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의 유교
사이트 내 전체검색

김경직(金敬直) 묘갈명(墓碣銘)

상세정보

  사도시정 김공의 묘갈명 – 서문과 함께80)
  고려말에 김주(金澍)81)가 임금의 명을 받들고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우리 조선이 천명을 받아들여 개국하였다는 소식을 듣고는 중국에 머물고 돌아오지 않았다. 이 일은 월정(月汀) 윤공(尹公: 윤근수)이 지은 그의 전기에 수록되어 있다.82) 공은 실제로 선산부(善山府) 사람인데, 선산에서 김씨로 성을 삼은 자들은 대부분 김주를 선조로 삼는다고 한다. 김주의 7세손 구정(九鼎)은 참봉이고, 그 아들과 손자인 맹련(孟鍊) 및 광계(光啓)는 산계(散階)83)로 사과(司果)와 사직(司直)을 지냈다. 사직이 평산(平山) 신달인(申達仁)의 따님을 아내로 맞이하여 공을 낳았다.
  공은 휘가 경직(敬直)84)이고 자가 이정(而正)이다. 나이 22세인 만력(萬曆) 경인년(1590)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42세에 문과에 올라 국자감에 분관(分館)되었다가 관례에 따라 전적(典籍)으로 승진하고 외직으로 나가 은계찰방(銀溪察訪)이 되었다. 광해군의 혼란한 조정을 만나자 물러나 깊은 산중에 살면서 서울에 발길을 두지 않은 것이 7~8년 되었다.
  계해년(1623)에 인조가 반정(反正)하자 낭천현감(狼川縣監)에 제수되었다가 내직으로 들어와 병조좌랑(兵曹佐郎)이 되었다. 예안현감(禮安縣監)과 황해도도사(黃海道都事)에 제수되었으나 직무에 능하다 하여 병조에서 오래도록 유임시키고 지방관으로 보내지 않았으며, 곧 정랑(正郎)으로 승진하고 사관(史官)의 직책을 겸하였다. 한참 뒤에 외직으로 나가 영천군수(榮川郡守)가 되었다가 내직으로 들어와 성균관의 사예(司藝)와 직강(直講), 사도시의 정(正)을 역임하였고, 평양서윤(平壤庶尹)과 영해부사(寧海府使)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갑술년(1634) 12월 초하루에 별세하니, 향년 66세였다. 춘천의 오봉산(五峰山)에 있는 사직공(司直公)의 묘소 아래에 장사지냈다. 후에 증손 덕기(德基)와 손자 시헌(時獻)이 2품의 품계에 오름으로 인하여 두 번 추증되어 도승지(都承旨)에 이르렀다.
  공은 어려서부터 재주와 도량이 있었고 엄숙함이 어른과 같았다. 장성하여서는 경사(經史)에 두루 통달하였으나 『소학(小學)』을 근본으로 삼았다. 문장력이 풍부하고 언론이 강직하고 바르니, 반궁(泮宮: 성균관)에서 공부할 적에 사우들이 모두 그에게 경도되었다.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갔으나, 광해군이 군주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하여 흉악한 무리들이 죄악을 자행하는 것을 만났다. 공은 윤리강상이 무너진 것을 애통해하여 동지들과 함께 말을 하다 세상일을 언급하게 되면 개탄하고 슬퍼하여 눈물을 흘리곤 하였다. 적신(賊臣) 이이첨(李爾瞻)이 일찍이 여러 번 공을 초청하였으나 공이 만나주지 않자 진실로 앙심을 품고 있었는데, 이때에 이것을 몰래 엿보고 알아 크게 원망하였다. 이이첨은 그 무리를 사주해서 장차 엄한 법으로 얽어매려 하였으나 마침 만류하는 자가 있어 결행하지는 못하였다. 친구 중에 이이첨에게 붙은 자가 찾아와 공의 뜻을 떠보았는데, 공은 준엄히 꾸짖고 용서하지 않았다. 이때부터 서울에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여 마침내 집안 식구들을 다 데리고 춘천의 우두촌(牛頭村)으로 돌아갔는데, 우두라는 이름이 아름답지 못하다 하여 우도(憂道)로 고치고는 이어 스스로 ‘우정(憂亭)’이라 호를 지었다.
  상촌(象村) 신 문정공(申 文貞公: 신흠)이 마침 이 고을에 귀양 와 있었는데, 공이 학식과 올바른 지조를 지니고 있음을 알고는 그를 매우 소중하게 여겼다. 공에게 지어준 시에, “연원은 하내의 학문이요, 시례는 제남의 생도이다[淵源河內學 詩禮濟南生]”85)라는 구절이 있었다.
  공은 백성을 다스리는 데에 뛰어난 재주가 있어, 두 고을을 맡았을 적에 모두 훌륭한 치적이 있었다. 청음(淸陰: 김상헌) 선생이 일찍이 자주 영천(榮川)의 정사를 칭찬하였으며, 완성부원군(完城府院君) 최명길(崔鳴吉)은 전조(銓曹)의 장관이 되었을 적에, 파격적으로 공에게 고을을 제수하고는 심지어 공발해(龔渤海)86)에게 견주기까지 하였다.
  공은 가정에서의 행실이 매우 돈독하여 부모를 섬길 적에 한결같이 부모의 뜻을 따르는 것을 위주로 하였으며, 병환이 위중하자 어버이의 변을 맛보았고, 상을 당하자 슬픔을 다하고 예에 맞게 장례를 치르니, 지방 사람들이 공의 지극한 효성에 감탄하였다. 형이 별세하자 아침저녁으로 상구(喪柩) 곁을 떠나지 않고는 항상 말씀하기를, “지금 사람들은 기복(朞服)의 중함을 아는 이가 적어서 처신함에 평인과 다름이 없게 하니, 이는 거의 천륜(天倫)을 모르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조카를 가르치기를 자기 소생보다 더 열성으로 하여 마침내 뜻을 이루게 하였고, 재산을 나누어줄 적에 풍요롭고 비옥한 토지를 가려 모두 조카에게 주고 자신은 척박한 땅을 취하였다. 집안에 있을 때에도 조정의 의식과 같이 엄숙하였으며, 자제들에게 명예의 길을 멀리 피하고 삼가 가업을 지키라고 훈계하였다.
  아! 공의 어짊이 이와 같으니, 또한 어찌 반드시 옛사람에게 많이 뒤지겠는가. 좋은 시절을 만나서 여러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장려 받는 바 되어 장차 점점 등용될 듯하였다. 그러나 돌아보건대 공은 본래 벼슬하고 싶은 생각이 적어서 시골에 은둔하여 반평생을 보냈으며, 조정에 있을 적에는 문을 닫고 손님을 물리쳐서 사람들을 초청하거나 쫓아다니지 않고 오직 서책에 마음을 다하였다. 이 때문에 끝내 침체하고 전진하지 못했는데 수명이 짧아 갑자기 별세하니, 어찌 세도(世道)를 위하여 유감스럽지 않겠는가.
  배위(配位) 수원최씨(水原崔氏)는 병절교위(秉節校尉) 도(渡)의 따님으로, 4남 1녀를 낳았다. 장남은 종명(宗溟)이고, 차남은 종락(宗洛)이고, 그 다음 아들 종필(宗泌)은 문과에 급제하여 부사이고, 그 다음 아들 종연(宗沇)은 판관이며, 딸은 현령 이유수(李幼洙)에게 출가하였다. 손자 국헌(國獻)은 종락의 소생인데 종명에게 출계하였고, 중헌(重獻)은 동지중추이며, 시헌(時獻)과 만헌(萬獻)은 종필의 소생이고, 일헌(一獻)은 종연의 소생이다. 명룡(命龍)과 진사 명호(命虎)와 현령 명구(命龜)와 명린(命麟)은 이씨 사위의 소생이다. 국헌의 아들 덕항(德恒)은 문과에 급제하여 부사이고, 시헌의 아들 덕기(德基)는 문과에 급제하여 참판이며, 나머지는 모두 선비이다. 사위와 여러 외손들은 너무 많아서 다 기록하지 못한다.
  공이 별세한 지 70여 년 뒤에 춘천 사람들은 향선생(鄕先生)을 사(社)에 제사하는 의리87)에 따라 공을 장절(壯節) 신공(申公: 신숭겸)의 사당에 배향하고 상촌 선생과 함께 제사지내고 있다. 죽천(竹泉) 김진규(金鎭圭) 공이 향사문(享祀文)을 지으면서 공을 지극히 찬양하였으니, 여기에서 사림의 공론을 볼 수 있다.
  명문(銘文)은 다음과 같다.


  혼란한 나라에 처해서는 홀로 강직하였고
  좋은 때를 만나서도 함부로 남을 따르지 않았네.
  집안에서는 효성스럽고 공손하였으며
  관직에 나아가서는 청렴하고 은혜로웠네.
  공의 지조 자세히 살펴보면
  진실로 무너진 풍속에 표본으로 삼을 만하네.
  나의 말을 믿지 못하는 이 있다면
  어찌 또한 저 외루의 시축에서 징험하지 않겠는가.88)

 

80) 이 글은 이의현(李宜顯)의 문집인 『도곡집(陶谷集)』 13권에 수록되어 있는데, 고전번역원 홈페이지에 원문과 번역문이 소개되어 있다.
81) 김주(金澍) : 고려말의 문신으로, 본관은 선산(善山, 一善), 호는 농암(籠巖)이며 아버지는 예의판서(禮儀判書) 김원로(金元老)이다. 1392년(공양왕 4)에 하절사로 명나라에 갔다가 일을 마치고 압록강에 이르러 고려가 망하고 조선조가 개국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동으로 향하여 통곡하며 부인 유씨에게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 하였으니 내가 강을 건너가면 몸둘 곳이 없다.”라는 편지를 쓰고 중국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82) 월정(月汀) 윤공(尹公)은 조선 중기의 문신인 윤근수(尹根壽, 1537~1616)를 말한다. 그가 김주의 일생을 기록한 〈농암선생전(籠巖先生傳)〉이 『월정집』 4권에 수록되어 있다.
83) 산계(散階) : 품계만 있고 일정한 직무는 없는 관원을 말한다. 산직(散職) 또는 산관(散官)이라고도 한다.
84) 김경직(金敬直, 1567~1634) : 조선중기의 문신으로 광해군의 난정에 실망하여 관직에서 물러나 춘천에 은거하였다. 인조반정 후 다시 관직에 나아가 병조좌랑(兵曹左郞)·사도시정(司䆃寺正) 등을 역임하였다. 도승지에 추증되고 춘천의 도포서원(道浦書院)에 제향되었다.
85) 이 구절은 신흠의 『상촌집(象村集)』 11권에 수록된 〈청평으로부터 돌아오자 여러 문생이 우두정에서 나를 영접하여 술자리를 마련하였는데 김 찰방 경직이 함께 참석하였다. 작별하면서 율시 한 수를 기념으로 주었다.[自淸平還 諸門生邀酌於牛頭亭 金察訪敬直與焉 臨別留贈一律]〉에 보인다.
86) 공발해(龔渤海) : 한(漢)나라 선제(宣帝) 때의 발해태수(渤海太守) 공수(龔遂)를 말한다. 백성을 잘 다스려 명망이 높아 지방관의 전범으로 꼽힌다.
87) 『의례(儀禮)』 <사관례(士冠禮)>에 따르면, 옛날 치사(致仕)한 뒤 시골로 내려온 중대부(中大夫)를 태사(太師)로 삼고 치사한 사(士)를 소사(少師)로 삼아, 향학(鄕學)에서 자제들을 가르치게 하고 이들을 향선생이라고 명명하였는데, 이들이 죽으면 그 고장의 서당에 위패를 모시고 제사하였다고 한다.

 

  司䆃寺正金公墓碣銘 幷序 陶谷集卷之十三

  麗氏之末  有金澍者奉使皇朝  聞我朝膺命  卽留住不返  事載月汀尹公所撰傳中  實爲善山府人  善之以金爲氏者  多祖於澍云  澍之七世孫九鼎參奉  其子若孫孟鍊,光啓  散階司果,司直  司直娶平山人申達仁女  生諱敬直字而正  年二十二  中萬曆庚寅進士  四十二  登文科  分隷國子  例陞至典籍  出爲銀溪察訪  値昏朝  退居深峽  跡不到京師者七八年  癸亥仁祖反正  拜狼川縣監  入爲兵曹佐郞  除禮 安縣監,黃海都事  以能於職  曹長留之不遣  仍陞正郞  兼史職  久之  出爲榮川郡守  入爲成均館司藝,直講,司䆃寺正  拜平壤庶尹,寧海府使  俱不赴  甲戌十二月初一日卒  享年六十有六  葬于春川五峰山司直墓下  後以曾孫德基,孫時獻秩二品  再贈至都承旨  公幼有器度  儼若成人  旣長  淹貫經史  以小學爲本  文詞贍富  言論勁正  游頖宮  士友盡傾  旣釋褐  而光海不辟  兇孽逢惡  公痛倫常斁絶  與同志語及時事  忼慨流涕  賊臣爾瞻嘗屢要致不得  固中嗛  及是偵察而大恚之  嗾其黨  將中以危法  會有止之者  不 果  有知舊附爾瞻  來試公意  公峻責不饒  自是不樂在京  遂盡室歸春川之牛頭村  以牛頭名不雅  改爲憂道  仍自號憂亭  象村申文貞公謫在是鄕  知公有學識雅操  甚重之  贈詩  有淵源河內學詩禮濟南生之句  公才長於治民  典二邑  俱有異績  淸陰先生嘗亟稱榮川之政  崔完城鳴吉主銓  爲越格除邑  至比龔渤海  內行甚篤  事父母  一以順志爲主  疾革嘗糞  及喪  盡哀而以禮  鄕黨感歎其至孝  兄沒  朝夕不離喪側  常曰  今人罕知朞服之重  處身無異恒人  是殆不識天倫也  敎訓從子  隃於己出  卒有成就  其析著 也  擇豐饒而悉歸之  自取磽瘠  居家  肅若朝典  戒子弟避遠名塗  謹守家業  嗚呼  公之賢若此  亦何必多遜古人  旣遇淸時  頗爲諸公知奬  若將駸駸嚮用  而顧公本少宦情  遯野過半  在朝  杜門却掃  不事徵逐  唯刳心竹素  以此卒踸踔不前而遐期遽促  寧不爲世道之追憾也耶  配水原崔氏  秉節校尉渡女  生四男一女  男長宗溟  次宗洛  次宗泌文科府使  次宗沇判官  女適縣令李幼洙  孫國獻宗洛出  繼宗溟  重獻同知,時獻,萬獻  宗泌出  一獻宗沇出  命龍,命虎進士,命龜縣令,命麟  李壻出  國獻子德恒  文科府使  時獻 子德基  文科參判  餘皆士人  與女壻諸房出  多不能盡錄  公卒後七十餘年  春川人以鄕先生祭社之義  享公於壯節申公祠  與象村並俎豆之  竹泉金公鎭圭爲享祀文  揄揚甚至  於此可見士林公議云  銘曰 
  處亂邦獨倔强  際淸時不詭隨  居家孝且悌  涖官廉而惠  盖觀公之操秉  允可標式乎頹俗  有不吾信  盍亦徵夫畏壘之尸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