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의 유교
사이트 내 전체검색

민영휘(閔泳徽) 신도비

상세정보

민영휘(閔泳徽) 신도비

번역문

황고 사호 하정부군의 신도비

불초자 형식이 피눈물을 흘리며 삼가 짓다

불초자 대식이 피눈물을 흘리며 삼가 쓰다

불초자 규식이 피눈물을 흘리며 삼가 전액을 쓰다

 

오호라! 우리 선친은 지극한 품성과 탁월할 행적으로 후세에 드리워 보여줄 만한 것이 있으니, 진실로 우리 불초자들이 사사로이 할 수 있는 바도 아니며, 또한 우리 불초자들이 감히 말할 수 있는 바도 아니다. 그러나 선친이 일찍이 수비명(壽碑銘)을 직접 짓고 남에게 비문을 구하지 말라고 훈계하셨다. 그 글이 장차 인멸되어 찾아볼 수 없게 될 것이기에 삼가 그의 행적 가운데 현저하게 드러나고 중요한 것과 관직에 나아간 후 빠트린 이력을 삼가 뽑고, 수장비에서 빠트리거나 생략한 것을 추가로 보충하니 실제로 불초자들이 어쩔 수 없이 한 것이다.

공은 성이 민(), 휘는 영휘(泳徽), 자는 군팔(君八), 하사받은 호는 하정(荷汀), 본관은 여흥(驪興)이다. 상의봉어를 지낸 휘 칭도(稱道)가 공의 시조이며, 20대를 내려와 인재(訒齋)라는 호를 쓴 대사헌 휘 시중(蓍重)이 공의 7대조이다. 6대를 전해져 휘 두호(斗鎬)는 판돈녕을 역임하고 의정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효헌이며, 정경부인에 추증된 청송심씨는 협판에 추증된 휘 영우(愚永)의 따님인데, 이 분들이 각각 공의 부친과 모친으로, 철종 임자년(1852) 515일에 광주 옛 고을의 마을집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훤칠한 체구에 순수한 얼굴을 지녔고 머리가 명석하였으며 수염은 성글지만 길었다. 소리는 금석을 울리는 듯 하였고 성품과 도량은 어질면서 강직하였다. 총명함이 특히 뛰어나 한번 보고 한번 들으면 조금이라도 잊지를 않았다. 일을 처리함은 삼가고 조심하며 질문하기를 좋아하였다. 부인은 평산신씨로 감역을 지낸 휘 명석의 따님으로 생전에 정경부인에 봉해졌다.1)  부인으로서의 거동과 규범은 부군이 지은 추기(追記)에 갖추어 수록되어 있다. 기유년(1849) 45일에 태어나 을묘년(1915) 정월 29일에 세상을 떠났다. 그 뒤로 21년 후인 을해년(1935) 125일 경진일에 공은 경성 관훈동 죽동의 관사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 84세였다. 13일 무자일에 춘천 장항리 계좌 언덕 부인의 무덤 오른쪽에 합장하였다.

자식인 불초자 형식은 본인인데 아들로 전위 병주(丙疇), 병길(丙吉)을 두었고, 딸은 전 전위(前 典衛)인 안동 김순한(金舜漢)에게 출가하였다. 둘째 아들 대식(大植)은 아들로 전 감조관 병수(丙壽), 병옥(丙玉), 계부에게 출계한 병도(丙燾), 병완(丙玩), 병선(丙瑄), 병소(丙玿), 병무(丙珷)를 두었고, 딸은 4명인데 첫째는 인동(仁同) 장지환(張智煥)에게 출가하였다. 셋째 아들 전 비서원증 규식(奎植)은 아들로 병서(丙瑞), 병유(丙瑜)를 두었고 딸은 하나이다. 막내아들 참봉 천식(天植)은 병도(丙燾)를 양아들로 삼았다. 사위 이유익(李裕翼)은 아들로 홍재(弘宰), 달재(達宰)를 두었고 딸은 안동 김규호(金虎圭)에게 출가하였다.

병주(丙疇)는 아들로 성기(聖基), 승기(承基), 효기(孝基)와 딸 셋을 두었다. 병길(丙吉)은 아들 호기(虎基)를 두었고, 병수(丙壽)는 아들 덕기(德基)와 헌기(獻基), 공기(公基), 석기(奭基)와 여섯 딸을 두었는데, 첫째는 김해 김관우(金寬羽)에게 출가하였다. 병옥(丙玉)은 아들 왕기(旺基)와 딸 셋을 두었고, 병완(丙玩)은 아들 흥기(興基), 풍기(豊基)와 딸 하나를 두었다. 병선(丙瑄)은 딸 셋을 두었고, 병도(丙燾)는 딸 둘을 두었다.

성기(聖基)는 아들 경보(庚輔)와 딸 하나를 두었고, 덕기(德基)는 아들 경현(庚玄), 경백(庚白), 경목(庚穆), 경화(庚和)와 딸 하나를 두었다. 장지환(張智煥)은 아들 정기(正基), 김관우는(金寬羽)는 아들 광세(光世)와 광집(光集)을 두었다.

공은 갑오년(1894)에 관직을 보국숭록대부 좌찬성이사에서 그만두고 봉조하로 치사할 것을 간청하는 상소문을 올렸는데, 난리를 만나 처리되지 못하였다. 그 후 궁내부특진관, 중추의장, 장례경, 규장학사, 태의경, 육군부장, 헌병사령관, 호위총관, 시종경, 표훈총재, 규장제학지후관을 역임하였는데 대다수가 겹쳐서 기록하지 않는다. 일강관, 친임내대신, 상방제조는 겸함(兼銜: 겸직)이다. 산릉(山陵: 왕족의 장례를 맡는 일) 효경전상호천릉도감, 교방사는 제거(提擧: 녹봉이 지급되지 않고 관료의 신분만 가진 무록관(無祿官))이다. 전교부총재, 진찬진연당상, 의궤영왕관빈은 경례(慶禮: 나라의 경사에 시행한 행사에서 예법을 담당하는 일)이다. 책시부사, 산릉석물도제조, 석의제조는 돈역(敦役: 국왕의 장례를 치를 때 직접 공사를 감독하는 일)이다. 1등에 훈작되고 특별히 대훈(大勳)에 특서된 것은 그의 품질(品秩)이다. 광무와 융희 연간에 한가하고 중요하지 않은 관직을 맡아 후반(候班)2) 만 하고 중서성에 한 걸음도 들이지 않는 것으로 제한을 정한 것은 공이 원래 지니고 있던 생각을 굳게 지킨 것이다.

어렸을 때 한강을 건너며 시를 지었는데, 십리 남쪽에서 향기로운 풀빛이 다가오는데, 한 사람이 큰 강물 소리 들리는 한가운데 앉았다.라고 하였다. 상국 김병학(金炳學)이 듣고는 크게 허여하며, 이 사람은 나라의 그릇이니 훗날 반드시 내 지위에 오를 것이다.라고 하였다. 과거에 급제하여 가주서로 임금의 명을 대기하면서, 글을 적어 내는 것이 상제하고 민첩하였다. 임금이 기뻐하며, 이번 과거에서 한 명의 뛰어난 신하를 얻었다.라고 할 정도로 임금의 칭찬과 사랑이 매우 중하였다.

외직으로 나가 영변을 다스리면서 백성을 구휼하고 학문을 진흥시켰고 향약을 만들어 시행하였다. 동경에 주재하면서 공관을 만들어 열고 이치에 맞게 일을 처리하였다. 평안도 관찰사로 부임해서는 과거시험을 실시할 것을 청하여 문학을 진흥시켰다. 기자의 무덤[]을 높혀 능()으로 격상시켜 백성들로 하여금 성인을 그리워하도록 교육시켰다. 임기가 다 되어 돌아올 때 선혜청은 텅 비어 있었다.

공이 당상관으로 있었을 때는 해당 문서를 각 관청으로 이첩하면서 직접 스스로 판단하여 결재를 하였다. 손에서 붓을 놓지 않아 하룻밤 사이에 오른쪽 소매가 해지고 구멍이 났으며, 수 개월이 지나자 재화와 곡식이 유통되었고 창고는 가득 찼다. 쌓아둠을 오랫동안 하고 아직 반포하지 않았으나 군수 물품과 관료의 봉급은 지급하고 공급하지 않음이 없었다. 국상(國喪)을 당하였을 때는 한결같이 의궤의 예법에 맞춰 조금도 구차하게 하거나 간소하게 하지 않았다. 순차적으로 공시(貢市)3) 를 담당하는 관직을 맡아 정리가 엄하고 밝으니, 사악하거나 속이는 일이 저절로 없어져 세금의 정책이 다시 새롭게 되었다. 북한산성을 중수할 때는 튼튼하고 치밀하게 하여 완전하고 견고하였다. 또 탕춘대성(蕩春臺城)을 수리하여 새로이 군영을 설치하면서 규모가 엄격하게 정리되었고, 성지(城池)를 새로 닦고 식량을 비축하며 군인들을 훈련시켜 뜻밖의 전쟁에 대비하게 하면서 힘을 다 쏟지 않음이 없었다. 빈객의 지위로 이연(离筵)4) 에서 시강(侍講)할 때는 뜻을 풀이함이 자세하면서도 밝아, 임금이 매우 칭찬하면서 이 사람은 문무를 모두 갖춘 인재이다.라고 하였다.

갑오년(1894) 봄에 떼를 지어 다니며 약탈과 살인을 일삼는 무리들이 창궐하자[갑오농민운동을 말한다] 임금이 청나라에 구원을 청하려고 하였다. 공이 임금 앞에 나아가 어찌 차마 다른 사람의 손을 빌어 우리 백성을 죽일 수 있겠습니까? 불쌍하게도 저 우매한 백성들은 살아갈 곳을 잃게 되어 이렇게 나라를 어지럽히는 일을 초래하였습니다. 의당 덕스러운 교화를 펼쳐 그들을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을 보여 주어 그들로 하여금 마음을 고쳐 각자 자기가 맡은 일을 편안하게 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만약 끝까지 마음을 고치지 않는다면 임금의 군대로 그들의 우두머리를 주살한다면 백성들의 마음은 저절로 안정될 것입니다. 혹시라도 위급한 사태가 있게 되면 신은 청컨대 두 영의 병사들을 거느리고 목숨을 바쳐 그들을 막아내겠습니다.라고 하였다. 말이 아직 실행에 옮기기도 전에 끝내 난리가 터졌다. 공은 마침내 천진으로 가서 임금의 밀지를 아뢰게 되었다. 상강(湘江)과 호강(滬江)5) 사이를 두루 돌아다니다 을미년에 임금의 명을 받들어 귀국하였다.

이 해 겨울에 임금이 아관(俄館)으로 거처를 옮겼다. 공은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나라를 안정시키는 계책을 임금에게 아뢰었다. 임금이 군정(軍政)을 맡기고자 하였으나 공은 불가하다는 뜻을 갖추어 아뢰고 사양하며 명을 받들지 않았다. 이때 러시아어 통역관인 김홍륙(金鴻陸)이 러시아 대사인 아롱다단(幻弄多端)에게 군정을 맡기려고 하였다. 공이 정색을 하고 문서를 찢어버리며, 외국 대사가 어찌 우리 내정에 관여하겠습니까? 또 홍륙은 말로 먹고사는 일개 통역일 뿐인데, 어찌 감히 이와 같이 한단 말입니까?라고 하였다. 드디어 관직을 버리고 교외로 물러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역적 홍륙이 독이 든 차를 임금에게 올려 임금과 동궁이 갑자기 병을 앓게 되었고 동궁이 더욱 위중하였다.6)  나라 안과 밖이 이 일로 당황하고 혼란하자 임금이 급히 공을 불러 태의경으로 삼았다. 공이 의관 기창(基昌)을 거느리고 입조하여 진료하고 약을 제조하여 올려 마침내 다시 회복될 수 있게 되었다. 사람들이 노봉(老峰) 문충공(文忠公: 閔鼎重)이 유상(柳瑺)7) 을 등용했던 것에 견주었다.

병오년(1906)에 휘문학교(徽文學校)를 세웠다. 예전에 집에다 글방을 설치하였는데 배우려는 무리가 구름처럼 모여들어 집이 다 수용할 수 없었다. 이때에 이르러 임금이 그 소식을 듣고 관상감사도시의 터를 하사하였고, 공이 또 관청의 땅과 민가의 여러 구역을 사들여 합쳐서 학교 건물을 세운 것이다. 공사가 끝나자 임금이 그 학교의 편액을 휘문(徽文)으로 하라고 명을 내리셨으니, 그의 이름에서 취하여 그를 기린 것이다. 후에 백만을 들여 재단법인을 만드니, 처음부터 끝까지 자본금과 경영에 필요한 비용은 모두 집안의 가산으로 채운 것이다. 이때 학도들이 학교 안에 동상을 세우고 은혜를 잊지 말자고 적었다. 이 학교가 설립된 것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최초의 효시8) 가 되니, 그가 실업에도 널리 관심을 지녀 또한 진흥시키기를 도모함에 힘쓴 실질적인 결실이다. 공이 시대의 흐름을 살핌에 남들보다 빨리 내다보는 능력이 밝았으니, 어찌 대중을 위하여 후생들을 인도하고 가르치려는 것이 아닌 것이 있겠는가.

얼마 지나지 않아 경술년(1910) 국치를 당했을 때 모욕을 참고 수치를 머금으면서도 오로지 왕실을 위하여 변고에 응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기미년(1919)과 병인년(1926)에 고종과 순종 두 임금이 연이어 세상을 떠나자 공은 애통해하며 살고자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하지 못하게 되자 오직 임금의 국상을 처리함에 온 몸과 수고로움을 다하였다. 청량(淸凉), 용마(龍馬)에 모시자는 여러 의론을 배척하고 금곡(金谷)의 홍릉(洪陵)과 유릉(裕陵)에 각각 합장한 것이 이것이다. 이것은 두 임금의 유지를 따른 것이다.

공의 지극한 품성은 하늘에서 타고났다. 모친이 병이 있어 일어나 움직이고 음식을 평소대로 먹지 못한 것이 10년이었는데, 의원을 모셔오고 약을 구함에 비가 오고 바람이 불어도 가리지 않았다. 모친상을 당하자 날마다 십리를 가서 반드시 무덤에 참배하였다. 임인년(1902) 부친인 효헌공이 병에 걸려 자리에 누웠는데, 이때 공은 지위도 높고 나이도 많거니와 또 자손과 종들이 매우 많았다. 그러나 직접 더우면 부채질을 하고 추우면 불을 때며 약을 맛보았고, 거상(居喪)을 예법에 맞게 하였다. 비록 비천하거나 어린 사람이 와서 조문하면 또한 반드시 곡을 하면서 맞이하여 마치 존귀하고 뛰어난 이를 받드는 것처럼 하였다. 효성과 정절이 뛰어난 이를 포상하고 곤궁하고 재난에 빠진 이를 구휼해주는 것은 늘상 하는 일이었다.

오호라! 공의 국가의 일을 맡아 처리하면서 드러난 공적은 의당 여기에서 그치지 않아야 하는데, 마침내 여기에서 그쳤으니, ! 나이가 그렇게 된 것인가, 하늘의 뜻인가.

학교를 세운 하나의 일만으로도 공은 30년간 마음과 신경을 썼으니, 영재를 교육하는데 힘써서 재능과 지식을 깨우쳐 열어준 이가 이미 많았다. 그들이 일을 이루고 공을 세움은 또한 앞으로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니, 이것은 거의 공이 만든 것이 아니겠는가. 오호라! 성대한 덕을 불초자들이 어찌 다 알 수 있겠으며, 또한 어찌 감히 군더더기 말로 덧붙이겠는가. 오직 사람들이 하는 말과 역사서에 기록된 것만을 모아서 감히 만세에 고한다.

단기 4275년 임오년(1942) 8월 일에 세운다.


1) 원문은 고봉(誥封)’이다. 5품관 이상은 죽은 조···처를 추봉했는데, 이때 생존한 이를 추봉하는 것을 일컫는다.

2) 후반(候班) : 임금의 안부를 살피는 반열을 말한다.

3) 공시(貢市) : 조선시대 공물(貢物)과 시전(市廛)을 말한다.

4) 이연(离筵) :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에서의 서연(書筵)을 말한다. 임금 앞에서 하는 경연(經筵)과 구별하여 붙인 명칭이다.

5) 상강(湘江)과 호강(滬江) : 상강(湘江)은 호남성(湖南省)을 말하고 호강(滬江)은 강소성(江蘇省) 상해현(上海縣)에 흐르는 강이다.

6) 1898년 김홍륙이 공홍식(孔洪植)을 시켜 고종과 태자가 마시는 커피에 독약을 넣어 발생한 사건으로, 김홍륙 독다사건(毒茶事件)이라고 한다. 아관파천(俄館播遷) 때 고종의 총애를 받은 통역관 김홍륙이 러시아의 세력을 믿고 정권을 농락하려 했으므로 흑산도(黑山島)로 유배당하였는데, 이에 원한을 품고 공홍식에게 아편을 주어 고종과 태자가 마시는 커피에 넣게 했다. 고종은 냄새가 이상해서 마시지 않았고, 태자는 마시다가 토하고 쓰러졌다.

7) 유상(柳瑺1643~1723) : 조선 후기의 의관이다. 숙종 때 천연두 전문가로서 왕과 왕비, 세자 · 왕자의 천연두 · 홍진을 치료해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가 되었고, 서산·고양 등지의 군수에 임명되었다.

8) 원문은 楛矢(고시)’인데, 이는 두만강 근처에 있던 숙신(肅愼)이란 나라에서 중국에 공물로 바친 화살로 우리나라를 지칭하기도 한다. 여기서는 효시(嚆矢)’의 오자로 보여 바꿔 번역하였다.

원문

皇考 賜號 荷汀府君 神道碑

不肖 衡植 泣血 謹撰

不肖 大植 泣血 謹書

不肖 奎植 泣血 謹篆

嗚呼 我皇考至性卓行 有可以垂示來後者 固非不肖輩之所可私也 亦非不肖之所敢陳也 而先君嘗自述壽碑銘 仍戒毋求人 文字則將湮而無徵 謹綴其事行之著且大者 與夫踐歷後承之前逸者 追補壽碑闕略 實不肖之所不得已也 公姓閔 諱泳徽 字君八 賜號荷汀 本官驪興 尙衣奉御 諱稱道 寔公初祖 二十世有諱蓍重 訒齋 大司憲 寔公七代祖 六傳諱斗鎬 判敦寧 贈議政 諡孝獻 贈貞敬夫人 靑松沈氏 贈協辦 諱愚永女 寔公考妣 以哲宗壬子五月十五日 生公于廣州古邑里第 公偉軀粹面 晳兩肦 髥鬢疏而長 聲音若出金石 性度仁而剛 聰明特達 一見一聞 未或遺忘 遇事謹愼好問也 先妣平山申氏 考諱命奭 監役 誥封貞敬夫人 儀範具在府君撰追記中 己酉四月五日生 以乙卯正月二十九日卒 後二十又一年 乙亥十二月五日庚辰 公考終于京城寬勳洞竹東館舍 壽八十四 十三日戊子 合封于春川獐項里癸坐原先妣竁右 孤子衡植 卽不肖 男丙疇 典衛 丙吉 女安東金舜漢 前典衛 仲子大植 男丙壽 前監造官 丙玉 丙燾父季父 丙玩 丙瑄 丙玿 丙珷 女四 長適仁同張智煥 叔子奎植 前秘書院丞 男丙瑞 丙瑜 女一 季子天植 參奉 繼男丙燾 壻李裕翼 男弘宰 達宰 女安東金虎圭 丙疇 男聖基 承基 孝基 女三 丙吉 男虎基 丙壽 男德基 獻基 公基 奭基 女六 長適金海金寬羽 丙玉 男旺基 女三 丙玩 男興基 豊基 女一 丙瑄 女三 丙燾 女二 聖基 男庚輔 女一 德基 男庚玄 庚白 庚穆 庚和 女一 張智煥 男正基 金寬羽 男光世 光集 公 甲午 官止輔國崇祿大夫 左贊成貳師 擬請奉朝賀致仕治疏 値亂未入徹 其後 宮內特進 中樞議長 掌禮卿 奎章學士 太醫卿 陸軍副將 憲兵司令官 扈衛摠管 侍從卿 表勳摠裁 奎章提學 祗候官 多疊不書 日講官 親任內大臣 尙方提調 兼銜也 山陵 景孝殿上號遷陵都監 敎坊司 提擧也 校典副摠裁 進饌進宴堂上 及儀軌英王冠賓 慶禮也 冊諡副使 山陵石物 都提調 石儀提調, 敦役也 勳一等 特敍大勳 品秩也 而光武隆熙間 閒司漫職 以供候班 不入中書一步 定爲艮限 是公所執有存焉 少時渡漢江 有詩云 十里南來芳艸色 一人中坐大江聲 金相國炳學聞而大許曰 此君國器 後必據吾座 及登第 以假注書召對 記注詳敏 上喜曰 今榜得一良臣 天褒甚重 出治寧邊 恤民興學 修行鄕約 駐箚東京 則刱開公館 應機辦理 按擦西藩 則請設試窠 振起文學 尊箕子墓爲陵 敎民慕聖 及遞歸 宣惠廳枵然空虛 公爲堂上 案簿行移 親自判押 手不停筆 一夜之間 右袂弊穿 閱屢月 財穀流通 倉廩充盈 積久 未頒之 軍需官料 莫不支給 時値國恤 一應儀軌 無少苟簡 次管貢市 整理嚴明 邪僞自消 貢政復新 重修北漢山城 堅緻完固 又修蕩春新營 規模嚴整 城池糧餉 甲兵演操 陰雨之備 莫不盡力焉 以賓客 侍講离筵 釋義詳明 上亟稱曰 是文武全材 至甲午春 匪撓猖獗 上欲請援淸國 公進曰 何忍借人之手 殘我赤子乎 哀彼愚氓 迫於失所 致此紛紜 宜宣德化 示以惻怛 使之革心安業 而若終不悛 則討以王師 誅止渠魁 民心自定 脫有緩急 臣請以兩營死當之 言未行 而竟値動亂 公則終有天津之行 奉上密諭也 遊歷湘滬間 乙未 承命還國 是歲冬 上播遷于俄館 公陳安民定國之策 上欲任以軍政 公備陳不可之義 辭不承命 時俄譯金鴻陸 依俄使幻弄多端 公正色折之曰 外使何關我內政 且鴻陸一舌人 通譯而已 焉敢乃爾 遂引退郊外 無何逆陸因進茶毒 上及東宮 猝致患候 東宮尤危重 中外惶懼 急召公以太醫卿 公率醫官基昌 入診進凉劑 竟得平復 人比老峰文忠公之用柳瑺也 丙午 徽文學校成 嘗設塾于家 學徒雲集 舍不能容 至是 上聞之 賜觀象監司䆃寺基址 公又買府地及民家屢區 合建校舍 旣竣工 上命其額曰徽文 盖取諸公名而褒之也 後投百萬 而爲財團法人 則其始終所資經用 悉舍家産以完之 於是 敎徒立銅像於校中 以識不忘 是校之設 最爲吾東楛矢 其於一般實業 亦以務圖振興之實 公察時早而見事明 何莫非爲大衆導掖後生者也 未幾而爲庚戌 忍辱含羞 專爲王室而應變 未幾而爲己未丙寅矣 兩聖相繼陟方 公痛不欲生 靡所逮及 則惟鞠躬盡瘁於大葬 排淸凉龍馬諸議 而各合祔于金谷洪陵裕陵 是也 而寔遵兩聖遺志也 公至性根天 太夫人不安節十年 邀醫求藥 風雨不擇 及丁憂 行十里 日必拜墓 壬寅 孝獻公寢疾 時公位尊年高 且子孫僮僕甚衆 而手自扇爐嘗藥 居喪如禮 雖卑幼來弔 亦必哭泣答之 若乃奉先尊賢 褒賞孝烈 賙窮恤災 日用常行也 嗚呼 以公遭際 事功之著 宜不止於此 而竟至於此者 噫 其時歟天歟 立校一事 是公三十年費心用慮 矻矻乎育英者 而啓發旣衆矣 從以成就事功 亦將不可量焉 則是殆非公之所造也歟 嗚呼 盛德 不肖何足以知之 亦何敢贅 以溢辭哉 惟摭其塗人耳目 乘史所載者 敢告于萬世

檀紀 四千二百七十五年 壬午 八月 日 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