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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휘(閔泳徽) 묘비(墓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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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휘 묘비[수장비]

하사받은 호가 하정의 수장비명

 

보국숭록대부로 의정부좌찬성겸이조판서 독판내무부사 판의금부사 지경연춘추관사 지훈련원사 원임규장각제학 시강원이사를 역임한 하옹의 수장비217) 스스로 지은 명문 서문과 함께

 

옛날 공숙문자가 하구에 올라가 좋구나! 나는 이곳에 장사지내고자 한다.218)라고 하였다. 옹에게 있어 수춘[춘천]도 또한 그렇다. 옹은 누구인가. 여흥(驪興) 민영휘(閔泳徽)이며, 자는 군팔(君八), 영준(泳駿)은 그의 초명이다. 호는 하정(荷汀)이라고 하였는데 임금께서 하사하신 것이다.

옹의 조상은 고려 상의봉어로 휘는 칭도(稱道)이다. 3대를 내려와 문경공 휘 영모(令謨)가 정의공(定懿公) ()를 낳았으니 모두 평장사를 역임하였다. 3대를 내려와 찬성사 충순공(忠順公) 휘 종유(宗儒)가 대제학 문순공(文順公) 휘 적()을 낳았고, 이 분이 대제학 여흥군(驪興君) 휘 유()를 낳았다. 명성과 덕망을 지녔고 높은 관직에 이르러 대대로 혁혁한 명성이 계속하여 이어졌다.

우리 조선조에 이르러 휘 심언(審言)은 개성부 부유수로 있다가 관직을 버리고 은거하였다. 이분은 일집의로 이조참판에 추증된 휘 충원(冲源)을 낳았다. 이분은 봉사시정으로 이조판서에 추증된 휘 수()를 낳았다. 이분은 전적으로 찬성에 추증된 휘 구손(龜孫)을 낳았다. 이분은 호가 입암(立巖)이며 좌찬성을 역임한 휘 제인(齊仁)을 낳았다. 이분은 군수로 참찬에 추증된 휘 사용(思容)을 낳았다. 이분은 영으로 이조판서에 추증된 여건(汝健)을 낳았고, 부윤으로 영의정에 추증된 휘 기()에 출계하였다. 창신교위 휘 여준(汝俊)이 그의 생부이다.

부윤공은 강원감사로 영의정에 추증된 휘 광훈(光勳)을 낳았고, 이분은 호를 인재(訒齋)라 하고 대사헌으로 좌찬성에 추증된 휘 시중(蓍重)을 낳았다. 이분은 통덕랑 휘 진로(鎭魯)를 낳았고, 이분은 돈녕판관 휘 흥수(興洙)를 낳았다. 이분이 옹의 5대조이다. 고조는 군수로 이조참판에 추증된 휘 백인(百寅)이며, 부인은 평산신씨 오()의 따님과 초계정씨 현감 기경(基慶)의 따님인데 모두 정부인에 추증되었다. 증조는 휘 정혁(楨赫)으로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부인은 한산이씨 형건(李享建)의 따님과 전주이씨 구(), 완산이씨 봉사 제백(齊白)의 따님인데 모두 정부인에 추증되었다. 조부는 안의현감으로 좌찬성에 추증된 휘 치서(致敍)이며, 부인은 죽산안씨 주부 후원(厚遠)의 따님으로 정경부인에 추증되었다. 부친은 판돈녕으로 의정에 추증된 휘 두호(斗鎬)이며, 모친은 청송심씨 우영(愚永)의 따님으로 정경부인에 추증되었다.

입암공의 후손을 살펴보면, 아들은 청백리로 공조참판을 지낸 휘 여임(汝任)이다. 7대가 전해져 휘 비현(丕顯)은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휘 단현(端顯)은 첨추로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의정공[端顯]은 출계하여 여양부원군(驪陽府院君) 문정공(文貞公) 휘 유중(維重)의 증손이며, 찬성에 추증된 휘 백술(百述)의 아들이다. 그의 셋째 아들은 참의로 찬성에 추증된 휘 치우(致友)인데, 또 이판공[丕顯]의 후사가 되었다. 부인은 정부인에 추증된 기계유씨 한건(漢健)의 따님이다. 이분이 선고(先考)의 본생고비(本生考妣)이다.

옹은 평산신씨 감역 명석(命奭)의 따님을 아내로 맞이하였는데 정경부인의 품직을 받았다. 좌의정 문충공(文忠公) 휘 정중(鼎重)7세손으로 돌아가신 군수 영집(泳集)의 둘째 아들 형식(衡植)을 입양하여 아들로 삼았는데, 문과에 급제하여 지금은 의정부 참찬이다. 차례대로 32녀를 두었는데, 지금 육군 참령(參領) 대식(大植)과 참봉 규식(奎植)과 천식(天植)이며, 딸은 각각 지금 부위인 연안 이유익(李裕翼)에게, 지금 참봉인 연안 김사식(金思湜)에게 출가하였다. 형식은 아들 딸 하나씩 두었고, 대식은 아들을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옹은 철종 임자년(1852) 515일에 태어났다. 지금 임금[高宗] 정축년(1877) 정시문과에 급제하였고, 기묘년(1879) 동궁의 천연두 증세가 회복되었을 때 사관의 신분으로 특별히 입직하여 6품으로 올랐고, 신사년(1881) 임금이 건원릉에 제사를 지낼 때 대축(大祝)을 맡아 통정대부로 승진하였다. 정해년(1887) 하례를 행할 때 예방의 임무를 맡아 가선대부로 승진하였고, 중전의 환후가 회복되었을 때 곁에서 약물을 올리는 노고를 행하여 가의대부로 승진하였다. 기축년(1889) 평안도관찰사로 있을 때 특별히 지경연에 제수되었고 자헌대부로 승진하였다. 경인년(1890) 신정황후(神貞皇后)의 상을 당했을 때 공사를 지휘한 노고로 정헌대부에 가자되었다. 동지에 하례를 행할 때 춘방예모관을 맡아 숭정대부로 승진하였고, 임진년(1892) 존호(尊號)를 올릴 때 제조의 임무를 맡아 숭록대부에 가자되었다. 계사년(1893) 북한산성을 중수할 때 감동장신(監董將臣)의 임무를 맡아 보국대부로 승진하였다.

참하(參下: 7품 이하의 관직)로는 검열, 주서겸설서를 역임하였고, 참상(參上: 6품 이상 정3품 이하의 관직)으로는 별겸춘추문신, 겸선전관, 정언, 중학교수, 도당록부수찬, 수찬, 부교리, 교리, 금위영종사관겸사서, 사서, 헌납, 검상을 역임하였다. 당품(堂品)으로는 병조참지, 참의, 돈녕부도정, 이조, 호조, 형조 참의, 동부, 우부, 좌부승지, 우승지, 조사오위장, 대사성, 참의내무부사를 역임하였다. 아경(亞卿)에서 정경(正卿)에 이르기까지는 겸보덕, 이조, 공조, 형조참의, 동지경연춘추성균의금돈녕부사, 내무부협판, 한성부좌우윤, 도승지예겸약원부제조, 특명주찰일본판리대신, 특진관, 규장각직제학, 검교, 직제학, 예조, 형조, 공조판서, 검교보덕, 홍문예문관제학, 지춘추의금돈녕부사, 한성부판윤을 역임하였다. 숭질(崇秩: 높은 품계의 관직)이후로는 판돈녕의금부독판, 내무부사, 병공조겸판서, 좌참찬, 기기국총판, 연무공원판리, 지훈련원사, 좌우부빈객, 좌빈객, 내각제학겸교서관, 좌찬성, 이사를 역임하였다. 겸직한 직함으로는 비국, 선혜청, 대동공시, 정부유사, 관서구관당상을 맡았고, 제거(提擧)219)로는 전의, 장흥빙고, 약원, 승문원공사, 이원, 태복총어영 맡았고, 국가의 경사를 하례하는 일은 진연진찬도감, 진작재신, 급진연회 연진찬의궤당상을 맡았다. 왕족의 치상을 감독하는 일은 빈전국장도감을 맡았다. 장수의 임무로는 경리총어양영사를 맡았고, 외직으로는 영변부사, 평안감사겸친군서영외사, 강화유수겸친군심영외사를 맡았고, 제술관으로는 악장과 만장을 각각 한번씩 맡았고, 서사관으로는 옥책과 애책을 각각 한번씩 맡았다. 이것이 옹이 갑오년(1894) 이전에 내외직에서 맡았던 이력이다. 겹치는 것은 기록하지 않았다.

우리 황제[高宗]와 명성황후께서 나를 불초하다고 여기지 않으시고 한마음으로 임금을 섬기다[一心事君]’라는 어필을 써 주며 총애하셨다. 동궁의 순명비(純明妃)220)께서도 또 율산혜당(栗山惠堂)’이라고 써 주어 분수에 넘게 대해주셨다. 나라가 큰 어려움을 겪었을 때는 외람되게도 커다란 임무를 맡겨주셨고 보배로운 글씨가 새로운 듯하였고, 말을 하사하는 전교를 무릇 85번에 걸쳐 받았고, 각종 피물과 상을 하사하신 것은 또 다 기록할 수 없다.

오호라! 옹은 재주가 남들보다 뛰어나지도 못한데 성스럽고 밝은 군주를 만나 문관과 무관을 모두 거쳐 지위가 가장 높은 곳에 이르렀으니, 진실로 옹이 원래부터 부끄러운 마음을 가졌었다. 하물며 을사년(1905년 을사보호조약) 이후 뻔뻔한 낯빛으로 구차하게 살아가니, 거적자리에 잠을 자면서 누구를 섬길 것이며, 와신상담을 어느 곳에서 할 것인가. 원통함이 하늘 끝에서 땅 끝까지 미치니 갑작스레 속세에 대한 미련이 없었다. 이것이 옹의 지극한 아픔이다. 하늘에 조문을 하지도 못하고 이른 나이에 부친을 여의어 풍수지탄이 그치지 않고 부종(釜鍾)221)하려고 해도 할 수 없으니, 이것이 옹의 지극한 한이다.

선친은 춘천에 처음 부사로 부임하였다가 관직명이 유수로 바뀌었는데, 그 사이 7년 동안 선정을 펼쳐 그 고장의 선비들과 백성들이 선군의 초상을 그려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 일찍이 장항리(獐項里) 계좌(癸坐)에서 묫자리를 하나 얻었는데, 모양과 지세가 감싸 안은 것 같아 풍수가의 말과 자못 합치되었다. 묫자리를 지키는 집을 설치하고 그 곁에서 찬찬히 살펴보아라.라고 하였다. 이곳에다 지금 수장(壽藏)222)할 터로 삼았다.

아아! 이곳은 선친이 미리 점찍어 둔 자리이니, 어찌 단지 공숙문자가 눈여겨 본 하구와 같을 뿐이겠는가. 혹자가 옹은 아직 늙지도 않았는데 묫자리를 잡은 계획은 너무 빠르지 않느냐고 물었다. 옹이 잘 들어보시오. 사람의 일생은 백년도 안되는데 항상 천년의 근심을 품고 있소. 내가 병석에 누워서 연명하여 100세의 나이에 이른다고 하더라도 이미 절반이 지났으니, 빠르다고 말할 수 있겠소?라고 하였다. 또 옹이 비문을 직접 쓰는 것은 나라에는 지극한 슬픔이 있고, 몸에는 지극한 한이 있지만 충성과 효심을 남에게 보일 수가 없기에 오직 비석에다 지나온 나의 이력을 써서 후세의 자손들로 하여금 이 비석에서 찾아볼 수 있게 한다면 족하다. 다른 사람이 써준 비문을 별도로 구해서는 안될 것이거니와, 또한 은혜를 베풀어 이름을 바꾸기를 구해서는 안될 것이니 나의 잘못을 무겁게 하고 나의 부끄러움을 크게 하는 일이다.

옹은 또 일찍이 스스로 내가 임금을 섬기면서 기록할 만한 일은 없다. 다만 속이지는 않았을 뿐이다. 집안에서는 쓸 만한 말은 없지만 오직 차고 넘치는 것을 경계하였을 뿐이다. 이것을 명문으로 새길만하겠구나.라고 하였다.

명문(銘文)은 아래와 같다.

 

睠玆昭陽 繫我桐鄕 돌아보건대 여기 소양강은, 우리 선친의 동향223)과 관련이 있다네.

惠存召棠 像留蜀堂 선정을 베푼 은혜는 소당224)에 남아 있고, 초상은 촉당에 남아 있네.

曾卜一岡 屢閱星霜 옛날에 한 언덕을 점찍어두고 나서, 많은 세월을 겪었네.

思先不忌 作爲壽藏 선친의 행적을 생각하여, 영원히 잠들 무덤자리로 삼았네.

紀德闡揚 乃銘之常 덕을 기록하여 드날리는 것이, 명문의 일반적인 도이거늘.

我自秤量 焉有銖長 내가 스스로를 헤아려보니, 어찌 자그마한 공적이라도 있겠는가.

有寃徹蒼 有懷永傷 원통함은 하늘까지 닿고, 그리움으로 영원히 마음 아프네.

浮雲軒裳 怳一夢場 뜬구름 같은 부귀공명, 일장춘몽처럼 부질없다네.

惟水泱泱 惟山嶈嶈 물은 넘실넘실 흐르고, 산은 우뚝하니 솟았네.

我刻斯章 同期渺茫 내가 새긴 이 글도, 똑같이 오랫동안 전해지길 기약하네.

 

대한광무 9(1905) 5월 일에 세우다.

 

부인은 기유년(1849) 45일에 태어나 을묘년(1915) 정월 29일 갑진일에 죽었다. 28일 계축일에 왼쪽에 묻었다. 오호라! 부인이 처음 나에게 시집와서 집안 살림을 맡아 부모 봉양225)에 조심하고 신경을 많이 써, 시부모님이 그녀의 효성 때문에 편안하였다. 존귀한 지위에 올라서도 더욱 겸손하고 검소하였으며, 친족과 화목하게 지내고 아랫사람에게까지 은혜가 미쳤다. 자손을 의로써 사랑하고 훌륭한 행적과 정숙한 덕은 모두 집안의 법이 되었으니, 어찌 나에게 과분한 자가 아니겠는가. 늘그막에 홀로 지내며 정신과 생각이 온전하지 못해 이와 같이 대략적으로 기록한다. 

 

217) 수장비(壽藏碑) : 죽기 전에 미리 자신의 비석을 세우는 것을 말한다.

218) 『예기(禮記)』 단궁 상(檀弓上)公叔文子升瑕兵 蘧伯玉從文子曰 樂哉斯丘也 死則可欲葬焉이란 구절을 말한다.

219)제거(提擧) : 조선시대 사옹원(司饔院내의원(內醫院) 등 여러 관서의 정·3품 관직을 말하는데, 이들은 녹봉이 지급되지 않고 관료의 신분만 가진 무록관(無祿官)이다.

220)순명비(純明妃) : 순종(純宗)의 비() 민씨(閔氏)를 말한다.

221)부종(釜鍾) : ()와 종()은 모두 곡식을 재는 단위로, ()64승이고, ()은 그의 10배로서 64두이다. 얼마되지 않는 녹봉으로 부모를 봉양한다는 말이다.

222)수장(壽藏) : 생전에 미리 만들어 놓은 무덤을 말한다.

223)동향(桐鄕) : 옛날 수령의 은혜로운 정사를 잊지 못하고 있는 고을이라는 뜻이다. () 나라 주읍(朱邑)이 젊었을 때 동향의 관리로 있었는데, 동향에서 그를 못내 사모하자 죽어서 그곳에 장사 지내었던 고사가 있다.

224)소당(召棠) : 『시경』 소남(召南)의 감당(甘棠)을 말한 것이다. ()나라 소공석(召公奭)이 남국(南國)을 순시하다가 팥배나무의 밑에서 민원을 처리해 주었는데, 후세의 사람들이 그를 사모하여 그 팥배나무를 차마 베지 못하였다. 후세에 선정(善政)을 비유하는 고사로 쓰이고 있다.

225)원문은 수수(滫瀡)’인데, 이는 고대 요리법의 일종으로 녹말을 음식물에 섞어 부드럽고 걸쭉하게 만든 음식을 말한다. 부모에게 맛있는 음식을 봉양함을 이른다.

 

원문

閔泳徽墓碑[壽藏碑]

賜號 荷汀 壽藏碑銘[1](篆額)

輔國崇祿大夫 行議政府左贊成 兼 吏曹判書 督辦內務府事 判義禁府事 知經筵春秋館事 知訓練院事 原任奎章閣提學 侍講院貳師 荷翁壽藏碑 自銘幷序

昔 公叔文子升於瑕邱曰: 樂哉, 我欲葬焉. 翁之於壽春, 亦云. 翁爲誰, 驪興閔泳徽, 字君八, 泳駿其初名. 號曰荷汀, 皇上所賜也. 翁上祖高麗尙衣奉御 諱稱道. 後三世 文景公 諱令謨, 是生定懿公珪, 皆官平章事. 又後三世, 贊成事 忠順公 諱宗儒, 生大提學 文順公 諱頔. 生大提學 驪興君 諱愉. 名德圭組 奕世相繼. 入我朝, 諱審言 以開城府副留守, 棄官隱. 生諱冲源, 逸執義 贈吏曹參判. 生諱粹, 奉常寺正 贈吏曹判書, 諱龜孫 典籍 贈贊成, 生諱齊仁 號立巖, 左贊成, 生思容 郡守 贈參贊, 生諱汝健 令贈吏曹判書, 系諱機 府尹 贈領議政 彰信校尉. 諱汝俊 其生父也. 府尹公生諱光勳 江原監司 贈領議政, 生諱蓍重 號訒齋 大司憲 贈左贊成, 生諱鎭魯 通德郞. 生諱興洙 敦寧判官, 寔翁五世祖也. 高祖諱百寅 郡守 贈吏曹參判, 配平山申氏 父噢, 草溪鄭氏 父縣監基慶, 俱贈貞夫人. 曾祖諱楨赫 贈吏曹判書, 配韓山李氏 父享建, 全州李氏 父矩, 完山李氏 父奉事齊白, 俱贈貞夫人. 祖諱致敍 安義縣監 贈左贊成, 配贈貞敬夫人, 竹山安氏, 主簿厚遠, 考諱斗鎬 判敦寧 贈議政, 妣贈貞敬夫人, 靑松沈氏 父愚永 由立巖公之孫, 淸白吏, 工曹參判 諱汝任. 七傳而有諱丕顯 贈吏判, 諱端顯 僉樞 贈領議政, 議政公出爲驪陽府院君 文貞公 諱維重曾孫, 贈贊成, 諱百述之子. 其第三子 參議 贈贊成, 諱致友, 又繼吏判公之后. 配贈貞夫人 杞溪兪氏, 父漢健, 是爲先考 本生考妣也. 翁聘平山申氏 監役命奭女, 誥封貞敬夫人. 繼左議政 文忠公 諱鼎重七世孫, 故郡守泳集 第二子. 衡植爲男 文科, 今議政府參贊, 次三男二女. 大植今陸軍參領, 奎植今參奉, 天植. 女適延安李裕翼 今副尉, 延安金思湜 今參奉. 衡植男女, 大植男 皆幼. 翁生哲宗壬子 五月十五日. 當宁丁丑庭試文科, 己卯 東宮痘候平復, 以史官別入直, 陞六品, 辛巳健元陵親祭, 以大祝, 陞通政, 丁亥陳賀 以禮房 陞嘉善. 坤殿患候平復, 又以侍藥勞 加嘉義. 己丑在西藩, 特授知經筵, 陞資憲, 庚寅 神貞皇后喪, 以敦匠勞, 加正憲. 冬至陳賀, 以春坊禮貌官 陞崇政. 壬辰上尊號, 以提調加崇祿, 癸巳以北漢 重修監董將臣, 特陞輔國, 參下 則歷檢閱 注書兼說書, 參上 則別兼春秋文臣 兼宣傳官 正言 中學敎授, 都堂錄副修撰 修撰 副校理 校理 禁衛營從事官兼司書 司書 獻納 檢詳. 堂品則兵曹參知 參議 敦寧府都正 吏戶刑曹參判 同知經筵春秋成均義禁敦寧府事 內務府協辦 漢城府左右尹 都承旨例兼藥院副提調 特命駐紮日本辦理大臣 特進官 奎章閣直提學 檢校 直提學 判禮刑工三曹檢校輔德 弘文藝文館提學 知春秋義禁敦寧府事 漢城府判尹, 崇秩以後, 判敦寧義禁府督辦 內務府吏兵工曹兼判書 左參贊 機器局摠辦 鍊武公院辦理 知訓練院事 左右副賓客 左賓客 內閣提學兼管校書館 左贊成 貳師, 兼銜 則備局 宣惠廳 大同貢市 政府有司 關西勾管堂上. 提擧 則典醫 長興氷庫 藥院 承文院公事 梨院, 太僕摠禦營, 慶禮則進宴進饌都監 進爵宰臣 及進宴會 宴進饌儀軌堂上. 敦役 則殯殿國葬都監. 將任 則經理摠禦兩營使. 外職, 則寧邊府使 平安監司兼親軍西營外使 江華留守兼親軍沁營外使. 製述官 則樂章挽章各一. 書寫官 則玉冊哀冊各一. 此 翁甲午以前內外踐履也. 疊除不錄, 我皇上曁我明成皇后, 不以徽不肖, 竝御書 一心事君四字 以寵之. 東宮純明妃, 又書栗山惠堂 以侈之, 以至艱虞之除, 猥蒙托畀, 寶墨如新. 所被錫馬之典凡八十有五, 表裏皮物賞賚, 又不可彈記, 嗚呼 翁 材不踰人, 遭値聖明, 官都文武, 位極崇亢, 固翁素所愧心, 況乙年以後, 靦然苟活, 苫干何事. 薪膽何在 寃徹穹壤, 忽忽無人世念, 是翁至痛. 弗弔于天, 早年失恃, 風樹不停, 釜鍾莫逮, 是翁至恨也. 先君 於春川 自府使而留守, 前後七載 多惠政. 士民繪像 祠之焉. 嘗得一穴於獐項里癸坐, 軆勢拱抱, 頗合刑家言, 置守戶其傍曰: 謹視之, 乃今爲壽藏焉. 噫 是先君之所占也, 豈僅如公叔之於瑕邱而已耶. 或謂翁年未暮, 何計太早 翁曰: 聞之, 人生百年內, 常懷千載憂. 吾寢假而至期頤之年 已過半矣. 早云乎哉. 且翁之爲此也, 至痛存乎國, 至恨存乎身, 無可以忠孝示人者, 惟書系閥履歷于石, 使後世子孫 徵於此 足矣. 不當別求他人文字, 亦不當干惠以求易名, 以重吾過 而長吾恥也. 翁又嘗自言: 吾事君 無可紀, 但不欺耳. 居家無可言, 惟戒滿耳. 是顧可銘歟. 銘曰:

睠玆昭陽 繫我桐鄕, 惠存召棠 像留蜀堂. 曾卜一岡 屢閱星霜. 思先不忌 作爲壽藏. 紀德闡揚 乃銘之常, 我自秤量 焉有銖長. 有寃徹蒼 有懷永傷, 浮雲軒裳 怳一夢場. 惟水泱泱 惟山嶈嶈, 我刻斯章 同期渺茫.

大韓光武 九年 五月 日 立

 

夫人以己酉四月五日生, 乙卯正月二十九日甲辰卒. 二月八日 癸丑 窆于藏之左. 嗚呼 夫人始歸我, 執組紃, 滫瀡唯謹, 舅姑安其孝, 及貴, 愈益謙儉, 睦宗黨, 惠逮下. 慈子孫以義, 懿行淑德, 皆家法, 豈余溢也. 暮境踽凉, 神思不屬, 槪此爲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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