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의 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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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헌(申櫶) 묘비명(墓碑銘)

상세정보

◆ 번역문

보국숭록대부 판중추부사 겸 병조판서인 평산 신공의 무덤(부인 정경부인 기계유씨는 왼쪽에 합장)

 

부군의 휘는 헌(), 자는 국빈(國賓), 초명은 관호(觀浩), 호는 위당(威堂)이다. 평산신씨는 고려 태사 장절공 휘 숭겸(崇謙)의 후손이다. 우리 조선 세종조에 휘 개()는 관직이 좌의정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희(文僖)이다. 이때부터 이조판서를 지낸 문절공(文節公) 휘 상(), 병조판서를 지낸 평천부원군(平川府院君) 휘 잡()과 같은 분이 있어, 문신과 무신으로 이름을 날려 역사서에 끊이지 않고 기록되었다. 휘 한장(漢章)인 분에 이르러 처음에는 무신으로 숙종을 섬겨 부총관의 관직으로 세상을 마쳤으니, 부군에게는 5대조이다. 증조는 휘 대준(大儁)으로 방어사로 세상을 마쳐 병조참판에 추증되었고, 조부는 휘 홍주(鴻周)로 순조를 섬겨 공훈과 명망이 있었다. 훈련대장으로 세상을 마쳤는데, 지금 임금[高宗] 병인년(1866)에 특별히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부친은 휘 의직(義直)인데 부사로 세상을 마쳤고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모친은 해평윤씨인 수사 휘 이동(頤東)의 따님이다. 계비(繼妣)는 순천김씨로 사인인 휘 우명(宇明)의 따님인데, 부군이 존귀한 지위에 올라 전 부인과 함께 정경부인에 추증되었다.

처음 훈장공(訓將公: 申鴻周)이 영변에 부임하였을 때 묘향산에 기도를 드리고 여러 스님들이 큰 대들보를 끌고 문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윤부인이 임신을 하게 되었고, 순조 신미년(1811) 325일에 공을 낳았다.198)

공은 어려서부터 점잖고 중후하여 평범하지 않았는데, 노비들을 관리하면서 은혜와 위엄을 함께 펼쳤다. 정해진 공부를 부지런히 하면서 놀거나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훈장공이 큰 그릇이 될 것이라 매우 기대하였다. 성동(成童)도 되기 전에 부친과 모친의 상을 아울러 만났다. 정해년(1827) 세자인 익종(翼宗)이 대리청정(代理聽政)할 때 별군직에 차출되었고, 곧 사제(賜第)199)하여 훈련원주부로 승진하였다. 기축년(1829)에 훈련공의 상을 당하여 승중(承重)200)하고 상을 마치자 선전관에 서용되었다. 헌종 을미년(1835)에 외직으로 나가 중화부사가 되었다. 좌임(左任)하는 4년동안 전부(田簿)를 정리하여 바로잡는 등 명성과 업적이 매우 현저하였다. 훈련원정으로 불러들이고 절충장군으로 승진하여 경기중군이 되었다. 경자년(1840)에 성진첨사에 제수되어 성곽과 관아를 크게 수리하면서 자신의 녹봉을 덜어내어 보태도 부족하자 차고 있던 주영(珠纓)을 팔아서 보태기도 하였다. 계묘년(1843)에 승정원 동부승지에 제수되었고, 외직으로 나가 전라우수사가 되었다. 직접 무사들을 거느리며 봄가을로 훈련을 시켰고, 별도로 재주를 견주는 시험을 실시하여 상금을 내걸어 장려하니 사람들이 모두 흥기하여 수년 사이에 섬과 육지에서 활을 잡는 선비가 매우 많았다. 또 육영재(育英齋)를 만들어 근처 마을에서 재주가 있는 아이들을 선발하고 스승을 초빙하여 그들을 가르쳤다. 달마다 곡식을 내리고 날마다 시험을 실시하니 성취하는 자가 매우 많았다. 병오년(1846)에 봉산군수에 제수되었다. 계사년(1893)에 임금이 고을을 다스리는 일을 물으시면서 마땅히 읽어야 한다면 어느 책이 좋겠냐고 동시에 물으셨다. 그러자 대답하기를, 대학(大學)의 장구(章句)만한 것이 없습니다. 만약 또 거기에다 연의(衍義)를 참조하신다면 제왕이 나라를 다스리는 학문에 큰 도움이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임금이 또 병법서로는 마땅히 어떤 것을 먼저 해야 하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대답하기를, 손자(孫子), 오기(吳起), 위료자(尉繚子) 아래로 대대로 저술한 책이 있습니다. 그러나 무릇 모두 권모술수와 임기응변이 섞여 있어 마음에 해를 끼칩니다. 전하의 성스러움으로 어찌 이런 책에서 취할 것이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임금이 좋다고 칭찬을 하였다.

무신년(1848)에 전라병사로 옮겼는데, 친혐(親嫌)을 이유로 벼슬자리를 내놓고 물러났다. 임금이 친히 시험을 보고 특별히 가선대부로 승진시켰고, 곧바로 불초자를 사제(賜第)하라는 명이 있었다. 부군이 부자가 같은 날 임금의 은총을 입는 것은 이미 지나치게 성대하다는 두려움이 있는 데다가, 관작을 쉽게 내려주는 것도 또한 국정에 손해를 끼친다고 무릎을 꿇고 아뢰며 관직에서 물러날 것을 간절하게 요구함이 그치지 않았다. 이에 임금이 가상히 여겨 동지중추부사 도총부부총관을 역임하는 데서 그쳤다. 기유년(1849)에 금위대장을 제수하니, 무신이 나이 40이 되기 전에 대장의 지위에 오른 것은 근세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 해 헌종이 승하하였다. 처음에 임금이 부군을 살펴보니 충성스럽고 근엄하여 큰 일을 맡길만하였다. 무신년 이래로 이틀에 한번씩 불러 볼 정도로 사랑과 대우가 특별히 융성하였다. 이때 임금에게는 아직 후사가 없었고, 중전에게 행차함도 드물었다. 일찍이 남모르게 부군에게 어찌하면 아들을 그대와 같이 얻을 수 있겠소?라고 물으면서 스스로 애통해하고 탄식하였다. 부군이 어찌할 줄 모르며 신에게 아들이 많은 것은 다른 방법이 아닙니다. 규문 안에 화목한 기운이 있을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은밀하게 임금을 풍자한 것인데 임금이 감동하는 빛이 있었다. 며칠 후에 경이 말한 바를 내가 깊이 생각해 보았소.라고 하고 즉시 국구(國舅)와 장임(將任)을 제수하였다. 또 일찍이 효문공(孝文公) 윤정현(尹定鉉)과 함께 입시하였을 때, 임금의 말이 군제(軍制)에 이르렀다. 이때 새롭게 총위영(總衛營)을 신설하여 이미 몇 년이 지난 상태였는데, 병기(兵騎)가 근심거리였다. 부군이 윤공과 함께 은밀하게 당나라와 송나라의 위병(衛兵)과 명나라의 12단영(團營)은 사용하기에 족하지 않다고 아뢰었다. 마침 난동의 불씨가 되자 임금이 지금 총위영을 말하는 것인가? 장차 경을 위해 그를 파직시키겠다.라고 하였다.

임금이 공을 믿고 의지함이 이와 같았으나 사람들도 또한 이 일로 인해 공을 시기하여, 철종 초기에 마침내 녹도(鹿島)로 유배되었다. 외딴 바닷가에서 열병을 일으키는 독한 기운을 쐬면서도 태연하게 살아가며, 날마다 경전과 서화로 스스로 즐겼다. 계축년(1853)에 감형하여 무주(茂朱)로 이배되었다가 정사년(1857)에 유배에서 풀려났다. 계모(繼母)의 상을 당하여 상을 치르고 나서 좌승지에 서용되었고 병조참판, 한성좌윤에 누차로 제수되었다. 경신년(1860)에 우포장이 되었고, 신유년(1861)에 통제사에 제수되어 무기와 전함 및 성첩과 관아를 크게 수리하였다. 임술년(1862)에 자헌대부로 승진하여 도총관, 형조판서를 역임하였다. 계해년(1863)에 한성판윤, 공조판서를 역임하다 다시 우포장이 되었다. 지금 임금[高宗] 갑자년(1864)에 병조판서에 제수되었고, 정헌대부로 승진하였다. 을축년(1865)에 지중추부사를 역임하고 숭정대부로 승진하여 판의금부사가 되었다. 병인년(1866)에 총융사에 제수되고 경복궁영건당상에 차출되었다. 9월에 프랑스 군대가 강화도로 쳐들어오자 임금이 부군에게 명하여 경병(京兵)을 거느리고 양화도(楊花渡)에 주둔하며 내외에서 상황에 대응하게 하였다. 주둔하는 40여일 동안 갑옷을 벗지 않고 군인과 아전을 엄하게 다스려 추호라도 백성에게 해를 끼치지 못하게 하였다. 병사들과 동고동락을 같이 하니 □□□□ 오강(五江)201)의 사이에 스스로 찾아오는 자가 날마다 많았고, 피난 갔던 자들이 다시 돌아와 경성은 공의 힘으로 인해 평온해졌다. 프랑스 군대가 물러가자 조정으로 돌아와 의금부 좌참찬에 제수되었다. 훈련대장에 제수되고는 병략(兵略) 몇 가지를 임금에게 올렸다. 그것의 시행은 훈국의 군제를 변통한 것 뿐인 데도 군대의 위용이 더욱 성대해졌다. 또 훈국에서 비용의 정도가 넉넉하지 못하여 항상 임시로 추렴하여 마련하였는데, 이에 승호(陞戶)202)의 자장전(資裝錢)을 취하여 각각의 초()에게 나누어 주고 이자를 취하여 쓰게 하였다. 또 군인의 봉급이 부족한 것은 별고(別庫)의 남은 쌀을 떼어다가 속영(屬營)한 것 700백석으로 그것을 유지하였다. 그러자 모든 군대가 기뻐 떠들썩하였다. 정묘년(1867)에 임금을 수행하며 남한산성을 지나다가 마반거(磨盤車)를 제작하여 대포를 시험하였고, 돌아오다 강에 이르러서는 수뢰포(水雷砲) 2기를 시험하였는데, 모두 부군이 방도설(仿圖說)로 스스로 제작한 것이었다. 그 포상으로 숭록대부로 승진하여 지삼군부가 되었다. 무진년(1868)에 보국으로 승진하여 판삼군부사가 되었다.

훈련도감에 근무한지 무릇 6년이 되어 신미년(1871)에 이르러서야 병권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늙어 관직에서 물러날 것을 청하여 과천에서 1년여를 살다가 다시 관직에 나아가 계유년(1873)에 판중추부사가 되었고, 갑술년(1874)에 진무사겸강화유수에 제수되어, 연해포대 50여 곳을 만들었다. 곧바로 체직되었다가 을해년(1875)에 어영대장에 제수되었다. 병자년(1876)에 일본 판리대신 구로다 기요다카(黑田淸隆) 등이 군함 10여척을 거느리고 풍도(楓島) 앞바다에 정박하고서는 우리 대신을 만날 것을 요구하였다. 조정에서 의견은 모두 부군에게 향하니 드디어 판부사로 대관에 임명되어 강화에서 만나 조약을 체결하였다. 다시 명을 받아 무위도통사에 제수되었다. 정축년(1877)에 총융사로 바뀌어 한국(閑局)203)에 취임하였다가, 무인년(1878)에 병을 이유로 사직하고 서울을 벗어나 노호(鷺湖)의 은휴정(恩休亭)에 거처하였다. 은휴(恩休)라고 한 것은 성상이 하사한 이름에서 취한 것이다. 임오년(1882)에 경리통리기무아문사를 맡았는데, 이때 청나라 북양대신인 이홍장(李鴻章)이 수사 제독 정여창(丁汝昌)과 관찰 마건충(馬建忠) 등을 보내 미국 대사인 슈펠트(Shufeldt, R.W., 薛斐爾)를 인도하여 와서 강화를 청하였다. 이때 부군은 또 전권대신으로 인천에 가서 약조를 맺고 돌아왔다.

7월에 불초자가 섬으로 유배를 가서 1년여를 지냈는데, 부군은 이때 진천의 시골집에 거처하였다. 갑신년(1884) 10월에 난리[甲申政變]가 터지자 부군은 병든 몸을 애써 일으켜 대궐로 찾아가 임금의 문후를 여쭈었다. 임금이 위로하고 보냈는데 집으로 돌아와 병으로 세상을 마치니 1210일이었고, 향년 74세였다.

병이 위독해지자 집안사람들에게 상을 치르면서 불가의 방법은 이용하지 말라고 훈계하였고, 불초자에게 편지를 보내 충성과 의리에 힘쓰라고 하였다. 돌아가시는 날엔 집안과 관련된 일은 한 마디도 하지 않으시고, 단지 지금 국가의 위태로움은 철류(綴旒)204)와 같다. 장차 내가 죽으면 지하에서 어떻게 선왕을 뵙겠는가.라고 하였다. 관을 똑바르게 하고 단정하게 앉아 삶을 마쳤다. 부고가 전해지자 임금이 애통해하고 안타까워하며 예법에 맞게 물품을 하사하였다. 그 다음해 224일 춘천의 유점(鍮店) 계좌 언덕에 장사지냈다.

배위는 정경부인인 기계유씨로 돈녕도정 휘 준환(駿煥)의 따님인데 아들 셋을 낳았다. 장자는 불초자 정희(正熙)로 전 공조판서이다. 둘째 석희(奭熙)와 낙희(樂熙)는 쌍둥이이다. 석희는 전 판윤이고, 낙희는 수사이다. 측실에게 아들 찬희(贊熙)를 낳았는데 지금 군수이다.

부군은 도량이 크고 마음이 넓었으며 중후하였다. 평소 남의 잘못을 말한 적이 없으며, 또한 남의 과실을 지적하지도 않았다. □□ 밝았으며, 일을 처리함은 삼가고 조심하였다. 무릇 백성이나 나라와 관련된 일들은 반드시 그것의 이로움과 해로움, 옳고 그름을 살피고 이치에 맞게 판단하면서 구차하게 임의대로 하여 명성을 구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런 까닭에 조정에 근무한 지 50년 동안 은혜와 혜택이 백성에게 이른 것이 실제로 많았다.

의붓어머니를 섬기면서도 효성을 다해 병간호를 하면서 필요한 약은 반드시 손수 다려서 올렸고, 추운 밤이면 잠자리를 봐주면서 간혹 직접 몸으로 따뜻하게 데우기도 하였다. 곤궁하고 가난한 자와 결혼에 때를 놓친 자를 보면 그들을 위해 힘을 써서 두루 구제해 주고 나서야 마음속으로 편안함을 느꼈다. 남을 포용하는 도량을 지녀 집에 두 명의 노비가 있었는데, 하나는 완고하고 어리석었고, 나머지 하나는 경박하고 신중하지 못하였지만, 그들을 30년 동안 데리고 있으면서 바꾸지 않고, 사람에게 모든 일을 완전하게 갖추어 다 잘하기를 요구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런 마음으로 병사들을 다스리니 병사들은 기꺼이 일을 맡았고, 이런 마음으로 멀리 사람들을 사귀니 사람마다 모두 믿고 복종하였다. 자신을 치장하는 일에는 검소하여 그가 입고 있는 옷은 임금을 가까이 할 때를 제외하고는 모두 빨거나 기워서 입었다. 엄숙한 것은 빈한한 선비와 같았으나 자태와 용모는 풍성하고 기걸차서 그를 바라보면 천만인을 눌러버릴 듯한 기세가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 다가가 그의 말을 들으면 또 온화하여 친근해할만 하였다.

시문을 지은 것은 충담(沖淡)하면서도 넉넉하였는데, 집에서 소장하고 있는 위당집(威堂集) 약간 권이 남아 있다. 서법(書法)에서는 더욱 뛰어나다고 칭송을 받았다. 어려서부터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구제하는 데 뜻을 두어 항상 공부하고 세상을 다스리지 못한다면 배우지 않은 것만 못하다. 차라리 재주나 기술 하나를 배워 사람들에게 이로움을 주는 것이 더 좋다.라고 하였다. 본성의 근원을 찾아 들어가 연구하고 특히 역전(易傳)을 좋아하여 그것을 읽으며 죽을 때까지 그만 두지 않았다. 유배를 가 섬에 있을 때 더욱 마음을 집중하여 연구하여 주역수필(周易隨筆) 3권을 저술한 것이 있는데, 이것은 실제로 부군이 평생 동안 마음과 정신을 다 쏟은 것이다.

부군이 손을 댄 사업의 근원은 불초자와 같이 좁고 비루한 자는 다 헤아릴 수 없는 것이 있다. 또 불초자의 분수를 마음속으로 헤아려보니 오랫동안 남해 한가운데 빠져 있다가 다행히도 성상께서 살아가게 해주신 사랑을 받아 돌아와 초야의 사이에서 먹을 것을 봉양할 수 있게 되었으니, 많은 날의 즐거움으로 한 때의 슬픔을 거의 잊을 수 있었다. 그로부터 며칠도 채 안되어 부군이 또 나라에 난리가 발생했다는 소식을 듣고 대궐로 나아가 다시 관직에 임용되었는데, 이 때 부군이 병에 걸린 지가 이미 여러 날 되었다. 그러나 임금의 은혜가 깊고 나라의 일이 심각하여 돌아갈 것을 아뢸 수가 없었다. 이미 공적인 일에 이로움을 행할 수도 없고 또 물러나 사사로운 희망을 이룰 수도 없는 상태에서 하늘이 그의 혼백을 뺏어가는데도 어지럽고 어두워 고꾸라져서 드디어 미치지 못하게 되니, 이것은 또 불초자가 부군의 교훈을 크게 저버린 것이라 거듭 죄를 짓게 되어 천지에 용납되지 못할 것인데도 스스로 반성할 수도 없었다. 몸이 찢어지는 듯한 슬픔이 어찌 끝이 있겠는가. 지극히 어리석고 완고함은 이와 같이 아는 바도 없는데 감히 부군의 마음속 생각을 백대의 후세까지 밝히려고 하니 또한 너무 먼 것이 아닌가. 아아! 슬프도다.

불초자 아들 정희(正熙)가 피눈물을 흘리며 삼가 짓고,

둘째 아들 석희(奭熙)가 존경하며 쓴다. 

 

 

198)현재 대부분의 기록물에서 신헌의 생년을 1810(순조 10)년으로 기록하였는데, 아들이 쓴 이 비명과 차이가 있으므로 확인이 필요하다..

199)사제(賜第) : 임금의 명령으로 특별히 급제한 사람과 똑같은 자격을 주는 것을 말한다.

200)승중(承重) :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모두 여읜 사람이 조부와 증조부를 잇는 제도를 말한다.

​201)오강(五江) : 서울 근처에 중요한 나루가 있던 한강(漢江), 용산(龍山), 마포(麻浦), 현호(玄湖), 서강(西江)의 다섯 군데의 강가 마을을 말한다.

202)승호(陞戶)의 자장전(資裝錢) : 천민(賤民)의 신분을 가진 이를 서울 및 각 지방에서 선발하여 양인으로 승격시켜 훈련도감(訓鍊都監)의 정군(正軍)으로 삼는 것을 승호라고 하며, 이 군대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비용을 자장전이라 한다.

203)한국(閑局) : 실무가 없는 한가한 관부(官府)를 말한다. 

204) 철류(綴旒) : ()는 관() 위에 매단 장식인데, 국가의 위태함이 철류(綴旒)와 같다는 것은 국가가 위태로운 것이 유가 관에 매달린 듯함을 비유하는 말이다.

◆ ​원문

輔國崇祿大夫 判中樞府事 兼兵曹判書 平山申公之墓 (配貞敬夫人杞溪兪氏祔左)

府君諱櫶, 字國賓, 初諱觀浩, 號威堂, 平山申氏, 高麗太師 壯節公 諱崇謙之後也. 在我世宗時, 有諱槪, 官至左議政, 諡文僖. 自是以來, 有若吏曹判書 文節公 諱錦若, 兵曹判書 平川府院君 諱. 文武勳名 史不絶書. 至諱漢章, 始以騎射, 事肅宗, 從副摠管, 於府君爲五世祖. 曾祖諱大儁, 終防禦使, 贈兵曹參判, 祖諱鴻周, 事純祖有勳, 終訓練大將, 今上丙寅 特贈左贊成, 考諱義直, 終府使, 贈左贊成, 妣海平尹氏, 水使 諱頤東女. 繼妣順川金氏, 士人諱宇明女. 並贈貞敬夫人, 以府君之貴也. 始訓將公任寧邊, 禱于妙香山, 夢衆僧大樑入門, 未幾尹夫人有辰. 以純祖 辛未 閏三月二十五日 生公. 幼凝重不凡, 指揮僮僕, 恩威幷行, 勤課業, 不好戱遊. 訓將公器之, 未成童 並遭內外艱. 丁亥 翼宗代理, 差別軍職, 尋賜第, 陞訓練院主簿. 己丑 遭訓練公喪, 承重. 服闋, 敍宣傳官. 憲宗乙未 出爲中和府使. 左任四年, 裁正田簿, 聲績甚著. 以訓練院正 召入, 陞折衝 京畿中軍. 庚子 除城津僉使, 大修城廨, 捐廩而不足, 至賣所服珠纓 以繼之. 癸卯 拜承政院同副承旨, 出爲全羅右水使, 窮率武士, 習射春秋. 別設轎試, 懸賞以奬之, 人皆興起, 數年間, 島陸控弦之士甚多. 又搆育英齋, 選近邑冠童有才者, 邀師以敎之, 月有廩 日有試, 成就者亦多. 丙午 除鳳山郡守, 癸巳, 上引詢邑事, 因問當讀何書爲善? 對曰: 無如大學章句, 若又參以衍義, 則大有益於帝王治平之學. 上又曰: 兵流當先何? 對曰: 自孫吳尉繚以下, 代有所著, 然大抵皆雜以權數, 有害心術, 以殿下之聖, 何足取於此乎. 上稱善. 戊申 遷全羅兵使, 以嫌避辭遁. 上因親試射, 特陞嘉善, 仍有賜第. 不肖之命, 府君跪陳父子同日蒙恩, 旣有盈盛之懼, 輕用爵祿, 亦損國政. 乞懇不已. 上嘉之, 歷同知中樞府事 都摠府副摠管. 己酉 配禁衛大將. 武臣之年未四十而登壇, 近世未所有也. 是歲憲宗升遐. 初上察府君忠謹可大用, 自戊申以來, 間日召見, 眷遇特隆. 時上未有嗣, 而罕御正壺, 嘗從容語府君曰: 何如得男子, 可如卿乎, 因自傷歎. 府君蹙然告曰: 臣之多男, 無他道. 有閨門之內, 有和氣而已. 此陰風之上, 有感動之色. 後數日 謂曰: 卿所言, 吾思之深矣. 卽授國舅 將任. 又嘗與尹孝文公定鉉, 同入侍, 上語及軍制, 時新設總衛營 已數年, 兵騎爲患. 府君因與尹公, 微陳唐宋之衛兵, 明之十二團營 不足爲用, 適爲亂階. : 謂今總衛耶, 行將爲卿罷之, 其見注倚如此, 而人亦以此忌之. 哲宗初, 竟竄鹿島, 絶海炎瘴, 處之泰然. 惟日以經籍書畵自娛. 癸丑 量移茂朱, 丁巳 宥還. 丁繼妣憂, 服闋, 敍左承旨 屢拜兵曹參判 漢城左尹. 庚申 爲右捕將. 辛酉 除統制使, 大修器械舟艦 城堞廨舍. 壬戌 擢資憲, 都摠管 刑曹判書. 癸亥 漢城判尹 工曹判書 復爲右捕將. 今上甲子 拜兵曹判書 陞正憲. 乙丑 知中樞府事 陞崇政 判義禁府事. 丙寅 授摠戎使, 差景福宮營建堂上. 九月法人寇江華, 上命府君 率京兵, 駐楊花渡, 策應內外, 在陣四十餘日, 不解甲. 嚴飭軍吏, 勿得秋毫犯民, 與士卒同甘苦. □□□□ 五江之間, 自赴者日衆, 避難者復歸, 京城賴安, 寇退還朝, 拜義禁府左參贊, 授訓練大將. 陳兵略數事, 其施行者, 惟訓局軍制變通, 而軍容增盛, 又以本局用度不敷, 常臨時醵辦, 乃取陞戶資裝錢, 分給各哨, 使取息以用. 又以軍料不足, 割別庫剩米, 屬營者七百石以支之, 一軍懽震. 丁卯 隨駕歷南漢. 以磨盤車 試大砲, 回至江, 試水雷砲二器. 皆府君仿圖說 自製者也. 褒陞崇祿, 知三軍府, 戊辰 陞輔國, 判三軍府事, 居訓局 凡六年. 至辛未 乃得解兵柄, 乞老, 居果川歲餘. 癸酉 判中樞府事, 甲戌 除鎭武使兼江華留守, 創設沿海砲臺五十餘所, 尋遞. 乙亥 拜禦營大將. 丙子, 日本辦理大臣黑田淸隆等, 領兵船十餘艘來泊楓島前洋, 要見我大臣, 朝議咸屬府君. 遂以判府事, 充大官, 會于江華, 與定條約, 復命, 授武衛都統使, 丁丑 授摠戎使, 就閑局也. 戊寅 以兵辭, 出居鷺湖之恩休亭, 恩休者, 聖上取賜名也. 壬午 任經理統理機務衙門事. 時淸北洋大臣李鴻章, 遣水使提督丁汝昌 觀察馬建忠等, 導美使薛斐爾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