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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대한제국기

상세정보

1. 권득수(權得壽)

춘천의병장

권득수는 1907년 헤이그 특사사건으로 고종황제가 강제로 퇴위당하고, 한일신협약의 강제 체결로 내정권이 박탈당하였으며, 군대 해산에 의한 자위권 상실 등을 계기로 1907~1910년 사이 발생한 정미의병기에 춘천에서 활약한 의병장이다.

 

2. 김경달(金敬達, 金慶達)

1849. 3.15 ~ 1896. 2. 8

춘천 신동면 팔미리 70

김경달은 원래 춘천부의 포군이었는데 천성이 효도와 우애가 극진하여 지방에 널리 알려졌다. 특히 부·조부·증조부·고조부의 생일에까지 반드시 새로 난 음식을 바쳐서 '김효자'로 불렸다. 일본의 정치 경제적 침탈행위에 분개해 오다가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발생하고 일제의 내정간섭으로 단발령이 내려지자 의병에 참여할 뜻을 가졌다. 이때 류중락 이만응 등을 중심으로 한 선비와 백성들 천여 명이 춘천부에 모여서 습재 이소응을 대장으로 추대한 춘천의진이 형성되었다. 이소응은 대장으로 추대되면서 "관망하여 곧 호응하지 않는 자나 적의 편에 붙어서 군정(軍情)을 방해하는 자가 있다면 이것은 모두 이적 금수(夷狄禽獸)의 앞잡이요, 난신 적자(亂臣賊子)의 도당이니, 단연 군법을 시행하여 먼저 베고 후에 보고할 것이다." 라는 강경한 격문을 8도에 보내었다.

김경달은 이에 즉각 응하여 류중락 의진에 소속되어 활약하였다. 그러나 춘천의진은 대개 선비들로서 구성되었기 때문에 전술 전략에 익숙하지 못하였고, 신우균(申羽均) 김귀현(金龜鉉) 등의 지휘하는 관군의 공세가 급하고, 성중에서도 관군과 내통하는 자가 생기게 되니 차츰 군심이 흩어져서 형세를 유지하기 어렵게 되었다. 여기서 이소응은 병력을 증강하기 위하여 몸소 지평(砥平)군수 맹영재(孟英在)를 찾아가 협상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2 17( 1 5)에 제천의 의암 류인석 의진으로 들어갔다.

이때 김경달은 최삼여(崔三汝)의 지평 의진으로 편입되었다. 이들은 행군하여서 양근(楊根) 땅 미원(迷源)에까지 진출하였다. 그러나 처음부터 전세가 매우 불리한데다가 강력한 경군을 만나게 되자 군사들이 모두 흩어졌다. 이때 맹영재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은 의병장 최삼여를 죽여 의병진의 활약을 봉쇄하고 경군의 활동을 도왔다. 그러한 상황하에서도 김경달은 발길을 돌리지 않고 그대로 서서 총을 쏘다가 경군에게 생포되었다. 경군은 그의 용감성에 감탄하여 "네가 만일 우리편이 된다면 죽이지 않겠다." 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큰 소리로 "원래 나라의 원수를 갚고, 형체를 보전하기 위하여 나섰던 것인데 불행하여 잡혔으니 죽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어찌 뜻을 고칠 수 있느냐." 하며 그대로 총살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3. 김시영(金時永)

춘천의병장

김시영은 1907년 헤이그 특사사건으로 고종황제가 강제로 퇴위당하고, 한일신협약의 강제 체결로 내정권이 박탈당하였으며, 군대 해산에 의한 자위권 상실 등을 계기로 1907~1910년 사이 발생한 정미의병기에 춘천에서 활약한 의병장이다.

 

4. 김정삼(金正三)

미상 ~ 1907.11.

춘천 북산외면 청평리

김정삼은 1907 8월 일제의 한국군 강제해산에 따라 원주진위대의 장병들이 의병으로 전환하자 이들을 중심으로 의병을 규합하고 총독장(總督將)이 되어 항일활동을 폈다. 동년 9 7일 이성신(李星信)외 부하 600여명을 인솔하여 홍천에서 일병과 교전한 후 동년 11월 양구군 선안리에서 일병의 습격을 받아 전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5. 김춘득(金春得)

한말의병장

김춘득은 한말 일제의 침략에 직면하여 봉기한 운강(雲崗) 이강년(李康秊)의병장 휘하의 종사부(從事部)에서 활약하였다. 이강년의병장은 전기의병기에 문경에서 기의하여 류인석을 찾아가 의병부대의 유격장으로 활약했으며, 일본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더 큰 규모의 의병부대를 일으켜 1908 7월까지 500명을 이끌고 치열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6. 류봉석(柳鳳錫)

1857. 2.13 ~ 1909. 4.30

춘천 남면 발산리 202

류봉석은 1896 1월 영월에서 류인석이 호좌의병(湖左義兵)을 일으킬 때, 김경원(金敬遠류중락 등과 함께 참가하였다. 그 뒤 정미7조약 늑결 이후 일제의 국권침탈이 가속될 때인 1907 7월 경춘도계(京春道界)에서 다시 의병항전을 벌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7. 류영석(柳寧錫)

1875.11.18 ~ 1907. 8.19

춘천 남면 가정리

류영석은 화서 이항로의 문인으로 당대의 대학자이던 족숙(族叔) 류중악에게 수학하였다.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 공포로 을미의병이 일어나자 1896 1월 이소응의 춘천의병진에 류홍석 등과 함께 참가하여 가평 일대에서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1905 11월 을사조약 체결에 이어 1907 7월 광무황제 퇴위사건과 정미조약, 그리고 8월 군대해산이 강행되자 원주에서 민긍호, 제천에서 이강년, 홍천에서 박장호(朴長浩김노수(金魯洙) 등이 기병하였다. 이에 류홍석이 류중악 등과 모의하고 춘천 가정리 항곡(恒谷)에서 의병을 일으킬 때 류제곤·박선명·박화지 등과 함께 의진에 가담하여 춘천 진병산, 가평 주길리(珠吉里) 등지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혈전을 벌였다. 그러나 류홍석 의진은 관군에 비하여 장비가 너무나도 열세였고 훈련 또한 부족하였다. 그리하여 주길리 전투에서는 의병장 류홍석이 부상당하였고, 류영석은 음력 8 19일 전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8. 류인석(柳麟錫)

1842. 1.27 ~ 1915. 1.29

춘천 남면 가정리

류인석은 14세 때 양평의 화서 이항로에게 글을 배웠는데 1868년 화서가 별세한 뒤 중암 김평묵과 종숙인 성재 류중교를 스승으로 모시며 위정척사(衛正斥邪)운동에 직접 참여하게 되었다. 화서의 문하에서 의병장이 가장 많아 나왔는데, 면암 최익현·류중교·김평묵·의암 류인석 등이 그 정신을 이어받은 당대의 석학들이었으며, 위정척사 사상을 실천에 옮긴이가 의암으로서 병자조약에 반대 상소를 올린 바도 있었다. 따라서 20년 후 제천(堤川)에서 강학하고 있던 의암이 전기 의병운동의 상징적 존재로서 전국 의병진의 중심적 세력이 되었던 것은 필연적인 사실로 볼 수 있다.

1895 8월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발생하자 거의할 마음을 굳히고 11 28일 문인인 이필희·서상렬·이춘영·안승우 등의 의병진에 격려의 글을 보냈다. 당시 의암은 상중에 있었기 때문에 가정리에서 여막(蘆幕)을 지키고 있었다. 이른바 제천 의진의 예하 부대들이 제천으로 진군, 양근·지평(砥平원주·제천에 이르는 일대의 의병이 모두 제천에 집결하게 되어 대부대를 형성하였다. 이렇게 대규모의 의진이 구성되자 내부적 단결을 굳건히 하고 또 광범한 지역에 영향을 미치기 위하여는 명망있는 인물을 중심으로 하는 강력한 지도 체제가 요구되었다. 그들은 의암을 찾아가 대장의 소임을 맡아 줄 것을 눈물로 호소하였다. 그는 상중에도 불구하고 권도(權道)를 택하여 출진할 것을 허락하고 영월에서 총대장에 추대되었다.

류인석의진은 중군(中軍)에 이춘영 부대, 선봉 김백선 부대, 유격장에 이강년 부대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안동의 의병장 권세연(權世淵)과도 이강년을 통하여 상호 관계를 맺고 있었다. 류인석의진은 제천을 중심으로 충청도·경상도·강원도의 3도가 접경하는 충주·단양·원주·영월·안동·문경을 연결하는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이 거대한 의병 세력은 충주의 일군(日軍)수비대 공격에서 그 모순 특히 신분상의 모순이 드러나 결국 평민출신 김백선(金伯善)을 처형하게 되고, 그 사건이 급속한 약체화 현상을 가져왔다. 그 결과 독자적으로 활약하면서 전국적인 유기체적 존재이었던 이강년 부대를 제외한 다른 부대들은 의병장을 잃고 사산(四散)되어 각지에서 지엽적인 활동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주요 막료들이 차례로 패망하자 의암은 잔존자와 더불어 평안도·황해도의 의진을 찾아가나, 의병운동의 한계를 느끼고 요동으로 떠났다.

압록강을 도강(渡江)함에 앞서 1896 7월 초산 아이성(楚山 阿夷城)에서 '재격백관(再檄百官)'이라는 장문의 격문(檄文)을 지어 천하에 발표하였다. 그는 격문에서 집권관료들을 통박하고 이어서 "지금 나라를 버리고 압수(鴨水)를 건너감은 기필코 원수를 갚고 다시 우리나라에 예의지방(禮儀之邦)을 세우기 위한 것이나, 그렇지 못하면 이역(異域)에서 우리의 옷을 입고 우리의 머리를 하고 우리의 구제(舊制)를 지켜 죽어서 귀국할 것이다" 이렇듯 철저한 주자학적 명분론에 입각하여 비장한 각오로 요동으로 들어갔다. 7 20일 압록강을 건넌 의병진은 중국 관헌에게 이범직(李範稷)과 부하 장졸이 피살당하고 무기도 빼앗겼다. 의암이 요동으로 간 것은 청병(請兵)하고자 한 것인데 오히려 자신은 물론 부하 219명의 의병과 함께 무장해제를 당하였다. 뿐만 아니라 219명의 의병은 본국으로 되돌려졌다.

그후 1897 5월 회인현 호로두(胡蘆頭)에 정착하여 재기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이렇듯 의암이 다른 의진과는 달리 정부의 회유에 끝까지 굴하지 않고 군대를 이끌고 만주로 돌아가 재기의 기회를 노렸다는 것은 일찍이 해외 독립운동 기지 구축을 착수하게 된 흔적으로서 주목할 만한 일이다. 1898 8월 의암은 고종의 소명을 받고 일시 귀국하였으나 초산에서 상소문만을 보내고 알현하지는 않았다. 이듬해 1899 1월 요동으로 들어가 동지들과 이른바 의체(義諦)를 상약(相約)했는데 그 목적은 전통적인 국제(國制)와 예의를 지켜 장차 재건의 기틀을 마련하고자 한 것이다. 그후 통화현 오도구에 거처를 정하자 이정규(李正奎백삼규(白三奎박정수(朴貞洙김상태(金尙台)  80여 명이 의암을 쫓아와 있었다. 여기에서 그는 강학과 저술에 전념하였다.

1900년 그가 다시 귀국한 것은 중국의 의화단 사건 때문이었다. 귀국 후 의암은 황해도 평산(平山)과 평안북도 용천·태천·개천 등지에서 강학하였는데 평산은 종숙인 류중교가 강학하던 곳이고, 태천은 동문 박문일(朴文一)이 강학하던 곳이었기 때문에 자리잡기에 좋은 여건이 마련되어 있었다. 그의 문하에 다시 수많은 인재가 운집하여 그들이 모두 훗일 을사의병으로 활약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가 다시 출국할 때 그를 수행하여 해외 독립운동의 선구적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중 전덕원(全德元백삼규(白三圭이진용(李鎭龍) 등이 대표적 인물이다. 이렇게 인재를 양성하는 한편 향약(鄕約)을 전국적으로 추진하여 일진회(一進會)에 대항하는 조직을 구축하고자 하였다. 그는 이 일을 위하여 충청도·황해도·평안도 등지를 다니며 향약의 조직과 시행을 권장하였다.

1905 10월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고 일제의 침략 야욕이 노골화 되자 의암은 60여세의 노구를 이끌고 전국 유림에 통문을 돌려 비록 병토(兵討)는 못할지라도 언토(言討의토(義討)라도 하자는 운동을 전개하고 아울러 백인해(白仁海전용제(全庸濟)를 청에 파견하여 원세개(袁世凱)에게 청병하였다. 이때 문인 박세화(朴世和원용팔(元容八정운경(鄭雲慶) 등이 의병을 일으켰다. 의암은 새로이 결심을 하고 요동으로 거수지행(去守之行)하기로 하였다. 이때 그는 죽음이나 개별적인 항거는 어리석은 일이라고 주장하고 어디까지나 살아서 국권회복을 위한 조직적인 행동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즉 해외기지를 구축하여 장기적인 무력항쟁을 모색하고자 한 것이다. 이를 위하여 요동으로 가던 중 각기병으로 용천에 머물고 말았다. 결국 좌이수의(坐而守義)하기로 결심하고 그후 춘천과 서울을 오르내리며 새로운 항쟁을 대비하였다.

1907 8월 정미7조약(丁未七條約)이 체결되고 군대 해산마저 당하자 의병운동은 전민족적 항쟁으로 번지고 의병에 참가하는 신분 계층도 다양화되는 등 발전적으로 전개되고, 이를 저지하려는 일제의 노력도 극렬화 되어갔다. 의암은 전국적인 조직적 성토대회로 적을 제압해야 된다고 주장하고 이를 위해 상경하였다. 그리고 의병운동은 국외로부터의 원조가 없이는 종국에 실패할 것이라고 보고, 이를 위하여는 국외에 항구적인 항쟁 기지를 마련하여 그곳으로부터 무기가 공급되고 본토회복 작전을 계획하여야 한다고 판단하고 원산으로 출발하였다. 이미 그의 고향집과 가족은 일군에 의해 불태워지고 참살 당하는 비운을 겪었다. 1908 7월 원산에서 해로로 연해주 블라디보스톡으로 향하였다. 이때 그의 문인 50여 명이 수행하였는데, 박정빈(朴正彬이진룡(李鎭龍) 등 의병장이 섞여 있었다. 떠나기에 앞서 의암은 전국 의병창의소에 대하여 일국진기(一國盡起)와 지구전(持久戰)이 무엇보다도 소중하다고 지적하였다.

블라디보스톡에 도착한 의암은 그곳에서 활약 중인 최재형(崔才亨이범윤(李範允) 등의 의병진을 방문 격려하고 이상설(李相卨안중근(安重根) 등을 만나 해외에서의 무력항쟁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관일약(貫一約)이란 의병규칙을 만들어 질서를 잡았다. 즉 애국(愛國애도(愛道애신(愛身애인(愛人)의 마음을 길러 장차 나라를 되찾으려는 원대한 계획이었다. 그리고 그는 성급하게 본국 침공(本國侵攻)을 하면 도리어 효과는 적고 피해만 클 뿐 아니라 무엇보다 소중한 인명만 상할 터이니 원대한 장기적 계획을 세워야 된다고 역설하였다. 그후 의암이 예측한대로 국내의 의병운동은 급격히 퇴조(退潮)하게 되었다.

1910년 초 연해주 의병 연합체가 형성되자 이범윤·이남기(李南基이상설·정재관(鄭在寬)의 추대로 13도의군도총재(十三道義軍都總裁)의 직에 올랐다. 이어 '13도 대소동포(十三道大小同胞)에게 통고'하는 포고문을 발표하여 2천만 국민의 단결과 결사 보국을 호소하였다. 그리고 조직적 운동 방안으로서 전국 각 도··면에 총재·총령·참모·총무·소모·규찰·통신 등의 직책을 두어 전국민이 일제히 일어나 국망통곡운동(國亡痛哭運動)을 벌일 계획을 세우고 실천하고자 계획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술국치를 당하자 '파천우아령해삼위(播遷于俄領海蔘威)'라는 상소문을 고종에게 보내 파천하여 망명정부를 수립할 것을 종용하였다. 한편 문인 백삼규·김기한(金起漢장덕중(張德中) 등을 북경에 파견하여 원세개와 정부요인에게 서한을 보내어 한중 공동항일(漢中共同抗日)을 권하였다. 그러나 중국측에서는 내용은 찬성하나 국력이 미약하므로 시기상조라는 회신을 받았다. 그리고 이상설과 함께 성명회(聲鳴會)를 결성하고 그 회장으로서 일제의 침략을 규탄하는 성명서를 열강정부에 발송하였고, 일본정부에도 항의하는 각서를 보냈다. 그러나 그 어느 방법으로도 사태를 되돌릴 수는 없었다. 그리고 러시아의 대일정책 때문에 끊임없이 탄압이 가해져 독립운동을 효과적으로 전개할 수 없었다.

이때 의암은 문인들에게 의를 지킬 세 가지의 길 첫째 나라에 보화(保華)하고, 둘째 몸으로 수화(守華)하고, 셋째 몸으로 순화(殉華)하는 길을 제시하였다. 이 세 가지 중에서 나라에 보화하는 것은 나라를 되찾은 연후에 가능한 일이고, 몸으로 순화하는 것은 일국인(一國人)이 다 같이 해야 할 일이므로 불가능한 일이니 오직 할 수 있는 것은 몸으로 수화(守華)하는 일이라 하여 동지들과 더불어 이 길을 택하기로 결심하였다. 이 논리에 따라 국내의 모든 지사들은 국내에 머물지 말고 간도로 나와서 수절(守節)하자고 호소하였다. 의암 자신도 1913년 블라디보스톡에서 나와 간도로 거점을 옮겼다. 그후 서풍현·흥경현을 거쳐 1915년에는 봉천성 관전현 방취구에 이르러 신병으로 신음하다가 74세를 일기로 타국에서 한 많은 일생을 마쳤다. 70노구로 병마에 시달리면서 탈고한 책이 우주문답이다. 나라를 잃은 슬픔 속에서 전통의 구제(舊制)를 회복하고자 하였으나 중국마저도 서양의 공화제(共和制)를 채택하게 된 현실을 바라보면서 슬픈 마음으로 저술한 것이다. 이것은 소의신편(昭義新編)과 아울러 의암집(毅菴集)상하권에 수록되어 편찬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9. 류제곤(柳濟坤)

1877.10.18 ~ 1948.12.25.

춘천 남면 가정리

류제곤은 1907 8월 류중악·류홍석·박선명·박화지·김경달·권일선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가정리 여의내골에서 탄약과 실탄을 제조하는 한편 군사훈련도 하며 서울 진공작전을 준비하였으나 가평 주길리(珠吉里) 전투에서 패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는 이 전투에서 일군의 칼에 맞아 큰 부상을 당하고 숨어서 치료하던 중 1910년 우리나라가 일제에 병합을 당하여 중국으로 망명하여 해외항일기지를 구축하는 등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그러나 1914년 일경의 급습으로 가족 전체가 몰살당하고 그 자신도 머리부상을 입어 후유증으로 시력을 잃게 되자 1915년 다시 가정리로 돌아와 일생을 고생하다가 1948 12 25일 병사하였다. 부인 진천 송씨 또한 윤희순 의사를 도와 의병자금을 모금하는 등 의병활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10. 류제함(柳濟咸)

1884.10.26 ~ 1964. 5.13

춘천 남면 가정리

류제함은 을미의병의 정신적 지주이었던 의암 류인석의 양자이다. 부친 류인석은 을미의병 실패 후 요동으로 망명하였다가 일시 귀국하였으나 정미의병(丁未義兵)때인 1907년 음력 1월 다시 망명의 길을 떠나 블라디보스톡으로 향하였다. 그후 류제함은 망명한 부친을 대리하여 국내 의병운동을 지원하였다. 1908 2월 의암이 국내에서 의병장으로 활약하고 있는 운강 이강년에게 보내는 격려서신(激勵書信)과 격문(檄文)을 김호원(金浩元)과 함께 전달하여 운강의 의병운동을 고무시키는데 일익을 담당하였다. 1908 6월 의암이 망명한 후 가족에 대한 적의 감시가 점차 엄중하여져 국내활동이 불가능해짐에 따라 의암을 따라 블라디보스톡으로 망명하여 의암의 활동을 뒷바라지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11. 류중락(柳重洛)

1842. 4.18 ~ 1922.12. 5

춘천 남면 발산리 341

류중락은 1895 8월에 명성황후가 시해 당하고 개화정부가 단발령을 내리자 류중악·류봉석·이소응 등과 의병을 선창하였고 이듬해 초에는 영월에서 류인석을 의병대장으로 추대하고 의병항쟁을 결의하였다. 1907년 한국군 강제 해산을 계기로 정미의병이 일어나자 경기도 가평에서 다시 일어나 가평 주길리 전투에서 격전을 치렀으나 패전하고 은신하여 후진교육에 전력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12. 류중악(柳重岳)

1843.11.12 ~ 1909. 5.23

춘천 남면 하정리

류중악은 1868년부터 1875년까지 화서·중암·성재의 문하에서 주자학을 공부한 거유이다. 일찍이 이근원·류인석과 함께 위정척사론을 주장하였다. 1876년 병자수호조약이 체결되자 이근원·류인석 등 50여 명이 척양(斥洋)하는 상소를 올렸고 1895년 명성황후 시해됨을 통탄히 여겨 고향 가정리 주산에서 통곡문(痛哭文)을 지어 발표하였다. 1895 11월 단발령이 내려지고 왜병의 침략이 노골화 되자 지평 용문산 아래에서 류중악은 류홍석·이근원·이소응 등과 같이 회동하여 거의할 것을 결의하고 류인석을 의병대장으로 추대하였다.

1896 1월 류중악은 이소응과 함께 춘천에서 수천 명의 의병을 소모하여 의암(衣岩)에 의병소를 두고 의암·진병산에서 적과 접전하였다. 먼저 유사 조인승을 잡아 주살하고 춘천 창의포고문을 선포하였다. 그리고 군자금 3백 냥씩을 추렴하고 각지의 의병들과 연락하여 연합전선을 구상하였으나 2월에 이춘영이 전사한 후 각기 흩어져 산진(散陣)하였다.

1907 7월 춘성군 가정리 여의내골餘義川谷 주산에서 류홍석과 함께 의병 6백여 명을 모아 군사훈련을 시켰다. 그러나 군자금이 없고 탄환이 부족하자 류중악은 자진하여 농우(農牛) 한 필을 팔아 군자금을 제공하고 의연금을 모아 탄약제조를 지원하였다. 그후 가평 주길리에서 적과 접전하였으나 역부족으로 패전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13. 류태석(柳台錫)

1858. 4.20 ~ 1933. 8.11

춘천 남면 가정리

류태석은 을미의병 당시 1896 1월 이소응의 춘천의진에 가담하여 류홍석과 같이 가평일대에서 의병항전을 전개하였다. 그후 1907년 정미의병이 일어나자 류홍석을 중심으로 재기한 춘천의진에 참가하여 가평 주길리에서 일본군과 혈전을 벌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14. 류하석(柳夏錫)

1849. 2.28 ~ 1907.10.28

춘천 남면 가정리 528

류하석은 1895 12 15일 류인석이 영월에서 거의하자 1896 1월에 의병진에 입진하였다. 동년 7월에 류인석이 의병의 근거지를 마련하고 항일정신의 확산을 위하여 만주(滿洲)로 갈 때 동행하였다. 1907 10 28일 만주에서 류인석을 도와 활동하다가 귀가하였는데 의병의 정신적 지주인 류인석을 잡고자 혈안이 된 일군의 방화로 참살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15. 류홍석(柳弘錫, 鴻錫)

1841. 1. 6 ~ 1913.11.21

춘천 남면 가정리

류홍석은 강원도 춘천 출신으로 의암 류인석의 재종형이다. 1895년 명성황후가 일제의 사주에 의하여 시해 당한 을미사변이 발생하고, 이어서 11월 단발령이 내려졌다. 이에 통분함을 금치 못하여 일제에 복수할 것을 결의하고 류중락·류봉석·김경달과 함께 거의하였다.

그후 호좌의진이 형성되어 류인석을 의병대장으로 추대하자 이에 합류하여 서무(庶務)를 관장하였으며, 수 차례 적과 접전하였다. 이때 의병들이 관군의 의병 해산책에 회유되어 이탈자가 늘어가자 통탄하여 '고병정가(告兵丁歌)'를 작사하여 선포하고 애국심을 고취하였다. 그러나 세부득이하여 독자적인 활동을 전개하던 이강년을 제외한 이춘영·안승우·김백선 등 의병장이 전사하자 의진을 해산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1907년 민긍호·이강년과 재기를 도모하였으나 실패하고, 다시 춘천·원주 등지에서 류영석·류제곤·박선명등에게 명하여 의병 600명을 모집하여 가평에서 왜적과 교전하다가 부상을 당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만주 환인현(桓仁縣)에 망명하였다가 1913 11 21일 그곳에서 병사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16. 마도현(馬道賢)

1882. 1.24 ~ 1951. 5.17

춘천 북산면 물노리 138

마도현은 부친 마정삼(馬正三)이 춘천 일대에서 항일 의병투쟁을 전개하다 1907년 일본군에 피체되어 총살당한 후 부친이 사용하던 화승총 7정을 집안 깊숙이 숨겨 놓고 부친의 원수를 갚을 기회를 기다리던 중, 역시 1908년 류중락 의진에 속하여 의병투쟁을 전개하다 피체되어 순국한 박영관(朴永寬)의 아들 박순구(朴順九)와 의기 투합하여 마침내 서로 협력해서 항일투쟁에 나서기로 맹약하였다.

그리하여 동생 마만봉(馬萬奉), 사돈인 안이순(安二淳안귀봉(安貴鳳) 형제 인척인 전봉학(全鳳學) 등을 가담시켜 총원 12명으로 장총단(長銃團)을 구성하여 화승총과 사냥총으로 무장하고 1921 10월이래 만 6년 동안 인제 가리산을 본거지로 하여 전후 19회에 걸쳐 홍천·춘천·인제·양구 등지의 경찰관 주재소를 습격하고 일경을 사살 처치하며 1924년부터는 부호층으로부터 군자금을 모금 또는 징수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다 1927 11월 일제 군경의 대규모 포위수색작전으로 전원 피체되었다. 이 일로 혹독한 고문을 당한 뒤 1928 10 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5년을 받고 3년여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17. 마정삼(馬正三)

1857. 3. 20 ~ (1908)

춘천 북산면 물노리

마정삼은 전기 을미의병기 류인석 의병진에 참전하여 분장(分長)으로 활동하였다. 또한 후기의병기인 1906 10월 의병이 다시 봉기하자 강원도 춘천 지방을 중심으로 의병을 모집하고 군자금 모금운동을 펴던 중 1907년 강원도 인제에서 일본군에 피체되어, 1907 6 6일 강원도 홍천 두촌면에서 일본군에게 불법적으로 총살당해 순국하였다. 1928년도 동아일보 및 조선일보 기사에 따르면 마정삼(馬正三)의 아들 마도현(馬道賢마뇌병(馬雷炳마만봉(馬萬奉)  3형제도 순국한 부친의 유한(遺恨)을 이어서 무려 10년간 강원도 일대에서 의병활동을 하다가 15년에서 5년까지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18. 민영문(閔泳文)

춘천의병장

민영문은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으로 을미의병이 전개되자 춘천에서 유생, 포수들을 모아 의거하였다. 1896 1월 춘천의병이 류중락과 이만응을 중심으로 봉기하자, 감역(監役)으로 있던 홍시영(洪時永)과 선비 이면수(李勉洙)가 몰래 곳곳에 방문을 붙이고 사발통문을 돌려 인심을 격동하였으며, 민영문은 이수춘(李守春류홍석과 더불어 고을 사람들을 격려하여 적극 참여토록 하였다.

 

19. 박현성(朴玄成)

춘천의병장

박현성은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으로 을미의병이 전개되자 춘천에서 유생, 포수들을 모아 의거하였다. 1896 1월 춘천의병이 류중락과 이만응을 중심으로 봉기하자, 감역(監役)으로 있던 홍시영과 선비 이면수가 몰래 곳곳에 방문을 붙이고 사발통문을 돌려 인심을 격동하였으며, 민영문·류홍석·이수춘(李守春)은 고을 사람들을 격려하여 적극 참여토록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춘천에서 상업활동을 하던 박현성은 유생 정인회, 그리고 군인으로 신망이 있던 성익환과 합세하여 포군(砲軍) 400여명을 의병에 가담시켜 의병진의 전력을 크게 진작시켰다.

 

20. 박화지(朴華芝 또는 朴化和)

춘천 남면 후동리

박화지는 1907년 고종황제의 강제 퇴위와 군대해산 등으로 정미의병이 봉기하자 춘천에서 의거하여 활동하였다. 그는 류홍석·류영석·류제곤·박선명 등과 함께 의병 600여명을 모아 춘천 진병산과 가평 주길리에서 일군과 맞서 싸웠으나 무기의 열세로 패하였고, 의병은 각지로 흩어졌다.

박화지는 의병이 흩어지자 집에 돌아와 숨어있었는데 일군이 마을을 급습하여 무고한 주민을 잡아다가 의병이 숨어 있는 곳과 박화지가 있는 곳을 알려주지 않으면 모두 죽이겠다고 협박한다는 말을 전해 듣고 내가 나가 죽으면 주민이 모두 안전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동리와 의병, 주민들의 안전을 위해 일군 앞에 스스로 나가 체포되었다. 그는 갖은 고문과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의기를 지키다가 끝내 일군에게 죽음을 당하였다.

 

21. 석오석(石五錫)

미상 ~ 1907.11.28

춘천 서면

석오석은 의병으로 강원도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1907 7 정미7조약에 따른 군대해산으로 해산군인들이 대거 의병대열에 참여함으로써 전국적인 국민전쟁으로 확대된 후기의병이 봉기하자 석오석은 정기공(鄭基公)과 같이 의병운동에 투신하여 강원도 일대에서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다가 그는 일본군 춘천수비대에 피체되어 1907 11 28일 강원도 춘천 봉의산에서 정기공과 함께 피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22. 성익현(成益鉉, 成益顯, 成益賢)

춘천

성익현은 관동창의대장으로 강원 삼척, 경북 울진·평해·봉화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성익현은 후기의병기인 1907년 음력 7월경 정경태(鄭敬泰)를 도총장(都總將), 변학기(邊學基)를 도총독(都總督), 이상렬(李相烈)을 부장(部將)으로 삼고 의병을 일으켜 관동창의대장이 되었다.

그리하여 성익현은 1907년 음력 7 25일 이들 의병 지도부와 부하 의병 30여 명을 거느리고 경북 평해 읍내에 설치된 경무고문분파소를 습격하여 권총 2정과 도검 2자루 등 무기, 그리고 군복 등 군수품을 노획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음력 7월 하순에는 부하 의병 40여 명을 이끌고 경북 울진군 읍내를 공격하여 군청 무기고에 있던 화승총 25, 활과 화살 등 병기를 노획하여 의병부대의 화력을 증강하였다. 그런 다음 그는 같은 해 음력 9 12일 이강년 의진의 중군장 정정진(鄭正眞)과 합세함에 따라 수백 명에 달한 의병부대를 진두 지휘하여 울진군 읍내를 재차 공격하였다.

여기에서 이들 연합의병부대는 일본 경찰들을 소탕하여 읍내를 완전 장악한 뒤 군청·경무서·우체국과 그 부속관사, 일본인 및 부일배의 가택 10여 호 등을 소각하면서 군자금품을 수합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10월 하순 울진군 원남면에서 군자금을 징수하고, 이듬해 4 5일에도 울진군 서면에서 군자금품을 징발하였다. 이후 다시 항일 무장투쟁에 나선 성익현 의진은 이강년 및 김상태(金相泰) 의진과 연합하여 1천여 명의 대규모 연합의진을 형성한 뒤, 의진의 근거지를 마련하기 위해 경북 봉화군 내성을 점령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이들 연합의병부대는 1908 5 18일 내성을 공격하러 가는 길에 봉화군 서벽리에서 일본군 정찰대를 발견하고 이를 공격하여 하사 1명과 순사 3명 및 통역 1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어 곧바로 내성을 포위 공격하였으나 일본군 수비대의 반격으로 성공하지 못하자, 이후에는 강원도 태백산·경상도 일월산 등 산간지역을 중심으로 활발한 유격전을 전개하는 등 항일 무장투쟁을 계속하다가 잠적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23. 심상희(沈相熙)

춘천의병장

심상희는 1907년 헤이그 특사사건으로 고종황제가 강제로 퇴위당하고, 한일신협약의 강제 체결로 내정권이 박탈당하였으며, 군대 해산에 의한 자위권 상실 등을 계기로 1907~1910년 사이 발생한 정미의병기에 춘천에서 활약한 의병장이다.

 

24. 안귀봉(安貴鳳)

1900. 3.13 ~ 1984.10. 3

춘천 북산면

안귀봉은 춘천 일대에서 항일 의병투쟁을 전개하다 1907년 일본군에 피체되어 총살당한 외삼촌 마정삼(馬正三)의 아들인 마도현(馬道賢마만봉(馬萬奉) 형제와 역시 항일 의병투쟁을 전개하다 1908년 일본군에 피체되어 총살당한 박영관(朴永寬)의 아들 박순구(朴順九)가 장성한 뒤 서로 협력하여 부친의 원수를 갚고 일제 침략세력을 토멸키로 맹약하고 1921 9월경부터 화승총과 사냥총으로 무장하여 홍천(洪川) 일대를 중심으로 활동을 개시할 때에 형인 안이순(安二淳)을 따라 그들과 뜻을 같이하기로 하고 가담하였다.

그 후 마도현의 친인척인 마남룡(馬南龍전봉학(全鳳學) 등을 추가 가담시켜 총원 12명으로 장총단(長銃團)을 구성하여, 7년여 동안 인제 가리산을 본거지로 하고 홍천·춘천·인제·양구(楊口) 등지를 무대로 전후 19회에 걸쳐 경찰관 주재소를 습격하고, 일경을 사살 처치하며, 부호층으로부터 군자금을 모금 또는 징수하는 등의 활동으로 이 일대의 일경을 괴롭히다, 1927 11월 일제 군경의 대규모 작전으로 전원 피체되었다. 이 일로 혹독한 고문을 당한 뒤 1928 10 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6년을 받고 4 10여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25. 안삼순(安三淳)

(1894) ~ 1941.11. 1

춘천 동면 감정리

안삼순은 춘천 일대에서 항일 의병투쟁을 전개하다 1907년 일본군에 피체되어 총살당한 외삼촌 마정삼의 아들인 마도현·마만봉 형제와 역시 항일 의병투쟁을 전개하다 1908년 일본군에 피체되어 총살당한 박영관(朴永寬)의 아들 박순구가 장성한 뒤 서로 협력하여 부친의 원수를 갚고 일제 침략세력을 토멸키로 맹약하고 1921 9월경부터 화승총과 사냥총으로 무장하여 홍천 일대를 중심으로 활동을 개시하였다.

이에 그의 형제인 안이순(安二淳안귀봉(安貴鳳)과 외사촌 마남룡(馬南龍), 사돈지간인 전봉학(全鳳學) 등이 그들과 뜻을 같이하여 잇달아 가담하면서 장총단(長銃團)을 구성하여 인제 가리산을 본거지로 하고 홍천·춘천·인제·양구 등지를 무대로 전후 19회에 걸쳐 경찰관 주재소를 습격하고, 일경을 사살 처치하며, 부호층으로부터 군자금을 모금 또는 징수하는 등의 활동을 벌여 나가자, 그도 같이 가담하여 주로 군자금 모금을 위한 부호층의 자산상태 정보 수집, 행동대원에 대한 길 안내 등의 지원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1927 11월 일제 군경의 대규모 토벌작전으로 다른 단원들과 함께 피체되어, 1928 10 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26. 안이순(安二淳, 泰善)

1889.11.17 ~ 1955. 4.20

춘천 동면 감정리 602

안이순은 춘천 일대에서 항일 의병투쟁을 전개하다 1907년 일본군에 피체되어 총살당한 외삼촌 마정삼의 아들인 마도현·마만봉 형제 및 역시 항일 의병투쟁을 전개하다 1908년 일본군에 피체되어 총살당한 박영관(朴永寬)의 아들 박순구와 서로 협력하여 부친의 원수를 갚고 일제 침략세력을 토멸키로 맹약하고 1921 9월경부터 화승총과 사냥총으로 무장하여 홍천 일대를 중심으로 활동을 개시하자 뜻을 같이하여 가담하였다.

그 후 동생 안귀봉과 마도현의 친인척인 마남룡·전봉학 등을 추가 가담시켜 총원 12명으로 장총단(長銃團)을 구성하여, 7년여 동안 인제 가리산을 본거지로 하고 홍천·춘천·인제·양구 등지를 무대로 전후 19회에 걸쳐 경찰관 주재소를 습격하고, 일경을 사살 처치하며, 부호층으로부터 군자금을 모금 또는 징수하는 등의 활동을 주동하여 이 일대의 일경을 처단하다 1927 11월 일제 군경의 대규모 포위수색으로 전원 피체되었다. 이 일로 혹독한 고문을 당한 뒤, 1928 10 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0년을 받고 6 9개월여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27. 윤희순(尹熙順)

1860. 6.25 ~ 1935. 8. 1

춘천 남면 발산리

서울 출신으로 16세 때 고흥유씨 류제원에게 출가해 류홍석의 며느리, 류중교의 증손부가 되었다. 1895년 명성황후시해사건(을미사변)과 단발령이 강행되자 시아버지인 류홍석이 류중악(柳重岳류중락(柳重洛) 등의 춘천 유림과 더불어 이소응을 의병대장으로 추대하고 춘천과 가평 일대에서 의병작전을 전개할 때, 윤희순은 안사람의 의병가·병정의 노래 등 수십 수의 의병가를 지어 의병의 사기를 진작시키고 직접·간접으로 춘천의병 활동을 적극 후원하였다.

이 때 춘천의병이 무기의 열세로 적의 공격을 못이겨 류홍석이 재종제인 류인석의 제천의병(湖左義陣)에 가담하였고 또 류인석과 함께 요동에 갔다가 귀국하는 동안에, 다른 지방에서 온 의병에게 마을 부녀자와 협력하여 밥을 지어주고, 빨래를 해주는 등 의병의 뒷바라지에 힘썼다.

그 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고 이어 1907년 헤이그밀사 사건을 구실로 고종황제가 퇴위하고 한국군대마저 해산되자 각지에 흩어진 해산군에 의해 정미의병이 봉기하였다. 이에 같은 해 8월 류홍석은 족숙인 류중악 등과 모의하고 가정리(柯亭里) 항골恒谷에서 류영석·류봉석·박화지 등과 더불어 의병 600명으로 가평 주길리(珠吉里) 등지에서 치열한 혈전을 벌였다.

이 때 의병자금과 탄약·군량이 부족하게 되자 윤희순은 향민으로부터 군자금을 모금해 여의내골餘義川谷주산(周山)에서 놋쇠와 구리를 구입하고 무기와 탄환을 제조, 공급하였다. 한편으로는 의병가를 지어 부르게 하여 의병 훈련을 진작시켰다. 류홍석이 주길리 전투에서 부상당한 뒤 제천 장담리(長潭里) 류중교의 집에 머무르고 치료하면서 의병 재조직을 계획하던 중 1910 8월 국치를 당하게 되었다. 류홍석이 왜적의 통치를 받을 수 없다 하여 먼저 만주로 이주하였다.

이후 1911년 윤희순 가족 역시 류홍석을 뒤따라 만주로 들어가서 의병 재거를 도모하게 되었다. 그러나 1913 12월 류홍석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고, 1915 1월 이미 망명해 온 류인석이 죽었으며, 남편인 류제원 또한 같은 해 10월 회인현(懷仁縣)에서 죽었다.

이에 윤희순은 대한독립단에 가입해 투쟁하는 돈상(敦相민상(敏相) 두 아들을 포함한 자손들에게 희망을 걸었다. 그러나 맏아들인 돈상이 그의 처남 음성국(陰聖國)과 함께 일본경찰에게 잡혀 고문 끝에 1935 7 19일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28. 이경응(李景應)

1865. 2.27 ~ 1947. 2.28

춘천 남면 하방곡리

이경응은 1896년 을미의병시기 춘천의진(春川義陣)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1895년 일제의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 공포로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하였다. 이와 같이 전국적으로 전개된 의병활동 중 그가 참여한 춘천의진의 초기 의병장은 이소응이었다. 1896 1월 이만응, 류중락 등을 중심으로 한 선비와 백성등 1,000여 명이 춘천부에 모여 이소응을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거의하였다. 처음 춘천의진은 적군을 격파하는 등 기세를 올렸으나 관군의 공세가 급박해지고 성중에서도 관군과 내통하는 자가 생기게 되니 군심(軍心)이 흩어져서 형세를 유지하기 어렵게 되었다.

이후 춘천의진은 이소응의 종형인 이진응(李晉應)이 지휘하였는데 이진응의병장이 관군과 일본군의 집중공격으로 순국한 다음에는 이진응 의병장의 아우인 이경응이 의병장에 추대되어 의진을 지휘하였다. 이경응 의병장은 양구, 강릉 등지를 넘나들며 류인석의진과도 연계하여 활동하였는데 제천성이 적군에 함락되고 제천의진이 서북방으로 진출하게 되자 군사를 이끌고 류인석의진에 합류하였다. 류인석 의병장은 학교(鶴橋)에서 이경응 의병장을 맞이하면서 "그대와 내가 다 임하(林下)의 서생인데 오늘의 대장 칭호가 어찌 될 번이나 한 말인가. 이것이 바로 망극한 세상 변고 때문일세" 라며 감격하였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29. 이도홍(李道弘)

춘천의병장

이도홍은 1907년 헤이그 특사사건으로 고종황제가 강제로 퇴위당하고, 한일신협약의 강제 체결로 내정권이 박탈당하였으며, 군대 해산에 의한 자위권 상실 등을 계기로 1907~1910년 사이 발생한 정미의병기에 춘천에서 활약한 의병장이다.

 

30. 이만응(李晩應)

1857. 9.17 ~ 1938. 7.20

춘천

이만응은 이소응 의진의 아장(亞將)으로 활약하였다. 1894년 일제가 경복궁을 무력으로 점거하고 1895년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만행을 저지른 후 친일정권을 사주하여 단발령과 복제개혁을 추진하는 등 조선의 국권을 탈취하려는 침략정책 수행을 가속화하자, 이만응은 의병을 봉기하여 일본세력을 축출하고자 하였다. 1896 1 20일 이소응·권중락 등과 함께 춘천에서 거의하고 의진의 대장으로 이소응을 추대하였다. 그는 의진의 아장(亞將) 직임을 맡아 이소응과 함께 의진의 중요한 일을 함께 의논·추진하였다. 1896 1월 의진은 관찰사 겸 선유사로 부임하는 조인승(曺寅承)을 처단하였고, 서울 진격 중 가평 벌업산 전투에서 교전을 치루면서 강력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2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31. 이면수(李勉洙)

춘천의병장

이면수는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으로 을미의병이 전개되자 춘천에서 유생, 포수들을 모아 의거하였다. 1896 1월 춘천의병이 류중락과 이만응을 중심으로 봉기하자, 민영문·이수춘·류홍석 등은 고을 사람들을 격려하여 적극 참여토록 하였고, 당시 이면수는 감역 홍시영과 함께 몰래 곳곳에 방문을 붙이고 사발통문을 돌려 인심을 격동하였다.

 

32. 이소응(李昭應, 이명 李宜愼,  習齋)

1852. 8. 7 ~ 1930. 3.25

춘천

강원도 춘천 출신으로 본은 전주이며 유학에 조예가 깊어 일반의 추앙을 받아 왔다. 1895년 을미사변이 발발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이러한 일제의 만행과 내정간섭을 규탄하여 전국에서 유생들이 중심이 되어 의병운동이 전개되었다. 그 중에서 춘천부를 중심으로 하여 1896 1월초부터 의거의 기운이 농후하여졌으며, 감역 홍시영과 선비 이면수 등이 방문을 붙이고 통문을 돌려 인심을 격동하였으며 선비 이수춘·민영문 등이 고을 사람들을 격려 고무하였다.

그리하여 1 20일 류중락·이만응 등을 중심으로 한 선비와 백성들 천여 명이 춘천부에 모여 습재 이소응을 대장으로 추대하였다. 대장으로 추대되자 곧 다음과 같은 격문을 지어 8도에 보내어 인심을 격동시키고 함께 거사하여 적을 토벌할 것을 호소하니 원근의 인심이 크게 분발하였다.

격문에서 이소응은 일본인들에 대하여 왜노(倭奴)  '왜놈'이라는 극단적인 호칭을 사용하고, 왜노와 거기에 아첨하여 따라 다니며, 국모를 시해하고 군부의 머리를 강제로 깎은 무리들을 불공대천의 원수로 규정지으며, 그들에 대한 복수 설치(雪恥)를 둘도 없는 큰 의리로 내세워서 의병의 명분을 뚜렷하게 하였다. 또 개화로 인한 풍속·사회의 변천을 크게 분노하면서 이적 금수의 지경이 되는 것을 구출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적에 대한 처벌 방법도 상당히 엄하여 각처의 관장으로서 즉시 호응하지 않고 주저 관망하는 자가 있으면 '선참후보(先斬後報)'할 것을 강력히 촉구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정부에서는 조인승(曺寅承)을 춘천부 관찰사 겸 선유사(宣諭使)로 보내어 도착하였는데 의진에서는 조인승이 원수의 역적들과 같은 무리라고 하여 잡아다 참형을 시행하였다. 이것은 개화파의 관원으로서 의병들에게 처형당한 첫 예가 되었다.

이 소식은 내각 대신들에게는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당시 외부대신이었던 김윤식(金允植)은 조인승의 참형소식에 이어 청평(淸平)에 살던 참판 조인희(趙寅熙)가 의진에 가담하지 않는다 하여 역시 살해당한 소식을 접하고 '갈수록 놀랍고 참혹하여 통한스럽다' 말한 것이나, 명성황후시해 사건의 관련자로 파면되었던 조희연(趙羲淵)을 군부대신에 임용하고 이튿날로 곧 1중대의 병력을 춘천으로 파견한 것은 이러한 사실의 일단을 말해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초기에 크게 기세를 올렸던 춘천 지방의 의병 세력은 그것이 대개 선비 중심의 봉기이었으므로 전술·전략에 익숙하지 못하였다. 반면에 신우균(申羽均김귀현(金龜鉉) 등이 지휘하는 관군의 공세는 날로 예리하여 갔다.

또한 성중에서 다시 관군과 내통하는 자가 생김에 따라 차츰 성내 인심이 흩어져 의진의 형세를 지탱하기도 어렵게 되어갔다. 이에 습재는 병력을 증강하기 위하여 몸소 지평 군수 맹영재(孟英在)를 찾아가 협상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2 17일 결국 습재는 제천의 의암 류인석의 의진으로 입진하였다. 이에 나머지 춘천 의진은 습재의 종형 이진응이 지휘하게 되었는데 곧 관군과 일본군의 집요한 공격으로 인하여 패전하고 주장은 전사하였다. 이후에는 진응의 아우 경응(景應)이 주장으로 추대되어 의진을 계속 지휘하였다.

습재는 의암을 따라 만주 봉천으로 망명하였다가 이역에서 순국하였다 한다. 습재는 춘천의 의병운동과 의암 의진의 활동 상황을 기록하여 습재연보, 습재선생문집 등의 저서를 남기기도 하였는데 이는 독립운동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로서 활용되고 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33. 이수춘(李守春)

춘천의병장

이수춘은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으로 을미의병이 전개되자 춘천에서 유생, 포수들을 모아 의거(義擧)하였다. 1896 1월 춘천의병이 류중락(柳重洛)과 이만응(李晩應)을 중심으로 보기하자, 감역(監役)으로 있던 홍시영(洪時永)과 선비 이면수(李勉洙)가 몰래 곳곳에 방문을 붙이고 사발통문을 돌려 인심을 격동하였으며, 이수춘은 민영문(閔永文류홍석(柳弘錫)과 더불어 고을 사람들을 격려하여 적극 참여토록하였다.

 

34. 이재천(李在天)

춘천의병장

이재천은 1907년 헤이그 특사사건으로 고종황제가 강제로 퇴위당하고, 한일신협약의 강제 체결로 내정권이 박탈당하였으며, 군대 해산에 의한 자위권 상실 등을 계기로 1907~1910년 사이 발생한 정미의병기에 춘천에서 활약한 의병장이다.

 

35. 이진응(李晋應)

1847 ~ 1896. 2.17

춘천

이진응은 의병장 습재 이소응의 종형으로서 강원도 춘천 출신이다. 1895년 명성황후시해 사건이 발발하자, 강원도 지역에서는 춘천과 강릉 등지에서 거의의 움직임이 있었으며, 그중 춘천에서는 1896 1월초부터 의거의 기운이 농후해지면서, 감역 홍시영과 이면수 등이 방문을 붙이고 통문을 돌려 인심을 격동시키고, 이수춘(李守春민영문(閔泳文) 등이 고을 사람들을 격려 고무하였다. 그리하여 1 20일 류중락·이만응 등이 중심이 되어 일대의 유림과 백성 천여 명이 춘천부에 모여 습재 이소응을 의병장으로 추대하였다.

이때 이진응은 아우 경응과 함께 입진한 것으로 보인다. 습재의 춘천 의진은 각지로 격문을 보내어 '왜노(倭奴)'들에 대하여 '선참후보(先斬後報)'할 것을 강력히 촉구함으로써 적극적인 척왜(斥倭)운동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였다. 이때 정부에서 조인승(曺寅承)을 춘천부 관찰사 겸 선유사로 파견하였으나 춘천의진은 그를 왜노로 간주 처형하였다. 이에 충격을 받은 조정에서는 1개 중대의 병력을 춘천으로 파견하였다. 이로써 춘천 의진에 대한 관군의 공세가 급격해지자 훈련이 부족하고 전술·전략에 익숙치 못한 의진은 쉽사리 붕괴되었다. 습재는 병력 증강을 위해 지평군수 맹영재를 찾아 협상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2 17일 제천의 의암 류인석의 의진으로 들어가 합세하게 되었다.

이에 이진응은 춘천 의진을 인계 받아 주장이 되었다. 이때 관군과 일본군의 집중공격을 받으면서 의진을 사수하다가 끝내 실패하고 순절하였다. 이진응의 사후에는 그의 아우 경응이 춘천의진의 주장으로 추대되어 이를 계속 지휘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하였다.

 

36. 인찬옥(仁璨玉)

미상 ~ 1907.10

춘천 사내면

인찬옥은 춘천군 사내면의 유생으로 1907 7월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사외면의 면장 황기운(黃基雲) 및 한중삼(韓重三이인환(李寅桓) 등과 모의하여 스스로 결사대의 총대장이 되어 이용규(李容圭김제현(金齊鉉)과 상응하여 각지에 격문을 배부하고 의병을 모집하다가 일경 보조원에게 탐지, 피체되었다. 그후 1907 10월 경성으로 호송되는 도중에 탈출하려다가 피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37. 장순원(張順元)

춘천의병장

장순원은 1907년 헤이그 특사사건으로 고종황제가 강제로 퇴위당하고, 한일신협약의 강제 체결로 내정권이 박탈당하였으며, 군대 해산에 의한 자위권 상실 등을 계기로 1907~1910년 사이 발생한 정미의병기에 춘천에서 활약한 의병장이다.

 

38. 정경태(鄭敬泰)

(1878) ~ 1911.11.22

춘천

정경태는 1907 7월 성익현(成益鉉)의진의 도총장(都總將)과 중군장(中軍將)이 되어 강원도 울진·삼척·평해 등지에서 활약하였고 이듬해인 1908 5월에는 스스로 관동창의장(關東倡義將)이 되어 강원도 및 경북지방에서 항일투쟁에 크게 활약하다가 피체되었다.

그후 1911 8 10일 함흥지방재판소 원산지부에서 소위 강도·살인 및 방화죄로 교수형을 언도받고 항고하여 동년 10 25일 경성공소원과 동년 11 10일 고등법원에서 기각, 형이 확정되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39. 정규문(鄭奎文)

(미상) ~ 1907.11.27

춘천 서면 덕두원리

정규문은 1907년 지용기가 박선명·최영석·박운선 등과 함께 춘천·가평 일대를 중심으로 의병을 조직하자 그의 아버지인 소모장(召募將) 정낙환(鄭洛煥)을 따라 함께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1907 11 27일 정규문은 정낙환의 인솔하에 동료의병 6명과 함께 가평에서 춘천으로 이동하다가 독가동(篤加洞:도까막골)에 있는 이창교(李昌敎)의 집 사랑채에 유숙하고 있었는데, 미리 정보를 입수한 일경이 덕두원리에 있는 주민을 협박하여 길을 안내받아 불의에 기습하였다. 이에 정규문을 비롯한 동료의병 8명은 저항할 사이도 없이 곧 전원 체포되어 개울가로 끌려가 총살당하였다.

 

40. 정낙환(鄭洛煥)

(미상) ~ 1907.11.27

춘천 서면 덕두원리

정낙환은 1907년 지용기가 박선명·최영석·박운선 등과 함께 춘천·가평 일대를 중심으로 의병을 조직하자 이에 가담하여 소모장(召募將)으로서 가평·춘천·화천 등지에서 의병을 모으고 의병항쟁을 전개하였다.

1907 11 27일 정낙환은 아들 정규문을 비롯한 동료의병 6명을 인솔하여 가평에서 춘천으로 이동하다가 독가동(篤加洞:도까막골)에 있는 이창교(李昌敎)의 집 사랑채에 유숙하고 있었는데, 미리 정보를 입수한 일경이 덕두원리에 있는 주민을 협박하여 길을 안내받아 불의에 기습하였다. 이에 정낙환을 비롯한 동료의병 8명은 저항할 사이도 없이 곧 전원 체포되어 개울가로 끌려가 총살당하였다.

 

41. 정기공(鄭基公)

미상 ~ 1907.11.28

춘천 서하면

정기공은 의병으로 강원도 춘천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1907 7월 일제는 정미7조약을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켜 우리 민족의 무력을 박탈하는 등 식민지화를 향한 발걸음에 박차를 가하였다. 이에 분격하여 전국적으로 수많은 의병이 봉기하여 일본군을 공격하고, 일진회원을 비롯한 친일주구배를 처단하는 등의 활동을 통하여 무너져가는 국권을 회복코자 노력하였다. 정기공은 이같은 시기인 1907년 일본군을 축출할 목적을 가지고 석오석(石五錫) 등과 함께 강원도 춘천에서 의병에 가담하여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다가 피체되어 같은 해 11 28일 같은 군 봉의산에서 피살, 순국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42. 정인회(鄭寅會)

(1868) ~ (1902)

춘천

정인회는 강원도 춘천 출신으로 1896 1월 춘천에서 창의한 이소응의진(李昭應義陣, 일명 春川義陣)에 참여하여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춘천의진은 1896 1 18일 춘천유생 정인회가 군인출신 성익현(成益鉉)과 상인 박현성(朴玄成)을 규합하여 포군 400여 명과 함께 봉기하여 춘천 강촌출신 습재 이소응을 의병대장으로 추대하여 결성한 의병진이다.

정인회는 당시 27세의 유생으로 1895년 명성황후시해사건과 단발령이 포고되자 진위대(鎭衛隊) 춘천분견소(春川分遣所)의 군인 중 신망이 두터운 성익현과 밀통하고 상인 중에서 용맹과 담력이 있는 박현성과 기맥을 통하여 부민(府民)에게 통문을 돌리고 의병봉기에 나설 것을 촉구하였다. 특히 성익현은 진위대 춘천분견소의 일부 군인과 포수 약 400명을 의병대열에 참가시켜 의병부대의 세력을 강화하였다. 1896 1 18일 창의한 춘천의병은 춘천관찰부를 습격하여 의병의 본영으로 삼았다. 그리고 전임 춘천유수 민두호의 생사당(生祠堂)을 불태우고, 그의 아들 민영준(閔泳駿)의 향제(鄕第)에 난입하여 집기를 불태웠다. 그리고 정인회 등은 이소응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각지에 격문을 발송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43. 지경도(池敬道)

춘천의병장

지경도는 1907년 헤이그 특사사건으로 고종황제가 강제로 퇴위당하고, 한일신협약의 강제 체결로 내정권이 박탈당하였으며, 군대 해산에 의한 자위권 상실 등을 계기로 1907~1910년 사이 발생한 정미의병기에 춘천에서 활약한 의병장이다.

 

44. 지용기(池龍起, 弘敏)

1867. 3.16 ~ 1907.11. 3

춘천 서면 금산리

지용기는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이소응의 춘천의병진에 참가하였고, 류인석의진으로 옮겼다가 류인석이 서북대행군하자 화천전투 때 잔류하여 줄곧 춘천·화천·양구 일대에서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그후 지용기는 1907년 정미의병 당시 박선명(朴善明최영석(崔永錫박운선(朴雲善) 등과 기병하여 춘천·가평·지평 일대에서 의병항전을 전개하다가 화천군 사내면(史內面)에서 8백여명의 독립의군부대를 편성하였다.

이어 동년 9월 춘천군에 주재할 것을 계획하고, 우선 가평군을 습격하여 군수 염규환(廉圭桓)  10여명을 회유한 후, 경기 강원의 도계이며 춘천 가평의 군계인 싸리재를 넘어 춘천군 서면 방동에 대장소를 설치하는 동시에 380명의 의병으로 포진하고 있었다. 그러나 밀고로 춘천 주재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1907 11 3일 새벽 방동리 뒤쪽 홍골과 사기맥 골짜기에서 혈전을 벌이다 전사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45. 최영석(崔永錫)

미상 ~ 1907.10.

춘천 북내면(北內面) 권산리(權山里)

최영석은 1907 7월 박선명·지홍민(池弘敏)의 휘하에서 소모계(召募係)와 정찰대장(偵察隊長)으로 일군의 행동을 탐지하고 동월 14일에 춘천군 인람리(人嵐里)에서 지홍민의 글을 박선명에게 보내려다 일경 경찰대에 피체되었다. 그후 동년 10월 서울로 호송되던 중에 탈출을 시도하다 피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46. 최천유(崔千有)

미상 ~ 1908

춘천 북산면

최천유는 의병장으로 강원도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1907 7월 일제는 정미7조약을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켜 우리 민족의 무력을 박탈하는 등 식민지화를 향한 발걸음에 박차를 가하였다. 이에 분격하여 전국적으로 수많은 의병이 봉기하여 일본군을 공격하고, 일진회원을 비롯한 친일주구배를 처단하는 등의 활동을 통하여 무너져가는 국권을 회복코자 노력하였다.

최천유는 이같은 시기인 1907년 가을 강원도 춘천에서 안종우(安鍾雨송관영(宋寬永김양현(金養鉉김순선(金順先)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그리하여 그는 같은 해 12월 중순이래 부하 600여 명을 이끌고 강원도 화천·양구·인제 등 산악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던 중 최천유 의진은 1908 1 2일 등정(藤井) 소위가 인솔하는 일본헌병대 양구분견대와 임당리(林塘里) 범동(犯洞)에서 조우하여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이 전투에서 최천유 의진은 크게 패하고 부하 이인금(李寅今) 이하 60여 명이 전사하고, 2명이 피체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항일 투쟁을 계속하다가 같은 해 음력 5월 양구군 진목정(眞木亭)에서 일본군 춘천수비대에 피체되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47. 홍시영(洪時永)

춘천의병장

홍시영은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으로 을미의병이 전개되자 춘천에서 유생, 포수들을 모아 의거하였다. 1896 1월 춘천의병이 류중락과 이만응을 중심으로 봉기하자, 민영문·이수춘·류홍석 등은 고을 사람들을 격려하여 적극 참여토록 하였고, 당시 감역으로 있던 홍시영은 선비 이면수와 함께 몰래 곳곳에 방문을 붙이고 사발통문을 돌려 인심을 격동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