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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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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강용석(姜用錫)

춘천사범학교 학생

강용석은 춘천사범학교 학생으로 일제의 민족말살교육에 반대하던 차 1941년 가을 친일단체인 경방단의 단장과 학생사이에 충돌이 발생하자 3학년 학생들을 모아 경방단을 습격하였다. 그러자 일제 경찰이 춘천사범학교의 기숙사를 포위하여 조양동 앞들에서 공방전을 벌이게 되었는데 이 일로 박성우(朴性宇박용래(朴容來노형우(盧亨愚이정원(李程遠) 등과 함께 학교로부터 퇴학처분을 받았다.

 

2. 강정상(康珽祥)

1928.11.25 ~ 2011. 5.30

춘천 퇴계동

강정상은 1944 6월 중국에서 광복군(光復軍)에 입대하여 활동하며 일본군대 내의 정보탐지 및 독립군 군사 모집활동을 전개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3. 고웅주(高雄柱)

1923.12. 1 ~ 1943. 7.

춘천 소양통

고웅주는 춘천중학교 학생으로 독서운동 등에 참여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1938년 가을에 춘천중학교의 항일학생결사 상록회(常綠會)가 일경에 발각되어 전회원이 검거된 후 춘천중학생들은 민족적 서적을 구독하고 독후감 교환 및 토론을 통하여 항일의식을 제고하면서 민족의 진로를 찾고자 독서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독서운동의 활동 내용과 성격은 상록회와 거의 같은 것이었으나 이들은 조직체의 이름을 내어 걸고 활동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이미 상록회가 발각되었으므로 다시 조직체를 갖는다는 것은 오히려 활동에 불리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직의 형식은 없었지만, 이들은 독서운동을 통하여 민족의식을 심화시켜 갔다. 그러던 중 독서운동에 참여하던 고제훈(高濟勳원후정(元厚貞김영근(金榮根박영한(朴泳漢권혁민(權赫民) 등이 민족차별에 분개하여 1941 3, 춘천중학교 교정에서 일인 학생들과 충돌한 일이 있었다. 그런데 싸움의 규모가 컸으므로 여기에 일경이 개입하면서 한국학생들을 탄압하였던 것은 물론이고 이때 춘천중학생의 독서운동도 발각되었다. 이로 인하여 그도 일경에 피체되었다. 피체 후 그는 1년여동안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1942 5,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단기 1년 장기 3년형을 언도받고 김천소년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일경의 잔학한 고문으로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4. 고제훈(高濟勳)

춘천중학교 학생

고제훈은 춘천중학교 학생으로 독서운동 등에 참여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1938년 가을에 춘천중학교의 항일학생결사 상록회(常綠會)가 일경에 발각되어 전회원이 검거된 후 춘천중학생들은 민족적 서적을 구독하고 독후감 교환 및 토론을 통하여 항일의식을 제고하면서 민족의 진로를 찾고자 독서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렇게 활동하던 중 1941 3월 교정에서 한일학생간 큰 싸움이 벌어져 일경이 개입함으로써 결국 독서회운동도 발각되고 말았다. 이로 인하여 그는 체포되어 1942 5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실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었다.

 

5. 고현정(高鉉鼎)

춘천농업학교 학생

고현정은 1937 11월 이준환(李俊桓김시묵(金時黙김창경(金昌卿반영균(潘榮均) 등이 조직한 비밀결사 춘천농업학교 독서회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그들은 회비를 내어 조선의 현재와 장래 등의 책을 구입하여 읽으며 토론을 하고 독후감을 발표하는 등 민족사상을 고취하였다. 그러던 중 독서회 회원들은 졸업생들에게 졸업기념품으로 준 태극기가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6. 곽재원(郭在元)

춘천고등보통학교 학생

곽재원은 1929년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춘천에서도 시위운동을 일으키고자 이창호(李彰浩정원식(鄭元植김영일(金英一) 등과 협의하여 격문 1천매를 만들었다. 그 중 2백매는 춘천농업학교 학생들에게 넘겨주고 나머지는 1919 12 19일 학교내 각 반 책상속에 배포하여 수업 두시간째에 운동장에 학생들이 모이도록 하였다. 학생들이 운동장에 모이자 그는 조례대위에 올라가 광주학생운동의 진상을 설명하고 춘천고보 학생들의 궐기를 촉구하는 연설을 한 뒤 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곽재원은 이일로 체포되었으나 1930 1 9일 기소유예 처분으로 석방되었다.

 

7. 권혁민(權赫民)

춘천중학교 학생

권혁민은 춘천중학교 학생으로 독서운동 등에 참여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1938년 가을에 춘천중학교의 항일학생결사 상록회(常綠會)가 일경에 발각되어 전회원이 검거된 후 춘천중학생들은 민족적 서적을 구독하고 독후감 교환 및 토론을 통하여 항일의식을 제고하면서 민족의 진로를 찾고자 독서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렇게 활동하던 중 1941 3월 교정에서 한일학생간 큰 싸움이 벌어져 일경이 개입함으로써 결국 독서회운동도 발각되고 말았다. 이로 인하여 그는 체포되어 1942 5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실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었다.

 

8. 김공모(金公模)

춘천 사북면 오탄리

김공모는 1919 3월 말 오탄리의 최기환의 집에서 독립만세시위를 벌이려고 준비하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민족대표의 독립선언 소식을 듣고, 자신의 마을에서도 독립만세시위를 계획한 그는 1919 3 31일 이교관(李敎寬최기환(崔基桓)과 협의하여 4 1일 석양을 기해서 독립만세시위를 벌일 것을 논의하고 주민에 대하여 독립운동에 가입할 것을 권고하는 회장(回章)을 작성하여 각호(各戶)에 회부하였다.

 

9. 김광호(金光鎬)

당시 27

춘천 춘천면 아동리

김광호는 1919 11월 김민수(金敏秀지달원(池達源엄중환(嚴中煥홍종숙(洪鍾肅)과 함께 김조길(金祚吉)로부터 독립선언서를 전달받아 이를 숙지하고 만세시위에 참여하기로 준비하다가 체포되어 심문을 받았다.

 

10. 김민수(金敏秀)

당시 40

춘천 가연리

김민수는 1919 11월 엄중환(嚴中煥지달원(池達源김광호(金光鎬홍종숙(洪鍾肅)과 함께 김조길(金祚吉)로부터 독립선언서를 전달받아 이를 숙지하고 만세시위에 참여하기로 준비하다가 체포되어 심문을 받았다.

 

11. 김두섭(金斗燮)

1922. 2. 4.(당시21)

춘천 서면 신매리

김두섭은 1937 11월 이준환(李俊桓김시묵(金時黙김창경(金昌卿반영균(潘榮均) 등이 조직한 비밀결사 춘천농업학교 독서회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그들은 회비를 내어 조선의 현재와 장래 등의 책을 구입하여 읽으며 토론을 하고 독후감을 발표하는 등 민족사상을 고취하였다. 그러던 중 독서회 회원들은 졸업생들에게 졸업기념품으로 준 태극기가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김두섭은 1942 10 2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 6월에 집행유예 4년형을 선고 받았다.

 

12. 김봉희(金韸熙)

1889.11. 1 ~ 1941. 5.10

춘천 북산면 청평리 58

강원도 춘천시 북산면 청평리에서 만세를 부르다 체포되었다. 춘천의 만세운동은 3월 말경 조성되었으나, 규모가 그리 큰 것은 아니었다. 1919 3 27일 김봉희는 청평리 유성천(柳星天)의 주막에서 마을사람들을 계몽하면서 조선독립만세를 불렀다. 또한 함께 있던 지상옥(池相玉) 등에게도 만세를 부를 것을 권유하여 만세를 부르게 하였다.

이 일로 체포된 김봉희는 1919 5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1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13. 김석규(金錫奎)

(1888) ~ 1929. 4. 4

춘천 북산면 조교리

김석규는 1921 9월 한말 의병으로 활동하던 마정삼의 아들 마만봉(馬萬奉마뇌병(馬雷炳마도현(馬道賢) 등과 박영관(朴泳寬)의 아들 박순구(朴順九) 등이 그들의 부친이 일본군토벌대에 의해 피살당한 원수를 갚기 위해 경찰서를 습격하고 일경을 살해할 목적으로 강원도 홍천(洪川)에서 소위 장총단(長銃團)을 조직하자, 이에 가입하였다.

1921 9월 홍천군 두촌면 어은리 경찰관주재소를 습격하였으며, 1926 9 13일 밤 9시경 마남룡(馬南龍전봉학(全鳳學) 등과 홍천군 내촌면 광암리 유익열(柳益烈)의 집에 침입하여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 1927 11월까지 강원도 춘천·홍천·인제 등지에서 6년간 24차례에 걸쳐 군자금모집과 경찰소를 습격하는 등 활동을 전개하다가 1927 11월 피체되었다. 피체후 1928 9 2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살인미수, 강도, 강도살인 및 강도미수로 마남룡과 함께 사형을 받자,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1928 11 30일 경성복심법원(京城覆審法院)에서도 소위 주거침입, 강도미수, 강도, 강도살인죄로 사형을 받고 1929 2 29일 판결이 확정되어 동년 4 4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2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14. 김영근(金榮根)

1923.10.23 ~ 2016. 9.14

춘천

김영근은 1939년 춘천중학교에 재학 중일 때 독립운동가인 여운형(呂運亨)으로부터 항일독립사상을 감화받고 교내에서 독서회(讀書會) 운동을 전개하였다고 한다. 1940년에서 1941년 사이에는 한일학생간의 민족차별과 식민지교육에 대한 항거운동을 하였고, 특히 1941 3월 한일학생들이 교내에서 충돌하자 선봉엣 대항하면서 일본인 학생을 구타하는 등 항일운동을 하다가 동년 2 23일 반일학생에 대한 일제 검거가 있을 때 피체되었다. 이로 인하여 1942 5 2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육해군형법 및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단기 1, 장기 3년형을 받았다. 1944년에는 다시 다른 사건으로 피체되어 동년 2 2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폭력행위 등 처벌에 대한 위반으로 징역 6월 이상 2년 이하의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15. 김영일(金英一)

춘천고등보통학교 학생

김영일은 1929년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춘천에서도 시위운동을 일으키고자 곽재원(郭在元이창호(李彰浩정원식(鄭元植) 등과 협의하여 격문 1천매를 만들었다. 그 중 2백매는 춘천농업학교 학생들에게 넘겨주고 나머지는 1919 12 19일 학교내 각 반 책상속에 배포하여 수업 두시간째에 운동장에 학생들이 모이도록 하였다. 학생들이 운동장에 모이자 곽재원이 조례대위에 올라가 광주학생운동의 진상을 설명하고 춘천고보 학생들의 궐기를 촉구하는 연설을 한 뒤 만세를 선창하여 함께 독립만세를 외쳤다. 김영일은 이일로 체포되었으나 1930 1 9일 기소유예 처분으로 석방되었다.

 

16. 김영진(金泳鎭)

춘천사범학교 학생

김영진은 학교 설립초기부터 전투모 거부운동 등 항일운동을 전개하던 춘천사범학교에 1944년 백의동맹(白衣同盟)이 조직되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백의동맹은 일본 유학생이었던 양일민(梁一民)을 중심으로 조직된 단체로 김화군 창도에 본부를 두고 김화·철원·춘천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춘천사범학교에도 별도의 조직으로 백의민족해방단이 조직되어 항일 무장투쟁을 준비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활동 중 일제에 발각되어 철원경찰서에서 고초를 겪었으나 8·15를 맞이하여 석방되었다.

 

17. 김우천

1872 ~ ?

춘천 서면 안보리

김우천은 1919년 이인선(李仁善)으로부터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하던 김세동(金世東)을 소개받고 은닉하며 편의를 제공하던 중 일경에 피체되어 1919 7 1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6월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그 후 1928년 김성만(金成萬백순화(白順和현기봉(玄基鳳김련(金練장순봉(蔣舜鳳) 등과 함께 서울에서 폭탄과 지폐를 제조하여 군자금 모집, 관공서 파괴 등을 계획하다가 피체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18. 김원이정(金原二正)

춘천농업학교 학생

김원이정은 1937 11월 이준환(李俊桓김시묵(金時黙김창경(金昌卿반영균(潘榮均) 등이 조직한 비밀결사 춘천농업학교 독서회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그들은 회비를 내어 조선의 현재와 장래 등의 책을 구입하여 읽으며 토론을 하고 독후감을 발표하는 등 민족사상을 고취하였다. 그러던 중 독서회 회원들은 졸업생들에게 졸업기념품으로 준 태극기가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19. 김유천(金裕天)

1883. 8. 1 ~ 1945. 5.19

춘천 서면 안보리

독립운동 자금 마련을 위해 노력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김유천은 1919 4 28일 강원도 춘천군 서하면 안보리 자신의 집에 독립운동자금 조달 혐의로 일본 경찰에 수배 중인 김세동(金世東)을 숨겨주었다가 체포되었다. 7 18일 경성지방법원의 유죄판결에 대해 항소하여 8 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취소되고 태형 90()를 받았다. 김유천은 1925 11 6일에 경성지방법원으로부터 공갈 미수로 징역 3년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기도 하였다. 판결 내용은 그가 400원을 부정 분배하고, 일정 금액을 착복한 혐의라고 하였는데, 사실은 독립운동자금 마련의 일환이었다.

이후에도 김유천은 도서 출판을 통해 민족의 자존심을 지켜 민족사상을 고취하고자 노력하였다. 1937 3월 한글로 지은 <좌랑공실기(佐郞公實紀)>라는 단행본 출판을 기획하였다. 지은이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 내용은 죽재(竹齋) 윤인함(尹仁涵김응택(金應澤김흡 등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의병을 일으켜 전공을 세웠던 인물들의 평전이었다. 그러나 이 책은 일제의 검열로 인해 출간되지 못하고 말았다. 이후의 행적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1945 5 19일 광복을 보지 못하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하였다고 한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20. 김인순(金仁順, 이명 金應和)

1921.10.25. ~ 1950. 8.20

춘천 운교동 59

1938년 강원도 춘천농업학교 재학 중 비밀결사 독서회에 참가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1937 11월 동교 학생인 이준환(李俊桓김시묵(金時默김창경(金昌卿반영균(潘榮均) 등은 일제의 억압과 식민수탈로 농업이 피폐하고 농민들이 생활고에 시달리는 것을 직접 목격하여 오던 중, 독립의 절실함을 깨닫고 농촌지도자가 되어 항일투쟁을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비밀결사 독서회를 조직하였다. 평소 항일의식이 투철하였던 김인순은 춘천농업학교에 입학하면서 이준환의 권유로 독서회에 참가하였다. 그는 회원들과 함께 이준환·김재하(金載河) 등의 하숙집이나 학교 뒷산에 올라가 집회를 가지며, 민족의 현실과 민족이 해야할 일에 대해 토론하거나 한글소설을 읽고 독후감을 발표하면서 항일의식을 고취시켜 나갔다. 그런데 1940 12월 재학생 회원들이 졸업기념품으로 만들어준 태극기가 양양군 인구소학교에 재직하고 있던 김시묵의 하숙방에서 발각되면서 일경의 포위망이 압축되었다. 결국 1941년 초 학교내 독서회 조직이 일경에 발각되면서 주동 학생들이 피체되고 말았다. 그는 이 일로 1942 10 2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으로 징역 1 6, 집행유예 4년을 받기까지 1 8월여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6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21. 김조길(金祚吉)

1880. 2.18 ~ 1946.11.28

춘천 춘천면 가연리 96

김조길은 1919 11 29일 춘천군에서 서울의 송춘근(宋春根)과 협의하여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일으키기로 계획하고 그에게서 선언서(宣言書), 독립문서(獨立文書), 독립운동가(獨立運動歌), 대한민국임시정부성립축하문(大韓民國臨時政府成立祝賀文)  4통의 문서를 송부받았다. 그는 이의 배포를 위해 춘천면(春川面)의 이동화(李東華)에게 문서 7뭉치를 전달하고 동면의 김민수(金敏秀엄중환(嚴中煥지달원(池達源김광호(金光鎬홍종숙(洪鍾肅)에게 각각 문서 한 뭉치씩을 배포함으로써 군중을 고무하여 독립운동에 참여토록 하는 등 활동하다가 피체되었다. 1920 10 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정치범처벌령으로 징역 1년을 받고 공소하였으나 같은 해 11 16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4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22. 김종건(金鍾健)

춘천농업학교 학생

김종건은 1937 11월 이준환(李俊桓김시묵(金時黙김창경(金昌卿반영균(潘榮均) 등이 조직한 비밀결사 춘천농업학교 독서회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그들은 회비를 내어 조선의 현재와 장래 등의 책을 구입하여 읽으며 토론을 하고 독후감을 발표하는 등 민족사상을 고취하였다. 그러던 중 독서회 회원들은 졸업생들에게 졸업기념품으로 준 태극기가 발각되어 체포된 김종건은 기소유예로 석방되었으나 검거 이후 1년간 옥고를 치렀다.

 

23. 김창경(金昌卿)

춘천농업학교 학생

김창경은 1937 11월 이준환(李俊桓김시묵(金時黙반영균(潘榮均) 등과 비밀결사 춘천농업학교(春川農業學校) 독서회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그들은 회비를 내어 조선의 현재와 장래 등의 책을 구입하여 읽으며 토론을 하고 독후감을 발표하는 등 민족사상을 고취하였다. 그러던 중 독서회 회원들은 졸업생들에게 졸업기념품으로 준 태극기가 발각되어 체포된 김창경은 기소유예로 석방되었으나 검거 이후 1년간 옥고를 치렀다.

 

24. 김희찬(金熙瓚)

1921.11. 8 ~ 1987. 4.14

춘천 마산

김희찬은 춘천농업학교 재학중인 1938년에 동급생인 이효선(李孝善)의 권유로 동교의 항일학생결사인 독서회에 참가하여 민족의식을 길렀다. 이들은 농촌피폐의 원인은 일제의 억압과 식민수탈에 있다고 보고 조선농민의 행복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독립을 쟁취해야 한다는데 뜻을 모으고 그를 위해 각자 농촌지도자가 되어 항일투쟁을 전개하기로 결의했다. 그후 이들은 민족적 서적을 윤독하며 항일의식을 길러 갔는데 도중 일경에 발각됨으로써 피체되었다. 피체 후 1942 10 2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 6, 집행유예 4년형을 언도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25. 남궁태(南宮珆)

1920. 8. 1 ~ 미상

춘천

남궁태는 춘천고등보통학교 재학중인 1937 3월에 동교생 이찬우(李燦雨문세현(文世鉉용환각(龍煥珏백흥기(白興基조규석(曺圭奭) 등과 함께 일제의 민족차별교육에 반대하여 항일학생결사 상록회(常綠會)를 조직하고, 부위원장을 맡아 조직확장에 힘썼다.

또 그는 상록회의 파생단체로서 조선독립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투사를 양성하고 궁극에 있어서 일제로 독립하기 위한 독서회를 조직하고 부회장과 이어 회장을 맡아 상록회를 이끌었다. 1937 10월 월례회에서 남궁태는 눈물이라는 제목으로 조선의 현상(現狀)을 볼 때 바야흐로 일본의 압제하에 자멸의 위기에 처해 있으므로 이 압제에 항거하여 투쟁하지 않으면 안되다는 요지의 연설을 하였다.

졸업후 그는 만주로 가서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는데, 상록회가 발각됨으로써 하얼빈에서 체포되어 1939 12 2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2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26. 노형우(盧亨愚)

춘천사범학교 학생

노형우는 춘천사범학교 학생으로 일제의 민족말살교육에 반대하던 차 1941년 가을 친일단체인 경방단의 단장과 학생사이에 충돌이 발생하자 3학년 학생들을 모아 경방단을 습격하였다. 그러자 일제 경찰이 춘천사범학교의 기숙사를 포위하여 조양동 앞들에서 공방전을 벌이게 되었는데 이 일로 강용석(姜用錫박성우(朴性宇박용래(朴容來이정원(李程遠) 등과 함께 학교로부터 퇴학처분을 받았다.

 

27. 류돈상(柳敦相)

1894. 9.29 ~ 1935. 7.19

춘천 남면 가정리

류돈상은 춘천의병장 외당 류홍석의 손자이다. 그는 경술국치 이후 1911년경 조부 류홍석·재종조 의암 류인석, 부친 류제원, 모친 윤희순을 따라 만주로 건너갔다. 1915년에는 선대의 독립정신과 그 유지를 이어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의 일선에 나섰다. 먼저 동지를 얻기 위해서 조부와 의암 선생의 문인 및 친지들을 찾아다니고 이어 만주, 몽고, 중원(中原)에 흩어져 있는 애국자들을 골고루 찾아다녀 마침내 음성국(陰聖國음성진(陰聖進)  180여 명의 동지를 얻어서 조선독립단(朝鮮獨立團 또는 大韓獨立團)을 조직하였다. 이들은 홍익단(弘益團)과 합세하여 왜적을 치기로 계획하고 준비하던 중 일제의 앞잡이에게 기밀이 누설되어 일제의 급습으로 실패하였다. 이에 피신한 그는 효준(孝俊) 또는 효남(孝男)으로 이름을 바꾸어 가며 다시 독립투쟁의 계획을 세웠다.

그 후 독립군 양성이 절실함을 깨닫고 음성국·음성진 형제 및 중국인 장경호와 함께 학교를 세우고 민족정신 교육과 인재양성을 위한 군사훈련에 전력을 기울였다. 또한 김인수·유석현·윤병구·신덕영·이혁인 등으로 하여금 군자금을 모집하여 병기를 사다가 군사훈련을 시켰다. 1928년에는 귀국하여 강원도 춘천, 충북 제천 등지에서 민족교육을 실시하는 한편 군자금을 모집하여 만주지역 독립운동 단체를 지원하기도 하였다. 1931년 다시 만주로 건너가 무순에서 독립단을 재조직하여 활동하였다. 1935년 무순에서 독립단 청년단원들을 교육하던 중 일제의 급습으로 피체되어 모진 고문 끝에 동년 7 19 42세를 일기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28. 류제춘(柳濟春, 海東)

1891.11.22 ~ 1981. 2.25

춘천 남면 가정리

류제춘은 의병운동의 정신적 지주인 의암 류인석의 친자로서, 강원도 춘천(春川) 출신이다. 항일의병운동을 시종 총지휘하던 부친 의암은 국내에서의 의병운동의 한계를 느끼고 해외기지 건설을 목적으로 1908년 고국을 등지고 러시아로 향하였다. 그곳에서 의암은 최재형(崔在亨이범윤(李範允이상설(李相卨안중근(安重根) 등 제의사들과 해외무력항쟁의 기틀을 마련하고 있었다. 이에 류제춘은 1910년경 고향을 등지고 의암을 보좌하면서 1915년 부친이 임종할 때까지 독립운동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그 뒤 의병장으로 망명한 박장호(朴長浩)를 보좌하면서 해외 독립운동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커다란 공적을 세웠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29. 마뇌병(馬雷柄, 이명: 馬應俊)

1888. 6.29 ~ 미상

춘천 북산면 물노리 156

1921 9월 강원도 인제에서 장총단(長銃團)을 조직하여, 1922년부터 1927년까지 강원도 홍천·인제·춘천 등에서 장총단원으로 군자금을 모집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21 9월 강원도 인제에서 동생 마만봉(馬萬奉)이 박순구(朴順九)와 함께, 한말 의병 활동을 하다가 일본 군대에게 살해를 당한 선친의 원수를 갚고자 장총단(長銃團)을 조직하였고, 마뇌병은 이에 가담하여 박순구 등과 함께 경찰관서를 공격하여 경찰관을 처단할 것을 협의하였다.

1924 12 3일 마도현(馬道賢, 마뇌병의 형마만봉·박순구 등과 함께 강원도 홍천군 두촌면 천치리의 장성칠(張聖七)에게 군자금을 요구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장총단은 형제 또는 내외종(內外從)의 인척 관계로 모두 12인으로 구성되었는데, 이후 1927 11월까지 강원도 인제에 있는 가리산을 근거로 하여 인제군 일대와 홍천·춘천·양구 등지에서 걸쳐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1927 11월 검거되어 1928 10 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살인미수·강도·강도살인·강도미수죄로 징역 3년을 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1930 9 13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출옥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2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30. 마만봉(馬萬奉)

1894. 8. 3 ~ 미상

춘천 북산면 물로리 139

마만봉은 1921 9월 강원도 인제에서 장총단(長銃團)을 조직하여 화승총을 휴대하고 홍천군의 경찰관 주재소를 공격하였고, 1921년부터 1927년까지 춘천(春川홍천·인제 일대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21 9월 강원도 인제에서 박순구(朴順九)와 함께, 한말 의병 활동을 하다가 일본 군대에게 살해를 당한 선친의 원수를 갚고자 장총단을 조직하였다. 동월 6일 박순구와 함께 화승총을 휴대하고 강원도 홍천군 두촌면 자은리에 소재한 경찰관 주재소의 경찰관을 공격하였다.

1922 10 5일 박순구와 함께 춘천군 동면 품걸리 김영주(金泳柱)의 집에 들어가 일제 원절식(元折式) 12구경 엽총 1자루와 실탄을 입수하였다. 1923 6 3일 두 사람은 다시 홍천군 두촌면 자은리 주재소에 근무하는 순사 진류기량부(津留崎良夫)에게 발포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924 9 14일 자신의 지휘 아래 마도현(馬道賢안이순(安二淳)과 함께 총을 휴대하고 강원도 인제군 남면 어륜리의 김수룡(金洙龍)에게 자신들이 상해임시정부 위원임을 자처하며 군자금을 요구하여 36원을 모금하였다.

마만봉이 주도하는 장총단은 형제 또는 내외종의 인척 관계로서 모두 12인으로 구성되었는데, 1922 10월 이래 1927 11월까지 강원도 인제에 있는 가리산(伽里山)을 근거로 하여 인제군 일대와 홍천·춘천·양구 등지에 걸쳐 24개소의 경찰 관서를 공격하였으며, 군자금을 모집하는 활동을 하였다.

1927 12월 체포되어 1928 10 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살인미수·강도·강도살인·가택침입·강도미수죄로 징역 15년을 받고 경성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2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31. 문세현(文世鉉)

1917.11.25 ~ 1945. 8.18

춘천 소양2 110

춘천고등보통학교 재학중인 1937 3월에 동교생 남궁태(南宮백흥기(白興基조규석(曺圭奭) 등과 함께 일제의 민족차별교육에 반대하여 항일학생결사 상록회(常綠會)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동회의 강령 및 부서를 정하였는데, 그는 선전부장의 일을 맡았으며 또한 동회의 회가(會歌)도 지었다. 그후 상록회는 신입회원을 가입시켜 회세를 확장하여 전교적인 규모로 확대되었다. 이러한 상록회의 주요활동은 월례회·토론회·독후감발표회 및 귀농운동 등으로서 주로 독서활동을 통한 항일의식을 고양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동 회원은 졸업 후에도 그러한 상록회의 활동을 계속하여 각기의 정착지에서 새롭게 상록회 조직을 결성하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38 3, 졸업 후 그는 철원금융조합서기로 근무하면서 동년 10월까지 상록회 활동을 계속하였다. 그런데 1938년 가을, 춘천에서 상록회의 조직과 활동이 일경에 발각되자 그도 피체되었다. 그는 1년여동안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1939 12 2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 6월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32. 박순교(朴順交)

1869. 9. 1 ~ 1946. 7. 1

춘천 북산면 조교리 100

박순교는 1919 3 28일 춘천읍에서 장날을 이용하여 이준용(李俊容윤도순(尹道淳) 등 천도교인 수명과 함께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벌이기로 계획하고 수십명의 시위군중을 규합하여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시위를 전개하다가 일경에 피체되었다. 이해 4 2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형을 언도받고 공소하였으나 6 11일 경성복심법원과 7 22일 고등법원에서 각각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33. 박순구(朴順九)

1888.11.6 ~ 미상

춘천

박순구는 1921 9월 강원도 인제에서 장총단(長銃團)을 조직하여 화승총을 휴대하고 홍천군(洪川郡)의 경찰관 주재소를 공격하였고, 1921년부터 1927년까지 춘천(春川홍천·인제 일대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박순구는 마만봉(馬萬奉)의 형 마도현(馬道賢)의 처 친족으로 1921 9월 강원도 인제에서 마만봉과 함께, 한말 의병 활동을 하다가 일본 군대에게 살해를 당한 선친들의 원수를 갚고자 장총단을 조직하였다. 박순구는 동월 6일 화승총을 휴대하고 강원도 홍천군 두촌면 자은리에 소재한 경찰관 주재소의 경찰관을 향해 발포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922 10 5일 마만봉과 함께 춘천군 동면 품걸리에 소재한 김영주(金泳柱)의 집에 침입하여 일제 원절식(元折式) 12구경 엽총 1자루와 실탄을 입수하였다. 1923 6 3일 두 사람은 다시 홍천군 두촌면 자은리 주재소에 근무하는 순사 진류기량부(津留崎良夫)에게 발포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924 9 14일 마만봉의 지휘 아래 마도현·안이순(安二淳)과 함께 총을 휴대하고 강원도 인제군 남면 어론리의 김수룡(金洙龍)에게 자신들이 상해임시정부 위원임을 자처하며 군자금을 요구하여 36원을 모집하였다. 1924 12 3일 마뇌병(馬雷柄안이순과 함께 홍천군 두촌면 천치리 장성칠(張聖七)에게 군자금을 모금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장총단은 형제 또는 내외종의 인척 관계로 모두 12인으로 구성되었는데, 1922 10월 이래 1927 11월까지 강원도 인제에 있는 가리산을 근거로 하여 인제군 일대와 홍천·춘천·양구 등지에서 걸쳐 24개소의 경찰 관서를 공격하였으며, 군자금을 모집하는 활동을 하였다. 1927 12월 체포되어 1928 10 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살인미수·강도·강도살인·강도미수죄로 징역 13년을 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1935 4 17일 출옥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12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34. 박성우(朴性宇)

춘천사범학교 학생

박성우는 춘천사범학교 학생으로 일제의 민족말살교육에 반대하던 차 1941년 가을 친일단체인 경방단의 단장과 학생사이에 충돌이 발생하자 3학년 학생들을 모아 경방단을 습격하였다. 그러자 일제 경찰이 춘천사범학교의 기숙사를 포위하여 조양동 앞들에서 공방전을 벌이게 되었는데 이 일로 강용석(姜用錫박용래(朴容來노형우(盧亨愚이정원(李程遠) 등과 함께 학교로부터 퇴학처분을 받았다.

 

35. 박영한(朴泳漢)

춘천중학교 학생

박영한은 춘천중학교 학생으로 독서운동 등에 참여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1938년 가을에 춘천중학교의 항일학생결사 상록회(常綠會)가 일경에 발각되어 전회원이 검거된 후 춘천중학생들은 민족적 서적을 구독하고 독후감 교환 및 토론을 통하여 항일의식을 제고하면서 민족의 진로를 찾고자 독서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렇게 활동하던 중 1941 3월 교정에서 한일학생간 큰 싸움이 벌어져 일경이 개입함으로써 결국 독서회운동도 발각되고 말았다. 이로 인하여 그는 체포되어 1942 5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실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었다.

 

36. 박용래(朴容來)

춘천사범학교 학생

박용래는 춘천사범학교 학생으로 일제의 민족말살교육에 반대하던 차 1941년 가을 친일단체인 경방단의 단장과 학생사이에 충돌이 발생하자 3학년 학생들을 모아 경방단을 습격하였다. 그러자 일제 경찰이 춘천사범학교의 기숙사를 포위하여 조양동 앞들에서 공방전을 벌이게 되었는데 이 일로 강용석(姜用錫박성우(朴性宇노형우(盧亨愚이정원(李程遠) 등과 함께 학교로부터 퇴학처분을 받았다.

 

37. 박우홍(朴禹弘)

당시 24

춘천 춘천읍 화원정 일정목 35

박우홍은 춘천공립고등보통학교를 졸업 후 북산면 서기로 근무할 때 이홍래(李鴻來신영철(申瑛澈) 등과 민족주의를 논하며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1938 9 24일 우두산 조양문 부근에서 춘천중학교 학생들에게 조선 청년이 나아가야 할 길이라는 제목으로 조선은 일본에 주권을 빼앗겨 비참한 실상에 있으므로 주권을 회복하는 것은 우리들 조선청년의 책무라는 점 등에 대해서 연설하여 독립의식을 고취시키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박우홍은 이 일로 체포되어 1940 1 1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받고 옥고를 치렀다.

 

38. 박제영(朴齊榮, 朴守福)

1904. 6. 8 ~ 1935. 2. 20

춘천

박제영은 1926년 서울에서 서울청년회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어 활동을 시작하였다. 1927 3월 이광(李珖)의 권유로 고려공산청년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으며, 5월 조선사회단체중앙협의회에서 경기도 대의원으로 선출되었고, 1929년에는 고려공산청년회 사건으로 체포되어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았다.

1930 7월 조선청년총동맹 전국군부동맹(全國郡府同盟) 대표자대회 사건으로 체포되어 2개월 여의 옥고를 치르고, 같은 해 9월경 중앙청년동맹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박제영은 1926년부터 1931년까지 사회주의운동 관련 사건으로 수차례 구류처분을 받았으며, 1932 1월 심치령(沈致寧) 등과 함께 노동자와 농민, 학생들을 조직하여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어 징역 2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르다 투옥 중 발발했던 늑막염이 악화되어 옥고 여독으로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1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39. 박찬하(朴贊夏)

1922. 7.28.(당시21)

춘천 마산리

박찬하는 1937 11월 이준환(李俊桓김시묵(金時黙김창경(金昌卿반영균(潘榮均) 등이 조직한 비밀결사 춘천농업학교 독서회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그들은 회비를 내어 조선의 현재와 장래 등의 책을 구입하여 읽으며 토론을 하고 독후감을 발표하는 등 민족사상을 고취하였다. 그러던 중 독서회 회원들은 졸업생들에게 졸업기념품으로 준 태극기가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박찬하는 1942 10 2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 6월에 집행유예 4년형을 선고 받았다.

 

40. 박형원(朴炯遠)

춘천사범학교 학생

박형원은 학교 설립초기부터 전투모 거부운동 등 항일운동을 전개하던 춘천사범학교에 1944년 백의동맹(白衣同盟)이 조직되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백의동맹은 일본 유학생이었던 양일민(梁一民)을 중심으로 조직된 단체로 김화군 창도에 본부를 두고 김화·철원·춘천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춘천사범학교에도 별도의 조직으로 백의민족해방단이 조직되어 항일 무장투쟁을 준비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활동 중 일제에 발각되어 철원경찰서에서 고초를 겪었으나 8·15를 맞이하여 석방되었다.

 

41. 방승현(方承鉉)

춘천 운교동 23

방승현은 1919 3월 숭실중학 2년 재학중,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가 피체되어 1개월간 고초를 겪었으며 1920년 음력 11월부터 대한독립청년단 조직에 가입하여 주로 단원을 관리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평남에서 조직된 대한독립청년단은 대한애국부인회 회장 조신성(趙信聖)과 대한독립청년연합회 평안남도 총무 김봉규(金琫奎)가 평남지역의 영원·덕천(德川맹산(孟山)을 중심으로 조직한 비밀결사였다. 이중 맹산군은 1920년 음력 7월부터 안국정(安國鼎)이 중심이 되어 단원과 군자금을 모집하여 상해 임정에 밀파하기로 하고, 안국정은 통신·연락 사무를 담당하였고 그는 동지규합 임무를 맡았다.

이들은 또한 맹산군 맹산면 선유봉 호굴(虎窟)에 대한독립청년단 모험부를 설치하고 일경과 친일파를 암살하고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그리하여 1921 3월 군자금 600원을 모금하였고, 동년 3 20일 우편물을 수송하던 일경을 사살하고 공금 3천원을 모금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6 20일 그를 비롯한 단원 3명이 피체되면서 조직이 탄로되었다. 이때 그도 피체되어 평양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42. 백춘기(白春基)

춘천농업학교 학생

백춘기는 1937 11월 이준환(李俊桓김시묵(金時黙김창경(金昌卿반영균(潘榮均) 등이 조직한 비밀결사 춘천농업학교 독서회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그들은 회비를 내어 조선의 현재와 장래 등의 책을 구입하여 읽으며 토론을 하고 독후감을 발표하는 등 민족사상을 고취하였다. 그러던 중 독서회 회원들은 졸업생들에게 졸업기념품으로 준 태극기가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43. 서은수(徐殷洙)

춘천사범학교 학생

서은수는 일제가 학생들에게 전시용 복장을 강요하자 1940년 신학기초에 전투모 거부운동을 벌이며 수업거부를 주동하다 학교로부터 퇴학처분을 받았다.

 

44. 송완식(宋完植)

당시 24

춘천 남면 후동리

송완식은 어렸을 때에 2년간 한문을 수학한 이래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는데, 1933 2월경에 유자훈(劉子勳)이 무산청년을 규합하여 공고한 단체를 조직하고 일대 혁명을 일으켜 일제로부터 우리나라를 독립시키고자 비밀결사 십자가당(十字架黨)을 조직하였다는 말을 듣고 이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45. 신기철(申琦澈)

1922. 1.24 ~ 2003. 6.23

춘천 신북읍 용산리

신기철은 1937 3월에 조직되었던 춘천고등보통학교의 항일학생결사 상록회(常綠會)는 회원의 졸업으로 해체될 형편에 이르자 1938 3월에 재편성을 하게 되었다. 이때 새로이 부서를 정하고 신입회원을 가입시켰는데, 그는 서적계의 일을 맡았다. 그후 동회는 다시 조직을 확장하고, 소양로) 소재 박태주(朴泰株) 회원의 집에서 간부진을 개편하였는데 그는 회장직을 맡았다. 상록회의 주요활동은 월례회·토론회·독후감발표회 및 귀농운동 등으로서 주로 독서활동을 통한 항일의식을 고양하는 것이었다.

또한 졸업생 회원들과도 긴밀한 연락을 맺고 있었는데 그와 이봉채(李鳳采)등은 선배회원 신영철(申瑛澈이홍래(李鴻來박우홍(朴禹弘) 등과 우두산·봉의산 등지에서 비밀리 모임을 갖고 토론, 강좌를 통하여 항일의식을 함양하였다. 이렇듯 상록회의 주요회원으로 활동하던 중, 1938년 가을에 상록회의 조직과 활동이 일경에 발각됨으로 피체되었다. 피체 후 그는 1년여동안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1939 12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 6월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46. 신영철(申瑛澈)

1917. 8. 5 ~ 미상

춘천 신북면 용산리 411

1936년 이홍래(李鴻來) 등과 함께 비밀결사 무명(無名)그룹을 조직하여 활동하였고, 1938 9월 춘천고등보통학교 학생들에게 민족주의 의식을 고취시키는 연설을 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35년 춘천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1936년부터 이홍래·박우홍(朴禹弘이종식(李鍾植) 등과 조선독립의 실행 방안을 강구한 끝에, 주의를 같이 하는 동지를 획득하고 이들과 함께 귀농하여 농민운동에 종사함으로써 민족주의를 고취시킬 목적에서 비밀결사 무명그룹을 조직하였다. 1937 9월 다시 이종식 등과 회합하여 조선 고유의 문화를 연구하자고 제안하며 동의를 얻은 뒤 실행방안을 협의하였다. 1938 3월 회합에서 신영철은 농민지도 방안을 제시하고, 한글의 연구와 보급을 역설하면서 조선어학회가 발행하는 <한글>을 구독할 것을 제안하여 찬동을 얻어 실행 방안을 협의하였다.

1938 9 24일 무명그룹 회원들과 함께 춘천고등보통학교 학생들에게 국내외 정세의 동향과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연설을 하였는데, 신영철은 <조선의 형상>이라 제목 아래 약 20분간에 걸쳐 "우리들의 원대한 목적을 달성하는 것은 우리가 민족문화의 재건을 꾀하는 데 있다"는 뜻을 역설하였다.

1938 10월 춘천서(春川署)에 검거된 뒤, 1939 4 19일 송치되었으며, 1940 1 1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 6(미결 200일 통산) 집형유예 3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2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47. 신철균(申喆均)

춘천사범학교 학생

신철균은 전투모 거부운동 등 항일운동이 전개되고 있던 춘천사범학교의 제1회 졸업앨범 편집위원으로 활동하며 졸업앨범에 국사봉과 무궁화를 그려넣었다가 발각되어 앨범은 압수당하고 고초를 당하였다.

 

 

48. 심재진(沈在震)

1920. 2. 7 ~ 미상

춘천 소양 3

심재진은 1939년이래 춘천중학교에 재학하고 있을 때 독립운동가인 여운형(呂運亨)으로부터 항일독립사상을 감화받고 이를 고취시키기 위하여 학교내에서 독서회(讀書會) 운동을 전개하였다. 1941 3 23일 한일학생간의 민족차별과 식민지교육정책에 항거하고, 한일학생간에 교내에서의 충돌이 있었을 때 선봉에서 대항하며 학생을 구타하여 반일학생에 대한 일제 검거가 실시되었을 때 피체되어 1941 6 30일 제적당하였다. 이에 1942 5 2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과 폭력행위 등 처벌법 및 육국형법 위반으로 단기 1, 장기 3년형을 언도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49. 안학수(安鶴洙)

춘천사범학교 학생

안학수는 전투모 거부운동 등 항일운동이 전개되고 있던 춘천사범학교의 제1회 졸업앨범 편집위원으로 활동하며 졸업앨범에 국사봉과 무궁화를 그려넣었다가 발각되어 앨범은 압수당하고 고초를 당하였다.

 

50. 엄중환(嚴中煥)

당시 44

춘천 화천군 사내면

엄중환은 1919 11월 김민수(金敏秀지달원(池達源김광호(金光鎬홍종숙(洪鍾肅)과 함께 김조길(金祚吉)로부터 독립선언서를 전달받아 이를 숙지하고 만세시위에 참여하기로 준비하다가 체포되어 심문을 받았다.

 

51. 염희태(廉熙泰)

춘천사범학교 학생

염희태는 학교 설립초기부터 전투모 거부운동 등 항일운동을 전개하던 춘천사범학교에 1944년 백의동맹(白衣同盟)이 조직되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백의동맹은 일본 유학생이었던 양일민(梁一民)을 중심으로 조직된 단체로 김화군 창도에 본부를 두고 김화·철원·춘천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춘천사범학교에도 별도의 조직으로 백의민족해방단이 조직되어 항일 무장투쟁을 준비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활동 중 일제에 발각되어 철원경찰서에서 고초를 겪었으나 8·15를 맞이하여 석방되었다.

 

52. 유근택(劉根澤)

당시22

춘천 춘천읍 우두리

유근택은 1937 11월 이준환(李俊桓김시묵(金時黙김창경(金昌卿반영균(潘榮均) 등이 조직한 비밀결사 춘천농업학교 독서회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그들은 회비를 내어 조선의 현재와 장래 등의 책을 구입하여 읽으며 토론을 하고 독후감을 발표하는 등 민족사상을 고취하였다. 그러던 중 독서회 회원들은 졸업생들에게 졸업기념품으로 준 태극기가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유근택은 1942 10 2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 6월에 집행유예 4년형을 선고 받았다.

 

53. 윤경옥(尹璟玉)

당시 19

춘천 신북면 천전리

윤경옥은 경성사립 배화여학교에 다니고 있던 1920 3 1 3·1운동을 기념하고자 동료학생들과 더불어 기숙사 뒤쪽 언덕과 학교 마당에서 대한독립만세를 높이 외치고 시위하였다. 이 일로 체포된 윤경옥은 1920 4 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형을 선고받았다.

 

54. 윤도순(尹道淳)

1860. 7.12 ~ 1930.12.23

춘천 동면 감정리 107

윤도순은 춘천군 동면 감정리에 거주하면서 춘천읍내의 3·1독립운동을 계획하였다. 이 곳에서는 천도교 평강교구에서 독립선언서 150매를 보낸 것이 1919 3 4일 일제에 발각되자 3월 초에는 별다른 활동은 없었고 3월 말경에 독립만세운동의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춘천에서 독립만세운동이 표면에 나타난 것으로는 3 28일 천도교도의 만세시위가 있었다. 본래 춘천 천도교측의 계획은 천도교 봉훈(奉訓)인 그와 천도교 교구장인 이준용(李俊容) 3월 중순에 전개하기로 하고 추진되었던 일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북면 만천리·가연리·송암리를 돌아다니면서 주민을 계몽하다가 일경에 발각되어 피체되었다. 이로써 이곳의 만세운동계획 추진이 잠시 중단되어 3월 말경에야 비로소 전개되었던 것이다. 그는 이해 4 2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월형을 언도받아 1년여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55. 윤익섭(尹益燮)

1924. 9.20 ~ 1964.12. 1

춘천 소양 2정목 36

윤익섭은 1939년 춘천중학교 재학중에 교우인 이란(李欄)의 주선으로 독립운동가인 여운형(呂運亨)을 알게되고 그로부터 항일독립사상을 감화받아 교내에서 독서회(讀書會)운동을 전개하였다. 1941 3 23일 한일학생간의 민족차별과 식민지교육에 항거하여 한일학생간의 교내 충돌시에 선봉에서 대항하다 반일학생을 모두 검거할 때에 피체되었다. 1942 5 2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단기 1, 장기 3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56. 윤학준(尹學俊)

1912. 8.30 ~ 미상

춘천 효자31131

광복군 제3지대에 입대하여 본부 부관실에 근무하는 등 항일활동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57. 이경호(李敬鎬)

1925. 8.14 ~ 미상

춘천

1942년 서울에서 항일비밀결사 구조단(救朝團)에 입단하여 선전부장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시내 각 중학교 이상의 학생들에게 항일민족사상을 고취하는 한편 만주로 특파되어 재만동포와 지하조직을 결성하고 독립운동의 기회를 모색하던 중 1944년 만주에서 일경에 피체되었다고 한다. 그는 1945년 청진지방법원에서 징역 단기 1, 장기 3년형을 언도받아 옥고를 치르다가 광복을 맞아 출옥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58. 이광훈(李光勳)

1924.10.10 ~ 1943. 5.

춘천 소양 48

이광훈은 1938년 가을에 춘천중학교의 항일학생결사 상록회(常綠會)가 일경의 발각되어 전회원이 검거된 후 춘천중학생들은 민족적인 서적을 구독하고 독후감교환 및 토론을 통하여 항일의식을 제고하면서 민족의 진로를 찾고자 독서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독서운동의 활동 내용과 성격은 상록회와 거의 같은 것이었으나 이들은 조직체의 이름을 내걸고 활동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이미 상록회가 발각되었으므로 다시 조직체를 갖는다는 것은 오히려 활동에 불리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직의 형식은 없었지만 이들은 독서운동을 통하여 민족의식을 심화시켜 갔다. 그러던 중 독서운동에 참여하던 고제훈(高濟勳원후정(元厚貞김영근(金榮根박영한(朴泳漢권혁민(權赫民) 등이 민족차별에 분개하여 1941 3, 춘천중학교 교정에서 일인 학생들과 충돌한 일이 있었다. 그런데 싸움의 규모가 컸으므로 일경이 개입하게 되었고, 이때 한국학생들을 탄압했던 것은 물론이고 춘천중학생의 독서운동도 발각되었다. 이로 인하여 그도 일경에 피체되었다. 피체 후 그는 1년여동안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1942 5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단기 1, 장기 3년형을 언도받고 인천소년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59. 이교관(李敎寬)

1890. 4.29 ~ 1966. 5.11

춘천 사북면 오탄리 139

강원도 춘천군 사북면 오탄리 사람으로 1919 3월 말 독립만세시위를 벌이려고 준비하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민족대표의 독립선언 소식을 듣고, 자신의 마을에서도 독립만세시위를 계획한 이교관은 1919 3 31일 최기환(崔基桓김공모(金公模) 등과 4 1일 석양을 기해서 독립만세시위를 벌일 것을 논의하였다.

그는 이 계획에 따라 마을 주민인 윤복균(尹復均윤철쇠(尹鐵釗) 등에게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하도록 독려하였다. 이러한 활동 중 체포된 이교관은 1919 5 6일 경성지방법원 춘천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 6월을 받았고, 1919 6 26일 경성복심법원과 1919 9 4일 고등법원에서 상고 기각으로 형이 확정되었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이교관은 1920년 징역 9월로 감형되어 1920 6 4일 출옥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8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60. 이동화(李東華)

당시 39

춘천 춘천면 가연리

1919 11 29일 김조길(金祚吉)이 서울의 송춘근(宋春根)과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일으키기로 협의하고 그로부터 선언서(宣言書), 독립문서(獨立文書), 독립운동가(獨立運動歌), 대한민국임시정부성립축하문(大韓民國臨時政府成立祝賀文)  4통의 문서를 송부 받았다. 이동화는 이때 김조길이 와서 협의하자 독립운동자금 20원을 내놓고 뜻을 함께하기로 하였다. 그 후 그는 김조길에게서 국민신보를 받아 숙지하였으며 독립선언서 7뭉치를 전달받아 배포함으로써 군중을 독립운동에 참여토록 고무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었다.

 

61. 이란(李欄)

1925. 1.18 ~ 2011.11. 9

춘천 화원(花園) 1정목 213

이란은 춘천중학교 학생으로 독서운동 등에 참여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1938년 가을에 춘천중학교의 항일학생결사 상록회(常綠會)가 일경에 발각되어 전회원이 검거된 후 춘천중학생들은 민족적 서적을 구독하고 독후감 교환 및 토론을 통하여 항일의식을 제고하면서 민족의 진로를 찾고자 독서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독립운동가 여운형(呂運亨)이 그의 아버지 이임수(李林洙)와 친교를 맺고있어 당시 춘천을 자주 왕래하였는데 그때마다 그와 춘천중학생들은 여운형을 찾아가 상해임시정부와 세계정세 등에 관하여 듣고 민족적 각성을 높이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를 비롯한 춘천중학생들의 독서운동 활동내용과 성격은 상록회와 거의 같은 것이었으나 이들은 조직체의 이름을 내걸고 활동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이미 상록회가 발각되었으므로 다시 조직체를 갖는다는 것은 오히려 활동에 불리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직의 형식은 없었지만 이들은 독서운동을 통하여 민족의식을 심화시켜 갔다. 그러던 중 독서운동에 참여하던 고제훈(高濟勳원후정(元厚貞김영근(金榮根박영한(朴泳漢권혁민(權赫民) 등이 민족차별에 분개하여 1941 3, 춘천중학교 교정에서 일인 학생들과 충돌한 일이 있었다. 그런데 싸움의 규모가 컸으므로 여기에 일경이 개입하면서 한국학생들을 탄압하였던 것은 물론이고 이때 춘천중학생의 독서운동도 발각되었다. 이로 인하여 그도 일경에 피체되었다. 피체 후 그는 1년여동안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1942 5월에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단기 1년 장기 3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62. 이성득(李聖得)

춘천사범학교 학생

이성득은 전투모 거부운동 등 항일운동이 전개되고 있던 춘천사범학교의 제1회 졸업앨범 편집위원으로 활동하며 졸업앨범에 국사봉(國士峯)과 무궁화를 그려넣었다가 발각되어 앨범은 압수당하고 고문을 당하였다.

 

63. 이연호(李淵湖)

당시 21

춘천 춘천읍 소양통 1정목 99

이연호는 춘천고등보통학교의 항일학생운동 단체인 상록회(常綠會)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상록회는 1937년 남궁태(南宮珆) 등이 회원으로서의 자기 완성, 지도자로서의 책임 완수, 단결력 배양으로 헌신적 항일투쟁을 강령으로 하여 조직되었고, 이연호는 배근석(裴根錫)의 권유로 가입하여 1938년 회장을 맡아 회원을 확충하며 상록회를 이끌었다.

이렇듯 상록회의 주요회원으로 활동하던 중, 1938년 가을에 상록회의 조직과 활동이 일경에 발각됨으로 피체되었다. 피체 후 그는 1년여동안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1939 12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 6월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64. 이윤석(李胤錫)

1894. 2. 1 ~ 1953. 4. 4

춘천 신북면 우두리

이윤석은 1919 3 15일 정흥교(鄭興敎장기영(張基榮) 등과 가평(加平) 일대의 독립만세시위를 주동하였다. 그는 3 1일 이후 전국적으로 독립만세시위가 전개되고 있음을 알고, 3 14일 정흥교와 만나 독립선언서를 보여주고, 같이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약속하였다. 이에 3 15일 오전 9시에 독립만세시위를 가평읍에서 전개하니 참여하라는 격문을 정흥교가 1, 그가 2통 등 3통을 작성하여 정흥교가 적목리·단녕리·과대리·백비리의 연락을 담당키로 하고, 자신은 이곡리·화악리·소법리 일대를 담당키로 하였다. 이에 1통을 이만석(李萬錫)에게 주고 나머지 1통을 정재명(鄭在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