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의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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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수사(文殊寺) 221칸이다. 부 북쪽 40리 청평산(淸平山) 아래에 있다. 일명 청평사(淸平寺)이다. 곧 이자현(李資玄)이 살던 곳이다. 고려 때 김부철(金富轍)의 기문(記文)에,

“춘주(春州)의 청평산이라는 것은 옛날의 경운산(慶雲山)이며, 문수원(文殊院)이라는 것은 옛날의 보현원(普賢院)이다. 처음에 선사(禪師) 승현(承賢)이 당(唐)나라로부터 신라로 와서 고려 광종(光宗) 24년에 이르러 처음으로 경운산에 와서 절을 짓고는 백암선원(白巖仙院)이라 했다.당시는 송(宋)의 개보(開寶) 6년이다. 문종(文宗) 23년 무신년(戊申年)에 좌산기상시지추밀원사(左散騎常侍知樞密院事) 이두(李頭)가 춘주도(春州道) 감창사(監倉使)가 되었는데, 경운산의 빼어난 경치를 사랑하여 백암선원의 구터에다 절을 짓고 보현원이라 했다. 당시는 희령(熙寧) 원년이었다. 그 뒤에 희이자(希夷子)가 벼슬을 버리고 여기에 은거하니 도적이 그치고 호랑이와 이리가 자취를 감추었다. 이에 산은 청평산(淸平山)으로, 원(院)은 문수원(文殊院)으로 고쳐 부르고는 지붕을 수리했다. 희이자(希夷子)는 곧 이공(李公)의 장남(長男)으로 이름은 자현(資玄), 자는 진정(眞精)인데, 모두 37년 동안 이 산에 살았다고 한다.

원나라 태정황후(泰定皇后)가 승려 성징(性澄)과 윤견(允堅)이 바친 불경을 이 절에 소장토록 하였다. 이제현(李齊賢)이 왕명을 받들어 지은 비명(碑銘)에, ”태정(泰定) 4년 3월 경자(庚子)에 첨의정승(僉議政丞) 신(臣) 흡(恰) 등이 궁중의 알자(謁者)를 시켜 왕에게 복명(復命)하기를, ‘천자의 근신(近臣)인 사도(司徒) 강탑리중(剛塔里中)과 정원사(政院使) 홀독첩목아(忽篤帖木兒)가 황후(皇后)의 명령을 받고 와서 승려(僧侶) 성징(性澄)과 시인(寺人) 윤견(允堅) 등이 바친 불경한 질을 청평산 문수사에 귀속시키고, 돈 일만 냥을 보시(普施)하여 그 이자를 가지고 황태자(皇太子)와 황자(皇子)의 복을 빌고, 각각 그 탄신일(誕辰日)에는 승려들에게 음식을 먹이고, 불경을 열람하게 하는 것을 세세(世世)의 범례로 하게 하셨습니다. 또 비(碑)를 세워 이를 영구(永久)하게 하는 뜻을 보이라 하셨습니다. 신(臣) 등은 적이 생각하건대, 불법(佛法)이 중국(中國)에 유입된 이래 세대에 따라 융성하기도 하고 침체하기도 한 것이 천여 년이나 되었습니다. 황조(皇朝)에서는 ’불도(佛道)가 무위(無爲)를 종지(宗旨)로 삼는 것이 성인(聖人)의 이치에 부합하고, 널리 구제하는 것을 마음으로 삼는 것이 인정(仁政)에 도움이 된다‘하여 매우 돈독하게 존숭하고 신봉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미 전거(傳車)로서 불경을 수천 리 떨어진 궁산(窮山)에까지 수송하였으며, 또 자산(資産)을 세워 그 무리들을 후족(厚足)하게 하였으니, 이는 불자(佛者)에 있어서도 다행한 일입니다. 천하에 명산(名山)과 복지(福地)가 적지 않지만 우리나라를 비천하게 여기지 않고 복을 비는 장소를 마련하였으니, 이는 불자의 다행일 뿐만 아니라 저희 나라의 다행이기도 합니다. 장차 이를 대서(大書)하고 특서(特書)하여 영원토록 가르치고 빛내야 할 것입니다. 하물며 황후 (皇后)의 유지(有旨)가 있었으니 감히 공경스럽게 받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집필자(執筆者)에게 맡겨 사실을 기록할 것을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신(臣)아무개에게 명(銘)을 지을 것을 명하니 신(臣) 아무개가 명(銘)을 짓기를, ’거룩하신 대원(大元)이여, 이미 대대로 인정(仁政)을 펴니, 봄날의 볕과 같고 단비와 같아 천하의 만물이 생성한다. 금선(金仙)이 무위(無爲)를 교화로 한 것을 그리워하여, 그 흙과 풀을 써서 중생을 이롭게 하고 포악함을 막았도다. 이를 존숭하고 공경하되 후히 그 무리들을 복호(復戶)하여, 부역(賦役)과 세금을 면해주고 오로지 불서(佛書)를 익히게 하였도다. 불서는 천 상자에 달해 넓기가 안개 낀 바다와 같은데, 정묘(精妙)하기는 호리(毫釐)를 쪼개듯 하고 넓기는 천지를 포괄하듯 하였도다. 율(律)은 계(戒)를 따라 서고 논(論)은 정(定)에서 나왔는데, 오직 불경을 연통(演通)하고 오직 지혜를 밝혔도다. 타고 온 저 규헌(犪軒)은 양거(羊車), 녹거(鹿車)보다 우뚝하고, 그 향기가 훈훈하여 온 산에 담복화(薝蔔花) 향기 가득하도다. 천축(天竺)에서 모은 이는 섭(葉)과 난(難)이며, 중국에 전파한 이는 등(藤)과 난(蘭)이었네. 양(梁) 나라에서는 쭉정이를 취하였지만 우리는 곡식을 맛보았고, 당(唐)에서는 돌이라 했지만 우리는 옥을 캐내었네. 성징과 윤견은 복장(服裝)은 다르지만 마음은 같아, 불경을 완성하여 준공을 진달했네. 황후가 가상히 여기고 간직할 곳을 도모하기를, 삼한(三韓)은 선한 것을 즐기고 의리를 돈독히 하고, 지금의 왕은 우리에서 나온 우리의 외손이니, 복을 빌어 황제에 보답할 그 정성을 믿는다 하고, 이 나라 동쪽에 있는 청평산의 문수사가 험하다고 꺼리지 않고 역(驛)을 통하여 보시(普施)하시었네. 내탕고(內帑庫)의 돈을 풀어 중들을 먹여 살리고, 왕과 신하들에게 부탁하여 오래도록 지켜지게 했네. 임금은 절을 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천자의 만세(萬歲)를 부르고, 천자와 황후가 해로(偕老)하고 근본과 지엽(枝葉)이 백세를 누리기를 기원했네. 제잠(鯷岑)에 토대가 이그러져 접해(鰈海)에서 먼지가 날지라도, 공덕(功德)이 모여 손상되지도 않고 추락하지도 않으리라”고 했다. 

 

○ 신흠(申欽)의 시(詩)에,

게으른 손 절을 찾아 오르니 / 倦客尋初地

드높은 비탈 위에 절간이 있네 / 懸(1)崖闢梵盧

구름 속에 진락공(眞樂公)의 집이 트이고 / 雲開眞樂觀

신령한 용 열경(悅卿)의 글씨 보호해 / 龍護悅卿書

폭포수는 짚신을 뿌려 적시고 / 飛瀑沾芒屐

돌다리 대가마로 건너간다네 / 危矼住(2)筍輿

동산 위에 개인 달 둥실 떠올라 / 東林看(3)月上

하늘 그림자 텅 빈 못에 떨어져 / 天影落潭虛

라고 했다. 

 

선동식암(仙洞息庵) 6칸이다. 현(縣) 북쪽 45리 청평산에 있다.

견성암(見性菴) 6칸이다. 부(府) 북쪽 45리 청평산에 있다.

흥복사(興福寺) 30칸이다. 부 북쪽 30리 삼악산(三岳山)에 있다.

반수암(伴睡庵) 28칸이다. 부 서북쪽 100리 화악산에 있다.

우두사(牛頭寺) 부 북쪽 15리 우두산(牛頭山)에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 

 

고려(高麗) 이자현(李資玄)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낸 자연(子淵)의 손자이다. 본성이 총명하고 민첩하였고 용모가 특출하였다. 과거(科擧)에 급제하여 대악서승(大樂署丞)이 되었으나, 홀연히 벼슬을 버리고 춘주(春州) 청평산(淸平山)으로 들어가 선도(禪道)로서 스스로 즐겼다. 예종(睿宗)이 누차 명(命)을 내려 불러들였으나 자현(資玄)은, ‘신(臣)은 처음 도성(都城) 문을 나서면서 다시는 서울 땅을 밟지 않겠다고 맹세하였습니다. 이에 감히 명령을 받들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 드디어 전문(箋文)을 올리기를, ‘새의 본성대로 새를 길러서 종고(鐘鼓)의 걱정이 없게 하시고 물고기를 관찰하여 물고기를 알아서 강호(江湖)를 좋아하는 물고기의 본성을 이루게 하소서’라고 했다. 왕이 다시 안동(安東)으로 행차(行次)하는 길에 불러서 청량사(淸凉寺)에 살게 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청평사(淸平寺)로 돌아 와서 죽었다. 시호는 진락(眞樂)이다. 자현(資玄)의 자(字)는 진정(眞精), 도호(道號)는 희이자(希夷子)이다. 시종(始終)의 사적(事跡)이 문수원(文殊院) 비문(碑文) 가운데 실려 있다.

본조(本朝) 우거(寓居) 김시습(金時習) 자(字)는 열경(悅卿), 도호(道號)는 매월당(梅月堂)이다. 세조조(世祖朝)에 세상을 피해 은거하였는데, 청평산(淸平山)에 머물러 지냈다. 또 사탄(史呑)의 산수(山水) 간에 집을 짓고 구름처럼 거리낌 없이 노닐면서 그칠 줄을 몰랐다고 한다. 

 

1) 문집에는 ‘層’으로 되어 있다.

2) 문집에는 ‘度’로 되어 있다.

3) 문집에는 ‘晴’로 되어 있다.

 

 

 

文殊寺 二百二十一間 在府北四十里 淸平山下 一名淸平寺 卽李資玄所居 高麗金富轍記 春川淸平山者 古之慶雲山而文殊院者 古之普賢院也 初禪師承玄 自唐來新羅 至廣廟二十四年 始來于慶雲山 創蘭若曰白禪院 時大宋開寶六年也 至文廟二十三年 歲在戊申 故左散騎常侍知樞密院事李公爲春州道監倉使 愛慶雲勝景 乃卽白之舊址 置寺曰普賢院 時熙寧元年也 其後希夷子 棄官隱居于玆 而盜賊寢息虎狼絶迹 乃易山名曰淸平 院名曰文殊 而仍加營葺 希夷子卽李公之長男 名資玄字眞精 住山凡三十七年云 ○ 元泰定帝皇后, 以僧性澄, 寺人允堅等, 進佛經藏于此寺, 李齊賢奉王旨撰碑曰

泰定四年三月庚子, 僉議政丞臣恰等, 令中謁者, 復于王曰, 天子之近臣, 司徒剛塔里, 中政院使忽篤帖木兒, 受命天子之后, 伻來以僧性澄, 寺人允堅等, 所進佛書一藏, 歸諸淸平山文殊寺, 施緡錢萬, 令取其息, 爲皇太子皇子祈福, 各取其誕辰, 飯僧閱經, 歲以爲凡, 且曰, 樹碑, 以示永久, 臣等窃惟佛法入中國, 隨世興替, 且千餘歲, 皇朝謂其道無爲爲宗, 有契乎聖理, 廣度爲心, 有補于仁政, 尊信之尤篤, 今旣以傳車, 輸其書數千里窮山之中, 又立食本, 以贍其徒, 斯乃佛者之幸也, 名山福地, 在天下不爲少, 不鄙弊邑, 爰置祝釐之所, 斯則非惟佛者之幸, 亦弊邑之幸也, 將大書特書, 誇耀無極, 況中宮有旨, 敢不祗承, 請付執筆者, 以記, 於是, 命臣某銘, 其銘曰, 於皇有元, 旣世以仁, 陽春時雨, 亭毒九垠, 乃眷金仙, 無爲爲敎。用其土苴, 利生禁暴。是崇是敬, 厚復其徒。不徭不賦, 顓習其書。其書千函, 浩若烟海, 妙析毫釐, 廣包覆載, 律繇戒立, 論自定興, 維經之演, 維慧之明, 路彼犪軒, 卓乎羊鹿, 載薰其香, 一林薝蔔。俶裒于竺, 曰葉與難。俶播于震, 曰騰與蘭, 梁取其秕, 我嚌維穀, 訾石者唐, 我割維玉。伊澄伊堅, 服異心同。旣成法寶, 以奏爾功。天后爾嘉, 載謀之地。(東文選作之), 曰惟三韓, 樂善敦義。維時維王, 我出我甥。祝釐報上, 允也其誠。于國之東, 文殊之寺。(東文撰作山), 毋憚阻脩, 置郵往施。發緡內帑, 俾轉食輸, 可繼以守, 諉王曁臣。王拜稽首, 天子萬歲, 天后是偕, 本支百世。鯷岑石爛, 鰈海塵飛。維功德聚, 不騫不墮。 輸可繼以守諉王曁臣王拜稽首天子萬歲天后是偕本支百世鯷岑石爛鰈海塵飛維功德聚不騫不墮

○ 申欽詩 倦客尋初地。懸厓闢梵廬。雲開眞樂觀。龍護悅卿書。飛霑芒屨。危矼住筍輿。東林看月上。天影落潭虛。

○ 仙洞息菴 六間在縣北四十五里淸平山 ○ 見性菴 六間在縣北四十五里淸平山 ○ 興福寺三十間在府西三十里三岳山 ○ 伴睡菴二十八間在府西北一百里華嶽山 ○ 牛頭寺在府北十五里牛頭山今無 

 

高麗 李資玄,門下侍中子淵之孫,性聰敏,容皃魁偉,登第,爲大樂署丞,忽棄官,入春州淸平山,以禪道自樂, 睿宗累詔徵之 資玄曰 臣出始都門,誓不復踐京華, 不敢奉詔,遂上箋曰,以鳥養鳥,庶無鍾鼓之憂,觀魚知魚,俾遂江湖之性,王復幸, 安東召之使居淸涼寺, 未幾還淸平寺, 卒諡眞樂, 資玄字眞精道號希夷子, 始終事跡, 在文殊院碑文中 ○ 本朝寓居 金時習 字悅卿道號梅月堂光廟朝避世隱居栖身於淸平山又結於舍史呑之山水間雲遊浪跡不知所終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