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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헌에 수록된 효행(孝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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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희언 효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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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헌에 수록된 효행(孝行)6) 


6)​춘천시·춘성군,

 

(1) 강씨(姜氏)

사인(士人) 최창경(崔昌慶)의 처로 지아비가 죽자 함께 따라 자결하였다. 후에 정려되었다.

 

(2) 고선주(高善柱)

진한(鎭漢)의 손자로 자는 인선(仁善), 호는 초은(樵隱)이며 주사(主事)를 지냈다. 부모의 병환이 오래되자 약을 채취하기 위해 입산하였는데 동자삼을 캐서 다려 드리니 회복하여 9순을 장수하였다고 한다.

 

(3) 고제흥(高濟興)

본관은 장흥(長興)이고 자는 기우(起雨), 호는 농포(農圃)이며, 제봉(霽峯) 경명(敬命)의 후손이다. 부친의 병환에 의원 말이 산삼이 아니면 고치기 어렵다고 하자 가평 광악산에 들어가 가까스로 산삼을 얻어다 드리니 효험이 있어 3년을 더 사셨다. 돌아가신 후 시묘 3년에 한 번도 집에 돌아오지 않으니 향리에서 모두 칭송하였다.

 

(4) 고진한(高鎭漢)

본관은 제주(濟州)로 고성부원군(固城府院君) ()의 후손이다. 일명 태한(太漢)으로 효행이 널리 알려졌으며 부친의 병환이 깊어지자 손가락을 잘라 주혈(注血)하니 회생하여 장수하였다고 한다. 도사(都事)를 지냈다.

 

(5) 김선일(金善一)

본관은 광산(光山)이고 호는 난곡(蘭谷)이며 충목공(忠穆公) 여석(礪石)의 현손이다. 사도시첨정(司䆃寺僉正)을 역임하였으며 임진왜란 때 양주에서 아들 김택(金澤)을 데리고 춘천시 서면 신매리에 정착하였다고 한다. 선조 대에 효행으로 이조참의에 증직되었다.

 

(6) 김의중(金義重)

본관은 선산(善山)이며 호는 삽암(翜庵)이다. 우정(憂亭) 경의(敬宜)의 후손이다. 관이 감역(監役)에 이르렀으며 효행이 지극하여 3년 여묘를 하는데 슬퍼서 흘린 눈물로 소나무가 고사하고 맹수가 보호하여 주었다고 한다.

 

(7) 김의탁(金義鐸)

호는 구암(龜巖)이며 진사 쌍백당(雙栢堂) 취우(就禹)의 아들이며 효행이 지극했고 학행이 돈독하였는데 청평사에 공부하러 갔을 때 별안간 어머니 병환이 생각나서 집으로 돌아오는데 도중에 수달피가 잉어를 잡아다 앞에 떨구고 가거늘 그것을 가져다 모친을 드리니 신효하게 나았다고 한다. 송은(松隱) 김영하(金泳河)가 행장을 지었다.

 

(8) 김씨(金氏)

정우익(鄭友益)의 처로 병자호란 때 적을 만나 절벽에서 투신하여 죽으니 후에 정려하였다.

 

(9) 김씨(金氏)

효자 임수강(林壽崗)의 처로 정려가 남면 둔일묘(屯日墓) 아래에 있다고 하였다.

 

(10) 김씨(金氏)

원생(院生) 오재윤(吳載胤)의 처이고, 열행으로 1807(순조 7)에 정려되었다.

 

(11) 김씨(金氏)

황기수(黃基秀)의 처로 1811(순조 11)에 정려되었다.

 

(12) 김씨(金氏)

선산김씨 김석종(金碩鍾)의 딸이며 남양(南陽) 홍사용(洪思庸)의 처이다. 모녀가 함께 과부가 되어 후사가 없자 친모에게 돌아와 극진히 부양하기를 수십년하였으며 굳게 우절(宇節)하니 효열 두 가지를 다 갖추었다고 칭송하였다.

 

(13) 김씨(金氏)

선산김씨 진사 김창수(金昌洙)의 딸이며 효자 황주하(黃柱河)의 증손 기언(基彦)의 처이다. 정열로 1811(순조 11)에 명정하였다.

 

(14) 무작개(無作介)

이돌봉(李乭封)의 처로 병자호란 때 그 남편은 종군(從軍)하고 시어머니와 둘이 있었는데 갑자기 돌입한 적에게 잡히자 꾸짖어 욕하기를 그치지 않다가 죽었다. 당시 회동(檜洞)에 살았다.

 

(15) 무진(戊辰)

장용위(壯勇衛) 송희령(宋希齡)의 처로 임진왜란 때 물에 투신하여 정절을 지켜 후에 정려되었다. 『춘천읍지』에 열녀로 기록되어 있다.

 

(16) 박사일(朴師一)

본관은 반남(潘南), 호는 근훤당(芹暄堂)으로 평도공(平度公)은 은()의 후손이다.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가 병환이 들어 약을 구하러 갈 때 호랑이가 밤길을 인도하였다고 한다. 정조 대에 효행이 조정에 보고되어 감찰(監察)에 제수되었다.

 

(17) 반희언(潘希彦)

본관은 거제(巨濟)로 임진왜란 때 용감했던 군수 반처량(潘處良)의 아들로 희언은 1554518일에 춘천 동내면 퇴계촌에서 출생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희언의 아버지 반처량 장군이 전사하자 친지와 이웃 사람들의 도움으로 선산에 안장한 그는 그 옆에 묘막을 짓고 그 곳에서 3년 시묘를 마치고 돌아오니 홀로되신 어머니의 건강이 매우 약화되어 온갖 약을 구해 정성껏 병간호를 하였으나 효험이 없었다. 어머니의 병으로 근심하던 중 꿈에 산신령이 나타나 대룡산에 가면 시체 5구가 있는데 그 중 가운데 시체의 목을 고아서 어머니에게 공양하면 어머님의 병이 나을 것이라고 일러주어 그대로 하였더니 어머님의 병이 나았다. 후에 알고 보니 시체의 목은 시체가 아니고 산삼이었다고 하는데 이 때 시체의 목을 들고 지나온 곳을 거수리(擧首里)라 하던 것을 후에 거두리(巨頭里)로 불리웠다고 한다. 훗날 다시 세월은 흘러 어머니의 연세가 94세의 노경(老境)에 이르렀고 노모의 병세는 아주 기울었는데 추운 겨울에 딸기를 드시고 싶다고 하여 심산유곡을 뒤져 딸기를 구해다 드렸다고 하며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다시 시묘 3년을 하였다고 전한다. 그의 효행이 임금에게 알려져 1608(선조 41)에 표창을 받았다고 하며 지방 유림들이 뜻을 모아 지금의 춘·원간의 관문인 효자동에 정문을 세워 희언의 놀라운 효행을 표창하는 동시에 널리 그 업적을 선전하여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본받게 한 것이다. 그때부터 이 지역을 가리켜 효자문거리라고 부르게 되었으나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효행이 깃들여 있던 정문은 없고 다만 반씨의 효자문거리라는 전설만 남아 있다. 집은 동내면 퇴계촌에 있었다.

 

(18) 성석구(成錫九)

본관은 창녕(昌寧)으로 덕수의 삼자이고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낸 희재(希在)의 후손이다. 효행으로 1759(영조 35)에 복호(復戶)되었다.

 

(19) 성씨(成氏)

이정익(李廷翼)의 처로 열행이 있었다. 남편이 일찍 죽자 평생 흰 옷을 입고 어육(魚肉)을 먹지 않았으며 제주를 장만하는데 있어서 반드시 별도의 제전(祭田)에서 나는 것을 사용하였으며 제기(祭器)도 반드시 별도의 것을 사용하고 일체 사지 않았다. 50여년을 이와 같이 하였다고 한다. 당시 서상리에 살았다.

 

(20) 송기(宋杞)

본관은 진천(鎭川)이고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부모상을 당하여서는 죽만 먹고 3년을 지냈다고 한다. 효행이 알려져 나라에서 정려를 명하였다.

 

(21) 송씨(宋氏)

여산(礪山) 송영인(宋榮人)의 딸로 수성(隋城) 최기노(崔基魯)의 처이다. 효성이 지극하였을 뿐만 아니라 열행으로 향리에서 칭송을 받았다.

 

(22) 송재정(宋在定)

본관은 상산(常山)이며 자는 공린(公麟), 호는 지파(芝坡)이다. 노모가 3년을 병석에 있었으나 극진히 간호하였으며 돌아가신 후에는 보름에 성묘하기를 빠뜨리지 않아 향리에서 칭송하였다.

 

(23) 심성택(沈星澤)

본관은 청송(靑松)으로 의관(議官) 의한(宜漢)의 아들이다. 가세가 빈한하여 부친의 병간호를 제대로 못하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하늘에 기원하니 홀연히 집안의 개가 여우 한 마리를 물고 왔다. 이에 이를 팔아서 약을 구해 드렸고 호랑이가 사슴 한 마리를 잡아다가 마당에 던져 이를 드리니 효험이 있었다고 한다.

 

(24) 악덕(岳德)

주분원(朱分院)은 본관이 신안(新安)으로 그의 처이다. 시어머니가 중풍이 들었는데 4년간 잠시도 떠나지 않고 보살폈으며 돌아가신 후 집에 불이 났는데 악덕이 불길을 무릅쓰고 들어가 시아버지와 시어머니의 신주를 끌어 안고 나오다가 불에 타 죽었다.

 

(25) 애재(愛才)

군관(軍官) 허차만(許次萬)의 딸이다. 야간에 호랑이가 돌입하여 그 어미를 물고 가려 하자 애재가 10여 세의 아이로 그 어미의 발목을 끼어 잡고 산록을 넘어 3리 정도 끌려갔으나 끝까지 놓지 않으니 호랑이가 이내 버리고 갔다. 이에 후에 정문이 세워졌다.

 

(26) 억금(億今)

양녀(養女)로서 절행(節行)이 알려져 1543(중종 38) 9월 의정부의 보고에 따라 양녀 팔월(八月)과 함께 상을 받고 복호(復戶)되었다.

 

(27) 유몽표(柳夢彪)

본관은 고흥(高興)이고 자는 응병(應炳)이다. 임진왜란 때 모친을 모시고 피난하다가 적군을 만났는데 위험을 무릅쓰고 몸으로 모친을 보호하였다. 효로써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임명되어 토산현감, 사섬시부정(司贍寺副正)에 이르렀다.

 

(28) 이격(李格)

이격은 부친을 여의고 어머니 김씨와 빈궁하게 살았는데 그는 늘상 옷을 팔아서 어머니를 정성껏 봉양하고 명절이 되면 성찬을 베풀어 모친의 마음을 기쁘게 하였다. 하루는 김씨가 토실(土室)에 들어 갔다가 실수로 불을 내 토실이 화염에 휩싸이고 김씨는 머리카락이 다 탔는데 격이 불을 무릅쓰고 들어가 옷을 벗어 모친을 싸가지고 나왔으므로 향리에서 효자라고 칭송하였다고 『세종실록』에 전한다.

 

(29) 이광진(李光鎭)

효자로 1808(순조 8)에 증직되었다.

 

(30) 이규갑(李圭甲)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호는 취죽(翠竹)이다. 문충공(文忠公) 항복(恒福)의 후손이다. 빈한하였으나 학문을 좋아하고 부모를 섬기는데 효성이 지극하였다.

 

(31) 이낙종(李樂鍾)

전주이씨(全州李氏)로 광평대군 후예이다. 효성이 지극하였는데 시묘를 살을 때 샘이 솟고 맹수가 보호하였다. 김영하·이구연·이계훈이 여막을 찾아가 조문하였다.

 

(32) 이씨(李氏)

용인현감 오악자(五岳子) 세욱(世郁)의 딸이며 충신 한백록의 후손인 한계우의 처이다. 순조 때 효로써 복호(復戶)되었다.

 

(33) 이유복(李維復)

효행이 알려져 복호되었다.

 

(34) 이유풍(李儒豊)

함성군(咸城君) 종생(從生)의 후손으로 성품이 순박하고 학문에 독실하였으며 효성이 지극하여 칭송을 받았다. 문행(文行)도 있다.

 

(35) 임수강(林壽崗)

본관은 평택(平澤)이고 판관 찬()5세손이다. 그가 9세 때 부친이 병으로 위급하게 되자 손가락을 잘라 마시게 하여 회생하였으며 모친이 또한 학질에 걸려 봉밀을 드시기를 원하자 산으로 들어가서 찾다가 우연히 석보봉액(石寶蜂液)을 얻어서 갖다 드렸다. 처인 김해김씨 역시 효성이 깊어 시부모가 병들자 의원이 이르기를 화사(花蛇)가 가장 좋다고 하였다. 이에 김씨가 때가 마침 겨울이었으나 얼음물에 목욕재계하고 기도하니 홀연히 하늘에서 뱀 한 마리가 김씨 앞으로 내려 왔다. 이를 탕을 만들어 드리니 회복되었다고 전한다. 부사 유계린(柳季麟)이 누차 상계하니 1832(순조 32) 4월 그의 처 김씨는 정려되고 그는 효자로 조봉대부동몽교관(朝奉大夫童蒙敎官)에 증직되었다.

 

(36) 임영규(林永圭)

본관은 평택(平澤)으로 충절공(忠節公) 인급(人汲)의 후손이다. 나이 겨우 16세에 부친이 병환이 들자 밤낮으로 보살피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부친이 꿩고기를 먹고 싶어 하니 산곡을 방황하여 찾아 다녔는데 홀연히 꿩 한 마리가 그의 앞에 가만히 엎드려 있는지라 이를 잡아서 부친에게 드렸다고 전한다.

 

(37) 전주이씨(全州李氏)

무과 출신인 선산김씨 김진종(金振鍾)의 처로 시부모를 극진히 모셨다. 시어머니가 병들자 집 뒤편 향노봉에 단()을 설치하고 백일기도를 하여 회복하였다. 이에 사람들이 그 터를 이씨산제당이라고 이름하였다고 전한다.

 

(38) 정일(貞一)

포보(砲保) 박영신(朴永信)의 처로 무뢰한이 범간하려 하자 꾀를 내어 지연시키며 피할 궁리를 하였으나 밤이 되자 저항하여 싸우다가 죽음을 당하였다.

 

(39) 조금(趙錦)

고려시대 사람으로 부창역리(富昌驛吏)의 아들로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였는데 그의 모친이 겨울에 병환에 있을 때 산 잉어를 먹고 싶다 하여 어름을 가르니 두 마리가 튀어나와 모친을 봉양했다 하며 또 회갑날에 사슴이 집으로 뛰어 들자 사람들은 효성이 하늘을 감동시킨 결과라고 하였다. 이에 정효(旌孝)에 올렸다고 한다.

 

(40) 종옥(終玉종례(終禮)

사노(私奴) 김간손(金艮孫)의 두 딸로 인조 대(1637년간인 듯함)에 그의 아비가 적에게 붙잡히자 두 딸이 울며 호소하여 말하기를 아비가 죽고 자식이 살아서 무엇하겠습니까하니 적이 그 아비를 놓아 주고 두 딸을 욕보이려 하매 형을 범하려 하면 동생이 나서서 막고 동생을 범하려 하면 형이 나서서 막으니 적이 노하여 한꺼번에 죽였다고 전한다. 이에 효열을 갖추었다고 칭송하였다.

 

(41) 최연순(崔璉淳)

본관은 수성(隋城)이고 수성백(隋城伯) 영규(永奎)의 후손이다. 효뿐만 아니라 문행도 유명하다.

 

(42) 최재남(崔在南)

본관은 수성(隋城)이고 자는 원평(元平), 호는 금서(錦西)이며 판관 제겸(悌謙)의 후손이다. 아버지가 병환이 있자 손가락을 잘라 주혈하니 13년을 더 살았다고 한다.

 

(43) 최학주(崔學柱)

본관은 삭령(朔寜)이고 자는 습여(習汝), 마계(麻溪) 대지(大智)의 후손이다. 효행이 지극하여 향리에서 칭송이 지극하였다.

 

(44) 팔원(八月)

양녀(養女)로써 절행이 알려져 1543(중종 38) 9월 의정부의 건의로 양녀 억금(億今)과 함께 상을 받고 복호(復戶)되었다.

 

(45) 한덕조(韓德祚)

본관은 청주(淸州)이고 자는 한여(韓汝)로 충신 희석(希碩)의 후손이다. 효로써 동몽교관에 증직되었다.

 

(46) 한용보

본관은 청주(淸州), 몽계(夢溪) 철충(哲冲)의 후손이다. 부모가 병환에 들자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고 시중을 들었고 탕을 드릴 때는 반드시 먼저 맛을 보았다. 학문을 좋아하여 사우들이 그를 존경하였다.

 

(47) 양천허씨(陽川許氏)

고흥(高興) 유청신(柳淸臣)의 후손으로 통덕랑 유재한(柳宰漢)의 처이다. 1806(순조 6)에 정열로서 정려되었다.

 

(48) 홍씨(洪氏)

정사충(鄭思忠)의 처로 임진왜란 때 적을 만나 화를 피해 절벽에서 투신하여 죽었다. 집이 천전리에 있었다.

 

(49) 홍재후(洪在厚)

본관은 남양(南陽)이고 자는 중명(仲明), 호는 소송(少松)이며 마천(麻川) 일동(逸童)의 후손이다. 매사(梅史) 재화(在和)의 문인으로 효를 근본으로 삼고 배움을 실천하여 후진을 양성하여 일향(一鄕)의 모범이 되었다. 유고(遺稿)가 있다.

 

(50) 황씨(黃氏)

본관은 평해(平海)이고 초계(草溪) 정석중(鄭錫重)의 처로 효행이 알려져 사림이 여러 차례 관에 아뢰니 도신(道臣)이 조정에 아뢰어 정려가 내려졌다.

 

(51) 황주하(黃柱河)

본관은 평해(平海)이고 자는 경부(擎夫)이며 양무공(襄武公) 희석(希碩)의 후손이다. 부친이 병환으로 위독하자 단지하여 피를 드시도록 하였고 여묘를 6년간 하였으며 모친상에도 그와 같이 하였다.

6)춘천시·춘성군, 『춘주지』, 춘천문화원, 1984, 1434~1436.

춘천백년사편찬위원회, 『춘천백년사』, 춘천시, 1996, 2122~2131. 위의 자료는 재인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