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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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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숭겸(申崇謙)1)

고려전기 무신으로 고려 태조에 의해 본관이 평산(平山)으로 내려져 평산신씨의 시조가 되었다. 초명은 능산(能山)이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 의하면 광해주(光海州, 현재, 춘천) 사람이라고 하였다. 후대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춘천도호부조에서는 고향에 대한 기록이 없고, 인물항이 아닌 우거(寓居)항에 수록하여 춘천이 고향이 아닌 것으로 기록하였다. 곡성현조에서는 인물항에 수록하여 곡성현 출신임을 나타내고, 비고(備考)에서 곡성에서 출생하였다고 하였으며, 평산도호부 인물항에서는 곡성현 사람이라고 하였다. 여지도서』 산천항에서는 비래산은 순천 조계산에서 뻗어 나오는데 신숭겸이 태어나서 자란 곳으로 지금도 말 달리던 주마대(走馬臺)가 있다고 하였다. 『고려사』에 의하면 처음 이름은 능산이니 광해주 사람이다. 체격이 장대하고 용맹이 있었다. 10년에 태조가 공산(公山, 현재, 팔공산) 동수(桐藪)에서 견훤과 싸우다가 불리하게 되어 견훤의 군대가 태조를 포위하였는데 형세가 심히 위급하였다. 이 때 신숭겸이 대장으로 있었는데 원보(元甫) 김락(金樂)과 더불어 힘껏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태조가 그의 전사를 매우 슬퍼하였으며 시호를 장절(壯節)이라 하고 그의 동생 능길(能吉), 아들 보락(甫樂) 및 동생 철()을 모두 원윤(元尹)으로 등용하고 지묘사(智妙寺)를 창건하여 그의 명복을 빌게 하였다.’라 하였다. 이러한 신숭겸의 출생지에 대한 여러 의견은 춘천과 곡성이라는 설로 나뉘어져 있는데, 현재는 대체로 곡성에서 태어나 춘천에서 살았으며 그의 묘소가 춘천에 만들어지게 되었다는 설로 정리되고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홍유·배현경·신숭겸·복지겸 4명이 비밀히 모의하고 밤에 왕건의 집에 모여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을 추대하여 이 공로로 4명은 1등 공신에 올랐다고 하였다. 후에 이들은 태조 묘()에 배향되었다.

 

2. 박유(朴儒)2)

박유의 자는 문행(文行)이고 광해주(光海州, 현재, 춘천) 사람이다. 고려사』의 열전에 생애가 자세히 수록되었는데 이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왕유(王儒)의 본 성명은 박유이며 자는 문행이니 광해주 사람이다. 성격이 곧으며 경서와 사기에 통달하였다. 처음에는 궁예에게서 원외(員外)로 있었고, 동궁기실(東宮記室)까지 올라갔다. 궁예의 정치가 혼란하여진 것을 보고 이어 가정을 떠나 산골짜기에 은거하였다가 태조가 즉위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 와서 현신하니 태조가 그를 예로써 대접하면서 말하기를 좋은 정치를 하는 길은 어진 사람을 구하는데 있는바 이제 그대가 온 것은 마치 부암(傅岩)과 위수渭濵가 명사를 얻은 것과 같다하고 이어 갓과 띠를 주고 기요(機要)를 주관하게 하였는데 공로가 있으므로 드디어 왕()씨라는 성을 주었다라고 하였다. 이로 보면 박유는 왕건이 왕위에 오르는 해의 그 달인 918 6월에 왕건의 휘하로 들어가 후삼국을 통일하는데 상당한 기여를 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그의 딸이 왕건의 18번째 왕후인 예화(禮和)부인인 것을 보면 고려 정부의 핵심 관료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 궁예는 영월 세달사에서 스님이 된 이후 892(진성여왕 6)에 원주 양길의 군사를 이끌고 영월주천나성울오어진을 거쳐 강릉으로 들어가 3,500명의 군대를 편성하였다. 궁예는 이 군사력을 바탕으로 저족(현재, 인제)생천(현재, 화천)부약(현재, 김화)금성(현재, 철원군 금성)을 거쳐 철원에서 태봉을 건국하게 된다. 이 때 강원도 영서지역의 행정지역이었던 삭주의 중심지인 춘천을 점령하지 않고 원주와 영월을 중심으로 하는 강원 남부지역과 강릉을 중심으로 하는 강원 동부지역을 그의 영역권내로 편입하였다. 그리고 강원 내륙의 춘천을 제외한 북부지역을 점령하면서 세를 확장하였다. 이 때 춘천을 침입하지 않은 것은 춘천지역의 대학자였던 박유가 궁예의 영향력 아래 있었거나 적어도 그와 어떠한 공조관계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관계가 성립되지 않았다면 춘천의 북방인 화천을 점령하고 김화로 공격로로 정할 것이 아니라 인제춘천화천금성철원으로 공격로를 택했을 것이다.

박유는 왕씨를 사성받은 후에 9산선문의 하나인 해주의 수미산문 개산조 진철대사의 보월승공탑비를 광조사에 세우고, 장단의 오룡사에 법경대사의 보조혜광탑비 건립에 참여하였다. 이는 태조로부터 왕씨를 사성(賜姓)받고 춘천이 아닌 해주와 장단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선종(禪宗)계열의 승려와 친교를 맺었음을 알 수 있다. 박유가 궁예의 정치를 자신의 생각과 같지 않다고 판단하여 궁예를 떠난 것을 『고려사』에서는 궁예를 피해 산으로 들어갔다고 하였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다고 하였다. 이 시기의 많은 귀족과 지식인들이 불교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음을 볼 때 승려가 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타당할 것 같다.

현재 춘천박씨의 시조는 박항(朴恒, 1227; 고종 14~1281;충렬왕 7)인데 지역의 일부 사학계에서는 춘천박씨의 시조로 보려는 견해가 있다.

 

3. 견권(堅權)3)

고려 태조 때에 춘천의 진()을 지키는 일을 맡아 보았는데 936(태조 19) 9월에 대상(大相) 견권은 왕과 견훤·희술·황보금산·원윤(元尹) 강유영 등과 더불어 기병 1만을 이끌고, 지천군 대장군 원윤 능달·기언·한순명·흔악·정조 영직·광세 등은 보병 1만으로 좌익군에 편재되어 후백제의 신검군과 싸워 항복을 받아 냈다. 이 공로로 고려 개국 2등공신에 책록되었다.

 

4. 박항(朴恒)4)

박항(1227; 고종 14~1281;충렬왕 7)의 자는 혁지(革之)이고 초명은 동보(東甫)이며 시호는 문의(文懿)이다. 신라 경명왕의 7번째 아들인 강남대군(江南大君) 언지(彦智) 10세손으로 춘천박씨의 시조이다. 1253(고종 40)에 몽골의 5차 침입으로 춘천에 거주하던 사람들이 봉의산성 전투에서 대부분 전사하였는데 그의 아버지도 함께 사망하였다. 개성에서 돌아와 그의 아버지와 닮은 시신 300구를 거두어 묻었다고 한다. 어머니는 몽골군에 포로로 잡혀 갔다는 소식을 듣고 연경에 두 번이나 찾아 갔으나 찾지 못하였다고 한다.

박항은 춘천의 아전이었는데 총명하고 지혜가 많았으며 고종 때에 향공(鄕貢)으로 급제하였다. 한림원에 임명되고 충주의 수령을 거쳐 우정언(右正言)에 임명되었다. 이후 경상도와 전라도의 안렴사로 공적을 쌓았으며 충렬왕 때에는 승선(承宣)이 되어 관리의 선발과 배치의 업무를 수행하였다. 또한 동지밀직사로 충렬왕을 따라 원나라를 다녀오고 좌명공신에 책록되고 춘성부원군에 봉해졌으며 중서문하성 정당문학의 후신인 삼문학사에 임명되었고 다시 찬성사(贊成事)가 되었다.

박항의 행적 중에서 고려와 원이 연합군을 편성해 일본을 정벌할 준비를 할 당시의 상황이 『고려사』에 자세히 기록되었는데 이를 보면 다음과 같다. ‘원나라 세조가 장차 일본을 정벌하고자 하면서 전함, 군량, 군사, 기자재를 모두 다 우리나라로 하여금 조달하라 하였으며 원수 혼도·우승 홍다구를 보내어 감시, 독촉케 하였다. 그리하여 임금이고 신하고 모두 네! !하고 복종할 뿐이었으며 실제에 있어서는 우리의 힘으로는 감당해 낼 수가 없었다. 박항이 왕에게 아뢰어 구체적 실정을 써서 원나라에 보고하게 하였다. 원나라 황제는 왕에게 좌승상 행중서성사의 관직을 주고 김방경을 정동도원수로 임명하였으며 또 만호, 천호, 백호 등 부신을 주어서 혼도 등으로 하여금 제멋대로 행하지 못하게 하였다. 또 동정(東征)에 필요한 후방 물자를 보내는 방책과 군사 기밀에 관계되는 여러 조치들에 관해서도 모두 박항이 안출하였다고 하였다.

이로 보면 박항은 몽골간섭기에 일본을 정벌하는 준비가 지나치게 계획되자 이를 고려 정부의 힘에 맞도록 고치게 하는 용기와 이론을 제시한 관료였으며 김방경을 원수로 삼아 군사 지휘권이 원나라에 넘어가는 것을 막게 되었다. 또한 문장을 능란하게 지었고 사람됨이 너그럽고 후하여 남을 잘 대접하였으며 근면하게 국가사업에 복무하였고 관리로서의 정치실무에도 능하여 당시 사람들이 그의 유능함을 칭찬하였다. 그러나 무슨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는 자기 의견을 고집하고 다른 사람 말을 참작하지 않았으며 그가 선발한 인재는 그에게 은혜가 있던 자나 친구들이 많았다. 그가 일찍이 전시(殿試)를 심사하였는데 선발, 합격된 자 9명 가운데 5명은 박항의 문생이었으므로 사람들이 그것을 흰옥의 흠이다고 하였다. 그의 아들 박원굉은 후에 광정(光挺)이라고 이름을 고쳤는데 급부(金符)를 받고 부만호로 임명되었다.”고 하였다.

 

5. 박천기(朴天器)5)

박천기의 생애에 대한 자료는 『고려사절요』에서 몽골이 고려를 5차 침입을 한 1253(고종 40) 9 20일에 춘천을 침략했을 당시의 자료에서 보이고 있다. 이를 보면 몽고 군사가 춘주성(현재, 춘천)을 두어 겹으로 포위하여 목책을 두 겹으로 세우고 참호를 한 길이 넘게 파 놓고 여러 날을 공격하였다. () 안의 우물이 모두 말라서 소와 말을 잡아 피를 마시는 등 사졸들의 곤함이 말할 수 없었다. (중략) 안찰사 박천기는 계책이 궁하여 힘이 다해 먼저 성 안의 돈과 곡식을 불 태우고 결사대를 거느리고 목책을 부수고 포위를 돌파하였으나 참호에 막히어 나가지 못하여 한사람도 벗어난 자가 없었다. 드디어 그 성은 도륙 당하였다.’고 하였다.

안찰사는 각 도에 1명씩 파견되어 그 지역의 수령을 감시하면서 사법권, 조세수납권, 군사지휘권을 가졌던 관직으로 안찰사 박천기는 몽골의 군대와 목숨을 걸고 싸웠으나 그들의 세력을 꺾지 못하고 전사하였다. 당시의 몽고는 세계제국을 꿈꾸던 북방민족으로 세계 최대국가를 건설했던 세력에 굴하지 않고 의연히 맞선 장군으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6. 조효립(曺孝立)6)

조효립(?~1253)에 대한 자료는 고려사절요』에 몽골이 1253(고종 40) 9 20일에 춘천을 침략했을 당시의 자료에서 보이고 있다. 이를 보면 몽고 군사가 춘주성(현재, 춘천)을 두어 겹으로 포위하여 목책을 두 겹으로 세우고 참호를 한 길이 넘게 파 놓고 여러 날을 공격하였다. () 안의 우물이 모두 말라서 소와 말을 잡아 피를 마시는 등 사졸들의 곤함이 말할 수 없었다. 문학 조효립은 성을 지키지 못할 것을 알고, 아내와 더불어 불에 뛰어 들어 죽었다.’고 하였다.

이 기사 자체로 박천기의 충효사상을 알 수는 없으나 춘천 주민이 겪은 몽골과의 전투 상황을 알려주는 자료로서 당시 몽골의 포로가 되지 않고 죽음을 택한 그의 사상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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