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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구(李書九) 묘비명(墓碑銘)

상세정보

◆​ 번역문

유명(有名) 조선(朝鮮) 우의정(右議政) 척재(惕齋) 이공(李公)의 묘비명(墓碑銘)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우의정(議政府右議政) () 영경연사감춘추관사(領經筵事監春秋館事) 척재(惕齋) 이공(李公)의 묘갈명(墓 名) 및 서문(序文)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우의정(議政府右議政) () 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 세자사(世子師) 남공철(南公轍)이 짓고,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우의정(議政府右議政) () 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 세자사(世子師) 한용구(韓用龜)가 쓰고,

통훈대부(通訓大夫) 영춘현감(永春縣監) () 충주진관병마절제도위(忠州鎭管兵馬節制都尉) 유한지(兪漢芝)가 전()하다.

()께서 24(1834)에 척재(惕齋) 이공(李公)을 발탁하여 의정부(議政府) 우의정(右議政)으로 삼았으나, ()이 어머니가 늙었다는 이유로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고, 또 스스로 삼가는 뜻을 폈다. ()이 여러차례 근시정경(近侍正卿)을 보내어 은혜와 타이름이 고귀하고 중하였으니, 공은 더욱 기동하지 않았다. 상소가 무릇 칠회 이상이므로 상()이 그의 개인사정이 가여워 잠시동안 그 간정함을 허락하였다. 비로소 명령이 있던 날, 경사대부(卿士大夫)들이 모두 말하기를, 성주(聖主)는 지금 제일류(第一流)를 얻어 재상(宰相)으로 삼으니 조정(朝廷)의 경사이옵니다라고 하였다. 하인(下人)과 농상민(農常民)이 말하기를 이상국(李相國)이 이르면 국가는 의지할 곳이 있어 백성들은 반드시 소생함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고 하였다. 이르지 않는다는 소문이 미치자 탄식하지 않음이 없었다. ()의 휘()는 서구(書九)이고, ()는 낙서(洛瑞), ()는 본국(本國)의 성()이다. 계통은 선조(宣祖)의 별자(別子) 인흥군(仁興君) () ()에서 출발하였고, 증조(曾祖)는 휘()가 완()으로 밀양군(密陽郡)이며, ()는 휘()가 언소(彦熽)으로 선공감부정(繕工監副正)을 지냈고 좌찬성(左贊成)에 증직되었다. ()는 휘()가 원()으로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을 지냈고 영의정에 증직되었으며, ()는 평산신씨(平山申氏)로 정경부인(貞敬夫人)에 증직되었으며 부사(府使) 사관(思觀)의 딸이다. 옛날부터 호치가(豪侈家)로 불렸고 반드시 공자왕손(公子王孫)이라 불렀으며, 인흥(仁興) 이후부터 대대로 근본을 지켰으며, 또 충근(忠謹)으로 열성(列聖)이 되어 예우를 받았다. ()은 영종(英宗) 갑술년(1735) 914일에 태어나 약관의 나이에 몸을 삼가, 여러 명공(名公)과 장자(長者)가 많이 그를 공경하였다. 더욱이 문사(文詞)를 좋아하여 가영(歌詠)을 지으면 모두 전해져 다른 사람들이 암송하였다. 갑오년(1774)에 정시병과(庭試丙科)에 봅히어 임시로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가 되었다가, 금방 6품으로 승진하여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을 임명받았다. 정종(正宗) 초년에 대신(臺臣) 중에 공의 집안을 좋아하지 않는 자가 있어 말하기를 ()의 과거급제는 시험관의 개인의 정 때문에 합격한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은 이때부터 숨어 살았는데 벼슬을 제수하면 모두 나아가지 않고 더욱 책을 읽으며 조용히 바깥 일이 없은지 오래 되었다. ()이 익히 공()의 문학이 뛰어남을 듣고 대신과 전관(銓官)을 타일러 말하기를 모를 막는 것은 가히 애석하다고 하였다. 계속해서 병조랑정언(兵曹郞正言)에 제수하니 황급히 나왔다. ()이 비로소 힘써 나가 받으니, 규장각강제(奎章閣講製)에 선발되었다. 문신(文臣) 송재경(宋載經)이 이조참판이 되어 많이 상소를 지연시키는 일을 하여 시의(時議)를 물리치니 진신(搢紳)들이 모두 모여 장차 모두 그들 탄핵하려 했으나, 공은 홀로 서명하지 않아 이로써 세상을 거역하였다. 상이 특별히 시강원사서(侍講院司書)를 제수하였고, 영록(瀛錄)에 선발하였으며, 홍문관(弘文館) 부교리(副敎理)에 임명하였는데, 뒤에 응교(應敎)에 이르렀다. 어사안렴영남(御史按廉嶺南)에 충당되어 통정(通政)에 올랐고, 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임명받았다. ()의 생질(甥姪)이 종묘(宗廟)를 반역하니 섬에 귀양을 보내고 공을 경저()에 유폐시키니, 제신(諸臣)들 중에 말하는 자들이 빈번히 죄를 주려고 많이 허물의 교시를 내리니, 강화(江華)로 유배를 보내도록 명하고, 또 위원(渭原)으로 옮겼다가 얼마 안되어 멈추도록 하고, 다시 승지(承旨)를 제수하였다. ()이 승정원(承政院)에서 숙직하고 있을 때 등불을 밝혀 바로잡고 구원하는 의()로써 하나의 계()를 초하여 올렸는데, 그때 삼사(三司)의 장소()가 모두 뜰에서 불태워 졌는데, ()은 오직 공()의 계()를 태우지 않고 사알(司謁)로 하여금 글을 써 책망하고 타일렀을 뿐이다. 영변(寧邊)을 맡으매 좀을 몰아내고 등창을 없게 하였고, 법을 세우고 조사하여 나쁜 관리를 일시에 제거하였다. 명을 받들러<여지고(輿地考)> <규장전운(奎章全韻)>을 편수하였고, 뒤에 <존주휘편(尊周彙編)> <장릉지(莊陵志)>를 찬()하였다. 계사년(1795)에 특별히 대사헌(大司憲)에 발탁되었다가, 대사성(大司成)으로 옮겨졌다.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로 나갔는데, 그해 큰 기근을 당하여 모든 사람에게 늠전(廩錢)을 주어 백성을 진휼하니 모든 생활이 편안하고 즐겁게 되었다. 부하 수재(守宰)가 곧바로 병들어 죽은 사람의 시체를 매장하지 않은 것에 연루되어 영해(寧海)로 유배 갔다가 용서받고 돌아왔다. 참판제조(參判諸曹)와 제사제(制瀉劑)가 천거하여 경상감사(慶尙監司)로 임명받았으나 힘써 사양하여 이르지 않았고, 후에 또 관동으로 부임하라는 명을 받았으나 이르지 않았다. 비변사에 차출되어 사제조(司提調)로 있었는데, 때때로 편전(便殿)으로 부르니, 조용히 다스리는 도를 논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풍속을 이끄매 근본에 힘쓰며, 다스림은 끝에 있는 것이 아니고 나라를 풍요롭게 하는 데는 절용(節用)이 요구되는 것이지 재물을 생산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현명한 사대부(士大夫)를 얻고자 하시면 마땅히 낮은 벼슬자리에서 구하여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을 여러차례 봄에 이것으로 펴고 다른 말로 바구지 아니하니, 매번 훌륭하다고 칭찬하였다. 하루는 상()이 공()에게 묻기를, 혹자는 관서(關西)의 곡식이 모두 나누어져 없어진 것은 모두 다른 관청에서 장영(壯營)으로 옮겨 이전에 이미 이 수가 있어 근일에 증치(增置)한 것이 아니라고 하는데, 이 말은 어떻게 된 것인가?라고 하니, 대답하여 말하기를 이전에 곡식을 매매하는 일은 이 수에 그친 것이 아니고 탐관오리(貪官汚吏)가 문법(文法)을 농락하여 조가(朝家)에서 알지 못하게 한 것이며, 또 많이 백성들이 심히 원망하지 않았으나, 지금 원망함은 재물을 쫓은 것일 따름이고, 폐단이 있으면 바로 잡아야 할 따름이지 증치(增置)의 구근(久近)과는 큰 관련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상()이 부채로 책상을 치면서 말하기를, 나는 조신(朝臣)을 많이 보았는데, 아직 경()과 같이 절실하고 정직한 말을 들어보지 못했노라라고 하였다. ()이 일찍이 문충공(忠文功) 유언호(兪彦鎬)와 문익공(文翼公) 윤시동(尹蓍東)에게 이모(李某)는 진실로 얻기 어려운 인재라고 말하니, 이공(二公) 모두 말하기를, 신 등 또한 이 사람을 크게 등용할 수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조참판에 임명되니 곧 훌륭한 빈객(賓客)들의 바램을 널리 수용하여 모두 지극히 선발하였다. 경신년(1800)에 정조(正祖)께서 승하하시니 대비께서 수렴(垂簾)하여 상과 함께 청정(聽政)함에, 여러 대신이 처음에 정치를 도울 때 모두 공에 의지하여 중히여겼다. 이 때 조정의 의논이 이미 분열되어 군국에 쌓인 폐단이 점점 고질화되어 뒤섞여 있는 실과 같이 처리할 수 없었고, 무너진 집과 물새는 배와 같이 지탱할 수 없었다. 공이 일을 따름에 두루 다스리고 고루 갖추었는데, 마침내 또한 도와줄 수 없게 되어 국사(國事)에서 삼을 만한 것이 없게 되니, ()은 날마다 빈전(殯殿)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 근신(近臣) 윤행임(尹行恁)이 형세를 틈타 권력을 농단하고, 또 교묘한 말로써 선왕(先王)의 교지를 사칭하였다. ()이 그것을 근심하여 여러차례 그것에 관해 말하였다. 행임(行恁)이 분해서 이를 갈며 반드시 공()을 중상하고자 하였다. 마침내 공()이 정경(正卿)에 오르매 대비(大妃)가 특별히 교지를 내려 탁지장(度支長)에 제수하였다. ()이 사양하는 상소를 올려 말하기를 사봉묵칙(斜封墨勅)은 금일의 마땅한 바가 아니니, 이는 반드시 신()의 이름이 자비로운 청정(聽政)과 관계를 맺고 있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대비(大妃)는 모()는 마치 외언(外言)을 주어서 사람을 등용한 것과 같다고 교시를 내렸다. ()을 내려 절도(絶島)로 유배를 보내니 대신(大臣)과 제신이 힘써 구원하니 그만 두었다. 오래지 않아 다시 호조판서를 제수하니, ()이 부득이 명을 받았다. 행임이 이 때 대궐에 거처하고 있었는데 조금이라도 자신과 다른 자는 빈번히 비어(蜚語)를 만들어 사이를 이간질시키고, 말하는 자가 존경받으면 다투어 나와 논박하여 공격하니, 문서는 날로 관청에 쌓였다. ()이 이전에 여러 대신에게 말하기를, 지금 성상(聖上)께서 나이가 어려서 임금의 자리를 이어 받아 아직 만기(萬機)를 총람(摠攬)하지 못하였다. 이 때에 만약 한 사람이라도 억울한 죄를 입으면 제공(諸公)들이 책망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대신들이 그러하다면서 이 일에 미치어 서로 돌아보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예조(禮曹)에서 의논하여 수빈(綬嬪)의 공물(供物)을 정하여 여러 도()에서 방물(方物)을 납하도록 명하였다. 척리재신(戚里宰臣)드이 공을 만나 조정에서 먼저 힘써야 할 것을 물었다. ()이 말하기를, 공물은 일의 근본이어서 매우 중요하니 마땅히 더욱 살피고 삼가 빈()의 겸덕(謙德)을 빛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재신(宰臣)들이 말하기를, ()의 말이 옳다하니, 그날 대비(大妃)가 방물을 그치라고 하교하고, 조정이 의논하여 장용영(壯勇營)을 파하였으나, 선조(先朝)가 건치한 것이어서 어려워 오랫동안 해결하지 못하였다. ()이 말하기를, 때는 각각 같지 아니하니 지금의 민국사세(民國事勢)를 돌아보니 파하지 않을 수 없다하고는, 시종 힘써 그것을 주장하였다. 익년(1802)에 이르러 대신들이 비로소 파하였다고 아뢰었다. 이조판서에 임명되어 정무(政務)를 맡으니 공의(公議)를 따르고 먼저 당색(黨色)으로 비의(非義)를 행하는 사람들을 막으니, 일세(一世)가 두려워하여 법을 위반하지 않았다. 청하여 호조판서로 옮기어 가례(嘉禮)로서 장인(匠人)의 노고를 돈독히 함에 정헌(正憲)을 더하였고, 또 총재(冢宰)가 되었다. 여러차례 부름을 어기다가 후에 황급히 나갔는데, 흉적(凶賊) 이경신(李敬臣)이 벼슬을 얻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공()을 원망하여 이전의 벼슬로 옷을 입고 모자를 쓰고 입궐하여 상소를 올려 공()을 막으니 매우 화를 냈다. ()이 곧 고향을 찾아 떠나니 상이 그것을 허락하였다. 관서(關西)의 빈 자리로 갈 때 조정에서는 공()이 아니고는 가하지 않다고 하며 추천하여 대신토록 하였다. 그 때 평양(平壤)의 신작로에 화재가 있었는데, 공이 이르러 힘을 다해 조치하고 백성들로 하여금 동요하지 않도록 하고 창고의 돈 3만 꾸러미를 할당하여 화재를 입은 이민(吏民)과 재목을 운반한 주군(州郡)에 나누어 주었다. 또 도내에 쌓아 둔 것을 경외(京外)에 적정하게 곡식 10만여석을 팔았는데, 상정절가(詳定折價)에 의한 것이어싿. 백성의 곤란이 끝나 한꺼번에 안정되었다. 만약 처음에 화재를 입지 않고 도 공비(工費)를 이전 것과 계산하여 헤아려 보면 남은 것이 105‘6이다. 타다 남은 15만냥을 받아 다시 녹여 덩어리를 만들어 창고에 충당하였다. 경신이 다시 상소를 가지고 궐문에 이르러 공()을 무고(誣告)하였는데, 말이 더욱 망칙하니 상이 무고함을 살피시고 경신을 귀양 보냈다. ()은 선조(先朝)부터 대우를 잘 받아 명환(名宦)을 거치고, 경열(卿列)에 이르니, 이미 많이 꺼리고 질투하였다. 전부(銓部)가 되어 이익을 싫어하고 선물을 허물하여 하나라도 얻은 것이 없어, 마침내 고립되어 더불어 함이 없게 되었으니, 드디어 무리들이 일어나 그를 꾸짖었다. 이 때에 양사(兩司)가 번갈아 일어나 경신(敬臣)의 무언(誣言)과 연유하여, 또 잊의 상소로써 사봉묵칙(斜封墨勅)을 말하고, 아울러 영사(營事)를 파하려 안을 작성한 것과 연유하여 청해 극형을 내리려고 하니, ()이 드디어 영평(永平)의 묘사(墓舍)에 돌아와 두문불출하고 세상의 일을 묻지 않으시고, 거친 밥을 먹고 헤진 옷을 입으니, 마치 종신토록 할 것 같았다. 15년 뒤(1819)에 대간이 계()를 올리니 비로소 그쳤으며, 계속해 재수하고 임명하였으나 모두 일어나지 않았다. 특별히 전라도 관찰사에 임명하니 삼가 명이 나옴이 엄숙하니 공()이 황공히 입성하여 거적을 깔고 명을 기다렸다. 명하여 삼례역(參禮驛)에 배치하였으나, 임명을 거절하였다. 이에 곧 임명하니 공()이 사양하고 업무를 보지 않았다. 공이 다시 이 나라를 맡으니, 여러 군은 본디 위엄과 은혜를 듣고, 모두 손을 씻고 법을 받드니, 백성을 해하는 자들은 스스로 물러났는데, 벼슬의 임기가 다 차게 되었다. 여러 차례 홍문관(弘文館)’ 예문관(藝文館)의 제학(提學)과 세자빈객(世子賓客)‘ 남성유수(南城留守)에 임명하였으나, 모두 임명받지 않았다. 오래지 않아 재상에 임명받았느네, 대개 상()이 반드시 공()을 한 번 등용하고자 한 바, 이에 비방이 그치지 않아 더디고 오래되서야 이명이 있었던 것이다. 공은 사람됨이 단중강방(端重剛方)하고 인륜을 돈독히 하여, 그 부모를 섬기고, 종족에 거하고, 많이 어려운 자에게 이르렀다. 벼슬에 있을 때는 각고면려하여 겸손하였고, 일을 다스림에 사려있고 정밀하였다. 비록 만언(漫言)이라도 세밀하게 힘써 항상 삼거하여 오직 허물이 있을까 두려워 하였다. 조정에 들어가 40년 동안 논함에 공평하였고, 편을 만들거나 고독의 뜻이 없었고, 또 학술로써 그것을 도왓으므로 견식이 가장 높았다. 을유년(1825)에 공()은 계비(繼妣)의 죽음을 당하였고, 병이 날로 심하니 상이 승지(承旨)를 보내어 위문하였고, 태의(太醫)를 보내 또 약을 주고 간병하였으나, 929일 집에서 돌아가시니, () 72세로 임종하였다. ()이 글을 보내 군덕(君德)에 힘쓰라 하였는데 부음을 듣고 상이 매우 애석해 하면서 근시(近侍)를 보내어 치제(致祭)토록 하였고, 동궁(東宮) 또한 관리를 보내어 치조(致弔)하도록 하였다. ()이 듣기를 공이 유명(遺命)하길 예장(禮葬)을 받지 말라는 것이었는데, 탁지(度支)에 명하여 넉넉히 장구(葬具)를 돕고, 그의 아들이 탈상하기를 기다려 벼슬을 주도록 하였다. 11월에 춘천 오금리(梧琴里)의 땅에 장례하였다. ()은 평산신씨(平山申氏) 처사(處士) 경한(景翰)의 딸에게 장가를 들었는데, 정경부인(貞敬夫人)에 증직되었고, ()보다 15년 먼저 돌아갔으며, 묘의 좌측에 합장하였다. ()은 후사가 없어 종자(從子) 시영(蓍永)을 취하여 후손으로 삼았으며, 측실(側室)에서는 아들로 회영(誨永) 보영(輔永)이 있고, 딸은 아직 어리다. 시영(蓍永)에게는 아들 근인(根仁)이 있다. 공은 문장으로는 <한서(漢書)>를 좋아했고, 늙어서는 여릉(廬陵)과 진천(震川)의 작품을 좋아하여, 간결제정(簡潔齊整)해 일가(一家)를 이루었다. 일찍이 신총(神聰)하여 널리 군서(群書)를 다하였으나, 널리 미치고 자기가 선전하는 것을 부끄럽다고 말하였다. 오로지 경사(經史)를 생각하여 반드시 그 깊은 것을 연구하여 알게 되었고, 그 앎은 모두 명확진절(明確眞切)하여 쓰일 수 있는 학문이라 할 수 있다. 궁핍한 생활에 미치어 더욱 <주역(周易)>으로 다스렸고, 공자(孔子)의 책과 정주(程朱)의 의리를 주로 하였으며, 제가(諸家)의 여러 가지나 괘는 많이 배처하였다. 그러나 심득(心得)에는 힘썼으니, 또한 논찬(論讚)은 하지 않아 몇권의 문집(文集)만이 있다. ()이 돌아가신 다음해 공의 남긴 뜻으로 묘수(墓隧)의 글을 청하니, 나는 공과 교분이 매우 돈독하니, 어찌 가히 애통한 말을 하지 않겠는가! 경술(經術)은 임금을 바로잡고 풍속을 아름답게 하였으며, 문장은 천자(天子)의 수와 왕의 꾀이다. 이에 공이 독서를 한 처음의 뜻일 뿐이며, ()이 벼슬을 함에 많이 슬기로서 등용된 것이다. 후에 연좌(連坐)되어 직책을 박탈당하여 그의 극치를 모두 펼 수가 없어, 나는 일찍이 공()을 불쌍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상()의 인성(仁聖)에 힘입어 죽을 지경이 된 공()을 건지셨다. 마침내 재상이 되어 또 그 뜻을 이룰 수 있어, 온전한 몸으로 돌아가시니 공의 깊음을 알지 못함이 어찌 능히 이와 같겠는가! 선비는 베풀거나 베풀지 않는 것으로 경중을 삼지 않고 그 편안한 바를 얻어 즐거움을 삼는다. 세상은 모두 공()이 때를 잘못 만났다고 하지만, 나는 때를 잘 만났다고 하는데, 군자(君子)는 이 말을 알고 있다. 명하기를, ()은 일찍이 나를 위해 말하기를 사마온공(司馬溫公)과 범촉공(范蜀公)은 서로 묘수(墓隧)를 새겨 줄 것을 약속하였다. 내가 당신보다 나이가 많아 마땅히 먼저 죽을 것이니, 당신은 이 일을 도모해야 할 것이다고 하니, 내가 웃으며, 라고 하였는데, 그가 죽음에 이르니 또한 이것으로 의탁한다. 아아, 슬프구나 말은 귀에 있고 공()의 문장과 사행(事行)은 간단히 선왕(先王)의 마음에 있고, 사대부(士大夫)의입에서 암송된다. 그러나 그 쓰임은 더디고도 늦구나. 마침내 귀양(歸養)을 허락받아 지키는 바를 빼앗지 못하여 때를 못 만났건 만났건 최고의 두터움을 받고 만년의 무덤에서 공은 또한 썩지 않을 것이다.

숭정기원후(崇禎紀元後) 네 번째 병술(1826) 가을에 세우다. 

◆ 원문

有明朝鮮右議政 惕齋李公墓碑銘(篆額)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右議政 兼 領經筵事監春秋館事 惕齋李公 墓碣銘 幷序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右議政 兼 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 世子師 南公轍 撰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 兼 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 世子師 韓用龜 書

通訓大夫 永春縣監 兼 忠州鎭管兵馬節制都尉 兪漢芝 篆

上之二十四年, 起惕齋李公爲議政府右議政. 公以母老辭不就, 兼陳自靖之義, 上屢遣近侍正卿, 恩諭隆重, 公兪不起, 䟽凡七上. 上憫其情私而姑許其懇, 始命之日, 卿士大夫皆曰, 聖主今得第一流爲相, 爲朝廷賀. 輿<원문이 한글임>農商之民曰, 李相國至, 國家有賴, 百姓必得更甦. 及聞其不至, 則無不咨嗟太息. 公諱書九, 字洛瑞. 李本國姓, 系出宣廟別子仁興君諱瑛, 曾祖諱椀 密陽君, 祖諱彦熽, 繕工監副正, 贈左贊成. 考諱遠 司諫院正言, 贈領議政, 妣平山申氏, 贈貞敬夫人, 府使思觀女. 自古稱豪侈家, 必曰公子王孫, 而自仁興以後, 世守儒素, 又以忠謹爲列聖所禮遇. 公以英宗甲戌九月十四日生, 自弱冠飭躬自勵, 諸名公長子多推譽之, 尤好文詞, 發於歌詠者, 皆傳誦於人. 甲午擢庭試丙科, 隸承文院正字, 旋陞六品, 拜司諫院正言. 定宗初年, 臺臣有不悅公家者, 言公科第由主司行私而得之, 公自是屛居, 除官皆不就, 益讀書求志, 泊然無外事. 久之, 上習聞公文學優長, 諭大臣銓官曰, 某之見枳可惜也. 連除兵曹郞正言, 促出之, 公始黽勉出膺 選奎章閣講製. 文臣宋公載經爲亞銓, 多行䟽滯之政, 爲時議所擯斥, 搢紳齊會, 將擧劾之, 公獨不署名, 公以此見忤於世. 上特除侍講院司書, 選瀛錄, 拜弘文館副校理, 後至應敎. 充御史按廉嶺南, 陞通政, 拜承政院同副承旨. 上出逆宗裀于島, 謫置京第, 諸臣有言者輒罪之, 多下過中之敎, 公繳還之上怒命竄江華, 又移渭原尋寢之, 復授承旨. 公夜直院中, 呼燭, 草一啓上之, 以附匡救之義. 時三司章䟽, 皆焚于庭, 上獨不焚公啓. 令司謁賚傳責諭而已. 出莅寧邊, 櫛蠹決癰, 立法鉤校, 宿瘼一除. 承命纂修輿地考, 奎章全韻, 後又修尊周彙編, 莊陵志. 癸巳特擢大司憲, 轉大司成, 出全羅道觀察使, 値歲大饑, 悉捐凜賙民, 所全活甚衆, 坐部下守宰不卽痤病死人骸屍, 配寧海, 宥還, 參判諸曺, 兼諸司堤擧, 拜慶尙監司, 力辭不赴. 後又有關東之命, 不赴, 差備局有司提調, 時時召見便殿, 從容論爲治之道. 公言, 導俗務端本, 而不在於治末. 裕國要節用, 而不在於生財. 又曰, 欲得賢士大夫, 當於輕爵綠<祿?>者求之, 屢見, 輒以此陳之. 不易他語, 上每稱善, 一日, 上問公, 或言關西穀盡分取耗者, 皆從他司移屬壯營, 後己有此數.

 

<2>

非近日增置, 此言何如? 對曰, 前之糶糴, 非止此數. 貪官汚吏, 奸弄文法, 爲朝家所不知者又多, 然民不甚怨, 今乃怨之者, 視財之所歸耳. 有幣斯矯之而已. 增置久近, 不須言也. 上以扇拍案曰, 予閱朝臣多矣, 未聞如卿切直之言, 上嘗語兪忠文公言鎬, 尹文翼公蓍東曰: 李某眞不易得之才也. 二公皆曰: 臣等亦知此人可大用矣. 拜吏曹參判, 仍通論善賓客之望, 皆極選也. 庚申正廟昇遐, 大妃垂廉<?>, 同上聽政, 諸大臣輔輔初政, 皆倚公爲重, 而時朝論已潰裂, 軍國之積弊益痼, 如棼絲之不可理, 如壞屋漏舟之不可支拄. 公隨事彌綸規畵, 卒亦不能有所裨補, 而國事無以爲矣, 公日望殯殿泣下, 近臣尹行恁乘機弄權, 又以辯言矯變先旨, 公憂之見大臣屢言之, 行恁切齒, 必欲中傷公矣. 會公陞正卿, 大妃特旨授度支長, 公因辭䟽言, 斜封墨勅, 非今日之所宜有, 是必有以臣名徹慈聽者, 大妃敎, 以某若以予因外言而用人者, 然其䟽出於沽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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命安置絶島, 大臣諸臣力救得寢. 未幾復除戶判, 公不得已膺命, 行恁時處禁密, 少有異己者, 輒造蜚語, 惎間之. 言者承望, 競出駁擊, 簡牘日積公車, 公前已言於諸大臣曰, 今聖上沖年嗣位, 未及摠攬萬幾, 此時若有一人受枉, 諸公不得辭其責矣. 大臣然之. 及是又相顧無如之何, 儀曺議定綏嬪供獻, 令諸道進箋方物, 有戚里宰臣, 遇公問朝政先務, 公言供獻事體甚重, 宜加審愼, 以彰嬪之謙德. 宰臣曰: 公言是卽日大妃下敎停方物, 廟堂議罷壯勇營, 以先朝所建置難之, 久而未決. 公言: 時各有不同, 顧今民國事勢, 不可不罷, 終始力主之, 至翌年大臣始白罷之. 拜吏曺判書. 爲政務, 循公議, 先以色 拒人於非義, 一世斂手無干. 請移判戶曺, 以嘉禮敦匠勞, 加正憲, 又爲冢宰, 屢違召, 迫然後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