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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천전1리 고인돌 : 신북읍 천전리 6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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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천전1리 고인돌9) : 신북읍 천전리 690-1(N37°55′36.6″E127°46′44.1″)

천전리 고인돌군은 일제강점기부터 조사가 이루어졌지만 이 시기의 조사는 일부 지표조사된 내용과 1915년에 조사된 천전리와 문정리 유적이 국립중앙박물관에 유리원판사진으로 확인되고 있을 뿐이다. 이후 1930년 토리이(鳥井)가 고인돌 1기를 발굴하였고, 1932년 춘천고등보통학교 선생이었던 나가오카(永岡)가 적석총 1기를 조사하였다. 해방 이후에는 후지타가 율문리 지역에 '고인돌과 석총이 동서에 걸쳐 분포하고 있다'고 소개한 바 있다.

천전리 고인돌은 춘천에서 동북쪽 방향의 신북면 천전리의 소양강변에 위치하며 강변에 한층 높게 퇴적한 사질토의 평탄한 경작지에 11기가 강과 병행하여 동서로 7~80m 전한다. 샘밭이라고도 불리는 이곳의 고인돌들은 일제강점기때에도 조사되었지만 매우 간략한 것이었으며 해방 후에 김원룡이 이곳을 답사한 후 보고를 하였다. 1961년 김원룡이 조사할 당시에는 현재의 1호 고인돌에서 동쪽으로 약 60여 미터의 거리 에 13기(고인돌 1기, 적석총 7기, 堆石 5기), 서쪽 100미터 지점에 1기(短形塊石)가 있었다고 하며, 1967년 조동걸에 의하면 역시 13기(북방식 6, 남방식 5, 적석총 2)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 이곳은 강원도 기념물 제4호로 지정되어(1971.12.16) 관리되고 있는 4기와 2003년 강원문화재연구소의 재발굴시 추가로 발견된 1기만이 남아 있다. 이 외에 이곳을 중심으로 서쪽으로 떨어져서 2기(1기 매립), 동쪽으로 마을 안에 2기가 남아 있어 현재 천전리 지역에는 3개소에 9기만이 남아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현재 남아있는 9기 중에서도 일부 개석식 고인돌은 당시에 고인돌로 보지 않았었기 때문에 실제 없어진 고인돌의 수는 그 이상일 것으로 판단되고, 적석총으로 보고된 것 또한 고인돌로 보여지므로 이 지역의 고인돌 수는 20여 기를 훨씬 상회하였을 것으로 보여지며, 코오노(河野萬世)의 춘천풍토기(春川風土記)에서는 '석총' '석분' 48기가 산재해 있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동안 조사된 고인돌들을 비교해 볼 때 나가오카(永岡)가 발굴한 고인돌은 어느 것인지 알 수 없지만, 토리이(鳥居龍藏)가 발굴한 고인돌은 국립박물관이 발굴한 1호 고인돌과 같은 것으로 현재 남아있는 4호 고인돌이다. 국립박물관이 3호 고인돌이라고 명명한 고인돌은 현재의 1호 고인돌이다. 국립박물관이 발굴한 2호 고인돌은 1호 고인돌(현재4호)로부터 서쪽으로 10m 지점에 있었다고 하는 점으로 볼 때 현재의 3호와 4호의 거리가 27.6m 임을 감안하면 멸실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현재의 2호와 3호는 국립박물관이 발굴당시 정밀발굴한 2기 외에도 고인돌군이 소재한 지역 내에 개석식의 덮개돌로 보이는 암석 4개가 있다고 하면서 그 중 2기에 대해 수습조사를 하였는데 그것의 크기가 현재의 2․3호와는 차이가 있으므로 나머지 2기가 현재의 2․3호로 추정된다. 국립박물관이 적석총으로 보고하였지만 고인돌로 보여지는 3기에 대해서는 아직 논의가 필요한 관계로 이번 연구에서는 제외하였다.

 

1) 1호 고인돌 <그림 5, 사진 3․4>

김원룡 소개 1호 적석총, 국립박물관 보고 1호 고인돌에 해당한다. 이 고인돌은 이미 1915년 일제강점기에 조사된 것으로 당시 조사내용을 유리원판사진으로 대조한 결과 북쪽과 서쪽의 벽석이 제거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적석의 상황은 유리원판 사진으로 볼 때 적석이 그리 많지 않은 상태로 있었으나 국립박물관 조사사진을 참조하여 보면 많은 양의 강돌이 적석된 상태로 있었다. 그 후 유적이 보존관리되어 오면서 현재의 모습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조사과정에서 새롭게 확인된 것은 부석이 설치되었다는 사실이다. 또한 탁자식 고인돌로 북쪽 장벽석과 서쪽 단벽석이 멸실되었으며 개석이 두동강난 상태인 것이 확인되었다.

층위조사에서는 부석시설을 확인하였고 전면제토를 한 결과 남쪽부분과 동․서쪽부분은 일본인의 조사와 국립박물관의 조사 이후에 지형변경으로 부석시설이 심하게 훼손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유일하게 남아있는 부석부분은 북쪽부분으로, 추정 북쪽 장벽석에서 약 4m까지 남아 있었다. 나머지 부석시설은 잔존 동서길이 6.8m가 남아 있다. 표토제거 이후에 나타난 부석시설도 일부는 교란된 것으로 판

단되어 일부 강돌을 제거하면서 조사를 실시한 결과 127×58×15cm 단벽석이 서쪽으로 도괴된 상태로 노출되었다. 동벽부분에서는 국립박물관에서 조사한 시굴구덩이(길이 150×80cm) 흔적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매장주체부는 바닥시설이 남아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1915년 일본인에 의해 조사된 것으로 보인다. 바닥 매장주체부 조사과정 중에 일본인에 의하여 조사되었던 서벽이 확인되었다. 따라서 동․서․남벽과 북벽 추정부분을 바탕으로 추정한 매장주체부 크기는 동서 135cm, 남북 55cm로 추정된다. 출토유물은 간돌도끼편, 붉은간토기편, 민무늬토기편이 수습되었다.

덮개돌 크기는 348×228×139cm이고, 장․단벽석의 크기는 동벽 97×60×13cm, 서벽 127×16×15cm, 남벽 190×115×18cm이다. 성혈이 6개가 있다.

 

2) 2호 고인돌 <그림 6, 사진 5>

국립박물관이 발굴한 2호 고인돌로써 현재는 없어졌다. 1호 고인돌에서 서쪽으로 약 10m 떨어져 위치하고 있었으며 발굴당시에도 이미 덮개돌을 상실한 상태였다. 동서 780cm, 남북 530cm, 높이 약 50~60cm인 타원형의 적석시설이 있었으며 적석의 중앙부분에 무덤방이 만들어져 있었다. 무덤방은 4매의 판석으로 구성하였으나 북쪽 장벽석 1매와 동쪽 단벽석이 절단된 채 하반부만 남아 있었고, 남쪽과 서쪽은 판석이 빠져나간 자리만 확인되었다.

북쪽 장벽석은 길이 75cm, 두께 23cm였고, 동쪽 단벽석은 길이 60cm, 잔존높이 40cm, 두께 13cm이다. 남쪽의 장벽석이 빠져나간 자리는 95×15cm였고, 서쪽의 단벽석이 빠져나간 자리는 60×15cm이다. 무덤방 내부의 넓이는 동서 70cm, 남북 75cm로 그 평면이 정방형에 가까운 것이 특색이며, 석실의 내부에는 주먹크기보다 약간 작은 자갈이 15cm 두께로 정연하게 깔려 있었다. 그 윗면에는 붉은간토기편을 비롯하여 간돌화살촉 2점과 용도가 확실치 않은 석제품이 발견되었다.<그림 7> 여기에서 발견된 간돌화살촉은 강원지역에서 흔히 발견되는 긴마름모꼴[長菱形] 간돌화살촉으로 흑회색과 회백색을 띤점판암제이다.

고인돌의 무덤방은 탁자식․기반식 모두가 장방형을 기본으로 하는데, 천전1리 2호 고인돌의 평면은 예외적인 것이었다. 무덤방의 평면의 구성이 약간 특수하였으나 무덤방을 구축하는 방법에는 별로 다른 점이 없었다. 천전1리 2호 고인돌이 탁자식 고인돌의 구조임이 대략 밝혀졌으나 이 고인돌에 서 가장 특이한 점은 바깥쪽에 돌무지층이 형성되었다는 점이다. 1호 고인돌의 돌무지는 아무 질서없이 잡석을 난잡하게 쌓은 것에 불과하나 2호 고인돌의 돌무지는 외부 시설로서 부가된 구축물로 보인다. 이것이 만약 고인돌의 건립 당초부터 마련된 시설이라면 대단히 중요한 유구라고 할 수 있다.

이 고인돌 주변 일대에서는 생선뼈무늬의 빗살무늬토기 조각이 발견되기도 한다. 돌무지무덤으로 보고되었던 3기에 대해 이것을 고인돌로 보는 해석이 행해졌다.

 

3) 3호 고인돌 <그림 8, 사진 6․7>

일제강점기에는 상석 하단부까지 강돌이 적석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여지나 1915년 이후 어느 시기에 적석부분이 모두 제거되어버린 상태로 보존관리되어 왔다. 외형은 단순한 탁자식으로 보였지만 2002년 강원문화재연구소의 발굴에서 주위에 대한 전면제토 결과 방형의 부석시설이 발견되었다. 하지만 그동안 자연포락과 여러 번에 걸친 정비사업으로 부석시설의 많은 부분이 멸실된 상태였다. 다만 북쪽과 동쪽부분 일부에서 길쭉한 강돌의 단면을 맞추어 면을 형성한 것을 확인하였다. 이면을 기준으로 부석의 범위를 추정하면 북벽에서 북쪽으로 약 2.2m, 서벽에서 서쪽으로 약 4m의 범위로 부석된 것으로 추정된다. 부석시설은 현재 1~2겹 정도의 강돌이 확인되었으나 그 상부에는 어느 정도 강돌이 적석되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매장주체부 시설인 석곽은 장벽석 2매와 단벽석 1매가 남아 있고 바닥은 강자갈 및 쓰레기가 불규칙하게 쌓여 있다. 내부조사에서는 벽석을 세우기 위해 수혈을 판후 벽석을 세우고 그 사이에 강돌을 끼워 넣어 고정하였으며, 바닥은 대부분 교란되어 파괴된 상태로 내부에서 유리파편과 인골 두개골편이 수습되었다. 출토유물은 부석시설에서 능형 간돌화살촉 1점이 수습되었고 제토과정에서 빗살무늬토기편, 간돌화살촉편, 구멍무늬토기편, 민무늬토기편이 수습되었다. 덮개돌의 장축은 남북방향이며, 크기는 250×220×50cm 내외의 말각방형이고, 장벽석은 남벽 150×70×22cm, 북벽 140×70×25cm이며, 단벽석은 85×70×20cm이다.

 

4) 4호 고인돌 <그림 9, 사진 8․9>

덮개돌이 깊이 묻혀있으며 지표상에 드러난 상태는 개석식으로 추정되었고 국립박물관의 발굴시 '남방식'의 개석으로 언급된 4개 중의 하나이다. 발굴조사결과 탁자식 고인돌의 장․단벽석으로 추정되는 판석재 2매가 확인되었다. 장벽석 1매는 제자리에서 남쪽으로 쓰러진 것으로 판단되며, 나머지 단벽석 1매는 석편 등이 구덩이에서 확인되는 등 완전히 도굴 파괴된 것으로 보인다. 매장주체부로 추정되는 부분은 남북 180cm, 동서 30cm의 구덩이로 남아 있으며, 벽석 주위에서 소위 '적석부가' 시설은 확인되지 않았다.

출토유물은 빗살무늬토기편, 간돌화살촉편, 붉은간토기편, 민무늬토기편 일부가 교란 구덩이에서 수습되었다. 개석의 장축의 방향은 동서이며, 크기는 235×165×35cm내외이다. 장벽석은 120×85×20cm, 단벽석은 80×40×10cm이다.

 

5) 5호 고인돌 <그림 10, 사진 10>

개석식 고인돌로 추정되었다가 발굴조사 결과 장·단벽석 3매가 확인되어 탁자식 고인돌임이 확인되었다. 개석을 들어낸 후 조사를 실시한 결과 이미 도굴되어 완전히 교란된 상태로 확인되었다. 출토유물은 간돌도끼편, 구멍무늬토기편, 붉은간토기편, 민무늬토기편 등이 수습되었다.

개석의 장축은 동서방향이며 삼각형이다. 윗면에는 성혈이 3개 있으며, 크기는 290×210×42cm이며, 하부에서 116×116×20cm의 장벽석 2매와 80×57×90cm의 단벽석이 확인되었다.

 

6) 6호 고인돌 <그림 11>

2003년 강원문화재연구소의 발굴조사 중 추가로 확인된 고인돌이며, 완전히 파괴된 매장주체부가 확인되었다. 매장주체부 장단벽석이 놓여있던 부분은 확인되지 않았다. 하지만 일부에서 강돌을 깔았던 흔적이 보인다. 장벽석 1매가 노출되었는데 크기는 140×90×16cm이다. 출토유물은 민무늬토기편이 수습되었다.

 

7) 7호 고인돌

위치는 알 수 없고 1966년 발굴당시 '남방식' 의 개석으로 언급된 4기 중의 하나이다. 덮개돌의 크기는 195×190×25cm였으며, 발굴조사시 하부구조는 발견되지 않았다.

 

8) 8호 고인돌

3호 고인돌에서 서쪽 40m 지점에 있었던 것으로 1966년 발굴당시 국립박물관이 '남방식'의 개석이라고 표현한 4개의 고인돌 중 발굴이 이루어진 것이다. 덮개돌의 크기는 170×130×20~40cm로 장축은 동서방향이었으며, 덮개돌 아래에 적석시설이 있었다. 적석시설은 남쪽부분이 낮게 깎여 있었고 덮개돌도 남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9) 김재원․윤무병, 1967. 앞의 책 , pp.79~98.

   有光敎一, 1938. 앞의 글 , pp.2~4.

   ​김원룡, 1961. 「앞의 글」, pp.20~24..

   ​조동걸, 1968가. 「앞의 글」, p.35.

   ​임세권, 1983. 「앞의 글」, pp.14~16.

   ​노혁진, 1986가. 「앞의 글」, pp.128~137.

   ​강원문화재연구소, 2004가. 앞의 책 , 107~134.

   ​춘천시․한림대학교박물관, 1997. 앞의 책 , pp.52~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