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의 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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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기(趙秉夔) 묘표(墓表)

상세정보

◆ 번역문

조선(朝鮮) 정헌대부(正憲大夫) 병조판서(兵曹判書) 풍양조공(豊壤趙公) 휘병기지묘(諱秉夔之墓) 증정부인(贈貞夫人) 안동김씨(安東金氏) 부우(祔右)

 

나의 선친은 풍은조공(豐恩趙公)과 내외종(內外從)간이면서 의()는 한 집안 식구와 같았으므로, 나는 어렸을 때부터 조공(趙公)의 젊었을 때나 장성했을 때나 칠십 고령에 이르기까지를 보아왔다. 너그럽고 인자하며 독실하고 두터운 품성이 천성에 뿌리하고 있었고, 부부인(府夫人) 송씨(宋氏)의 완숙(婉淑)한 덕은 또한 능히 그 가문에 아름다움을 더할 만 하였으니 그 후손들이 반드시 창성하고 복록이 더욱 길어야 할 터인데, 맏아들 문숙공(文肅公)은 이미 불행히도 일찍 세상을 떠났고, 이제 그 둘째아들 판서공(判書公)의 상사(喪事)가 있음에 갑자기 가문이 처량하게 되었음은 그 이치를 알기 어려우니, 이른바 하늘은 선한 사람을 돕는다라는 말이 틀린 말이 아닌가. 또 공의 지위가 팔좌(八座)205)에 이르렀으니 높지 않다고는 할 수 없겠으나, 그처럼 투명한 오해(悟解)와 구비된 재능을 10분의 1,2도 펼쳐 보지 못한 채 중도에 막히고 말았으니 하늘이 공을 낳았다가 또 이처럼 빨리 빼앗아 감은 도대체 어찌된 영문인가?

공의 휘는 병기(秉夔), 자는 경주(景冑)이니 풍양인이다. 상조(上祖)의 휘는 맹()이니 고려 태조를 도와 삼한206)을 통합하고 벼슬이 시중에까지 이르렀으며, 아조(我朝)에 이르러서는 벼슬이 여러 대에 걸쳐 혁혁하였다. 고조부는 이조판서를 지내고 영의정에 증직되었으며 경헌(景獻)이라는 시호가 내려진 휘 상경(尙絅)이다. 증조부는 이조판서를 지내고 좌찬성(左贊成)에 증직되었으며 문익(文翼)이라는 시호가 내려진 휘 엄()이다. 할아버지는 이조판서를 지내고 영의정에 증직되었으며 효문(孝文)이라는 시호가 내려진 휘 진관(鎭寬)이다. 아버지는 영의정을 지내고 문충(文忠)이라는 시호가 내려진 휘 인영(寅永)이다. 공은 원래 풍은부원군(豐恩府院君)에 봉하여지고 영의정에 증직되었으며 충경(忠敬)이라는 시호가 내려진 휘 만영(萬永)의 생자(生子)인데, 계부(季父)인 문충공에게로 출계(出系)하였다. 어머니는 정경부인에 증직된 안동 김씨니 이조참판에 증직된 군수 휘 세순(世淳)의 딸이다. 생가(生家)의 어머니는 덕안부부인(德安府夫人)에 증직된 은진송씨로, 좌찬성(左贊成)에 증직된 목사(牧使) 휘 시연(時淵)의 딸이요, 동춘선생(同春先生) 휘 준길(浚吉)의 후손이다.

공은 순묘(純廟) 신사년(辛巳年)207) 정월 25일에 태어났는데, 어려서도 용모가 응중(凝重)하였으며 성품이 치밀하였고 장성하자 더욱 닦고 수칙(修飭)하여 엄연히 노성(老成)한 전형(典型)이 있게 되니, 충경 문충 두 공이 그릇됨을 매우 중하게 여겼다. 경자년(更子年)208)에 순원왕후(純元王后)의 명령에 의하여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제수되었으니 효유대비(孝裕大妃)209)께 문안드리기 위해서였고, 갑진년(甲辰年)210)에 황감과(黃柑科)211)2등으로 발탁되어 특명으로 곧바로 전시(殿試)에 응시하여 장악원(掌樂院)의 연락(宴樂)을 하사받았고 얼마 안 되어 특명으로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에 제수되었는데,  때 상감께옵서 공이 합격된 것을 발표하는 첫 날이라 하여 근신(近臣)을 보내 부부인(府夫人)의 사당에 치제(致祭)함으로서 추감(追感)하는 뜻을 표하였다. 내직(內職)으로는 각조(各曹)를 거쳐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 승정원도승지(承政院都丞旨), 홍문관부제학(弘文館副提學), 경연일강관(經筵日講官), 사헌부대사헌(司憲府大司憲), 병조판서가 있고, 외직(外職)으로는 개성유수(開城留守), 황해감사(黃海監司)가 있다.

무오년(戊午年)212)에 정헌대부(正憲大夫)로서 총융청총융사(摠戎廳摠戎使)에 임명되었는데, 그 해 31일 정축(丁丑)에 숙환으로 정침에서 돌아갔다. 부음이 들림에 조회(朝會)와 시전(市廛)을 거두고 치부(致賻)함을 예에 따라 하였다. 59일에 춘천 삼태동(三台洞)의 문충공묘 너머 오른쪽 언덕 건좌원(乾坐原)에 장사지냈다.

! 공은 대대로 녹을 먹는 가문에서 태어났고 겸하여 부형(父兄)이 훌륭한 즐거움이 있었고 가정에서 전해들은 언행과 사물을 응접하는 식견이 탁월하여 남이 미치지 못할 바가 있었다. 일상생활로서 하는 학업 외에도 제도(諸道)에서 공부(貢賦)하는 전곡(錢穀)의 수량과 관직, 성호(姓號), 연대, 족파(族派)의 류()와 각영(各營)의 군제(軍制), 연혁에 관한 것을 속속들이 알지 못하는 것이 없었고, 또 그 타고난 모습이 빼어나고 내집(內執)이 독실하여 남을 대할 때면 다만 일단(一團)의 화기(和氣)뿐이었으나 이치에 맞는 일에 이르러서는 털끝만큼도 굽히지 않았다.

이른 나이에 초사(初仕)를 하였고 그 길로 과거에 올라 궁중에 출입하기 20년 동안에 몸가짐을 스스로 삼가니 환첩(宦妾)들이 감히 사사로이 간청하는 일이 없었다. 또 교유하기를 좋아하지 아니하고 자취를 거두어 항상 낙오된 것만 같았다. 을사년(乙巳年)213)에 백씨상(白氏喪)을 당한 뒤로부터 생가(生家)와 양가(養家)의 양친을 모시는 범절에 있어서는 그 성효(誠孝)를 극진히 하였고, 여러 여형제들과 우애함에 있어서는 돌보고 돕는 일에 정의(情義)를 다하였으며, 족척(族戚)과 지구(知舊)간에 가난하여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혼인을 치르지 못하거나 거주할 곳이 없는 자에게 그 형세에 따라 급한 사정을 도와주었다.

벼슬살이를 함에 있어서는 반드시 그 직책을 다하려 하였으니 개성유수로 있을 때에는 효문공(孝文公)의 유애(遺愛)가 없어지지 않은 곳임을 생각하여 그 자취를 잘 이어받아 돈 8,000꾸러미를 별도로 마련하여 학궁(學宮)을 개축하여 학업으로 교양케 하고 향리에 파급시켜 자산을 늘리어 베풀어주니, 사민(士民)들이 그 초상화를 그리어 숭앙하는 뜻을 극진히 하였다. 황해감사로 있을 때에는 여러 고을들의 양곡 매상(買上)과 방출에 있어서 여러 해의 쌓인 폐단을 널리 자문하고 두루 검토하여 계문(啓聞) 개혁시키니 온 도민(道民)이 혜택을 입어 이임한 뒤의 사모가 철비(鐵碑)를 세우기에 이르렀다. 병조판서로 있을 때에는 공의(公議)를 채취하여 억울한 일들을 가려내어 소통시켰으므로 정안(正眼)이 나오기만 하면 군인들이 모두 찬양하였으니, 이는 모두 익혀온 그 수명을 더 연장케 하였더라면 가문이나 국가에 성취한 바 어떠하였겠냐마는 하늘이 무심하여 향년 겨우 38세였다. 돌아가던 날에 위로는 조정의 고관들로부터 아래로는 서민에 이르기까지 모두 다 애석해마지 않아 말하기를 큰 나무가 꺾이었다. 이 댁의 이 분이 어찌 이에 그치는고!라고 하였으니, 여기에서 더욱 인심을 골고루 얻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부인은 정부인(貞夫人)에 증직된 안동김씨인,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 유근(逌根)의 딸이다. 태어난 해는 경자년(庚辰年)214)이고 공보다 15년 앞선 갑진년(甲辰年)215) 1222일에 돌아갔으며 자녀는 없다. 처음에는 본동(本洞) 자좌원(子坐原)에 장사지냈다가 묘자리가 좋지 못하여 이장 합부하였다. 둘째부인은 정부인(貞夫人) 전주이씨이니 현령(縣令) 승소(承召)의 딸이다. 딸 하나만을 두고 아들은 없었으므로 삼종형(三從兄)인 현령 병석(秉錫)의 둘째아들 영하(寧夏)로 후사를 삼았다.

! 공이 출생하던 이튿날에 나는 풍은공(豐恩公)을 찾아가 축하를 드렸었다. 충은공은 만년에 기린 같은 아들을 얻은 기쁨이 안색에 넘치던 그 모습이 아직도 엊그제 일같이 역력하게 기억되는데, 나는 이미 늙고 또 병들었으니 한문공(韓文公)216)의 시에 그대는 대장부가 되었고 나는 백발이 되었네라고 함이 이를 두고 한 말인 듯하다. 공이 나의 죽음을 조상하지 못하고 내가 도리어 붓을 적시어 공의 묘표(墓表)를 짓는다는 것은 이 또 상리(常理)로서야 생각할 수 있겠는가?

! 공이 돌아감은 사가(私家)의 견지에서는 자손을 남기지 못했고 국가의 견지에서는 좋거나 낮거나 간에 의지할 바가 없게 되었다. 후일에 공의 묘소 앞을 지나는 사람들은 허희탄식하면서 가리키되, 또한 이는 모()의 무덤이라 말함에 불과할 것이고, 공의 상세한 것을 알고 공의 죽음을 절실히 슬퍼할 사람은 그 몇이나 되겠는가? 옛 사람들이 말하기를 누가 그대를 어질게 만들었으며, 누가 그대를 단명케 하였으며, 누가 그대를 자손이 없게 하였는가? 운명이로다! 운명이로다!라고 하였으니, 나 또한 공에 대하여 이와 같이 말하는 바이다.

 

숭록대부(崇祿大夫) () 호조판서(戶曹判書) ()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홍문관제학(弘文館提學) 경연일강관(經筵日講官) 홍재철(洪在喆)이 삼가 지음. 음기(陰記)는 가선대부(嘉善大夫) 예조참판(禮曹參判) () 규장각직제학(奎章閣直提學) 김병주(金柄㴤)가 삼가 썼고, 전면(前面)은 통정대부(通政大夫)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 유치선(兪致善)이 삼가 썼다.

숭정기원후 네 번째 무오(戊午) 12월 일에 세우다. 

 

 

205)팔좌(八座): 판서(判書)의 위치를 말한다.

206)삼한: 후삼국을 말한다. 전통시대 삼국 또는 우리나라 자체를 삼한(三韓)이라고 별칭하였음.

207)신사년(辛巳年): 순조 21, 1821.

208)경자년(更子年): 헌종 6, 1840.

209)효유대비(孝裕大妃): 신정왕후(神貞王后)를 말한다.

210)갑진년(甲辰年): 헌종 10, 1844.

211)황감과(黃柑科): 제주도에서 진상된 귤을 신하들에게 나누어주면서 치르는 일조의 과시(科試)

212)무오년(戊午年): 철종 9, 1858.

​213)을사년(乙巳年): 헌종 11, 1845.

214)경자년(庚辰年): 순조 20, 1820.

215)갑진년(甲辰年): 헌종 10, 1844.

216)한문공(韓文公): 한유(韓愈, 168-824)를 말한다. 퇴지는 그의 자(). ()나라 동주(동주) 남양인(남양인)으로 어려서 천애 고아가 되어 형수가 길렀다. 정원(貞元) 8(792) 진사시(進士試)에 급제하여 19년에 감찰어사(監察御使)에 임명되었는데, 궁시(宮市)의 폐단을 극언한 일로 양산령(陽山令)으로 폄출되었다. 한유는 시무에 대해 극언을 서슴치 않은 까닭에 자주 폄출되었는데, 헌종(憲宗) 원화(元和) 12(817)에는 봉상(鳳翔)의 불사리를 봉안한 일을 비판하다가 조주자사(潮州刺史)로 폄출되기도 하였다. 육경(六經)과 백가(百家)의 학문에 모두 통달하였고 육조(六朝) 이래의 문학적 풍토에 한 대하여 산체(散體)를 주장하였는데, 기풍이 웅건하였다. 그의 글을 특칭하여 한문(韓文)이라고 하기도 한다. 문인(門人) 이한(李漢)이 편찬한 <창려선생집(昌黎先生集)>이 있다.

◆​ 원문

朝鮮 正憲大夫 兵曹判書 豊壤趙公諱秉夔之墓, 贈貞夫人安東金氏祔右

吾先君子與豐恩諶趙公爲中表 兄弟而誼同一室 自吾幼時 及見趙公之少而壯 而至于稀齡寬仁篤厚根於天性 府夫人宋氏婉淑之德 又能匹美于家宜 其後承之必昌熾福履之益綿遠 而長子文肅公 旣不幸早世 今又於其次子判書公之喪 忽焉門戶之凄凉 理實難諶 豈所謂天之報施善人者非耶 且公之位至八座 不爲不高 然以若悟解之明透 才具之足備十未有一二展焉 而闕於中途 天旣生公而遽又奪之速 抑何耶 公諱秉夔字景冑豐壤人 上祖諱孟 佐麗太祖統合三韓官侍中 至我朝屢世奕舃 高祖吏曹判書贈領議政諡景獻諱尙絅 曾祖吏曹判書贈左贊成諡文翼諱曮 祖吏曹判書贈領議政諡孝文諱鎭寬 考領議政諡文忠諱寅永 公以豐恩府院君贈領議政諡忠敬諱萬永之生 系于季父文忠公 妣贈貞敬夫人安東金氏 郡守贈吏曹參判諱世淳女 本生妣贈德安府夫人恩津宋氏 牧使贈左贊成諱時淵女 同春先生諱浚吉後也 公生於純祖辛巳正月二十五日 幼而容貌凝重性度縝密 長益修飭 儼然有老成典型 忠敬文忠兩公甚器之 庚子因純元王后命除童蒙敎官 爲承候於孝裕大妃也 辛丑冬有守令擬入之敎 除果川縣監卽文忠公回甲在邇 俾奉專城之養也 甲辰擢柑製第二 特命直赴殿試 賜梨園樂 未幾特除弘文館修撰 時上以公唱名之初遣近臣 致侑于府夫人祠版示追感之意 內而諸曹泮長知申副學經筵日講官都憲兵曹判書 外而開城留守黃海監司 戊午正憲摠戎使三月一日丁丑以宿疾 考終于正寢 訃聞撤朝市致賻如例 五月九日葬于春川三台洞 文忠公墓越右岡負乾之原 嗚呼 公生長於世祿之門 而兼有賢父兄之樂言行之家庭承聆見識之事物 應接卓乎有人難及者 日用學業之外 以至諸道貢賦錢穀嬴絀 及官職姓號年代族波之類 各營軍制沿革之故 靡不洞貫 且其天姿秀穎 而內執篤實對人 只是一團和氣 至若理勝處毫不撓奪 早年筮仕 仍登科第 出入禁闥 二十年謹愼 自持宦妾之輩 莫或干以私 又不喜交遊斂跡恒若疎逖 自乙巳伯氏喪變之後 兩大人保護之節 極其誠孝 諸姊妹友愛顧助之方備盡情義 至於族戚知舊之 未葬未婚 及無庇身所者 隨其勢 而周其急當官 必欲盡其職 其在松京也 追感孝文 公遺愛之不泯克繩 其武別備錢八千餘緍 改建學宮絃誦 而涵養之派 及坊里滋殖 而矯捄之 士民生繪其像 而致其誠虔焉 莅海西也 列邑糶糴之積 年弊痼者 博詢周察啓聞而釐革之全省賴其德去後之思 至有鐵銘 及秉西銓也 採取公議 拔其寃鬱 而疏通之政眼 一出靺韋齊誦 此皆習熟聞見 見重於當世者也 若使公假其年壽 則于家與國其所成就 當如何 而惟天不慭 享年僅三十八 易簀之日 上自朝紳 下至黎庶 咸嗟惜不已曰 大樹折矣 此家此人 豈止斯乎 尤可見人情之所同也 配贈貞夫人 安東金氏 判敦寧府事逌根女 生庚辰 先公十五年 甲辰十二月二十二日卒 無育 初葬于本洞子坐原 以宅兆不利移窆合祔 繼配貞夫人全州李氏 縣令承沼女 有一女幼 無男以三從兄縣令秉錫第二子寧夏爲后 嗚呼 公之以降之 翌日吾往賀于豐恩公 公之晩得抱送之麟喜動顔色尙或追惟歷歷如昨而吾已老 且病韓文公詩(?)之君爲丈夫 我白首者是也 公之竟不哭吾 而吾反泚筆而表公之墓者 是又常理所可度耶 噫 公之云亡 而私而子姓無所遺 國而休戚無所倚 後之過公之墓者 歔欷指點 亦不過曰 是某之收藏 而知公之詳 悲公之切其幾人乎哉 昔人有言 孰俾子賢乎孰嗇子年乎 孰使子無傳乎 天乎天乎吾於公亦云

 

崇祿大夫行戶曹判書兼判義禁府事弘文館提學 經筵日講官 洪在喆 謹撰

陰記 嘉善大夫禮曹參判兼 奎章閣直提學 金炳㴤 謹書

通政大夫成均館大司成 兪致善 謹書

崇禎紀元後四戊午十二月 日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