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의 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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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명(趙永命) 묘표(墓表)

상세정보

증이조참의(贈吏曹參議) 조공영명지묘(趙公永命之墓) 증숙부인(贈淑夫人) 청송심씨(靑松沈氏) 부좌(祔左)

 

나의 중씨(仲氏)101)의 휘는 영명(永命)으로 자는 기중(祈仲)이고 풍양인이니 고려 때 시중인 휘 맹()의 후손이다. 휘 희보(希輔)102)라는 분이 있었으니 좌찬성에 증직되었고, 휘 형()103)이란 분이 있었으니 행예조판서(行禮曹判書)를 지냈고 시호가 충정(忠貞)이니, 이분들은 고조부와 증조부가 된다. 할아버지는 좌찬성에 증직된 휘 상정(相鼎)104)으로 백부(伯父)인 이조판서에 증직된 휘 민()105)의 후사로 출계하였는데, 문행(文行)이 있었으나 일찍이 돌아갔다. 아버지는 휘가 인수(仁壽)106)이고 호가 백분당(白賁堂)인데, 경행(經行)으로 천거되어 관직이 도사(都事)107)였으나, 출사(出仕)하지는 않았고 영의정에 증직되었으며 풍흥부원군(豐興府院君)에 봉하여졌다. 어머니는 광산김씨(光山金氏)로 승지(丞旨)를 지낸 휘 만균(萬均)108)의 딸이요, 사계(沙溪) 문원공(文元公) 휘 장생(長生)109)의 현손이다.

중씨께서는 갑인년(甲寅年)110) 928일에 백씨(伯氏) 대사간공(大司諫公) 경명(景命)111)과 함께 임신되어 출생하였는데, 태어나면서부터 보통의 아이들과 달랐고, 장성하게 되자 기억력이 남보다 뛰어나 과거공부를 함에 문장력이 빛나기도 하였으나, 과시(科試)에서는 액운이 끼어 무자년(武子年)112)에야 비로서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게 되었다. 갑오년(甲午年)113)에 영릉(寧陵) 114)참봉이 되고 종묘서봉사(宗廟署奉事), 사도시직장(司導直長), 종부시주부(宗簿主簿), 금부도사(禁府都事), 공조좌랑(工曹佐郞)을 거쳐, 경자년(更子年)115) 겨울에 외직으로 나가 교하현감(交河縣監)이 되었다. 2년이 지난 임인년(壬寅年) 116)418일에 폭질(暴疾)에 걸려 임지에서 돌아갔는데, 당시 49세였으니, ! 애통하도다.

중씨께서는 관유순선(寬裕順善)하였고 남을 사랑하여 베풀어주기를 좋아하였다. 어버이를 모심에 지극하였고, 형제간에 처함에 조금도 너와 나를 가름이 없어 길흉과 급하고 급하지 않은 일이건 간에 일이 있기만 하면 재력을 내려 할 일을 하였다. 남을 대우함에 있어서는 간격을 두지 않았고 더욱이 친구들에게 독실하였으며, 관직에 있을 때에는 까다로운 지적을 좋아하지 않았으나 이민(吏民)들이 그의 공정함과 청령함을 두려워하였다. 처음에 교하에 장사지냈었는데, 산역(山役)에 나왔던 교하의 백성들이 혹은 눈물을 흘리며 우는 이도 있었으니 여기에서 그의 치정(治政)의 일단을 엿볼 수가 있었다.

! 중씨와 같은 재능과 그릇됨으로서 가문의 운이 크게 트이게 됨을 당하였는데도 하급관직에 머무르게 되어 겨우 하나의 조그만 고을에 시험 삼아 쓰이는 것에 그쳤으니, 어찌 그처럼 운명이 곤궁하단 말인가. 무신년(戊申年)117)에 이조참의에 추증되었으니 둘째아들 재박(載博)118)이 양무원종훈(楊武願從勳에 훈록되었기 때문이다.

부인은 숙부인(淑夫人)에 증직된 청송 심씨로, 사직서령(社稷署令) 약황(若潢)의 딸이자, 광주부윤(廣州府尹) ()의 손녀이며, 승지에 증직된 강릉 김만시(金萬始)의 외손녀이다. 동서들과의 처신에서 환심을 얻었고 가난한 살림을 잘 주간하여 남편으로 하여금 있고 없는 것을 알지 못하도록 하였다. 중씨보다 앞선 계사년(癸巳年)119) 417일에 돌아가 양주(楊洲) 해등촌(海等村) 선영 곁에 임시로 장사지냈다가, 경술년(庚戌年)120) 824일에 이르러 함께 이장하여 춘천 동면(東面) 애막동(艾幕洞) 선산의 정향원(丁向原)에 합장하였다.

32녀를 두었다. 장남 재극(載極)은 일찍 죽었는데, 판관(判官) 박필교(朴弼敎)의 딸을 취하여 22녀를 낳았고, 재박(載博)은 부사(府使)인데, 사인(士人) 이희직(李希稷)의 딸을 취하였고, 재억(載億)은 생원인데 참봉 이수정의 딸을 취하여 아들 하나를 낳았다. 작은 부인 소생의 아들은 재백(載百)인데, 아직 어리다. 장녀는 사인 윤득경(尹得庚)의 아내로 자식 하나를 두었고, 그 다음은 생원 김이원(金履遠)의 아내로 자식 하나를 두었다.

둘째동생 좌의정(左議政) 풍릉부원군(豊陵府院君) 문명(文命)이 짓고, 셋째동생 이조판서(吏曹判書) 현명(顯命)이 쓰다.

숭정기원후(崇禎紀元後) 두 번째 병진(丙辰) 8월 일.

 

101)중씨(仲氏): 둘째 형을 말한다.

​102)희보(希輔): 1553~1622. 자는 백익(伯益). 1588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정치적으로 정인홍(鄭仁弘) 등의 대북파(大北派)와 대결하다가, 1622년 관직을 사퇴하고 원주에 은거하고 있다가 돌아갔다.

103)(): 1606~1679. 자는 군헌(君獻), 호는 취병(翠屛). 승지(承旨) 회보()의 아들이다. 인조 4(1626)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으나 파방되어 다시 1630년 식년문과에 응시하여 병과로 급제하였다. 성격이 완고하여 여러번 유배를 당하는 등 파란만장 하였으나, 장수하여 1675년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104)상정(相鼎): 1631~1660. 자는 원진(元鎭)으로, 효종 5(1654) 생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어려서부터 문한(文翰)으로 세상에 알려졌으나, 일찍 돌아가 빛을 보지 못하였다.

105)(): 1575~1650. 자는 미중(美仲)으로, 선공감감역(繕工監監役)을 지냈다.

106)인수(仁壽): 1648~1692. 초명은 정춘(靜春), 자는 백정(伯靜). 일찍부터 과거 보는 것을 단념하고 학문에만 전념하여 명성이 있었다.

107)도사(都事): 금부도사(禁府都事)를 말한다.

108)만균(萬均): 1631~?. 자는 정평(正平), 호는 사휴(思休) ‘ 취선(醉仙) ’ 이호(梨湖). 이조판서 익희(益熙)의 아들.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으로 효종 5(1654)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09)장생(長生): 1548~1631. 자는 희원(希元), 호는 사계(사계), 대사헌(大司憲) 계휘(繼輝)의 아들이다. )>,<의례문해(疑禮問解)>, <근사록석의(近思錄釋疑)>, <경서변의(經書辨疑)> 등이 있다.

110)갑인년(甲寅年): 현종 15, 1674.

111)경명(景命): 1674~1726. 자는 군석(君錫), 호는 귀락정(歸樂亭). 숙종 28(1702) 진사시에 합격하여 음보로 현감(縣監)이 되었고, 경종 2(1722) 정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112)무자년(武子年): 숙종 34, 1708.

113)갑오년(甲午年): 숙종 40, 1714.

114)영릉(寧陵): 효종의 능을 말한다.

115)경자년(更子年): 숙종 46, 1720.

116)임인년(壬寅年): 경종 2, 1722.

117)무신년(戊申年): 영조 4, 1728.

118)재박(載博):1700~1733. 자는 자약(子約)으로 인천부사(仁川府使)를 지냈다. 그의 묘가 애막동 미좌(未坐)에 있다.

119)계사년(癸巳年): 숙종 39, 1713.

120)경술년(庚戌年): 영조 6, 1730.

121)재극(載極): 1698~1729. 자는 지잔(子眞). 그의 묘가 애막골 건좌(乾左)에 있다.

122)재억(載億): 1704~1740. 자는 자구(子久). 공조좌랑을 지냈다.

123)재백(載百): 1721~1782. 영조 27(1751) 무과에 급제하여 관직이 첨정(僉正)에까지 이르렀다.

124)윤득경(尹得庚): 본관은 해평(海平)으로, 진사(進士) 제명(濟明)의 아들이다. 도사(都事)를 지냈고, 슬하에 1남을 두었다.

125)김이원(金履遠): 본관은 안동(安東)으로, 판관(判官) 영행(令行)의 아들이고, 감사(監司) 시걸(時傑)의 손자이다. 목사(牧使)를 지냈고, 슬하에 1남을 두었다.

126)병진(丙辰): 영조 12, 1736년이다.

 

 

贈吏曹參議 趙公永命之墓 贈淑夫人 靑松沈氏 祔左

 

我仲氏諱永命字祈仲 豊壤人 高麗侍中諱孟之後 有諱希輔贈左贊成 有諱珩行禮曹判書諡忠貞 寔爲高曾祖 祖考贈左贊成諱相鼎 出後於伯父贈吏曹判書諱珉 有文行蚤世 考諱仁壽号白賁堂 薦經行官都事不仕 贈領議政豊興府院君 妣光山金氏 承旨諱萬均女 沙溪文元公諱長生玄孫也 仲氏以甲寅九月二十八日 與伯氏大諫公同胎而生 生而異凡兒 及長記性絶人 爲擧子業 藻彩燁然 而厄公車 戊子始中司馬 甲午爲寧陵參奉 歷宗廟奉事司導寺直長宗簿寺主簿義禁府都事工曹佐郞 庚子冬出爲交河縣監 越二年壬寅四月十八日 遇暴疾卒於官次 得年四十九 嗚呼痛矣 仲氏寬裕順善 愛人好施 事親有至性 處昆弟無一分物我心 吉凶緩急 輒出力辦具 待人不設畦畛 尤篤於親舊 居官不喜苛摘 而吏民畏其公廉 始葬于交 交之人赴役者或哭之涕出 於此可以見其政之一端矣 嗚呼 以仲氏之才之器 値門闌亨運 沉頓下僚 堇試於一小縣而止 何其命之窮也 戊申贈吏曹參議 以仲子載博參奮武原從勳也 配贈淑夫人靑松沈氏 社稷令若潢之女 廣州府尹捴之孫 處妯娌得歡心 幹貧窶不使君子知有無 先以癸巳四月十七日歿 權葬于楊州海等村先坣側 至庚戌八月二十四日 同時移奉 合窆於春川東面艾幕洞先山丁向之原 有三男二女 長載極早夭 娶判官朴弼敎女生二子二女 載博府使 娶士人李希稷女生一女 載億生員娶參奉李壽鼎女生一男 側出男載白幼 女長士人尹得庚妻有一子 次生員金履遠妻有一子

叔弟 左議政 豊陵府院君 文命撰

季弟 吏曹判書 顯命書

崇禎紀元後 再丙辰 八月 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