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의 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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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백록(韓百祿) 묘갈명(墓碣銘)

상세정보
  증병조판서 행부산첨사 한공묘갈명(贈兵曹判書 行釜山僉使 韓公墓碣銘)
  옛날 섬 오랑캐의 난리가 있자, 천곡 송상현과 충장 정발이 가장 먼저 흉악한 적과 싸워 의를 잡고서 죽음에 이르자, 성명이 지금도 밝고 훤하게 드러나고 있다. 그리고 한백록 공이 충장 정발을 이어 부산진을 제수받아 동시에 순절하니, 그 어려운 가운데 죽음으로 이루어낸 충만큼은 충장 정발에게 조금도 뒤지지 않으나 이름이 인멸하여 일컬어지지 않은지 오래되었다.
  숭정(崇禎) 무진(戊辰:1628년) 인조께서 비로소 공의 충의를 가상히 여겨 특별히 가선대부 병조참판으로 증직하였고, 영조 신미에 또 정려를 명하셨다. 지금 순조 정묘(丁卯:1807년)에 본도의 유생이 상소하여 다시 관직을 올리고 시호 내리시기를 청하자, 일이 예조로 내려오고 예조에서 이전에 이미 증직을 내렸으니 그렇게 하지 말도록 아뢰었다. 임금께서 특명으로 자헌대부병조판서(資憲大夫兵曹判書)로 증직을 더하여 베풀기를 허락하시니 아마도 특별한 전례였다.
  공의 후손 준유(濬裕)가 대종백(大宗伯) 오재소(吳載紹) 공의 시호를 청한 장계를 가지고 와서 묘비의 글을 청하였다. 내가 이미 공의 충렬(忠烈)에 감개하여 늙음을 핑계로 글 짓는 일을 그만둘 수 없었다. 마침내 장계를 살펴보고 쓴다.
  공(公)의 자는 수지(綏之)이시며 청주에서 이어져 나왔다. 시조는 휘가 난(蘭)인 분으로 고려 태조를 도와 삼한을 통합한 벽상공신(壁上功臣)으로 관은 태위(太尉)이시며 시호는 위양(威襄)이시다. 그 뒤로 휘가 후(侯)이신 분이 있으시니, 벼슬이 태재(太宰)에 이르셨으며 공(功)이 있어 평산백(平山伯)에 봉하여지셨다. 8세(世)를 지나서 휘가 철충(哲冲)이신 분이 있으시니, 벼슬이 전법판서(典法判書)이셨으며 호(號)가 몽계(夢溪)이시다. 고려말 상주(尙州)에 은거하시니 이분이 공(公)의 6대조(祖)이시다.
  본조(本朝)에 휘가 계사(繼思)이신 분이 있으시니 벼슬이 감찰(監察)이셨다. 감찰(監察)께서 휘가 근(瑾)인 분을 낳으시니 벼슬이 참봉(參奉)이셨으며, 참봉께서 휘가 경인(敬仁)이신 분을 낳으셨다. 경인께서 휘가 굉(硡)인 분을 낳으시니 공(公)이 그 분의 장자(長子)이시다.
  공(公)은 가정(嘉靖) 을묘(乙卯:1555년)에 춘주(春州:春川) 당산리(棠山里) 집에서 태어나셨다. 어려서부터 그릇됨이 아주 크셨으며 타고난 재질이 영오(穎悟)하시어서, 경전(經傳)과 자사(子史)를 한번 눈으로 살펴보고서는 바로 해득하셨다. 장성하시어서는 뜻과 기상이 무리에서 뛰어났으며 담대함과 지략은 보통 사람을 넘어섰다. 손자와 오자의 병법(兵法)을 아주 좋아하시어 분연히 국가를 위하여 일면을 감당하려는 뜻이 있었다. 일찍이 “우리집안은 선세(先世)로부터 유자(儒者)의 업(業)을 닦아왔으나, 대장부로 이 세상에 태어나 저 반정원(班定遠:반초(班超) 후한의 명장. 자는 중승(仲升). 반고(班固)의 아우. 명제(明帝) 때 서역(西域) 제국이 후한(後漢)을 배반하였을 때 출정하여 서역 50여 국을 평정하고 그 공으로 서역도호(西域都護)가 되고 정원후(定遠侯)로 봉후(封侯) 되었음)이 붓을 던졌으며 마복파((馬伏波):마원(馬援). 후한의 정치가. 처음에는 외효(隗虈)를 따르다가 광무제(光武帝)에게 사관(仕官)하여 복파장군(伏波將軍)이 됨)가 전장에서 죽었으나, 또한 작은 일이라 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시었다. 그리고는 활을 잡고 얼마 안 되어, 선조 임금 때에 알성과(謁聖科)에 등과(登科)하시니 그때 나이가 스물 여섯이셨다.
  곧바로 진잠현감(鎭岑縣監)을 제수 받으시고, 정성과 온 힘을 다하시었다. 병무(兵務)에는 더욱 힘을 쏟아 다스리며 군졸을 조련(操練)하는 일을 급선무로 하시었다.
  그 때에 사신 갔던 황윤길(黃允吉)과 김성일(金誠一)이 일본(日本) 적의 정황을 탐색하고 돌아오자, 조야(朝野)에 우려와 두려움이 일었다. 공(公)께서 재간(才幹)과 용맹함으로 선발되어, 공(公)은 지세포만호(知世浦萬戶)에 제수되었다. 공(公)은 임지에 도착하자마자 병사들을 훈련시켜 언제 일어날지 모를 전쟁에 대비하시었다.
  과연 임진년 4월에 왜적이 마도(馬島)로부터 곧바로 포구(浦口)로 들이닥쳤다. 공은 전영장으로서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의 휘하에 소속되어 여러 장수들과 함께 판옥선(板屋船)을 타고 거제도(巨濟島) 송미포(松味浦) 앞 바다에 이르렀다. 적선 오십 여척이 사면에서 포위하여 버티고 있었고 바람을 타고 불길이 따라와 대적(對敵)할 수 없는 형세였다. 공(公)이 홀로 군중(軍中)에서 분발하여 힘을 다해 싸우며 죽기를 맹세하고 세 번을 적의 배와 접전(接戰)하였다. 갑자기 번개로 쓸어내고 천둥같이 쳐서 적의 큰 배 수척을 깨어 부수니 적은 곧 궤멸되어 흩어졌다.
  원수(元帥)가 조정에 알렸다. 이때에 부산의 정발(鄭撥) 공(公)이 전장에서 사망하여 진영을 이끌어나갈 장군이 없자, 특별히 관직을 높여 공(公)을 부산첨사(釜山僉使)로 삼았다. 공(公:鄭撥)이 패망한 후에 진영에 남아있는 패졸(敗卒) 천여 명을 수습하여, 오로지 충의(忠義)로 사람을 격동시켜 싸움에서 세 번을 이기니 군대의 사기가 크게 진작되었다. 7월 17일 또 다시 왜적과 미조항(彌助項)에서 전투가 벌어지자, 공(公)은 몸을 가벼이 하며 죽기를 각오하시고 진격하여 적선을 치셨다. 종일토록 칼을 휘두르시고 담력과 기백은 더욱 굳세시니 적이 전패하여 달아나려 하였다. 공이 갑자기 날아든 유탄을 맞아 기운이 끊어져 내렸으나 오히려 몸을 세워 왜적을 쫓으라는 모양을 세 번 보이시고 나서야 운명하시니 나이 서른 여덟이셨다.
  노복(奴僕) 득충(得忠)이 공(公)을 좇아 군영에 있었는데, 시체 더미에서 공(公)의 시신을 수습하였다. 시기가 가장 더운 때였으나 공(公)의 얼굴 모습은 꿋꿋한 모습 그대로여서 마치 살아있는 듯하였다. 춘천(春川) 관음동(觀音洞) 선영(先塋) 임(壬) 방향의 언덕 선영에 반장하였다. 남쪽 지방 사람들은 공(公)이 싸우다 돌아가신 곳에 단을 쌓고 희생을 잡아 제사지내고 있으며 지금도 폐하지 않았다고 전한다.
  조정에서 공에게 선무(宣武) 이등의 철권(鐵券)을 내리셨다. 부인 창녕(昌寧) 성씨는 상곡(桑谷)의 칠대손이고 경재(敬齋) 근(近)의 손녀로 부덕(婦德)이 있으셨다.
  장남 우천(佑天)은 무과도사(武科都事)로 품계가 절충(折衝)이다. 네 명의 자식을 두었으니, 태일(泰一) 형일(亨一)은 수직첨추(壽職僉樞:수직은 해마다 정월에 80세 이상의 관원 및 90세 이상의 백성에게 은전으로 주는 벼슬)를 지냈으며 홍일(弘一) 처일(處一)이 있다. 따님은 한 분으로 홍석주(洪錫周)에게 시집갔다.
  공은 천륜(天倫)에 돈독하시어 부모님을 섬기고 동생을 아끼는 일이 모두 그 마땅함을 얻으니 가정 안이 조화로운 기운으로 잘 융화되었다. 몸을 세워 벼슬길에 나아가 정성을 다하여 직분을 수행하였고 전쟁을 당하여서는 여러 차례 적의 예봉을 꺾었으나, 갑자기 날아든 탄환에 맞아 바다에서 순절하시니, 마침내 이루어 놓은 일이 충무공 이순신과 더불어 같다고 귀결되니 오호 장렬하도다!
  내가 이미 행장에 근거하고 그 가문 세계(世系)의 이어짐과 순절의 본말에 대해 가려 뽑아 썼다. 그것에 이어서 명(銘)을 짓는다.
  예전 임진년에 왜국 도적의 속셈을 헤아리지 못하였다. 송상현 정발 장군이 처음 맞아 싸워 의로써 죽음에 이르셨다. 공이 분연히 보루를 지키시어 악독한 적의 예봉을 막으셨다. 불꽃의 탄환이 갑옷을 뚫어 운명하시니 충을 온전히 하시었다. 예로부터 죽음이 있어도 값진 죽음 얻기는 어렵구나. 남쪽 사람 돌아가신 곳에 제를 올리니 남기신 자취는 없어지지 않으리라. 춘천의 산기슭 자그마한 봉분에 누우셨다. 내 명(銘)을 지어 후세에 알리니 영원토록 없어지지 않으리라.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전임(前任) 좌의정(左議政) 치사(致仕) 봉조하(奉朝賀) 이경일(李敬一) 짓다.

 

  贈兵曹判書 行釜山僉使 韓公墓碣銘
  在昔島酋之訌 宋泉谷鄭忠壯 首當凶鋒 秉義立殣 聲名至今炳烺 而韓公百祿繼忠壯授釜鎭 同時殉節 其死難之忠 媲忠壯無差殊間 而名湮滅不稱者久矣 崇禎戊辰仁廟 始嘉公忠義 特贈嘉善大夫兵曹參判 英廟辛未 又命旌閭 當宁丁卯 本道章甫上言 更請增秩賜諡 事下該曺 該曺以前旣貤贈防啓 自上特命許施加贈資憲大夫兵曹判書 盖殊典也 公之後孫濬裕 持大宗伯吳公載紹請諡之狀 來請賁隧之文 余旣感公忠烈 不可以老廢筆硏辭 遂按狀曰 公字綏之 系出淸州 始祖諱蘭 佐高麗太祖 爲統合三韓 壁上功臣 官太尉 諡威襄 本朝有諱繼思官監察 監察生諱瑾 官參奉 參奉生諱敬仁 敬仁生諱硡 公其長子也
  公以嘉靖乙卯生于春州之棠山里 自幼器宇魁偉 才質穎悟 於經史一覽 輒解 及長 志氣出倫 膽略過人 好讀孫吳韜略 慨然有志於爲國家當一面 嘗曰 吾家世修儒業 然大丈夫生斯世 班定遠之投筆 馬伏波之裹革 亦不可小之也  仍操弓未幾 登宣廟朝謁聖科 時年二十六 卽拜鎭岑縣監 殫誠 尤以繕治兵仗 操練軍卒爲急 時信使黃允吉金誠一 自日本探賊情還 擧朝憂懼 公以才勇選 除知世浦萬戶 公馳到任所 卽治戎脩以待不虞 壬辰四月 倭賊果自馬島 直抵浦口 公以前營將 隸李忠武公舜臣麾下 與諸將等 同騎板屋舡 至巨濟松味浦前洋 賊舡五十餘艘 四面圍住 乘風從火 勢不可敵 公獨於軍中 奮發力鬪 以死自誓 三接賊艫 輒電掃霆擊 撞破其大舡數隻 賊仍潰散 元帥聞于朝 此時釜山自鄭公撥戰亡 鎭無主將 特命陞 公爲僉使 公收殘鎭敗卒千餘於敗亡之後 專以忠義激人  戰三捷 軍聲大振 七月十七日 又與倭賊鏖戰於彌助項 公輕身效死 進薄賊艘 終日交鋒 膽氣益壯 賊戰敗欲遁 公忽中流丸 氣垂絶猶作蹶起馳逐之狀者三而歿 享年三十有八 有奴得忠者 從公在軍 收公屍於積屍中 時當盛熱 顔貌猶凜然若生 返葬于春川觀音洞壬坐原從先兆也 南州之人設壇享牢於公戰亡處 至今不廢云 朝廷錄公宣武二等鐵券 夫人昌寧成氏 桑谷石因之七代孫 敬齋近之孫女有婦德 一男曰佑天 武科事 生四子 恭一亨一 壽職僉樞 弘一處一 一女適洪錫周 公篤於天倫 事親愛弟 咸得其宜 家庭之內 和氣瀜洽 立身從宦 殫誠盡職 及當兵燹屢挫賊鋒 猝遇飛丸 身殉海濤上 畢竟成就 與李忠武同歸 嗚呼烈哉 余旣据狀撰次其世派後承與殉節本末 係之以銘曰 昔歲龍蛇 漆齒匪茹 掎宋若鄭 義辨熊漁 公奮乘障 式遏毒鋒 焱丸泂鎧 殞身全忠 自古有死 得所實難 南民揭處 遺躅不刓 春州之麓 載封四尺 我銘詔後 永世靡泐
  大匡輔國崇祿大夫前任左議政致仕奉朝賀李敬一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