰래 벗은 허물 같고 / 岩底白雲僊蛻秘

세숫대야에는 아직도 잔잔한 물이 고여 있네 / 盥盆猶貯水潺潺

라고 했다.

 

 

○ 오원(吳瑗)의 시에,

진락(眞樂)의 옛 암자 학의 둥지 같고 / 眞樂古岩(21)如巢鶴

내려 보니 멀리 구름 낀 산 아득하네 / 下視遙雲山漠漠

푸른 벽돌 맑은 웅덩이 남은 자취 완연한데 / 碧甃蒼窪宛餘近(22)

높은 축대 고요한데 이끼가 얼룩덜룩 / 危坮寂歷苔衣蝕

맑은 못에 비추어도 내 마음 부끄럽지 않아 / 淸潭照面我無怍

우뚝한 장송(長松) 곁에서 술에 취해 노래하네 / 醉發高歌松落落

라고 했다.

 

 

견성암(見性庵) 6간이다. 부 북쪽 45리 청평산 남쪽 깎아 세운 듯한 낭떠러지 위에 있었다. 지금은 없다.

 

 

○ 유포(柳浦)(23)의 시에,

멀리 천 길의 벽을 보니 / 遙看千仞壁

중간에 두어 칸 암자가 있네 / 中有數間庵

청정(淸淨)은 구름 끝 먼 곳에서 일어나고 / 梵起雲端逈

등불은 거울 속에 깊은 곳에서 빛나네 / 燈明鏡裡涵

얼음을 뚫고 동자는 물을 나르고 / 敲氷童子汲

눈에 막혀 늙은 중은 참선하네 / 閉雪老禪叅 

소요할 땅에 이르자 / 得到逍遙地

뱁새 같은 삶 부끄럽구나 / 方知斥鷃慚

라고 했다. 

 

조우인(曺友仁) 시에,

한 송이 푸른 연꽃 / 一朶靑蓮花

물에서 낳어도 물에 집착 칠 않네 / 生水不着水

묻노니 선정 중의 사람은 / 借問定中人

참으로 이것을 볼 수 있는지 / 眞能見得此(24)

 

 

○ 신득연(申得淵)의 시에,

도(道)는 참으로 이러함에 있으니 / 道固在凭地

불성(佛性)이 어찌 여울물과 같으리 / 性豈猶湍水

참선하는 좌중을 시험삼아 바라보니 / 試向定中看

깨달음은 이런 마음에서 오는 것이리라 / 悟來方試此

라고 했다.

 

 

흥복사(興福寺)(25) 30칸이다. 부 서쪽 30리 삼악산에 있다.

반수암(伴睡菴) 28칸이다. 부 서북쪽 100리 화악산에 있다.

 

 

김창흡(金昌翕)의 시에,

화악산 깊고 먼 곳 / 華山深逶迤

몇 곳에서 구름 생기나/ 雲生幾處所

해 졌으나 빛은 남아있으니 / 日沒餘輝存

험한 곳으로 찾아 가네 / 崢嶸訪且去

깃드는 새는 여울을 스치고 / 歸鳥拂驚湍

우는 말은 그윽한 곳 돌아가네 / 鳴馬遶幽楚

도착하자 희미한 달 뜨고 / 旣至爲微月

외로운 선방 법고소리 끊어졌네 / 孤禪歇琅鼓

조용한 마의(麻衣) 입은 무리들 / 默默麻衣徒

암자 이름 예스럽다 말하네 / 菴名亦云古

 

 

우두사(牛頭寺) 부 북쪽 15리 우두산(牛頭山)에 있었다. 지금은 없다.

구성암(九成庵) 읍의 진산(鎭山)인 봉의산(鳳儀山)에 있다.

사자사(獅子寺) 화악산 동쪽에 있다.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많은 사람들이 피난했다고 한다. 승려 성정(性靜)이 중수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청평산(淸平山) 일명 경운산(慶雲山)이다. 양구(楊口)의 사명산(四明山)으로부터 나와서 용화산(龍華山)의 주맥(主脈)을 이룬다. 부 북쪽 40리에 있다. 천석(泉石)이 매우 빼어나다. 선동(仙洞), 서천(西川), 팔송대(八松坮), 김시습(金時習) 옛 터가 있다. 고려의 이자현(李資玄)이 이 산에 은거하였다. 선설(禪說)을 좋아하여 선동에다 식암(息庵)을 지었다. 고니 알처럼 둥글고 겨우 양 무릎을 움츠릴 정도였는데, 간혹 여러 달 동안이나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동년(同年)인 곽여(郭璵)가 사명(使命)을 받들고 관동(關東)으로 나와 시를 주기를,

 

청평(淸平)의 산수는 상수(湘水)의 물가와 같은데 / 淸平山水似湘濱

우연히 옛 사람을 만나 보는구나. / 邂逅相逢見故人

삼십 년 전 우리는 함께 급제하였는데 / 三十年前同擢第

이제 천리 밖에서 따로 깃들고 있노라. / 一千里外各棲身

뜬 구름처럼 골짜기에 들어오더니 세상 일이 없고 / 浮雲入洞曾無事

밝은 달이 냇물을 상대하니 티끌에 물들지 않노라. / 明月當溪不染塵

말없이 오래 거처하는 곳을 바라보니 / 目擊無言良久處

담담하게 옛 정신이 서로 비추어 오노라. / 淡然相照舊精神

라고 했다.

 

 

 자현이 화답하기를,

따뜻함이 시내와 산을 두루 돌면서 봄이 돌아왔는데 / 暖遍溪山暗換春

문득 신선 지팡이 짚고 은둔자를 방문하였네. / 忽紆仙仗訪幽人

백이(伯夷)와 숙제(叔齊)가 세상 피한 것은 천성 보존함이요 / 夷齊遁世唯全性

직(稷)과 설(契)이 나라 일에 부지런함은 자신 위해서 아니었네 / 稷契勤邦不爲身

조서(詔書)를 받들고 온 이 때 옥패물(玉佩物)이 쨍그랑 거리나. / 奉詔此時鏘玉佩

어느 날 관을 걸어 두고 옷의 티끌을 떨쳐 버릴는지 / 掛冠何日拂衣塵

어느 때나 이곳에서 함께 은둔하면서 / 何當此地同棲隱

종래의 사그러지지 않는 정신을 길러나 볼까 / 養得從來不死神

라고 했다.

 

 

○ 이황(李滉)의 시에,

산협 사이 감도는 물 잔도는 구불구불 / 峽束江盤棧道傾

홀연히 구름 밖에 맑은 시내 흐르네 / 忽逢雲外出溪淸

지금까지 사람들이 여산사를 말하는데 / 至今人說廬山社

이곳에서 그대는 곡구 밭을 갈았다네 / 是處君爲谷口耕

허공 가득 하얀 달에 그대 기상 남았는데 / 白月滿空餘素抱

맑은 이내처럼 자취 없이 헛된 영화 버렸구나 / 晴嵐無跡遣浮榮

우리나라 은일전(隱逸傳)을 누가 지어 전하려나 / 東韓隱逸誰修傳

조그만 흠 꼬집어서 흰 구슬을 타박 말라 / 莫指微疵屛白珩

라고 했다.

 

 

○ 이주(李冑)의 시에,

진락공이 일찍 놀던 땅 / 眞樂曾遊地

문수도 하늘에서 살진 않았네 / 文殊不住天

객이 와서 세속의 생각을 잊으니 / 客來休俗念

비로소 잠깐에 선을 깨닫네 / 始覺片時禪

라고 했다.

 

 

○ 신득연(申得淵)(1)의 시에,

세상 밖에도 또한 인사(人事)가 있으니 / 世外亦人事

산중에도 오히려 이별이 있네 / 山中猶別離

예전부터 삼영(三英)(2)의 우호(友好)를 알았으니 / 從知三英好

서로 갈라진들 한탄하지 마시게 / 且莫恨分岐

라고 했다.

 

 

서천(西川)을 읊은 시에,

담담한 그림자 유리처럼 푸르고 / 湛影碧琉璃

맑은 물결은 수정같이 맑구나 / 淸流白玉瑛

하얀 옷 본래 티끌이 없던 것 / 雪衲本無塵

세탁하자 다시 깨끗해지네 / 洗來還皎潔

라고 했다.

 

 

남지(南池)를 읊은 시에,

그림자가 있을 때는 푸른 것이 산이더니 / 影來綠有山

그림자 사라지니 다시 물로 변하네 / 影滅還成水

색즉시공(色卽是空) 이치 비추어 보니 / 照見色始空

일찍이 불승에게 들은 적 있네 / 嘗聞舍利子

라고 했다.

 

 

용담(龍潭)을 읊은 시에,

계곡에서 내뿜는 물소리 우레와 같고 / 濆壑濘雷吼

온 하늘 가득히 어지러이 눈이 흩날리네 / 登空亂雪飛

신이로운 공력은 만물을 이롭게하니 / 神功行利物

옷깃에 먼저 물 뿌리네 / 先試洒人衣

라고 했다.

 

 

반석(盤石)을 읊은 시에,

법신(法身)(3)은 원래 환령(幻靈)한 것 / 法身元是幻

공(空)과 상(相) 어느 것이 진리에 가까운가? / 空相孰爲眞

예(禮)를 마친 요단(瑤壇)(4)에 고요함이 깃드는데 / 禮罷瑤壇靜

가득이 두건 속으로 천향(天香)이 잦아드네 / 天香湿滿巾

라고 했다.

 

 

○ 김창흡(金昌翕)의 시에,

시내 옆길에서 스님 만나 어렴풋한 종소리를 물으니 / 逢僧溪路問微鐘

10리 밖 강 소리는 구송대(九松臺)에서 멎는다 하네 / 十里江聲限九松

말 머리의 구름과 산기운 자주 생겼다 사라지는데 / 馬首雲嵐頻起滅

식암(息庵)은 몇 겹 봉우리 너머에 있네 / 息菴猶隔數重峰

라고 했다.

 

 

서천(西川)을 읊은 시에,

청평에는 기이한 봉우리 있으니 / 淸平有奇岫

경운봉(慶雲峰)과 부용봉(芙蓉峰) 바로 그것이로다 / 慶雲與芙蓉

구름이 부용봉으로 돌아가자 / 雲歸芙蓉峰

향로봉(香爐峰)에는 달이 떠오르네 / 月臨香爐峰

구름과 달은 어찌 붙잡을 수 있나 / 雲月我何宿

졸졸졸 예전처럼 물만 흐르네 / 濺濺古時水

산중의 나무는 울창한데 / 山木鬱穇穇

이끼는 자주 말라 죽는구나 / 女蘿屢枯死

아름다운 꽃 핀 산 아래 질풍이 불고 / 瑤華山下飄

석란(石蘭)은 촉촉이 이슬을 머금는다 / 石蘭露上委

소나무와 전나무 누구와 감상하나 / 松杉與誰玩

밤에도 바람은 불어대누나 / 夜風其吹矣

근심하며 옷깃 가지런하게 하나 / 陫側整塵衿

어둑어둑한 속에 생각은 끝 없네 / 曖曖增想似

라고 했다.

 

 

영지(影池)를 읊은 시에,

견성암(見性庵) 앞에 소낙비 내리다가 / 見性菴前白雨低

칡덩굴 헤치며 까마득한 사다리 타고 내려오네 / 捫蘿百級下雲梯

선승의 옷은 붉은 난간 위에 걸쳐 있고 / 禪衣只在朱欄上

하나하나 연못에 논둑이 보이네 / 一一池心見稻畦

라고 했다.

 

 

○ 조유수(趙裕壽)(5) 시에(6)

여산(廬山)은 높지 않으니 / 廬山不足高

제일 높은 건 청평산이네 / 最高唯淸平

청평산 스스로 높지 않으니 / 淸平不自高

희이(希夷) 선생(7) 때문에 높네 / 其以希夷一先生

고려에 은자가 없었으나/ 麗代無隱者

희이자 홀로 맑은 마음 드날렸네/ 希夷獨抗淸高情

조그만 암자서 굽히길 40년 / 彎跧小菴四十年

알처럼 둥글고 하늘도 둥글었네 / 卵裏團團天不傾

경운산의 조그만 언덕도 본래는 평평했었으나 / 慶雲小丘本平平

지금 산은 더욱 높고 물은 더욱 맑은 것 같네 / 今焉山若增高水益淸

편안히 하늘 중간에 절벽이 서있는 모양인데 / 居然天半壁立勢

풍악산 높다고 낮게 평가하지 말라 / 莫高楓嶽還低評

뼈를 벗고 어찌 북망산의 흙이 되겠는가 / 蛻骨寧作北邙土

누각은 우뚝한 바위에 있네 / 閣在巖㟼之崢嶸

마음 비록 달과 영지 가운데 있으나 / 心雖與月印在影池中

옛날 견성암에 의지해 여러 층을 만들었네 / 依舊見性層九成

중간에 보우(普雨)를 만나 낮아지지 않았으니 / 中經普雨亦不卑

촉산(蜀山)의 무거움을 어찌 사람이 가볍게 할 수 있나 / 蜀山之重豈以人去輕

어떤 사람이 이걸 이어 삼고(三高)가 되었나 / 何人繼此作三高

뒤에 자익(子益)(8)이 있고 앞에 열경(悅卿)(9)이 있네 / 後有子益前悅卿

아아! 동봉(東峯)(10)이 있던 설악산이 어찌 높지 않으랴마는 / 嗚呼東峯雪嶽豈不高

이 산에 양보하고 부형(父兄)으로 추대하길 / 終讓玆山推父兄

 

 

○ 오원(吳瑗)의 영지(影池)를 읊은 시에,

들쭉날쭉 산의 그림자들 / 參差萬山影

네모난 연못에 고요히 비치니 / 照此方池靜

굳이 암중(庵中)에 선정(禪定)하리오 / 何必菴中定

여기도 견성(見性)할 수 있어라 / 於斯可見性

라고 했다.

 

 

서천(西川)을 읊은 시에,

서천에 앉으니 해지려하는데 / 西川坐將夕

옷깃 속에 산 기운이 가득하네 / 山氣滿人衣

희끗희끗 넓고 흰 바위에 / 磷磷多白石

맑은 여울에 노을이 흐르고 / 淸瀨蕩餘暉

선동(仙洞)으로 가는 희미한 오솔길 / 仙洞有微徑

노을 속에 어둑어둑 자취를 묻네 / 暮霞掩依依

솔바람 속 노래 부르는데 / 高歌倚松風

깃드는 새는 나를 앞질러 돌아가네 / 棲禽先我歸

라고 했다. 

 

이자현(李資玄) 자는 진정(眞精), 호는 희이자(希夷子)이다. 본성이 총명하고 민첩하였다. 과거(科擧)에 급제하여 서승(署丞)이 되었으나 벼슬을 버리고 청평산(淸平山)으로 들어갔다. 누차의 부름에도 부응하지 않고 전(箋)을 올리기를 “새의 본성대로 새를 길러서 종고(鐘鼓)의 걱정이 없게 하시고 물고기를 관찰하여 물고기를 알아서 강호(江湖)를 좋아하는 물고기의 본성을 이루게 하소서”라고 했다. 사망하자 진락(眞樂)의 시호를 내렸다.

김시습(金時習) 자(字)는 열경(悅卿), 호(號)는 매월당(梅月堂)이다. 광묘조(光廟朝)(11)에 세상을 피해 은거하여 청평산(淸平山)에서 몸을 깃들여 살았다. 또한 산수간(山水間)에 집을 짓고 중이 된 뒤 설잠(雪岑)으로 개명하였다. 

 

문수사(文殊寺) 221칸이다. 부 북쪽 40리 청평산(淸平山) 아래에 있다. 일명 청평사(淸平寺)이다. 이자현(李資玄)이 살던 곳이다. 고려 때 김부철(金富轍)의 기문(記文)에, “춘주(春州)의 청평산은 옛날의 경운산(慶雲山)이며, 문수원(文殊院)은 옛날의 보현원(普賢院)이다. 당초에 선사(禪師) 승현(承賢)이 당나라로부터 신라로 와서 광종(光宗) 24년 처음 경운산에 와서 절을 짓고는 백암선원(白巖仙院)이라 했다. 당시는 송(宋)의 개보(開寶) 6년이었다. 문종(文宗) 23년 무신년(戊申年)에 좌산기상시추밀원사(左散騎常侍樞密院事) 이두(李頭)(12)가 춘주도(春州道) 감창사(監倉使)가 되었는데, 경운산의 빼어난 경치를 사랑하여 백암선원의 구터에다 절을 짓고 보현원이라 했다. 당시는 송의 희녕(熙寧) 원년(元年)이었다. 그 뒤에 희이자(希夷子)가 벼슬을 버리고 여기게 은거하니 도적이 그치고 호랑이와 이리가 자취를 감추었다. 이에 산은 청평산(淸平山)으로, 원은 문수원(文殊院)으로 고쳐 부르고는 지붕을 수리하였다. 희이자(希夷子)는 곧 이공(李公)의 장남(長男)으로 이름은 자현(資玄), 자는 진정(眞精)인데, 모두 37년 동안 이 산에 살았다고 한다.

 

원나라 태정황후(泰定皇后)가 승려 성징(性澄)과 윤견(允堅)이 바친 불경을 이 절에 소장케하였다. 이제현(李齊賢)이 왕명을 받들어 지은 비명(碑銘)에, ”태정(泰定) 4년 3월 경자(庚子)에 첨의정승(僉議政丞) 신(臣) 흡(恰) 등이 궁중의 알자(謁者)를 시켜 왕에게 복명(復命)하기를, ‘천자의 근신(近臣)인 사도(司徒) 강탑리중(剛塔里中)과 정원사(政院使) 홀독첩목아(忽篤帖木兒)가 황후(皇后)의 명령을 받고 와서 승려(僧侶) 성징(性澄)과 시인(寺人) 윤견(允堅) 등이 바친 불경 한 질을 청평산 문수사에 귀속시키고, 돈 일만 냥을 보시(普施)하여 그 이자를 가지고 황태자(皇太子)와 황자(皇子)의 복을 빌고, 각각 그 탄신일(誕辰日)에 승려들에게 음식을 먹이고, 불경을 열람하게 하는 것을 세세(世世)의 범례로 하게 하셨습니다. 또 비(碑)를 세워 이를 영구(永久)하게 하는 뜻을 보이라 하셨습니다. 신(臣) 등은 적이 생각하건대, 불법(佛法)이 중국(中國)에 유입된 이래 세대에 따라 융성하기도 하고 침체하기도 한 것이 천여 년이나 되었습니다. 황조(皇朝)에서는 ’불도(佛道)가 무위(無爲)를 종지(宗旨)로 삼는 것이 성인(聖人)의 이치에 부합하고, 널리 구제하는 것을 마음으로 삼는 것이 인정(仁政)에 도움이 된다‘하여 매우 돈독하게 존숭하고 신봉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미 전거(傳車)로서 불경을 수천 리 떨어진 궁산(窮山)에까지 수송하였으며, 또 자산(資産)을 세워 그 무리들을 후족(厚足)하게 하였으니, 이는 불자(佛者)에 있어서도 다행한 일입니다. 천하에 명산(名山)과 복지(福地)가 적지 않지만 우리나라를 비천하게 여기지 않고 복을 비는 장소를 마련하였으니, 이는 불자의 다행일 뿐만 아니라 저희나라의 다행이기도 합니다. 장차 이를 대서(大書)하고 특서(特書)하여 영원토록 가르치고 빛내야 할 것입니다. 하물며 황후 (皇后)의 유지(有旨)가 있었으니 감히 공경스럽게 받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집필자(執筆者)에게 맡겨 사실을 기록할 것을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신(臣)아무개에게 명(銘)을 지을 것을 명하니 신(臣) 아무개가 명(銘)을 짓기를, ’거룩하신 대원(大元)이여, 이미 대대로 인정(仁政)을 펴니, 봄날의 볕과 같고 단비와 같아 천하의 만물이 생성한다. 금선(金仙)이 무위(無爲)를 교화로 한 것을 그리워하여, 그 흙과 풀을 써서 중생을 이롭게하고 포악함을 막았도다. 이를 존숭하고 공경하되 후히 그 무리들을 복호(復戶)하여, 부역(賦役)과 세금만 면해주고 오로지 불서(佛書)를 익히게 하였도다. 불서는 천 상자에 달해 넓기가 안개 낀 바다와 같은데, 정묘(精妙)하기는 호리(毫釐)를 쪼개듯 하고 넓기는 천지를 포괄하듯 하였도다. 율(律)은 계(戒)를 따라 서고 논(論)은 정(定)에서 나왔는데, 오직 불경을 연통(演通)하고 오직 지혜를 밝혔도다. 타고 온 저 규헌(犪軒)은 양거(羊車), 녹거(鹿車)보다 우뚝하고, 그 향기가 훈훈하여 온 산에 담복화(薝蔔花) 향이 가득하도다. 천축(天竺)에서 모은 이는 섭(葉)과 난(難)이며, 중국에 전파한 이는 등(藤)과 난(蘭)이었네. 양(梁) 나라에서는 쭉정이를 취하였지만 우리는 곡식을 맛보았고, 당(唐)에서는 돌이라 했지만 우리는 옥을 캐내었네. 성징과 윤견은 복장(服裝)은 다르지만 마음은 같아, 불경을 완성하여 준공을 진달했네. 황후가 가상히 여기고 간직할 곳을 도모하기를, 삼한(三韓)은 선한 것을 즐기고 의리를 돈독히 하고, 지금의 왕은 우리에서 나온 우리의 외손이니, 복을 빌어 황제에 보답할 그 정성을 믿는다 하고, 이 나라 동쪽에 있는 청평산의 문수사가 험하다고 꺼리지 않고 역(驛)을 통하여 보시(普施)하시었네. 내탕고(內帑庫)의 돈을 풀어 중들을 먹여 살리고, 왕과 신하들에게 부탁하여 오래도록 지켜지게 했네. 임금은 절을 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천자의 만세(萬歲)를 부르고, 천자와 황후가 해로(偕老)하고 근본과 지엽(枝葉)이 백세를 누리기를 기원했네. 제잠(鯷岑)에 토대가 이그러져 접해(鰈海)에서 먼지가 날지라도, 공덕(功德)이 모여 손상되지도 않고 추락하지도 않으리라”고 했다. 

 

○ 승(僧) 보우(普雨)(13)가 중수하였다. 극락전(極樂殿)을 매우 웅장하고 아름답게 건립했으며, 황금을 사용하여 부처를 만들기도 했다. 그리고 자신 또한 매우 사치하게 지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죄를 입고 주살되었다. 또 나옹(懶翁)(14)이라는 승려가 있었는데, 그의 쇠 지팡이가 아직도 소장되어 있다.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이 지은 비석은 넘어져 끊어지고, 자획(字劃)도 검고 흐려졌다. 비문(碑文)은 익재집(益齋集)에 실려 있다. 또 진락공(眞樂公)의 비도 글자가 벗겨지고 떨어졌는데, 절문 앞에 서 있다.

 

 

○ 유영길(柳永吉)의 시에,

  서쪽 개울에 봄 지나며 그윽한 정 기약하니 / 西溪春盡愜幽期

  소나무와 바위의 맑고 기이함 시 속으로 들어오네 / 松石淸奇並入詩

  배꽃 같은 산에 뜨는 달 기다리면서 / 直待梨花山月白

  창 아래 자지 않고 쌍지(雙池)를 굽어보네 / 高窓不寐俯雙池

  라고 했다.

 

 

○ 이정형(李廷馨)의 시에,

  늙은 몸으로 네 아들을 데리고 / 老人携四子

  흥을 따라 우연히 와서 노네 / 乘興偶來遊

  가을이 늦어가니 단풍잎은 떨어지고 / 秋晩楓林脫

  구름은 희미한데 돌길은 길구나 / 雲迷石路修

  쌍폭 아래서 갓끈을 빨고 / 濯纓雙瀑下

  영지 머리에서 산책을 하노라 / 散策影池頭

  문득 청한자 생각나는데 / 却憶淸寒子

  높은 발자취 멀어 짝할 수 없네 / 高蹤邈寡儔

  라고 했다.

 

 

○ 신흠(申欽)(15)의 시에,(16)

게으른 손 절을 찾아 오르니 / 倦客尋初地

드높은 비탈 위에 절간이 있네 / 懸(17)崖闢梵盧

구름 속에 진락공(眞樂公)의 집이 트이고 / 雲開眞樂觀

신령한 용 열경(悅卿)의 글씨 보호해 / 龍護悅卿書

폭포수는 짚신을 뿌려 적시고 / 飛瀑沾芒屐

돌다리 대가마로 건너간다네 / 危矼住(18)筍輿

동산 위에 개인 달 둥실 떠올라 / 東林看(19)月上

하늘 그림자 텅 빈 못에 떨어져 / 棲禽先我歸天影落潭虛

  라고 했다. 

 

 

선동식암(仙洞息庵) 6칸이다. 부 북쪽 45리 청평산 북쪽에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 진락(眞樂)의 유해를 질그릇에 담아 둔 곳이 있는데, 네 모퉁이에 건곤감리(乾坤坎离)를 새기고 주홍(朱紅)으로 채워서 보관하였다. 돌 사이에는 방백(方伯) 정두원(鄭斗源)의 각석(刻石)과 와전(瓦磚)이 있는데, 승려 문옥(文玉)을 시켜 개장했다고 한다. 지금도 석함(石函)과 석벽(石壁)에 ‘청평진락(淸平眞樂)’의 넉자가 새겨져 있는데, 진락(眞樂)의 필적이라 한다.

 

 

○ 김창흡의 시에,

푸른 하늘 축대와 고송(古松) 사이에 보이는데 / 靑冥坮砌古松間

식노(息老)(20)가 못다 한 정취 작은 산에 가득하네 / 息老餘情滿小山

바위 아래 흰 구름 신선이 몰래 벗은 허물 같고 / 岩底白雲僊蛻秘

세숫대야에는 아직도 잔잔한 물이 고여 있네 / 盥盆猶貯水潺潺

라고 했다.

 

 

○ 오원(吳瑗)의 시에,

진락(眞樂)의 옛 암자 학의 둥지 같고 / 眞樂古岩(21)如巢鶴

내려 보니 멀리 구름 낀 산 아득하네 / 下視遙雲山漠漠

푸른 벽돌 맑은 웅덩이 남은 자취 완연한데 / 碧甃蒼窪宛餘近(22)

높은 축대 고요한데 이끼가 얼룩덜룩 / 危坮寂歷苔衣蝕

맑은 못에 비추어도 내 마음 부끄럽지 않아 / 淸潭照面我無怍

우뚝한 장송(長松) 곁에서 술에 취해 노래하네 / 醉發高歌松落落

라고 했다.

 

 

견성암(見性庵) 6간이다. 부 북쪽 45리 청평산 남쪽 깎아 세운 듯한 낭떠러지 위에 있었다. 지금은 없다.

 

 

○ 유포(柳浦)(23)의 시에,

멀리 천 길의 벽을 보니 / 遙看千仞壁

중간에 두어 칸 암자가 있네 / 中有數間庵

청정(淸淨)은 구름 끝 먼 곳에서 일어나고 / 梵起雲端逈

등불은 거울 속에 깊은 곳에서 빛나네 / 燈明鏡裡涵

얼음을 뚫고 동자는 물을 나르고 / 敲氷童子汲

눈에 막혀 늙은 중은 참선하네 / 閉雪老禪叅 

소요할 땅에 이르자 / 得到逍遙地

뱁새 같은 삶 부끄럽구나 / 方知斥鷃慚

라고 했다. 

 

조우인(曺友仁) 시에,

한 송이 푸른 연꽃 / 一朶靑蓮花

물에서 낳어도 물에 집착 칠 않네 / 生水不着水

묻노니 선정 중의 사람은 / 借問定中人

참으로 이것을 볼 수 있는지 / 眞能見得此(24)

 

 

○ 신득연(申得淵)의 시에,

도(道)는 참으로 이러함에 있으니 / 道固在凭地

불성(佛性)이 어찌 여울물과 같으리 / 性豈猶湍水

참선하는 좌중을 시험삼아 바라보니 / 試向定中看

깨달음은 이런 마음에서 오는 것이리라 / 悟來方試此

라고 했다.

 

 

흥복사(興福寺)(25) 30칸이다. 부 서쪽 30리 삼악산에 있다.

반수암(伴睡菴) 28칸이다. 부 서북쪽 100리 화악산에 있다.

 

 

김창흡(金昌翕)의 시에,

화악산 깊고 먼 곳 / 華山深逶迤

몇 곳에서 구름 생기나/ 雲生幾處所

해 졌으나 빛은 남아있으니 / 日沒餘輝存

험한 곳으로 찾아 가네 / 崢嶸訪且去

깃드는 새는 여울을 스치고 / 歸鳥拂驚湍

우는 말은 그윽한 곳 돌아가네 / 鳴馬遶幽楚

도착하자 희미한 달 뜨고 / 旣至爲微月

외로운 선방 법고소리 끊어졌네 / 孤禪歇琅鼓

조용한 마의(麻衣) 입은 무리들 / 默默麻衣徒

암자 이름 예스럽다 말하네 / 菴名亦云古

 

 

우두사(牛頭寺) 부 북쪽 15리 우두산(牛頭山)에 있었다. 지금은 없다.

구성암(九成庵) 읍의 진산(鎭山)인 봉의산(鳳儀山)에 있다.

사자사(獅子寺) 화악산 동쪽에 있다.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많은 사람들이 피난했다고 한다. 승려 성정(性靜)이 중수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淸平山 一名慶雲山自楊口縣四明山來 爲龍華山脈自官門北踞四十里 高麗李資玄。入此山。葺文殊院以居之。尤耆禪說。於洞中幽絶處。作息菴。團圓如鵠卵。只得盤兩膝。黙坐其中。數月猶不出。其同年郭璵。持節出關東。訪之。贈詩云。淸平山水似湘濱。邂逅相逢見故人。三十年前同擢第。一千里外各栖身。浮雲入洞曾無事。明月當溪不染塵。目擊無言良久處。淡然相照舊精神。資玄和云。暖遍溪山暗換春。忽紆仙仗訪幽人。夷齊遁世唯全性。稷契勤邦不爲身。奉詔此時鏘玉佩。掛冠何日拂衣塵。何當此地同棲隱。養得從來不死神。

李滉詩。峽東江盤棧道傾。忽逢雲外出溪淸。至今人說廬山社。是處君爲谷口耕。白月滿空餘素抱。晴嵐無跡遣浮榮。東韓隱逸誰修傳。莫指微疪屛白珩。

李冑詩。眞樂曾遊地。文殊不住天。客來休俗念。始覺片時神。

申得淵詩 世外亦人事 山中猶別離 從知三英好 且莫恨分岐 咏西川詩曰 湛影碧琉璃 淸流白玉瑛 雪衲本無塵 洗還皎潔 咏南池詩曰 影來綠有山 影滅還成水照見色始空嘗聞舍利子 咏龍潭詩曰 濆壑濘雷吼等空亂雪飛神功行利物先試洒人衣咏盤石詩曰 法身元是幻 空相孰爲眞禮罷瑤壇靜天香湿滿巾

金昌翕詩 逢僧溪路問微鐘。十里江聲限九松。馬首雲嵐頻起滅。息菴猶隔數重峰。

咏西泉詩曰 淸平有奇岫。慶雲與芙蓉。雲歸芙蓉峰。月臨香爐峰。雲月我何宿。濺濺古時水。山木鬱穇穇。女蘿屢枯死。瑤華山下飄。石蘭露上委。松杉與誰玩。夜風其吹矣。陫側整塵衿。曖曖增想似。

咏影池詩曰。見性菴前白雨低。捫蘿百級下雲梯。禪衣只在朱欄上。一一池心見稻畦。

趙裕壽詩。廬山不足高。最高惟淸平。淸平不足高。其以希夷一先生。麗代無隱者。希夷獨抗淸高情。受跧小庵四十年。那裏團團天不傾。慶雲小邱本平平。今焉山若增高水益淸。居然天畔壁立勢。其高楓岳還低評。蛻骨寧在北邙土。閣在岩㟼之崢嶸。心雖與月印在影池中。依旧見性層九成。中經普雨亦不卑。蜀山之重豈以人去輕。何人繼此作三高。後有子益前悅卿。嗚呼東峯雪岳豈不高。終讓此山推父兄。

吳瑗詩 參差萬山影。照此方池靜。何必菴中定。於斯可見性。

咏西川詩曰。西川坐將夕。山氣滿人衣。磷磷多白石。淸瀨蕩餘暉。仙洞有微徑。暮霞掩依依。高歌倚松風。棲禽先我歸。 

 

李資賢。字眞精。號希夷子。性聰敏。登第爲署丞。棄官入淸平山。屢徵不赴。遂上箋有曰。以鳥養鳥庶無鍾鼓之憂觀魚知魚。俾遂江湖之性。及卒。諡眞樂公。金時習。字悅卿。号梅月堂。光廟朝。避世隱居。棲身於淸平寺。又結舍山水間。爲僧改名爲雪岑。

 

文殊寺。二百二十一間。在府北四十里。淸平山下。一名淸平寺。卽李資玄所居。高麗金富轍記 春川淸平山者 古之慶雲山而文殊院者 古之普賢院也 初禪師承玄 自唐來新羅 至廣廟二十四年 始來于慶雲山 創蘭若曰白禪院 時大宋開寶六年也 至文廟二十三年 歲在戊申 故左散騎常侍知樞密院事李公爲春州道監倉使 愛慶雲勝景 乃卽白之舊址 置寺曰普賢院 時熙寧元年也 其後希夷子 棄官隱居于玆 而盜賊寢息虎狼絶迹 乃易山名曰淸平 院名曰文殊 而仍加營葺 希夷子卽李公之長男 名資玄字眞精 住山凡三十七年云 元泰定帝皇后, 以僧性澄, 寺人允堅等, 進佛經藏于此寺, 李齊賢奉王旨撰碑曰

泰定四年三月庚子, 僉議政丞臣恰等, 令中謁者, 復于王曰, 天子之近臣, 司徒剛塔里, 中政院使忽篤帖木兒, 受命天子之后, 伻來以僧性澄, 寺人允堅等, 所進佛書一藏, 歸諸淸平山文殊寺, 施緡錢萬, 令取其息, 爲皇太子皇子祈福, 各取其誕辰, 飯僧閱經, 歲以爲凡, 且曰, 樹碑, 以示永久, 臣等窃惟佛法入中國, 隨世興替, 且千餘歲, 皇朝謂其道無爲爲宗, 有契乎聖理, 廣度爲心, 有補于仁政, 尊信之尤篤, 今旣以傳車, 輸其書數千里窮山之中, 又立食本, 以贍其徒, 斯乃佛者之幸也, 名山福地, 在天下不爲少, 不鄙弊邑, 爰置祝釐之所, 斯則非惟佛者之幸, 亦弊邑之幸也, 將大書特書, 誇耀無極, 況中宮有旨, 敢不祗承, 請付執筆者, 以記, 於是, 命臣某銘, 其銘曰, 於皇有元, 旣世以仁, 陽春時雨, 亭毒九垠, 乃眷金仙, 無爲爲敎。用其土苴, 利生禁暴。是崇是敬, 厚復其徒。不徭不賦, 顓習其書。其書千函, 浩若烟海, 妙析毫釐, 廣包覆載, 律繇戒立, 論自定興, 維經之演, 維慧之明, 路彼犪軒, 卓乎羊鹿, 載薰其香, 一林薝蔔。俶裒于竺, 曰葉與難。俶播于震, 曰騰與蘭, 梁取其秕, 我嚌維穀, 訾石者唐, 我割維玉。伊澄伊堅, 服異心同。旣成法寶, 以奏爾功。天后爾嘉, 載謀之地。(東文選作之), 曰惟三韓, 樂善敦義。維時維王, 我出我甥。祝釐報上, 允也其誠。于國之東, 文殊之寺。(東文撰作山), 毋憚阻脩, 置郵往施。發緡內帑, 俾轉食輸, 可繼以守, 諉王曁臣。王拜稽首, 天子萬歲, 天后是偕, 本支百世。鯷岑石爛, 鰈海塵飛。維功德聚, 不騫不墮。

△ 僧普雨重修立極樂殿 甚宏麗用黃金造佛 且自擧極侈 未幾被罪誅死 又有懶翁鐵杖至今藏焉 益齋李齊賢所撰 碑石仆折字畫默昧 文則益齋集中又有眞樂公俾字解剝落立在寺門外

柳永吉詩 西溪春盡愜幽期 松石淸奇並入詩 直待梨花山月白 高牕不寐俯雙池

李廷馨詩 老人携四子 乘興偶來遊 秋晩楓葉脫 雲迷石路脩 濯纓雙瀑下 散策影池頭 却憶淸寒子 高蹤邈寡儔

柳夢寅詩。欲求宓妃聘。那舍蹇惟媒。曾見瑞香院。不慙眞歇坮。金風凋翠樹。紅澗泛瓊盃。鹿馭疲岩經。山遊且莫催。

申欽詩 倦客尋初地。懸厓闢梵庐。雲開眞樂觀。龍護悅卿書。飛堞鉄芒屨。危矼住筍輿。東林看月上。天影落潭虛。

○仙洞息菴 六間在縣北四十五里淸平山北今無有眞樂遺骸盛陶器四隅刻乾坤坎离塡以朱紅藏之石間方伯鄭斗源刻銘瓦甎使僧文玉改葬之云 今之有石函石壁淸平眞樂四字亦眞樂筆跡云

金昌翕詩 靑冥坮砌古松間。息老餘情滿小山。岩底白雲僊蛻秘。盥盆猶貯水潺潺。

吳瑗詩。眞樂古岩如巢鷽。下視遙雲山漠漠。碧甃蒼窪宛餘近。危坮寂歷苔衣蝕。淸潭照面我無怍。醉發高歌松落落。

○見性菴。六間在府北四十五里淸平南絶崖上今無

柳浦詩。 遙首千仞壁 中有數間菴 梵起雲端逈 燈明鏡裏涵 敲氷童子汲 開雪老禪叅 到得逍遙地 方知斥鷃慙

曺友仁詩。 一朶靑蓮花。生水不着水。借問定中人。眞能見得此。

申得淵詩。 道固在凭地性豈猶湍水試向定中看悟來方試此

興福寺三十間在府西三十里三岳山 伴睡菴二十八間在府西北一百里華嶽山 金昌翕詩 華山深逶迤。雲生幾處所。日沒餘輝存。崢嶸訪且去。歸鳥拂驚湍。鳴馬遶幽楚。旣至爲微月。孤禪歇琅鼓。默默麻衣徒。菴名亦云古 牛頭寺在府北十五里牛頭山今無 九成菴在邑鎭鳳儀山 獅子寺在華岳東丙子亂人多避兵云僧性靜重修今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