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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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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습 초상(보물1497호, 문화재청)
상세정보
1. 김시습(金時習)7)

김시습(1435;세종 17~1493;성종 24)은 조선전기 문신으로 아버지 김일성(金日省)과 어머니 장씨(張氏) 사이에서 출생하였다. 서울 출신으로 본관은 강릉이고 자는 열경(悅卿)이며, 호는 동봉(東峯청한자(淸寒子매월당(梅月堂) 등이다. 김시습을 5세 신동이라고 불리었는데 그가 유자한과 주고받은 편지에 스스로 쓰기를 세상에 나서 8개월 만에 글을 알았고, 3살 때에 복사꽃은 이미 붉고 버들은 푸르러 3월은 저물었고, 구슬이 푸른 바늘에 꿰었으니 솔잎의 이슬이로다라고 시를 지었으며, 5세에 이계전에게 중용』과 『대학』을 배웠다. 정승 허조가 집에 와서 나는 노인(老人)이니 노자(老字)로 글을 지어라하기에 말 떨어지자 노목에 꽃이 피었으니 마음은 늙지 않았네라고 지으니 허조가 나를 신동이라 칭찬하였다라고 하였다고 한다.

김시습은 계유정난으로 단종이 폐위되고 수양대군이 등극하자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정신으로 그 해에 출가하여 계룡산 동학사·보현산 보현사를 거쳐 장안사·심원사·소요사·회암사·내소사·중흥사 등 전국을 유랑하였다. 부여 무량사에서 세상을 뜰 때까지 안씨와 결혼한 1481~1483년간을 제외하고 스님의 신분으로 살았는데 이 때 법명은 설잠(雪岑)이다. 스님으로 살면서도 머리를 깎은 것은 진세를 피하기 위함이요, 수염을 남겨 놓은 것은 장부라는 것을 나타냄이다라고 한 것을 보면 그는 불교와 유교를 넘나드는 세계관을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강원도의 오대산과 양양 낙산사 등에서 지냈는데 춘천지역에서는 청평사에서 오래 머물렀다. 특히 춘천지역에서 남긴 시를 보면, 청평사와 관련된 청평산에서淸平山〕」·학매에게 주다示學梅〕」·학매 대사에게 주다梅大師〕」·학매대사를 만났다가 또 이별하다逢梅又別〕」4·청평산 세향원 남쪽 창에서 쓰다題淸平山細香院南窓〕」2·청평사(淸平寺)·약초 캐는 선동采藥仙洞〕」·선동에서仙洞〕」·식암의 연야息庵練若가 있고, 춘천에 관련된 시로 우두 벌에서牛頭原〕」·소양강에서昭陽江〕」·모진에서母津〕」·거듭 전송하며重送〕」·취하여 노니는 춘성醉遊春城〕」·노 저어 돌아오는 소양강返棹昭陽〕」·소양인(昭陽引)·봄 생각春思〕」·소양정에 올라登昭陽亭〕」3·강가에서江頭〕」·신연강을 건너며渡新淵·우두사에서 자며宿牛頭寺〕」·스님 찾는 화악산尋僧花岳〕」·낚시하는 신연강釣魚新淵〕」·고산에서 사공불러 건너다喚渡孤山〕」·춘수(春愁) 등의 여러 시가 있다.

김시습이 청평사에 머물면서 학매(學梅)를 제자로 받아 가르치는데 조선전기의 벽송지엄의 제자이고 서산대사로 널리 알려진 청허휴정과 부휴선수의 스승이었던 부용영관(芙蓉靈觀, 1485;성종 16~1571;선조 4)이 양평 용문사에서 청평사의 학매에게 불교에 대한 선지식을 배우기 위해 찾아온다. 이는 학매와 청평사가 당시의 불교계에서 차지하는 사상사적 위상이 상당하였음을 알 수 있다.

 

2. 한백록(韓百祿)8)

한백록(1555;명종 10~1592;선조 25)은 조선 전기 무신으로 본관은 청주이고 자는 수지(綬之)이다. 춘천시 서면 당산리(棠山里:현재, 방동 1)에서 태어났는데 어려서부터 명석하여 경전을 읽고 해득하는데 남달랐고, 효제심도 돈독하였다고 한다. 26(선조 13;1580) 때에 알성무과에 급제하여 수문장(守門將)의 벼슬을 받았고 이어서 현재의 대전시 유성구 지역인 진잠현감을 지낸 후 지세포만호에 임명되었다. 장군은 황윤길과 김성일이 일본을 다녀와 조정에 보고한 당시의 정황을 전해 듣고 병사들에게 군사 훈련을 철저히 하였다. 이 때에 임진왜란이 발생하여 우수사 원균이 한산도로 돌아와서 군사를 모으자, 영등포만호 우치적, 옥포만호 이운룡과 함께 판옥선에 동승하여 거제도 송미포 앞바다에 이르러 적선 50여척과 세 번의 접전을 벌여 적의 큰 배 수척을 파괴시키고 적을 궤멸시켰다. 이후 부산첨사로 자리를 옮겨서 연합함대에 합류하여 7 17, 미조항 전투에 참전하였다가 전사하였다. 원균의 보고에 의하면 한백록이 여러 전투에서의 공로가 가장 크다고 하였으며, 전투 중에 탄환을 맞고도 나아가 싸우다가 전투가 끝나고 끝내 사망하였다고 하였다. 한백록이 전사한 후, 그를 따라 군영에 있던 노복 득충(得忠)이 시신을 수습하여 고향인 춘천에 안장하였다.

한백록은 선조 38(1605)에 선무원종공신 2등에 책록되었고, 1628(인조 6)에 병조참판 증직되었으며 1751(영조 27)에는 정려가 내려졌다. 1807(순조 7)에 병조판서로 재차 증직되었으며, 1811(순조 11)에는 충장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묘는 금산 3리 관음동에 위치하고 있고, 정려각은 방동리에 있다.

 

 

 

 

 

 

 

 

 

 

 

7) 강원향토문화연구회 역, 『국역 매월당집』, 강원도, 2000.

범해 찬·김륜세 역, 『동사열전』, 광제원, 1994, 115·1012.

강원도, 『강원도사』10. 인물 상, 강원도사편찬위원회, 2014, 89~90. 


8) 제장명, 임진왜란 시기 이순신을 도운 경상우수군, 『충장공 한백록 학술세미나 및 토크콘서트』, 충장공 한백록기념사업회, 2015, 15~41.

유재춘, 임진왜란과 충장공 한백록 연구, 『충장공 한백록 학술세미나 및 토크콘서트』, 충장공 한백록기념사업회, 2015, 45~64.

충장공 한백록기념사업회, 『충장공 한백록 학술세미나 및 토크콘서트』, 2015.

허준구, 충장공 한백록의 실기(實記) 연구, 『충장공 한백록 충·의 토론회』, 충장공 한백록기념사업회, 2016, 11~40.

권혁진, 충장공 실적 소재 한시 연구, 『3, 충장공 한백록 충·의 토론회』, 충장공 한백록기념사업회, 2017, 11~44.

정재경, 충장공 한백록 장군 추증 연구-충장공실적을 중심으로, 『3, 충장공 한백록 충·의 토론회』, 충장공 한백록기념사업회, 2017, 47~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