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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발산2리 고인돌 : 신북읍 발산2리

상세정보

8. 발산2리 고인돌19) : 신북읍 발산2리 253(N37°57′34.5″E127°45′48.6″) 

발산리 고인돌은 소양강물과 멀리 떨어진 발산2리의 솔밭 뒤편 얕은 구릉 위에 삼한골을 등지고 자리하고 있다. 지역 주민들에 의해 일명 '검은돌배기'라고 불리기도 하는 이 곳 고인돌 10여 기 내외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으나 현재는 둥근 형태로 30m 정도의 거리에 7기가 무리지어 있다.<사진 19> 고인돌 주변에는 내부 구조물이었던 것으로 보이는 돌들이 사방에 흩어져 있는데 이는 일제강점기에 일인들에 의해 도굴된 후 수차에 걸쳐 파괴되고 또다시 도굴되었던 때문으로 여겨진다.

이 일대는 주위에 천전리․유포리․산천리 등의 넓은 들이 펼쳐져 있으며 맥국의 옛터라고 전해지고 있다.20) 이 유적은 2001년 심창섭(당시 춘천시 문화재전문위원)이 고인돌이 이동된 상황을 발견 신고하여, 토지소유자의 지원으로 강원문화재연구소에서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1) 1호 고인돌 <그림 12, 사진 11>

개석은 없어진 상태로 장축은 동서방향이다. 북벽과 남벽의 일부분이 파괴되거나 옆으로 밀려난 상태다. 무덤방 1단은 큰 할석을 쌓고, 시상(屍床)은 작은 할석을 깔았으나 많은 부분이 흐트러진 상태로 나타났다. 무덤방과 외부적석시설이 거의 지표면과 가까이 인접하여 있어 무덤방을 이루는 벽석의 일부가 훼손되었다. 무덤방 크기는 동서 170cm, 남북 70cm이다. 무덤방 바깥쪽에서 간돌화살촉 1점이 출토되었다. 덮개돌의 크기는 200×150×40cm이다.

 

2) 2·3호 고인돌 <그림 13, 사진 12>

토지소유주의 형질변경과정에서 유구의 교란이 극심하게 이루어져 매장주체부와 적석부의 윤곽을 확인하기 어렵다. 특히 한 구덩이에서 다량의 신라토기편과 민무늬토기편이 수습되기도 한다. 이는 발굴자가 보았듯이 고인돌의 적석부가 파괴되면서 고분이 조영된 형태이며, 따라서 청동기시대의 고인돌과 삼국시대의 고분이 조영되어 있는 상황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시기를 달리하는 분묘가 중첩되는 경우가 종종 발견되기도 한다.

비닐하우스가 근접한 부분에 1기의 고인돌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북쪽부분에도 1~2기의 고인돌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3호로 추정되는 고인돌의 경우도 매장주체부로 추정되는 부분에 남북장축의 시상부가 있고 남동쪽 모서리 부분에도 매장주체부가 확인되어 2기의 고인돌이 조영되었을 확률이 높다. 3호 동쪽 부분에서는 처음 석재를 제거하는 과정에 돌창, 돌화살촉, 돌끌이 수습되었다.<그림 14> 2호 고인돌의 덮개돌의 크기는 230×140×80cm, 3호는 190×52×35cm이다.

 

3) 4호 고인돌 <그림 15>

현존크기는 동서길이 250cm 남북길이 230cm 정도 남아 있다. 석재는 모두 할석을 이용하여 축조하였으며, 축조방법은 외면은 큰 할석을 사용하여 면을 맞추고, 내부에는 작은 할석들을 채웠을 것으로 보인다. 북쪽 경계부근에서는 짐승뼈 일부가 확인되었다. 돌창과 민무늬토기 저부편이 출토되었다.<그림 16> 5호 고인돌의 양상을 볼 때 방형의 기단부를 축조한 후 중앙부에 매장주체부를 만든 고인돌로 판단된다.

 

4) 5호 고인돌 <그림 17, 사진 13․14>

크기는 남북길이 300cm, 동서길이 340cm로 정방형에 가깝다. 적석부 외곽은 30~50cm 크기의 석재를 이용하여 적석부 경계면을 만들었다. 남쪽 경계 중앙부분에는 길이 45~60cm, 폭 15~20cm 정도의 할석을 가로 방향으로 4매를 깔아 놓았다. 다른 부분과는 달리 석재를 정연하게 조영한 것으로 볼 때 매장의례와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된다. 적석부 내부는 다양한 크기의 할석들로 적석하였다. 적석부 중앙은 각 1매의 판석을 이용하여 바닥과 뚜껑을 만들고, 벽석은 5매의 판석으로 5각형의 석곽을 만들었다.<사진 16> 석곽의 크기는 장축이 75cm, 단축이 60cm이며, 깊이는 남벽의 상단부에서 바닥의 판석까지 약 14cm 정도이다.

이 석곽의 뚜껑 상면에서 돌검 1점과 장릉형 간돌화살촉 2점이 확인되었다.<그림18, 사진 15> 석곽 내부에서는 골편과 목탄이 일부 수습되었고, 석곽 남쪽에서는 간돌화살촉 1점도 수습되었다.

 

5) 6호 고인돌 <그림 19, 사진 17>

동서를 장축으로 하는 형태로 북으로 약간 틀어져 있다. 판석으로 된 동벽과 북벽 일부만 남아 있고 나머지 부분은 모두 훼손되었다. 시상부분은 수 매의 판석이 남아 있으며, 생토면에서 간돌화살촉 2점이 수습되었다. 수 매의 판석이 바닥면에 잔존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시상면은 판석을 깔아 만들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된다. 하지만 간돌화살촉 2점이 비교적 제 위치에서 출토되는 양상으로 보아 수 매의 판석은 교란과정 중에서 유입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석곽의 크기는 토층 상태로 보아 남북 최대 길이 75cm, 동서 길이 150cm 내외로 추정되며, 동벽의 판석 상단에서 바닥까지의 깊이는 35cm이다.

 

6) 7호 고인돌 <그림 20, 사진 18>

동서를 장축으로 하고 있으나, 북으로 약간 틀어져 있다. 동벽은 2매의 판석을 세워 놓은 상태로 남아 있고, 북벽 일부를 제외한 나머지 벽석은 확인되지 않는다.

크기는 동서 장축이 150cm, 남북 단축이 70cm이다. 깊이는 15cm 정도이며, 동벽석 상단부를 기준으로 깊이는 40cm 정도이다. 유물은 출토되지 않았다.​ 

 

 

 

 

 

 

19) 조동걸, 1968가. 「앞의 글」, p.35.

20) 조동걸, 1970. 「북한강 유역의 고인돌-무괴석 고인돌에 대하여」 춘천교육대학 논문집 8-2, p.90.

     강원문화재연구소, 2004가. 앞의 책 , pp.21~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