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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정(憂亭) 김선생(金先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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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정(憂亭) 김선생(金先生)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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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에 옳고 그름을 가려 결정하며 비분강개했으며, 세속과 영합하지 않은 분은 김공(金公) 경직(敬直)이다. ()는 이정(而正)이고 스스로 우정(憂亭)이라 호를 지었다. 광해군이 인륜을 무너뜨리고 어지럽히자, 요망한 신하들이 악을 만나 권력을 잡으니, 세상에서 자신의 지조를 아낀다고 불리는 사람 중 물러난 자가 많았다. 그 때 공은 막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을 하고 있었다. 이이첨(李爾瞻)38)이 사람을 보내 요구하였으나 공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뜻을 같이 하는 사람과 말을 할 때 당시의 일에 미치면 번번이 눈물을 흘리며 분해하셨다. 이이첨이 염탐하여 그 사실을 알고, 다른 날 나를 죽일 무리들은 모두 이러한 사람들이다.하고, 근거가 없는 말로 헐뜯으려고 했으나 만류하는 자가 있어 일이 그쳤다. 한번은 예전에 요청했던 자가 와서 공에게 말하길, 요즘 사람들이 내가 그대와 아니, 운각(芸閣)39)으로 나를 내치려고 합니다. 사귐을 장차 다시 말할 수 없습니다.하였다. 공이 정색하여 말하길, 너는 운각(芸閣)의 치욕을 알면서도 어머니 없는 죄를 생각하지 않는가? 나는 얼굴을 알면서도 마음을 알지 못하는 것을 한스럽게 여기니, 가서 다시 말하지 말아라.라고 하였다. 그 사람은 이이첨에게 아부하여 관직이 화무(華膴)40)에 이르렀으나, 공은 옳다고 여기지 않았다.

공은 드디어 집안을 이끌고 춘천(春川)의 우두강(牛頭江)가로 와서 생애를 마칠 계획을 세웠다. 우두(牛頭)를 고쳐 우도(憂道)로 했으니, 세상의 도()를 근심한 것이다. ‘()’로 정자에 이름 붙인 것도 이 뜻이다. 김씨(金氏) 중 선산(善山)을 본으로 삼는 것은 고려시대 문하시중(門下侍中)41) 득충(得忠)이 시조이다. 후손인 주()42)는 농암선생(籠巖先生)으로 불렸는데, 강에 가서 옷을 부친 사람이다. 고황제(高皇帝)가 절개를 아름답게 여겨 상서(尙書) 벼슬과 죽을 때까지의 녹을 주었다. 공에게 10세조이다. 증조(曾祖)는 구정(九鼎)으로 참봉(參奉)을 역임했다. ()는 맹련(孟鍊)이며, 아버지는 광계(光啓)인데, 함께 산계(散階)43)를 받았다. 어머니는 평산신씨(平山申氏)이고, 아버지는 달인(達仁)이다. 공은 융경(隆慶)44) 기사년(己巳年)45)에 태어나 66세를 사시고 돌아가셨다. 춘천(春川) 오봉산(五峯山) 아래 미좌(未坐)46)에 모셨으니, 선영을 따랐다.

공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뛰어났으며 말을 적게 하였다. 행동거지는 엄정한 것이 어른과 같아 어르신들이 군자(君子) 아이라고 불렀다. 장성하여 경학(經學)에 뜻을 두고 소학(小學)을 근본으로 삼았고, 문예(文藝)는 일찍 이루어졌다. 약관의 나이에 상사생(上舍生)47)으로 반궁(泮宮)48)에서 노닐었는데, 말과 의론이 엄정하여 친구들 중 그를 좇는 자가 많았다.

경술년(庚戌年)49)에 대과(大科)에 합격하였다. 처음 국자(國子)에 속해 전적(典籍)50)에 오르고, 외직으로 나가서 은계(銀溪)51) 찰방(察訪)52)이 되었으나, 바로 그만두고 돌아와 몇 년을 살았다. 인조반정(仁祖反正)53)이 일어나 윤리가 다시 밝아지자 선비들이 등용되었고, 공도 또한 뽑혀 회복되었다. 안으로 병조좌랑(兵曹佐郞)54), 정랑(正郞)55), 직강(直講)56), 사예(司藝)57), 사도시정(司導寺正)58)으로 늘 겸사(兼史)59)를 같이 했다. 외직으로 낭천(狼川)60)과 예안현감(禮安縣監)61), 황해도사(黃海都事)62), 영천군수(榮川郡守)63), 평양서윤(平壤庶尹)64), 영해부사(寧海府使)65)가 밟아온 이력이다. 기랑(騎郞)66)에 있을 때 교활한 관리를 단속하고, 폐해가 극심한 것을 막으니, 다스리고 쓰는 것이 풍족하여 몇 년 되어 평상시로 되돌아가자, 조장(曹長)이 능하다고 여겼다. 예안과 황해도 감영에 제수되자 모두 남아있기를 청하였다. 낭천(狼川)67)에 있을 때 역적 이괄이 서울을 침범한다는 말을 듣고 공은 눈물을 씻고 의병을 모집하여 서울로 부지런히 갔으나 길에서 도적들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의병을 해산하고 낭천으로 돌아왔다. 평양서윤은 병 때문에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영해부사는 늙었다는 것으로 헐뜯는 자가 있었는데 완성(完城) 최명길(崔鳴吉)68)이 전장(銓長)69)으로 상소를 올려 신원하였다. 공발해(龔渤)70)를 인용하여 말을 하니, 주상이 임지에 가도록 재촉하였으나 공은 마침내 사양하였다. 공은 다스림에 성실하고 삼갔으며 청렴하고 어질었다. 반드시 사랑하는 마음으로 구제하는 것을 마음으로 삼아 이르는 곳마다 관리들과 백성이 편안히 여겼다. 영천(榮川)에 있을 때 청음(淸陰)71) 김선생(金先生)이 시를 지어 공의 아름다운 정치를 매우 칭찬했다.72) 제수를 받으면 비록 부지런히 힘써 잠시 부임했으나, 곧 병을 핑계로 오래 머무르지 않았다.

효도와 우애가 순수하게 갖춰졌으며, 부모를 모시는데 게으르지 않았다. 병이 들자 변을 맛보며 점검하고 하늘에 기도하길, 자신의 몸으로 대신하길 청하였다. 앞뒤로 예로써 한결같이 상을 치뤘다. 큰형이 돌아가시자 조석(朝夕)으로 빈소 곁을 떠나지 않았고, 반드시 몸소 제사를 지냈다. 조카를 애무하며 사랑하는 것이 자기 자식들보다 나았다. 분가할 때 모두 비옥한 땅을 주었고, 스스로 척박한 땅을 가졌으며 반을 나누었다. 집안에 거처할 때 법도가 있어 늘 여러 자식들에게 공명(功名)의 길을 피해 멀리하게 했다. 가법(家法)을 삼가 지켜 평일에도 화목하며 단정하게 거처하였고, 경서 책을 침잠하여 읽고 사물의 겉에서 마음을 노닐게 했다. 세상의 모든 얻고 잃음에 대해 잡념이 없었다. 스스로 즐기는 바가 있었으나 사람들은 알지 못하였으니, ! 공이 배우고 기른 것을 숭상할 만하구나!

공은 수원(水原) 최씨(崔氏)와 결혼했으며 아버지는 도()이다. 부인은 단정하고 엄하며 정숙하였으며 집안을 잘 다스려 공이 공직에 있을 때 빙벽(氷櫱)의 지조73)가 있게 했으니, 더불어 도와주는 것이 있었다. 공보다 2년 먼저 태어났고, 죽는 것은 5년 먼저 갔으며 공의 묘소 왼쪽에 합장하였다. 아들 종명(宗溟)종락(宗洛)종필(宗泌)74)은 문과 출신이며 통정(通政)75)과 부사府使)를 지냈고, 종연(宗沇)은 판관(判官)76) 벼슬을 했으며, 딸은 현령(縣令) 이유수(李幼洙)77)에게 시집갔다. 종명(宗溟)에게 적자가 없어 종락(宗洛)의 아들 국헌(國獻)이 후사가 되었다. 딸은 정우익(鄭友益), 정후윤(鄭厚胤)의 처가 되었다. 종락(宗洛)이 낳은 장자는 오랑캐 난리 때 죽으니 조정에서 그 절행(節行)에 정려문을 내렸다. 아들 중헌(重獻)은 동지(同知)가 되고, 시헌(時獻)만헌(萬獻)이 있다. 딸은 좌랑(佐郞) 안광욱(安光郁), 최유염(崔有琰), 좌랑(佐郞) 김만익(金萬翼), 한재동(韓再東)의 처가 되었다. 종필(宗泌)은 아들 일헌(一獻)을 낳았고, 딸은 참판(參判)으로 추증된 오두흥(吳斗興), 동지(同知) 허각(許恪), 원상(元尙)의 빈처(賓妻)가 되었다. 종윤(宗沇)은 명룡(命龍), 명호(命虎), 진사(進士) 명구(命龜), 현령(縣令) 명린(命麟)을 낳았다. 이유수(李幼洙)가 낳은 내외 증손과 현손은 모두 백여 명이어서 많아 모두 기록하지 못한다. 국헌(國獻)의 아들은 부사(府使) 덕항(德恒)78)이고, 시헌(時獻)의 아들은 참판(參判) 덕기(德基)79)이다. 만헌(萬獻)의 사위는 첨지(僉知) 박태서(朴泰舒), 승지(承旨) 조영세(趙榮世)이며, 일헌(一獻)의 아들은 참봉(參奉) 덕연(德淵)이고, 사위는 좌랑(佐郞) 이저정(李蓍定)이다. 김만익(金萬翼)의 아들은 주부(主簿) 항수(恒壽), 문학(文學) 태수(台壽), 좌랑(佐郞) 태수(泰壽)이다. 오두흥(吳斗興)의 아들은 좌윤(左尹) 중주(重周), 사위는 부사(府使) 이인희(李寅熺), 별제(別提) 박태범(朴泰範)이다. 허각(許恪)의 아들은 참봉(參奉) ()이며, 사위는 영원군(靈原君) ()이 드러난 자들이다.

! 공은 결백한 행실과 절개가 굳어, 비록 이해득실과 길흉화복의 사이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았다. 철륜(鐵輪)80)이 머리 위에서 빙빙 돌아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폐한 채 내버려 두어도 편안히 여기면서 조금도 후회하지 않았다. 맑고 밝은 때를 만나 많은 현인들이 나아가 등용되어도 공은 홀로 되돌아와 초복(初服)81)하고 강호에서 유유자적하였으니, 어찌 망해가는 세상의 높은 발자취가 아니겠는가? 상촌(象村)82) 신문정공(申文貞公)이 일찍이 공에게 시를 주길, 연원(淵源)은 하내(河內)의 학문이었고, 시례(詩禮)는 제남(濟南)의 학생이네.83)라 했으니, 공의 문학과 지조를 중히 여기는 것이 이와 같았다. 고을의 사람들이 공을 문정공(文貞公)84)과 장절공(壯節公)85) 사당에 함께 배향하였다. 공의 절개 있는 행동은 또 읍지에 실렸으니 사림이 추모하고 숭상하는 뜻을 볼 수 있다. ()은 다음과 같다.

도가 있으나 없으나, ()함을 변치 않으시고, 가르침을 생각하는 것이 분명하셨으니, 공은 진실로 가까웠네. 크게 간사한 때를 만나, 이로움으로 꾀였으나, 개와 돼지처럼 보았으니, 재앙과 복이 어찌 다시 오겠는가? 예전에 권력으로 맞아들이려했으나 사양하며 꾸짖어 배척하고, 정자 간판에 ()’를 거셨으니, 도를 근심하는 사람이었으며, 이미 성군을 만나서도 나가는 것 어렵게 여기고 물러나는 것 쉽게 여겼네. 호수에서 낚시하며, 산에서 나물 캐니, 위험하고 평탄하고 간에 뜻이 한결 같았네, 출처(出處)를 살피고 구차하지 않게 절개를 지키셨으나, 문학(文學)과 정사(政事)는 공적으로 많이 행해지지 않았고 그 때에 쓰이지 않으니 세상에선 알아주지 않았으나, 오직 상촌(象村)86)께서 시로 아름다움을 칭찬하시고, 문정공(文貞公)과 함께 한 묘에 배향되어 제사를 받으셨네. 여럿이 의논한 말이 증거가 되니, 마땅히 이것을 넘지 않을 것이니, 내 글을 지어서 천 년토록 알리노라.

통훈대부(通訓大夫)87)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88)와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89) 진선(進善)90)을 지낸 윤봉구(尹鳳九)91)가 묘지명(墓誌銘)을 짓다.

 

 


37)윤봉구의 『병계집(屛溪集)』​에 사도정증도승지김공경직묘지명(司導正贈都承旨金公敬直墓誌銘)으로 실려 있다.

38)이이첨(李爾瞻): 1560(명종 15)~ 1623(인조 1). 대북(大北)의 영수로서 정인홍(鄭仁弘) 등과 광해군대의 정국을 주도했다.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득여(得輿), 호는 관송(觀松쌍리(雙里). 성종·연산군대의 권신(權臣)으로 무오사화를 일으켰던 좌찬성 극돈(克墩)5대손으로, 아버지는 우선(友善)이다.

39)운각(芸閣): 조선 시대, 경서의 인쇄나 교정, 향축(香祝), 인전(印篆) 따위를 맡아보던 관아.

40)화무(華膴): ()는 사헌부사간원홍문관의 삼사(三司)와 같은 청환(淸宦)을 이름이요, ()는 호조와 같은 후한 녹을 받는 관직을 말한다.

41)문하시중(門下侍中): 고려시대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의 최고관직.

42)(): 본관은 선산(善山). 호는 농암(籠巖). 아버지는 예의판서(禮儀判書) 원로(元老)이며, 어머니는 수주김씨(水州金氏)이다. 공양왕을 섬겨 벼슬이 예의판서에 이르렀다. 1392(공양왕 4)에 하절사로 명나라에 갔다가 일을 마치고 압록강에 이르러 고려가 망하고 조선조가 개국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동으로 향하여 통곡하며 부인 유씨에게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 하였으니 내가 강을 건너가면 몸둘 곳이 없다.”라는 편지를 쓰고, 또 아들을 낳으면 이름을 양수(揚燧)라 할 것과 조복(朝服)과 신을 부치고, 부인이 죽은 뒤에 합장할 것을 당부하였다. 그리고 중국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43)산계(散階): 이름만 있고 일정한 직무는 없는 산관의 품계를 이르던 말.

44)융경(隆慶): 중국 명나라 목종 때의 연호.

45)기사년(己巳年): 1569.

46)미좌(未坐): 남서를 뒤로하고 북동을 바라보고 앉은 방위.

47)상사생(上舍生): 조선 시대의 생원진사를 가르킴. 중국 송()나라 때 태학 시험에 합격한 사람을 가르킴.

48)반궁(泮宮): 성균관의 별칭.

49)반궁(泮宮): 성균관의 별칭. 

50)전적(典籍): 조선 시대, 성균관의 정육품 벼슬.

51)은계(銀溪): 은계도(銀溪道)를 말함. 조선시대 강원도 회양의 은계역(銀溪驛)을 중심으로 한 역도(驛道). 중심역은 김화의 생창역(生昌驛)으로 이속하였다. 관할범위는 회양-금성-낭천 방면과 회양-평강-철원 방면 및 회양-양구-인제-동해안 방면으로 이어지는 역로이다. 이에 속하는 역은 철원의 풍전(豊田용담(龍潭), 김화의 생창(生昌), 금성의 직목(直木창도(昌道서운(瑞雲), 회양의 신안(新安), 평강의 임단(林丹 또는 丹林옥동(玉洞), 이천의 건천(乾川), 낭천의 산양(山陽원천(原川방천(方川 또는 芳川), 양구의 함춘(含春수인(水仁 또는 遂仁), 인제의 마노(馬奴부림(富林남교(嵐校임천(林川) 19개 역이다. 1785(정조 9) 이후 임단·부림·임천역 등은 폐지되고, 문산역(文山驛)과 원통역(圓通驛, 麟蹄)이 신설되었다. 은계·풍전·생창·직목·창도·신안역 등은 중로(中路) 또는 중역(中驛)에 속하는 역이었고, 그 밖의 역들은 소로 또는 소역에 속하는 역이었다. 이 역도는 1894년 갑오경장 때까지 존속하였다.

52)찰방(察訪): 조선 시대, 각 도의 역참을 관리하는 일을 맡아보던 종육품의 외직 문관 벼슬.

53)인조반정(仁祖反正): 1623년 음력 312일 서인 일파가 광해군 및 대북을 몰아내고 능양군 이종을 옹립한 사건.

54)병조좌랑(兵曹佐郞): 조선시대 병조(兵曹)에 둔 정육품(正六品) 관직. 

55)정랑(正郞): 조선 시대, 육조(六曹)의 정오품 벼슬.

56)직강(直講): 조선시대 성균관(成均館)에 둔 정오품(正五品) 관직.

57)사예(司藝): 조선 시대, 성균관에 소속되어 음악을 가르치던 정사품 벼슬.

58)사도시정(司導寺正): 사도시(司導寺)는 조선 시대 궁궐에서 쓰이는 쌀과 간장 등의 식료품 공급을 맡아보던 관아(官衙). 사도시정(司導寺正)은 정삼품에 해당함.

59)겸사(兼史): 조선 시대, 다른 관아의 벼슬아치가 겸임하는 춘추관의 사관(史官) 벼슬을 이르던 말.

60)낭천(狼川): 화천의 옛 이름.

61)예안현감(禮安縣監): 예안(禮安)은 경상북도 안동 지역의 옛 지명이고, 현감(縣監)은 고을의 우두머리로 종6품 수령.

62)황해도사(黃海都事): 도사(都事)는 조선시대 감사(監司)의 보좌관으로 파견한 지방관을 말한다. 5품으로 경력과 함께 수령관(首領官)이라고 불렸다.

63)영천군수(榮川郡守): 군수(郡守)는 조선 시대, 종사품(從四品) 벼슬로 군()의 행정을 맡아보는 으뜸 관리.

64)평양서윤(平壤庶尹): 서윤(庶尹)은 조선 시대, 한성부와 평양부에 두었던 종사품 벼슬을 말한다.

65)영해부사(寧海府使): 부사(府使)는 조선시대에 정3품 대도호부사(大都護府使)와 종3품 도호부사를 일컫는다.

66)기랑(騎郞): 조선 시대 병조낭관(兵曹郎官)의 다른 명칭.

67)낭천(狼川): 화천의 옛 이름.

68)최명길(崔鳴吉): 1586(선조 19)~ 1647(인조 25). 실질을 중시하는 양명학적 사고를 바탕으로 청()나라의 침입 때 주화론(主和論)을 주장하여 강화를 담당했으며, 인조대 후반에 국정을 담당하면서 정치사회개혁을 추진했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자겸(子謙), 호는 지천(遲川창랑(滄浪). 아버지는 영흥부사를 지낸 기남(起南)이다.이항복(李恒福)과 신흠(申欽)의 문인이다.

69)전장(銓長): 이조판서(吏曹判書).

70)공발해(龔渤海): ()나라 선제(宣帝) 때 발해 태수(渤海太守)를 지낸 공수(龔遂)를 말한다. ()는 소경(少卿)으로 사람됨이 강의(剛毅)하고 대절(大節)이 있었다. 선제 초기에 발해 지역에서 도적(盜賊)떼가 자꾸 일어났는데 당시 군수(郡守)가 그들을 제압하지 못하자, 선제가 공수를 발해 태수로 임명하여 그곳에 가서 진압하게 하였는바, 그는 무기를 지닌 도적들에게 무기를 팔아 농기구를 사서 농사에 힘쓰도록 권장함으로써 그들을 진압하였다.

71)청음(淸陰) 김선생(金先生): 김상헌(金尙憲:1570~1652)을 말함.

72)김상헌의 영천(榮川)의 쌍청당(雙淸堂)에서 판상(板上)에 있는 운을 차운하여 군수인 동년(同年) 김경직(金敬直)에게 주다란 시가 있다. “어젯밤에 서리와 바람 계당(桂堂) 안에 불더니, 꺾인 연꽃 가지가지 연못에 떠다니고, 몇몇 집의 누런 잎새 가을 모습 깊어가니, 한쪽 벽의 청사초롱 나그네 베개 싸늘하네. 그윽한 흥 일지만 반악(潘岳)의 부()를 찾지 못했는데, 맑은 담소로 먼저 유공(庾公)의 평상 위를 차지했네. 그대 정사 아름다워 복잡한 일 없애고, 소주(蘇州)에서 퉁소부니 침소에선 향기 나네.(昨夜霜風襲桂堂 敗荷千柄倒廻塘, 幾家黃葉秋容晩 一壁靑燈旅枕凉, 幽興未尋潘岳賦 淸談先據庾公床, 多君美政能消劇 坐嘯蘇州燕寢香)”

73)얼음물을 마시고 황벽나무를 식용으로 한다는 말로, 청고(淸苦)한 생활을 하며 절조(節操)를 지켜 온 것을 뜻한다. 

74)종필(宗泌):인조(仁祖) 2(1624) 갑자(甲子) 증광시(增廣試) [진사] 3(三等) 합격.

75)통정(通政):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정3품 당상관.

76)판관(判官): 고려와 조선 시대, 지방 장관 밑에서 민정을 보좌하던 관리. 관찰부, 유수영 및 주요 주(), ()의 소재지에 두었다. 조선 시대, 중앙과 지방의 관아에 편제되어 실무를 담당한 종오품의 중급 관직.

77)이유수(李幼洙):현종(顯宗) 3(1662) 임인(壬寅) 증광시(增廣試) [생원] 2(二等) 합격.

78)덕항(德恒): 숙종(肅宗) 5(1679) 기미(己未)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23위 합격.

79)덕기(德基): 1654(효종 5)1719(숙종 45). 자는 재이(載而). 경직(敬直)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종필(宗泌)이고, 아버지는 시헌(時獻)이며, 어머니는 황도형(黃道亨)의 딸이다.

80)철륜(鐵輪): 쇠로 만든 수레바퀴로, 불교에서 지옥의 악귀(惡鬼)를 제압하는 무서운 형구(形具)이다. 또는 철륜발(鐵輪拔)의 준말로 수미(首尾)에 칼날이 달린 병기로 말 위에서 적을 쳐 죽이는 데 쓰인다.

81)초복(初服): 관리 노릇을 하기 전의 복장.

82)상촌(象村) 신문정공(申文貞公): 신흠(申欽:15661628) 이정구(李廷龜장유(張維이식(李植)과 함께 '월상계택'(月象谿澤)이라 통칭되는 조선 중기 한문사대가(漢文四大家)의 한 사람이다.

83)신흠의 상촌집(象村集)청평에서 돌아오자 여러 문생이 우두정에서 나를 영접하여 술자리를 마련하였는데, 김 찰방 경직이 함께 참석하였다. 작별하면서 율시 한 수를 기념으로 주었다[自淸平還 諸門生邀酌於牛頭亭 金察訪敬直與焉 臨別留贈一律]란 시가 남아 있다. “술 들고 멀리 보내주었으니, 우두담(牛頭潭) 위 우두정이구나. 연원(淵源)은 하내(河內)의 학문이었고, 시례(詩禮)는 제남(濟南)의 학생이네. 석양에 비친 물 갈매기마냥 하얗고, 머언 산 눈동자처럼 푸른데, 유구한 옛적 가락으로써, 꿋꿋한 마음 남겨두네.(携酒遠相送 牛頭潭上亭, 淵源河內學 詩禮濟南生, 晩水如鷗白 遙山與眼靑, 悠悠千古調 留取歲寒情)”

84)문정공(文貞公): 신흠을 말한다.

85)장절공(壯節公): 평산신씨(平山申氏)의 시조인 신숭겸(申崇謙)을 말한다.

86)상촌(象村): 신흠을 말한다.

87)통훈대부(通訓大夫): 조선 시대, 정삼품 당하관의 문관 품계.

88)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 조선시대 사헌부(司憲府)의 종삼품(從三品) 관직.

89)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조선시대에 왕세자의 보도(保導)와 교육을 담당한 관청.

90)진선(進善): 조선시대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에 설치된 세자의 교육을 담당한 정사품(正四品) 관직.

91)윤봉구(尹鳳九): 1683(숙종 9)1768(영조 44).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서응(瑞膺), 호는 병계(屛溪) 또는 구암(久菴). 유건(惟健)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호조참판 비경(飛卿)이고, 아버지는 명운(明運)이며, 어머니는 이경창(李慶昌)의 딸이다.

  

◆ 원문

有直截慷慨 不肯與時俯仰者 曰金公諱敬直 字而正 自號憂亭 光海斁倫亂紀 孼臣逢惡招權 世之號自好者 亦多逶迤 時公纔釋褐 在進退間 爾瞻送人要之 公不答 與同志語及時事 輒揮淚慷慨 爾瞻偵知之曰 他日殺我輩者 皆此等人 欲中傷之 有止之者 事得已 一舊要來謂公曰 時輩以我與君知 欲以芸閣貶我 交誼將不復講 公正色曰 汝知芸閣之辱 不念無母之罪乎 吾恨知其面 不知其心 去矣勿復言 其人卽附爾瞻 官華膴 公不以爲意也 公遂挈家歸春川之牛頭江上 以爲終老計 改牛頭爲憂道 蓋憂世道也 名亭以憂 亦此意也 金氏貫善山 麗朝門下侍中諱得忠寔始祖 後澍世號籠巖先生 卽臨江寄衣者也 高皇帝嘉其節 賜尙書祿以沒身 於公爲十世祖也 曾祖諱九鼎 參奉 祖諱孟鍊 考諱光啓 俱散階 妣平山申氏 考達仁 公生於隆慶己巳 壽六十六而沒 葬在春川五峯山下未坐原 從先兆也 公幼聰穎絶倫 罕言語 動止儼若成人 長老稱君子兒 及長  專意經學 本之小學 文藝早成 弱冠 以上舍生遊泮宮 言議峻正 士友多從之者 庚戌 闡大科 初隷國子 陞典籍 出爲銀溪察訪 卽遞還 逬居屢年 仁廟改玉 彝倫復明 士類登庸 公亦被甄復 內以兵曹佐郞正郞直講司藝司導寺正 常帶兼史 外而狼川禮安縣監黃海都事榮川郡守平壤庶尹寧海府使 其踐歷也 在騎郞 束猾吏杜弊孔 經用贍足 幾復平時 曹長能之 其除禮安及海幕 皆請留之 狼川時聞逆适犯京 公雪涕募義 赴勤于王 道聞賊就戮 罷兵還狼 平壤則辭病不赴 寧海則有以老刺之者 崔完城鳴吉以銓長疏伸之 引龔渤海爲言 上促令赴任 公終辭遞 公爲治 誠謹廉良 必以愛濟爲心 所到 吏民安之 在榮川 淸陰金先生題詩亟稱公美政焉 凡有除拜 雖黽勉暫赴 輒引疾不久淹 孝友純備 事父母不怠 病則嘗糞以驗 禱于天 請以身代 前後居憂一以禮 喪伯氏 朝夕不離喪側 必躳執饋奠 撫愛宗姪踰己出 析產 悉豐饒歸之 自取磽瘠 減其半 居家有法度 常戒諸子避遠名塗 謹守家法 平日穆然端居 潛玩經籍 遊心物表 凡世之一切得喪 泊如也 自有所樂而人不知也 嗚呼 公之所學所養 其可尙也歟 公娶水原崔氏 其父渡 端莊貞淑 善理家 使公居官 有冰櫱之操者 與有助焉 先公二年生 沒又先五年 祔葬公墓左 男宗溟宗洛宗泌文通政府使宗沇判官 女適縣令李幼洙 宗溟無嫡子 取宗洛子國獻爲後 女爲鄭友益鄭厚胤妻 宗洛出 長死虜亂 朝廷旌其節行 子重獻同知 時獻萬獻 女爲佐郞安光郁崔有琰佐郞金萬翼韓再東妻 宗泌出 子一獻 女爲贈參判吳斗興同知許恪元尙賓妻 宗沇出 命龍命虎進士命龜縣令命麟 李幼洙出 內外曾玄揔百餘人 多不盡錄 惟國獻男府使德恒 時獻男參判德基 萬獻婿僉知朴泰舒承旨趙榮世 一獻男參奉德淵 婿佐郞李蓍定 金萬翼男主簿恒壽文學台壽佐郞泰壽 吳斗興子左尹重周 婿府使李寅熺別提朴泰範 許恪男參奉榥 婿靈原君櫶 其顯者也 噫 公淸修介勁 雖利害禍福之際 不懾不搖 如鐵輪頂上旋轉 不動而安於廢置 不少懺悔 値時淸明 羣贒進用 而公乃獨返初服 江湖自適 豈非衰世之高蹈耶 象村申文貞公嘗贈公詩曰 淵源河內學 詩禮濟南生 其重公文學操履如此 州之人以公與文貞配食於壯節公祠 以公節行 又載之邑誌 士林慕尙之意 可見矣 銘曰 有道無道 不變强哉 思訓炳然 公實庶幾 惟時巨慝 啖我以利 我視狗彘 禍福曷貳 舊要媚權 嚴辭責斥 亭顔揭憂 憂道之棘 曁際昌明 難進易退 我湖我釣 我山我採 于險于夷 我志惟一 觀乎出處 不苟大節 文學政事 不足公多 猶不時用 世無知何 惟象淸翁 有詩褒美 終與文貞 一廟腏祀 公議攸徵 宜莫踰此 我撮綴辭 以詔千禩

通訓大夫行司憲府執義 兼世子侍講院 進善尹鳳九撰墓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