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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연(金錫衍) 묘표(墓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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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조판서 김공의 묘표

 

옛날 숙종조(肅宗朝)에 판서를 지낸 김공은 휘가 석연(錫衍)89)으로, 어영(御營)의 대장을 20년간 맡으며 청렴결백하였고 맡은 바 임무에 부지런히 종사하다 세상을 떠났다. 시호는 정희(貞僖)이다. 지금 임금[英祖]께서 왕위를 계승하시고 국가에 난리가 많자 장군으로 삼을 만한 인재에 관심을 기울였다. 장신(將臣) 장붕익(張鵬翼)이 나아가 고판서(故判書) 아무개에게 손자가 있는데 뛰어납니다.라고 아뢰었다. 임금이 크게 기뻐하여 즉시 내승(內乘)90)에 제수하였다. 공은 이때 포의의 신분으로 책 읽기를 좋아하며 죽어도 출사하지 않겠다고 맹세하였었다. 임금의 독촉이 그치지 않아 하루는 갑옷을 입고 입직하라고 명을 내리셨는데 엄한 하교가 벼락이 쳐 땅을 뒤흔들 듯 하여 군율로 다스리겠다고 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공은 선친의 가르침과 모친의 훈계를 어길 수 없다고 하여 힘써 사양하며 빨리 죽여줄 것을 청하였다. 임금이 이에 달래는 뜻을 직접 글로 써서 내리시니 공은 황송함이 더해 눈물을 흘렸는데, 물시계의 물이 다 떨어진 새벽까지 이어졌다.

이 일로 인해 임금이 공이 지조가 굳은 것을 알게 되어 더욱 관심을 기울임이 나날이 더하였다. 품계를 뛰어넘어 서용하여 고부군수(古阜郡守)에 임명하였으나 즉시 관직을 버리고 돌아갔다. 벗에게 탄식하면서 주상께서 혹시라도 노여움을 누그러뜨려 내가 음로(蔭路)에 나아갈 수만 있어도 생각과 바람에 족하다.라고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별군직(別軍職)으로 내시사(內試射)에 참가하였다가 직부(直赴)하라는 명을 받았다. 이때부터 관리에 발탁되어 헛되이 보내는 날이 없어 수년 사이에 대장군(大將軍) 대사마(大司馬: 병조판서)에 이르렀다. 이때 나이 39세였다. 경오년(1750)에 판의금(判義禁)으로 특별 승진하고, 병자년(1756)에 숭록(崇祿)에 가자(加資)되었다.

공은 네 개의 군영91)을 두루 거쳤고, 만년에 숭록대부(崇祿大夫)의 품계가 되어 장군의 부절을 차고 있으면서도 매번 임금 앞에 나아가면 노모가 연로하였다는 이유로 관직에서 물러나게 해달라고 청하는 것이 매우 간절하였다. 임금이 감동하여 건의를 받아들여 사임을 허락하였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또 관직을 제수하였다. 임오년(1762)에 비로소 관직에서 물러날 수 있었는데, 대신들이 공의 병이 심각한 것을 걱정하여 주당(籌堂)92)에서 면직시켜줄 것을 주청하고자 하였다. 공이 눈물을 흘리며, 나는 조만간 죽을 것이다. 닷새에 한 번 청대(請對)하는 게 아니면 어떻게 천안(天顔)을 우러러 뵐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공이 세상을 떠나자 임금이 매우 슬퍼하여 조회도 하지 않고 관리에게 관을 만들 재료를 제공하라고 명하시고, 공의 모친에게 약물을 하사하고 친히 제문을 지어 제사를 지냈다. 또 경연에서 탄식하며 내가 이완(李浣)에게 가복(加卜)93)했던 전례를 쓰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라고 하셨다. 아아! 임금과 신하의 사이에 이와 같이 여한이 없었고 죽음을 애통해하는 마음과 예를 갖춰 대우한 것이 모두 갖추어졌다고 말할만하다.

공은 천성이 정직하였고 체격이 장대하고 용모가 훤칠하였으나, 마음은 온화하여 선을 즐기고 의를 좋아하였다. 일을 당하면 지조를 굳게 지켜 귀족과 권세가에게 굽히지 않았다. 특히 옛 친구에게 돈독하게 대하였고 선비들을 사랑하고 아꼈다. 이런 성격 때문에 자못 당시 시류에 거슬림을 당했지만 끝내 후회하지 않았다. 공은 임금과 가깝고 밀접한 자리에 출입하면서 나아갈 때나 머무를 때나 일정한 법도가 있었다. 일찍이 승선(承宣)94)의 신분으로 근사록(近思錄)』을 강하였는데, 구두(句讀)가 정밀하면서도 맑았다. 임금이 그를 기특하게 여겨 무인인 것이 참으로 원통하도다.라고 하였다. 공은 가문의 업적을 실추시켰다고 스스로 아파하여 비록 극히 귀하고 번성하였지만 일찍이 자랑하려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옷은 간소하고 검소한 것만 입고 가난한 선비를 달리 대하지 않았다. 거처하는 집이 좁고 누추하여 손님을 맞이할 수 없을 정도였지만 넓히거나 확장시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사사로운 일에는 마음을 쓰지 않아 집에는 값비싼 물건이 없었다. 유독 법으로 삼을만한 서예책과 이름난 그림을 좋아하여, 옛날과 지금의 금석문을 모은 것이 몇백 권이었는데, 한가할 때면 한장 한장 펼쳐보며 스스로 즐겼다.

평소에는 순박하여 무능한 사람 같았지만 고을을 다스리거나 변방의 책임을 맡아서는 탁월한 업적이 있었고, 여러 번 두 전조(銓曹: 이조와 병조)의 장관이 되어 인사를 담당할 때는 공평하였다. 그가 장수로 있을 때는 중후함을 견지하고 옛 것을 지키는데 힘을 쏟았으며, 호령을 번거롭게 하지 않아 부하들로 하여금 스스로 편안하게 여기도록 하였다. 훈국(訓局: 훈련도감)에서 일찍이 군대 창고를 만들고 식량을 채워 넣어 임금이 칭찬을 하자, 공이 사례하며 저의 능력이 아니라 어영청 대장을 본받은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가 스스로 겸손하게 물러나고 자랑하지 않은 것이 대부분 이와 같았다. 가장 높은 장수의 지위에 있는 30년 동안 나라 안은 편안하고 조용하여 사람들은 전쟁을 알지 못하였다. 임금이 처음부터 끝까지 공을 의지하고 믿어 복덩어리 장군이라고 불렀다.

공이 병들었을 때 장수와 병졸들이 걱정하느라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제물을 갖춰 하늘에 기도를 드렸고, 상을 당하고 장례를 치를 때까지 분주하게 다니며 애통하게 운 것이 마치 친척을 잃어 슬퍼하는 것 같았다. 평소에나 병이 들었을 때나 공은 떨쳐 일어나게 함이 적었으나 이때에 이르러 상복을 입고 정성스런 마음을 미루어 사력을 다해 싸우게 만든 것은 비록 옛날에 이름난 장수도 미치지 못할 정도였다.

공은 휘가 성응(聖應), 자는 군서(君瑞)로 청풍인(淸風人)이다. 기묘년(己卯年) 명현(名賢)95)인 대사성 휘 식()의 후손으로, 6대가 내려와 부원군이 된 충익공(忠翼公) 휘 우명(佑明)이 바로 정희공(貞僖公)을 낳았다. 부친은 진사인 휘 도영(道泳)으로 좌찬성에 추증되었고, 출계하여 숙부로 판서에 추증된 휘 석익(錫翼)의 후사가 되었다. 모친은 정경부인 윤씨로 해숭위(海嵩尉) 휘 신지(新之)의 현손인 별검 휘 하명(夏明)의 따님이다.

공은 숙종 기묘년(1699) 614일에 태어났는데 1년도 되지 않아 부친이 세상을 떠났다. 죽을 때까지 이 일을 매우 애통해 하며 부친의 기일이면 부르짖어 통곡하며 단괄(袒括)96)과 같이 하였다. 경진년(1700)에 이르러 추상(追喪)97)하려고 마음을 먹었지만 모친이 살아계신 까닭에 감히 상복을 입지는 못하고 거친 옷을 입고 먹는 것을 간소하게 바꾸고 한 해를 마쳤다. 모친이 팔순이 되도록 별다른 병이 없이 건강하였는데 공은 모친 곁에서 그 즐거움을 이어 노래자(老萊子)가 춤춘 것98)처럼 하였다. 모친이 꽃과 과실을 좋아하자 손수 집 앞에 벌려놓고 웃고 즐길 거리로 삼게 하였다. 모친이 병에 걸리면 밤낮으로 관복을 벗지 않고 간호하였고, 공이 임종시에 입으로 중얼거린 것이 모두 모친을 그리워하는 말이라, 듣는 자들이 슬퍼하였다. 형과 누이를 부모처럼 사랑하여 형의 자손을 마치 자기 자식처럼 아끼며 양육하였다. 친족에게 정을 두텁게 하여 귀천을 따지지 않고 매번 모여 즐거운 잔치자리를 마련하였고, 자주 왕래하며 곤궁한 자를 구휼하고 위급한 자를 구해주면서도 항상 부족한 듯이 하였다. 그가 집안에서 행한 것의 독실함이 남들보다 뛰어남이 또 이와 같았다.

갑신년(1764) 82일 세상을 떠나니 향년 66세였다. 10월 병술일에 양주의 평구리 대사성 무덤 오른쪽에 장사지냈다. 처음에 공은 선산(先山)에 묫자리를 정하였는데, 그 땅은 상국 이의현(李宜顯)의 무덤과 가까웠다. 공은 측은해 하며 이공의 자손이 크게 떨쳐지지 못하였으니

의당 알려주어 그 집안에서 쓰도록 해야겠다.라고 하였다. 지관이 공의 마음씀씀이가 이와 같으니 마땅히 좋은 곳을 얻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장사를 마치고 여러 자식들이 나에게 글을 요구하였다. 내가 일어나 사양하며, 공의 이름과 업적은 역사서에 기록되어 있고, 덕행은 묘지명에 갖추어져 있으니, 어찌 내 말을 기다리겠는가.라고 하였다. 비록 그렇지만 내가 마음속으로 느낀 바가 있었다. 공의 집안은 대대로 충성과 효성, 청렴함과 신중함으로 소문이 났다. 비록 귀근(貴近)99)과 인척관계로 연결이 되고 문에는 계극(棨戟)100)이 늘어져 서 있었으나 지나치게 많다고 시기하는 자가 없었다.

공은 성군을 만나 임금의 은총이 혁혁하였다. 장자는 높은 지위에 올라 다시 왕실과 혼인을 하니 가문이 더욱 번성하였다. 그러나 공은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더욱 굳게 하여 겸손함과 검소함으로 스스로를 다스리고, 자손들에게 무인(武人)을 감히 모욕하지 말라고 훈계하였다. 대개 마음을 먹고 행실을 통제하고, 말을 하고 일을 맡음에 있어 터럭 하나라도 이익을 가까이 하거나 남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 없었다. 그가 큰 복을 길이 누리고 아름다운 명성을 끝까지 보존한 것이 어찌 우연이겠는가. 나는 공에게 남은 경사가 아직 다 하지 않았음을 확실히 안다.

내가 어려서부터 외람되게도 공을 알게 되었는데, 공은 흰 머리가 되어서도 변하지 않았다. 예전에 공이 부르기에 내가 갔었고, 공이 다시 나를 지나가면서 담소를 나누며 매우 즐거웠다. 이때 공은 이미 건강이 좋지 않음을 보였지만 본인 걱정을 할 겨를도 없이 나의 상황을 걱정하였다. 그의 후덕하고 순수한 마음 및 풍류와 정취를 지금 어찌 다시 볼 수 있으랴. 지금 참판군이 지은 행장을 읽고는 책을 어루만지며 눈물을 흘렸다. 그의 생전의 행적 가운데 눈과 귀에 가장 익숙한 것을 고르고 예전부터 사모하고 좋아하던 마음을 글로써 비석에 새기도록 하였다.

부인 홍씨는 관찰사 우녕(禹寧)의 따님으로 33녀를 두었다. 장남은 참판 시묵(時默)으로, 종부(從父)에게 출계하여 후사가 되어 충익공의 제사를 주관하며, 차남은 첨정 지묵(持默), 막내는 치묵(峙默)이다. 사위는 각각 부사 이헌진(李憲鎭), 사인 이상호(李商頀), 조원(趙瑗)이다. 측실에 3녀를 두었는데, 첫째는 이한장(李漢章)에게 출가하였고 나머지 두 명은 아직 어리다. 첫째아들인 참판의 아들 기대(基大)는 진사이며, 딸은 세손빈(世孫嬪)이 되었다. 둘째 아들 첨정의 아들은 기후(基厚)이고, 딸은 홍낙윤(洪樂倫)에게 출가하였고, 나머지 하나는 어리다. 막내 아들 치묵은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어리고, 첫째 사위인 부사의 딸은 김상유(金相猷)에게 출가하였고, 사위 조원의 아들은 진규(鎭奎)이며 하나는 아직 어리다.

昔在肅宗時判書金公諱錫衍 以元舅掌御營兵二十年 廉白勤勞卒 諡貞僖 今上嗣位 國家多難 注意將材 將臣張鵬翼進言 故判書某有孫克肖 上大悅 卽除內乘 公方以布衣 喜讀書 矢死不出 上督之不已 一日 命戎服入直 嚴敎震疊 至擬以軍律 公以先訓毋戒 力辭請速死 上乃下御筆諭意 公惶隘涕泣 時夜漏已盡 由是 上益知公有守 眷注日隆 超敍爲古阜郡守 卽棄歸 喟然謂友人曰 主上儻遂寬 我得浮沈蔭路 志願足矣 未幾以別軍職 參內試射 命直赴 自此遷擢無虛月 數年中 至大將軍大司馬 時年三十九 庚午 特陞判義禁 丙子 加崇祿 公周流四營 晩年秩崇 尙綰將符 每於前席 以母老年衰 乞解甚懇 上爲動容許副 己又還授 壬午 始得解 大臣憫公病甚 欲奏免籌堂 公泣曰 吾朝暮且死 非五日一對 何由獲瞻天顔 及卒 上震悼 不視朝 命有司給柩材 致藥物于大夫人 親製文以祭 又臨筵歎曰 予恨不用李浣加卜故事 嗚呼 君臣之際 於是無憾 而隱卒崇終 可謂備矣 公天性正直 狀貌魁偉 而開懷坦易 樂善好義 遇事確守 不撓 貴勢 惟篤於久要 愛惜士類 以是頗牴牾於時 然卒不悔也 公出入近密 進止有常 嘗以承宣 講近思錄 句讀精亮 上奇之曰 爲武固寃矣 公自傷墜失先業 雖極貴盛 未嘗有矜色 衣被簡儉 無異寒士 居第隘陋 不容賓從 而不許增拓 不以私事經心 家無長物 獨喜法書名畫 集古今金石累百卷 暇則繙閱以自娛 平居恂恂若無能 而治郡制閫 綽有成績 累長西銓 政注公平 其爲將 務持重守舊 號令不煩 使人人自便 訓局嘗創補軍庫 上稱善 公謝曰 非臣之能 乃效御將也 其退讓不伐 多此類 居上將三十年間 邦內寧謐 人不知兵 上終始倚毗 號爲福將 公之病也 將士憂遑 齎物行禱 自喪至葬 奔走號哭 如悲親戚 平日或病公少所振作者 至是 方服以爲推誠心得人死力 雖古名將不過也 公諱聖應 字君瑞 淸風人 己卯大司成諱湜之後 六世而爲府院君忠翼公諱佑明 是生貞僖公考諱道泳 進士贈左贊成 出後叔父贈判書諱錫翼 母貞敬夫人尹氏 海嵩尉諱新之之玄孫 別檢諱夏明女 公以肅宗己卯六月十四日生 未周歲而孤 終身爲至痛 忌日號慟 如袒括 至庚辰 意欲追喪 以大夫人故 不敢服 猶麤衣變食 以終其年 大夫人大袠無恙 公左右承歡 若老萊之戲 凡玩好花果 手自羅列於前 以爲笑樂 有疾則日夜不解帶 臨歿啽囈 皆戀慕語 聞者哀之 愛兄姊如父母 撫育兄孫 如己子 厚於宗族 不間貴賤 每聚會歡讌 履舃交錯 卹竆濟急 常如不及 其內行之篤 又絶人如此 甲申八月二日卒 享年六十有六 十月丙戌 葬于楊州之平丘里大司成兆右 始公卜壽藏于先山 其地近李相國宜顯墓 公惻然曰 李公子孫不振 宜告其家用之 術人曰 公處心若此 法當得吉地 旣葬 諸孤徵文於余 余作而辭曰

公之名績 書在史氏 德行具於幽誌 顧何待余言 雖然 余竊有感焉 公家世以忠孝廉謹聞 雖戚聯貴近 門列棨戟 而無滿盈之忌 至公遭逢聖主 恩寵赫然 長子通顯 重姻王室 門戶益盛 然公益懷戒懼 謙儉自牧 戒子孫毋敢侮武人 葢立心制行 出言應事 無一毫近利而害物 其享有遐祉 終保令名 豈偶然哉 余固知公流慶未艾也 余自少辱知 公白首不渝 曩余赴召 公再過余 笑語甚驩 時公已示憊 不暇自憂 而憂余之行止 其厚德純心 風流情致 今何可復得 今讀參判君所爲狀 爲之撫卷流涕 謹最其事行之習於耳目 夙所慕好者 俾書于石陰 夫人洪氏 觀察使禹寧女 擧三男三女 男長卽參判時默 出后從父主忠翼公祀 次僉正持默 季峙默 女壻府使李憲鎭士人李商頀趙瑗 側室三女 長適李漢章 餘幼 參判子基大進士 女爲世孫嬪 僉正子基厚 女適洪樂倫 一幼 峙默一子幼 府使女 適金相猷 趙壻子鎭奎 一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