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의 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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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중진(睦重鎭) 효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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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려각 현판
상세정보

남산면 수동리 산록의 묘역에 있다. 본관은 사천(泗川), 목사(牧使) 창우(昌遇)의 아들이다. 서울에서 성장하여 춘천으로 이거하였는데 조부의 제사일이나 형의 생일이면 춘천의 토산품을 몸소 지고 200리 길을 한 번도 빠짐없이 왕래하였다 한다. 정문은 1730(영조 6)에 내려졌다. 중앙로에 있던 법원을 효자동에 신축하면서 정려각을 현재의 위치로 이전했다는 자료가 있으나2) 1937년에 발간된 『조선환여승람』에 정려가 남면 수동리에 있다고 하였다. 따라서 효자동에 정려문이 있었다는 설은 재검토가 필요하다.

 

효자정려비

: 앞면- 중앙- 孝子通德郞睦重鎭之門

우측- 上之六年甲寅十二月/命旌

뒷면- 팔대종손 영대 자 원균/유사 영안 영걸/영규 영환/영근 영득/영춘 영재/계묘년 삼월일입

효자정려문

: 孝子通德郞睦重鎭之門/上之六年甲寅/十二月日/命旌

 

전하는 말에 의하면 춘천시의 효자동이 이 효자문에 의해 효자동이라는 법정동의 이름이 생겼다고도 하고 반씨(潘氏)의 효자문이 있어서 생겼다고도 한다. 묘역에 건립된 목씨문중의 유래문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사천목씨(泗川睦氏) 현헌공파(玄軒公派) 고석공택(孤石公宅) 정문공종중(旌門公宗中)의 유래

우리 목씨(睦氏)는 선대(先代)가 경상도 사천에 살면서 우애가 남달리 돈독하여 화목할 목()자로 성()을 얻게 되었고, 본관을 사천(泗川)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계승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성씨가 본관이 서로 다르나 목씨의 본관이 사천 하나뿐인 것은 그 뿌리가 한분에게서 이어졌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목씨의 시조는 고려조에 무관을 지내신 낭장동정공(郎將同 正公 諱 孝基)이시고, 2세 합문지후공(閤門祗侯公 諱 德昌)은 고려 원종 10년에 서북방면에서 일어나 반란을 평정하다 순국하시어 충신일등으로 영주군(靈州君)에 봉()해지신 분이며, 3세는 직제학공(直提學公 諱 俊平)은 비서성판사(秘書省判事), 보문각직제학(寶文閣直提學)을 지내신 분이다.

우리 목문(睦門)은 고려조부터 가문이 융성하여 중앙관계에 진출하기 시작하였고, 조선조에서도 많은 정치가와 인재를 배출하여 당당히 명문대가의 위치에 올랐다. 시조로부터 6세까지의 묘소(墓所)는 북한에 모셔져 있어 현재 7세조가 모셔져 있는 서울 도봉구 방학동 선영(先塋)내에 단비(壇碑)로 모시고 있다.

고려조에서 무신가문(武臣家門)으로 성망(聲望)이 높았던 우리 목씨는 단본(單本)이라 사람 수는 적었지만 조선시대에 들어와 33명이 문과급제(文科及第)를 하였으며 정승 판서를 비롯하여 장상관(堂上官) 21명을 배출함으로써 명문대가(名門大家)의 지위를 확고히 하였으니 이는 우리 문중의 큰 자랑이다.

특히, 11세조 현헌공玄軒公 諱 世秤은 중종 때 명현(名賢)으로 이름이 높았고 그의 아들이신 두일당공逗日堂公 諱 詹은 대사간·이조참판·도승지 등을 지내시고 선조 2577세에 기로소(耆老所)에 드셨다.’

2) 춘천시·춘성군, 『춘주지』, 춘천문화원, 1984, 1435.

춘천백년사편찬위원회,춘천백년사』, 춘천시, 1996, 2124~2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