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의 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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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한장(申漢章)의 기문(記文)

상세정보

◆번역문

춘주(春州)는 실로 우리 시조 고려(高麗) 태사(太師) 장절공(壯節公)께서 태어나서 거주하신 곳이요, 산소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 정충대절(精忠大節)은 우주의 버팀목이 되었으니, 비록 백성과 노비와 같은 천인들과 지극히 무식한 이들도 여전히 공의 유풍을 듣고 무궁토록 그 의()를 칭송한다.

! 효묘(孝廟)7)경인년(庚寅年)8)에 구당(久堂) 박공(朴公) 장원(長遠)9)이 이 땅에 수령으로 와서10) 많은 선비들의 바람으로 인하여 비방동(悲芳洞)의 묘 아래에다 사우(祠宇)를 창립하여 향사처로 삼았다. 구당(久堂)은 장절공의 외손이다.

성상 갑술년(甲戌年)11)에 후손 참판(參判) ()12)이 본도를 안찰하다가 이 사우가 해마다 퇴락한 것을 안타깝게 여겨 유생들과 더불어 도장포(道藏浦)의 고산(孤山)에다 이건할 것을 논의하였다. 물력의 대부분은 감영 예산과 내외 자손으로부터 나왔다. 당시는 새로이 조정에서 금령이 있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서 부조를 요청할 수 없었다. 이에 역사를 장대하게 거행할 수 없어서 체단(體段)은 전혀 구비되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유생들이 유식(遊息)하는 장소 따위는 실마리도 얻지 못하여 사람들이 병통으로 여긴지 오래되었다.

불초손은 부임13)한 다음 봉급을 기부하여 날로 역사를 경영하였다. 문언(門垣)과 외숙(外熟)은 옛 규범대로 하여 지난날에 겨를이 없던 일을 지금 이미 수거하여 창건하였고, 장차 퇴락해지려고 하자 또 수리하였으나 갖추질 못하였다. 갑자기 지금에 이르러서야 서원의 모양이 대강 이루어졌으니, 어찌 사문의 다행과 불행의 운수가 그 사이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예전에는 묘전에 대석(坮石)이 없었으나 새로 만들어서 설치하였다. 조그맣게 선조를 향한 것이 진시로 마쳐졌으며, 조금도 저버리지 않은 것은 모두 성스런 임금의 은택이다. 부인(府人) 황관(黃琯) 역시 공의 외파로서 시종일관 한마음으로 역사를 도왔다. ! 황상사(黃上舍) 위양(渭陽)의 생각 또한 족히 드높일 만하다. 대략이나마 그 전말을 기록하여 이 역사의 내력에 대한 기록으로 삼고자 하나 진실로 참람되고 비루함을 면할 수 없다.

  

 

7)효묘(孝廟): 효종(孝宗)

8)경인년(庚寅年): 1650.

9)박공(朴公) 장원(長遠): 1612(광해군 4)1671(현종 12).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중구(仲久), 호는 구당(久堂습천(隰川). ()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좌랑 효성(孝誠)이고, 아버지는 직장(直長) ()이며, 어머니는 청송심씨(靑松沈氏)로 돈녕부1도정 현()의 딸이다. 1658년 상주목사에 이어 강원도관찰사를 지냈다.

10)재직기간은 1649.12~1652.4이다.

11)갑술년(甲戌年): 1694.

12)관동지에 의하면 16946월에 부임하여 같은 해 12월 대사간으로 이배하였다.

13)1708.4~1709.6

 

  

◆ 원문

春州實我鼻祖高麗太師壯節公生居死藏之地也 其精忠大節撑柱宇宙 雖氓隸之賤 至無識者 尙能聞風而誦義無窮 嗚呼卓夫 孝廟庚寅 久堂朴公長遠來守此邦 因多士之願 創立祠宇於悲芳洞墓下 以爲妥靈莊壬之所 久堂公之外裔也 上之甲戌 姓孫參判懹 按本道節 悶玆宇之歲頹圮 慨然與章甫 議移設於道藏浦之孤山 物力多從營辨 與內外子孫出 蓋新有朝禁 不敢求助於人 遂不能張大其役 體段百不備 如諸生遊息之所 幾於不成緖 士林病之日久矣 不肖孫余忝莅之後 爲捐所捧 日有經紀門垣外熟 爲之假觀 昔所未遑 今旣修擧 旣創 而將廢又修而不備 卒至今日 院貌略成 斯豈非斯文幸不幸之數存在其間歟 墓前田無坮石 亦且新造而設之 區區向先誠畢 不負萬一秋毫 皆聖主賜也 府人黃琯亦公之外波 終始相役一心無怠 噫 黃上舍渭陽之思 亦足尙已 略序顚末 爲斯役廢修之記 僭陋固不可避也

출전 춘천읍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