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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貊國을 통해 살펴 본 春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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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貊 關聯 우리나라 文獻史料 檢討 

춘천에 맥국이 있었다는 최초의 기록은『三國史記』에서 보인다. 『삼국사기는 賈耽의『古今郡國志』를 인용해 삭주(춘천)를 고구려의 동남쪽예의 서쪽옛 맥의 땅’ 이라고 기록165)하고 있다.『삼국사기에 이어삼국유사는 춘주(춘천)가 옛 우수주로 옛 맥국이라고 하는 기록166)을 남기고 있다이를 근거로 하여 고려사』지리지를 비롯한 이후의 지리지들은 모두 춘천을 맥국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三國史記』雜志」〈地理高句麗 조에는 牛首州 42개 군현이 고구려 땅 이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167) 이 기록에 의하면 춘천은 최초 고구려의 영역에 편입되었다가 이후 신라 영역에 들어가는 것이 된다그런데 『三國史記』百濟本紀에는 溫祚 13(B.C. 6) 백제의 영역이 동으로 走壤(춘천)에 이른 것으로 기록168)되어 있어 잡지」〈지리고구려 조의 내용과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大東地志』는 백제 文周王 2(476)까지 임진강 이북 지역이 백제영역 이었다고 하면서 삼국사기』지리2, 4에 있는 고구려 지명 중 잘못 기술되었다고 판단한 69개 지명을 백제 지명으로 옮겼으나 나머지 백제 지명은 그대로 고구려 지명으로 둠에 따라 춘천 지역은 여전히 최초 고구려 지명을 사용하였던 것으로 보았다그러나 최근 언어학 분야의 연구 성과는 백제 阿莘王 대인 400년 경 이전까지 대동강 이남 지역이 백제의 북쪽 경계였음을 입증하고 백제의 동쪽 경계 역시 평강-춘천-여주를 잇는 지역임을 밝혀냈다그리고 춘천홍천횡성원주인제양구화천 등을 포함한 52개 지명을 추가로 백제 지명으로 환원시키고 있다.169) 춘천은 처음 백제의 영역에 포함되었다가 이후 고구려의 영역이 되었으며마지막에 신라의 영역으로 편입된 것을 알 수 있다.

앞에서 살폈듯이삼국사기』지리지에는 춘천이 옛 맥의 땅이라고 기록되어 있다춘천 지역에는 춘천 맥국과 관련된 전설과 지명들이 전해지고 있다신북읍 鉢山里 일대는 조선시대의 각종 지리지에 맥국 터가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맥국 왕궁터로 전해지는 발산리 뒤로는 三韓谷(삼한골)이라 불리는 계곡이 있는 산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으며앞으로는 산천리율문리유포리천전리에 걸쳐 넓은 충적대지가 펼쳐져 있고 그 앞에 소양강이 흐르고 있다발산리에는 왕뒤(왕대)궐터맥뚝바리미 등 맥국과 관련된 지명이 지금도 남아 있으며170)바리미를 바리모즉 발의뫼로 보아 발의산발족의 산 이라고 보고바리산은 맥국산왕대산발산으로 보는 의견도 있다.171) 이외에 발산리 뒷 산에서 고탄에 이르는 지역에 토성이 있었다는 설과 발산리 뒷 산에서 牛頭山에 이르는 지역에 흙과 돌로 축조한 성이 있었다는 설 등이 전해지고 있다三岳山에는 발산리에 있던 맥국이 적의 침입을 받아 삼악산성으로 궁궐을 옮기고 싸우다 패했다는 전설이 있으며이와 관련해 대궐터망국대배일골깃대봉망덕봉 등 지명이 남아 있다172).

橫城과 平昌 지역에는 두 지역에 걸쳐 있는 太岐山에 貊國 太岐王과 관련한 전설이 전해지고 있으며이와 연계된 지명들이 남아 있다횡성 屯內 지역에는 마한의 마지막 왕 태기가 신라 세력에 쫒겨 이곳에서 전열을 재정비 해 옛 땅 회복을 도모했으나 결국 태기산성에서 패하고 말았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으며173)이와 연계해 갑옷을 씻었다는 甲川 등의 지명이 전해지고 있다평창 蓬坪 지역에도 같은 태기왕에 대한 전설이 전해지고 있는데맥국의 왕 태기가 춘천 지역에서 다른 부족에게 쫒겨 원주로 옮긴 후 여기에서 강릉지역의 濊國과 일전을 치르고자 태기산에 성을 쌓고 병마를 훈련시켰으나 결국 예국에 패해 왕이 白玉浦에서 투신 자살하였다는 것이다174)평창 지역에는 이와 관련하여 왕이 옥새를 잃어 버렸다는 옥산대왕이 도망치다 휴식을 취했다는 왕유맥국 병사들이 전멸했다는 멸인(면온), 왕이 빠져 죽었다는 백옥포왕이 도망치다 해가 저물었다는 무일리(무이리), 왕의 장군들이 진을 쳤다는 삼형제봉호령봉 등이 있으며태기왕을 신령으로 모시는 태기산 산신령굿이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175)춘천횡성평창에 전해지는 맥국 관련 전설은 춘천에 있던 맥국이 외부 세력에 떠밀려 근거지를 옮기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전설을 모두 믿을 수는 없지만근거없이 생긴 전설은 없으며특히 전설과 관련한 지명들이 지금까지 존재한다면이는 유사한 일이 실제 벌어졌음을 추정해 볼 수 있다.

삼국사기』지리지와 달리본기에는 춘천 맥국을 언급한 기록이 나타나지는 않지만신라본기에 맥국 관련 기록이 등장한다신라본기에는 儒理王 때 화려와 불내가 신라를 침입하자 맥국 거수가 이를 河西(강릉)에서 가로막아 패퇴시켜 신라와 우호 관계를 맺었다는 기록176)과 맥국 거수가 짐승을 사냥하여 바쳤다는 기록177)이 있다유리왕 대의 맥국관계 기사는 江陵과 멀지 않은 지역에서 거수가 통치하던 맥국이 신라와 밀접한 연계 관계를 맺고 있었음을 보여준다이는 당시 낙랑의 압력과 함께 삼한 여러 나라가 정치체제를 구축하고 영역을 넓혀 나가는 격변기에 영동 지방에 인접해 있던 맥의나라가 신라와 연합한 것으로 볼 수 있다강릉에서 화려와 불내의 침입을 막은 맥국 거수의 근거지로 가장 관심을 갖게 되는 지역은 平昌이다평창은 강릉에서 대관령을 넘으면 바로 도착 할 수 있는 곳이며平昌江 유역에서 積石塚을 비롯한 철기시대 유적유물들이 출토되고 있고,178) 봉평 지역에 맥국의 마지막 왕인 태기왕 관련 전설과 지명이 남아 있다.179)삼국사기기록과 고고학 성과로 확인된 유적유물전설과 지명 등을 종합해 보면 기원 전 1세기 무렵까지 춘천에 맥국 중심세력이 있었으나 漢四郡의 樂浪 설치 이후 이들 세력이 춘천에서 밀려 나 횡성을 거쳐 평창에 근거를 마련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춘천 맥국의 실체 여부를 파악하기 위해 검토해야 할 기록 중의 하나는 樂浪 관련 사실이다춘천 지역에서는 최근 많은 유적에서 낙랑과의 연계성을 생각할 수 밖에 없는 漢式系 土器와 環頭小刀 등 鐵器五銖錢 등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다따라서 철기시대 춘천은 백제에 편입되기 전까지 낙랑과 직간접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三國史記』新羅本紀와 百濟本紀에 등장하는 낙랑 관련 기사는 신라본기에 6백제본기에 9회 등장하고 있다신라본기혁거세와 남해왕 재위 기간은 동예 지역인 單單大嶺 동쪽 7현에 樂浪東部都尉가 설치되어 있던 시기이므로신라를 공격한 낙랑은 화려불내 등 낙랑동부도위에 속한 지역에서 이들을 동원해 동해안 지역을 통해 침입한 것으로 보인다당시 낙랑 세력은 기동력을 이용해 신라와 멀지 않은 곳까지 세력을 확장한 것으로 여겨지며자주 신라를 침입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그러나 낙랑이 동부도위를 폐지한 이후 이들 지역은 가 통치하는 독자세력으로 존재하였으며180)儒理王 14(37)에는 고구려 無恤王(大武神王)으로부터 낙랑(옥저의 최리낙랑)이 심한 타격을 받아 5천여 명이 신라로 이주하기도 하였다181)光武帝 6(30) 낙랑이 동부도위를 폐지하고 예인을 현후로 임명한 후 철수 하였음에도 이 지역에서는 매년 낙랑에 조알하는 한편낙랑의 칭호를 사용하였으나 유리왕 14년 이후 동해안 지역에서 낙랑은 더 이상 명칭을 찾아 볼 수 없다그러나 낙랑 대신 화려와 불내가 직접 신라를 침입하고 있고 이를 제지하는데 인접 지역에 있던 맥국이 가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신라본기에 등장하는 낙랑이 낙랑동부도위와 낙랑 부용세력을 통해 신라를 침입한 것과 관련된데 비해 백제본기에 등장하는 낙랑은 말갈을 앞세워 중부 내륙지역에서 백제와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는 것을 살펴 볼 수 있다.

백제본기낙랑관계 기사는 溫祚王 대에 집중되어 있다慰禮城을 중심으로 漢水 이북에 자리잡은 백제는 온조왕 4(B.C. 15) 사신을 낙랑에 보내 우호관계를 유지하고자 노력하였다.182) 이는 건국 초기 馬韓의 인정 하에 한수 이북에 나라의 기틀을 세웠으나 낙랑말갈과 접해 있는 지정학적 조건 하에서 나라의 안정을 위해 취한 방안이었던 것으로 보인다그러나 온조왕 8(B.C. 11) 말갈이 위례성을 공격한 것을 계기로 馬首城과 甁山柵을 세워 방비를 강화함에 따라 낙랑과 긴장관계를 유지하기 시작하였다.183) 이에 낙랑이 우호(부용관계에 있던 말갈을 시켜 병산책을 습격하였고백제는 다시 禿山柵과 拘川柵을 세워 낙랑과의 교통로를 차단하고 있다.184) 온조 13(B.C. 6)에 단행된 백제의 천도는 낙랑과 말갈의 위협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한 방편으로 행해진 것으로 보아 당시 樂浪과 靺鞨의 세력이 대단하였음을 알 수 있다.185) 백제와 낙랑과의 관계는 온조왕 17(B.C. 2)과 18(B.C. 1)에 이르러 정점을 맞는 것으로 보인다온조왕 17년 낙랑이 쳐들어 와 구도읍인 慰禮城을 불태우는 사태가 벌어졌고186)이듬해 말갈이 침입하자 맞서 싸워 말갈 酋長 素牟를 사로잡아 마한으로 보내고 있다이 사실은 당시 백제의 위례성 정착과 한수 이남 천도를 모두 인정해 주었던 마한에서도 말갈의 존재를 이미 상세히 알고 있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국가에 큰 위협 요인으로 존재하였던 말갈을 물리친 백제는 여세를 몰아 실질적으로 말갈을 움직인 세력이었던 낙랑의 牛頭山城을 공격하고자 병사를 일으켰으나 臼谷에서 큰 눈을 만나 회군하였다187)樂浪 牛頭山城은 春川 牛頭山으로 추정되며188)구곡 역시 연구자들에 의해 춘천 인근 지역으로 비정189)되고 있다.

이 기록에서 주목되는 것이 낙랑 우두산성이다백제가 춘천의 우두산성을 공격하고 있음은 우두산성이 실질적으로 백제를 침입하는데 있어 지휘부 역할을 했던 곳이었음을 뜻한다실제 낙랑의 치소가 아닌 춘천이 낙랑 우두산성으로 표기된 것은 당시 우두산성을 근거로 했던 세력이 스스로 낙랑이라고 칭하였기 때문이다이와같은 일은 당시 한 군현이 인정해 주었을 때 가능한 일이다. 『三國志』魏書」〈東夷韓 조에 보면 樂浪과 帶方에서 마한의 여러 臣智들에게 인수를 내려 인수와 옷두건을 갖춘 자가 1천여 명에 달했다는 기록이 있다. 『삼국사기』신라본기유리왕 14(37) 조에는 고구려 無恤王(大武神王)이 낙랑을 멸하여 그 나라 사람 5천 명이 신라에 투항하여 6부에 나누어 살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190) 이 기록에 나오는 낙랑은 평양 중심의 낙랑이 아닌 沃沮의 樂浪(일명 崔理樂浪)이었다낙랑군이 東部都尉를 폐지한 이후에도 동부도위에 속하였던 지역에서는 공식적으로는 의 신분이지만 대외적으로는 낙랑을 호칭하기도 하였음을 알 수 있다이를 통해 볼 때 春川 牛頭山城의 세력은 낙랑의 묵인 하에 또는 그들 스스로 대외적으로 낙랑의 칭호를 사용하였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192)

백제와 낙랑의 긴장 관계는 온조왕 18년 백제가 말갈을 대파하고 낙랑 우두산성까지 공격을 시도한 이후 古爾王 13(246) 까지는 서로간의 충돌없이 이어지고 있다그 관계가 246년 낙랑이 고구려와 싸우는 틈을 타 백제가 낙랑 변방을 습격하고 주민들을 잡아 가는 사태로 인해 상호간의 긴장 관계가 유지되나 낙랑의 침입을 우려하여 다시 주민들을 돌려보내는 것으로 무마되고 있다崎離營戰鬪라고 불리는 이 싸움을 계기로 백제는 주변에 영향력을 급속히 확대해 나간 것으로 보인다.192)

『三國史記』本紀에 등장하는 중부지방 말갈 관련 기록은 百濟本紀30新羅本紀19회 이다백제의 건국과 거의 시기를 같이하여 등장하고 있는 말갈은 초기에는 백제와 영역을 다툴 정도로 치열한 양상을 보이지만이후 수세적 입장과 타협적 입장이 함께 보이고 있으며시기가 갈수록 영토 문제 보다는 경제적인 이유 등으로 침입을 하는 형태로 바뀌어 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초기 건국 과정에 馬韓과의 우호 관계를 바탕으로 한수 이북 위례성에 도읍 하였던 백제는 남쪽에 위치하고 있던 마한과는 상호 협조 관계를 형성하고 있으나 동쪽의 낙랑과 북쪽 말갈과는 매우 긴박한 대립관계를 유지하고 있다온조왕 2(B.C. 17)부터 등장하는 말갈을 보면 이미 백제 건국 이전부터 중부 내륙 지역에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으나 왕을 칭할 수 있을 정도의 단계에는 이르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193) ​ 이들은 고구려로부터 갈라져 나온 맥족의 일부 세력으로 중부내륙의 영서 지방을 주 근거지로 하여 적석총을 만들었던 貊系 靺鞨이었다.194) 온조왕 8(B.C. 11) 기록은 말갈과 낙랑백제와의 위치 문제와 관계를 살펴 볼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해 주고 있다당시 백제를 공격한 말갈은 3천 명에 달하는 대규모 병력이었다이때 말갈은 10일이 지나 군량이 떨어져 퇴각하는데 이로 보아 당시 백제와 말갈의 거리 차이가 멀지 않았다는 것과 말갈이 충분한 군량을 비축하고 백제에 쳐들어 온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말갈의 전술은 병사들이 지닐 수 있을 만큼의 군량을 준비하고 나머지는 현지에서 확보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이와 함께 백제가 말갈의 침입 후 낙랑 영토와 가까운 곳에 마수성과 병산책을 세우는 것에 대해 낙랑이 항의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곧 말갈과 낙랑이 백제와 연접해 있고백제에 다다르기 위해서 같은 통로를 필요로 하고 있음을 알려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아울러 당시에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목책과 성을 함께 활용하고 있고백제가 종전 우호 관계였던 낙랑과도 대립 관계에 접어들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온조왕 10(B.C. 9) 기록은 맥계 말갈의 군사 조직을 살펴 볼 수 있는 근거를 보여주고 있다말갈이 백제의 북쪽 경계를 침입했을 때 백제 군사 2백 명이 막지 못한 말갈병을 왕이 정예 기병 1백 명으로 구원하고 있는 것을 볼 때 당시 백제를 침입하고 있는 말갈은 기병 위주가 아닌 보병 위주였던 것을 추정해 볼 수 있다.195) 온조왕 11(B.C. 8) 백제는 낙랑이 말갈을 시켜 병산책을 습격하자 독산책과 구천책을 세워 낙랑과의 통로를 막고 있다이때 말갈은 독자세력으로 백제를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말갈의 지시를 받는 부용세력으로 움직이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독산책과 구천책이 낙랑과의 교통로에 설치 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초기 백제는 낙랑과 말갈을 방비하기 위해 이들과의 교통로 주요 길목에 목책과 성을 축조하여 침입에 대비하고 있었다.

온조 13(B.C. 6) 백제는 낙랑과 말갈의 침입을 대비하기 위해 도읍을 위례성에서 한수 이남으로 옮긴 후 강역을 北 浿河南 熊川西 大海東 走壤으로 획정하고 있다이로 미루어 당시 말갈은 백제가 도읍을 옮겨 방비해야 할 정도로 군사적 힘이 막강한 세력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온조 18(B.C. 1) 백제가 말갈의 침입을 칠중하에서 격퇴하고 추장 소모를 사로잡아 마한에 보냄으로써 백제와 말갈과의 무력 대결은 백제가 우위를 점하게 되었으며말갈은 추장이 사로잡힐 만큼의 타격을 받고 있다이때 백제가 말갈 추장 소모를 마한으로 보냈음은 마한을 연맹의 맹주로 인정하고 있었고마한 역시 말갈에 대해 잘 알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아울러 백제가 말갈에 막대한 타격을 입힌 것에 그치지 않고 말갈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던 낙랑의 우두산성을 공격하고자 하였으나 큰 눈이 내려 구곡에서 돌아간 것을 확인할 수 있다당시 백제의 동쪽 경계가 주양(춘천)임을 온조왕 13년 기록에서 알 수 있는데 반해 낙랑의 우두산성(춘천)을 공격하고자 한 것은 일견 사료상 맞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이 기록은 춘천이 백제의 동쪽 영역 끝이 아니라 춘천의 경계 지역인 가평을 동쪽 국경으로 하였다는 것으로 이해하여야 한다가평과 춘천은 북한강의 큰 물줄기로 갈라져 있지만 겨울이면 강물이 얼어 강을 건너는 것이 용이하였을 것으로 보인다그렇게 되면 백제가 춘천 우두산성을 공격하기 위해 구곡(지금의 강촌 일대)까지 왔다가 돌아간 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온조 22(4)부터 백제와 말갈과의 관계는 백제가 그동안의 수세적 입장에서 공세적 입장으로 전환하였음을 보여준다이 해 온조왕은 斧峴(평강인근에서 훈련을 겸한 사냥 중 말갈 부족을 만나 이를 격파하였고포로를 장수와 병사들에게 나누어 준 것으로 볼 때196) 많은 말갈족이 포로로 잡힌 것을 알 수 있다이후 18년 간 말갈과 백제 사이에는 충돌 기록이 없으며이때 말갈은 부현 인근의 한 부족이 궤멸되었음은 물론그 여파로 인근 타 부족의 말갈들도 백제와의 충돌을 피하고자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한동안 소강 상태를 보이던 말갈과 백제의 충돌은 온조 40(22) 말갈이 述川城(여주)을 공격하고부현성을 습격하여 1백여 명을 죽이고 약탈하는 것으로 재현되었다.197) 그러나 이때 말갈의 세력은 백제가 보낸 2백 명의 기병으로 쫓아 낼 수 있을만큼 약화 되었으며습격의 목적 역시 영토 문제 보다는 식량 확보 등 경제적인 성격이 더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이는 말갈의 침입이 주로 추수가 끝난 9월 이후에 행해진 것으로 알 수 있다.

온조 40년 이후 말갈과 백제와의 관계는 소강 상태를 유지하고 있으며己婁王 49(125)에는 말갈의 침입을 받은 신라를 구하기 위해 병력을 지원198)하기도 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백제의 군사 지원은 말갈을 충분히 방어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함께 말갈의 군사적 역량을 나름대로 분석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또한 肖古王 49(214)에는 말갈의 石門城을 빼앗기도 하는데이에 위기 의식을 느낀 말갈이 종전의 보병 위주에서 기병으로 군사를 편성하고 술천까지 쳐들어 오기도 하였다.199) 초고왕 대 말갈의 석문성을 빼앗은 것은 백제와 말갈간의 관계에서 백제가 먼저 계획적으로 공격을 한 사례이며당시 말갈이 석문성과 같이 일정 지역을 근거로 활동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古爾王 대에 말갈은 고대국가로 팽창해 나가고 있는 백제와 전쟁 대신 화해를 통해 자생하는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당시 백제는 신라와 치열한 영토 전쟁을 벌이는 한편낙랑대방 등이 고구려와 싸우는 기회를 타 낙랑의 변방을 공격하는 등 활발한 정복 전쟁을 펼치고 있던 시기였으므로 고이왕 25(258) 말갈 추장 나갈이 화친을 청하였고 백제에서도 이를 받아 들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200) 당시의 백제는 마한을 완전히 정벌하지 못한 상태에서 북쪽의 낙랑과도 긴장 관계를 지속하였고 국가 발전을 위한 내치에도 신경을 써야 했던 시점이므로 말갈의 화친 제의를 수용한 것으로 보이나말갈이 백제에 화친을 청한 이유는 더 이상 춘천 우두산성을 중심으로 한 세력이 말갈을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볼 수 있다이 무렵 춘천은 백제의 동쪽 영역으로 편입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낙랑이 고구려에 흡수된 美川王 4(313) 이후 중부지방의 말갈은 대부분 고구려와 백제의 세력에 흡수된 것으로 보이며일부 세력이 산악 지역을 거점으로 생활하였던 것으로 보인다고이왕 25년 이후 130여 년간 백제와의 큰 충돌없이 살던 말갈은 辰斯王 3(387)부터 武寧王 6(506)까지 120여 년간 5회에 걸쳐 關彌嶺赤峴城馬首柵高木城漢山城 등 백제의 북쪽 거점들을 공격하여 함락시키는 등 백제를 괴롭히고 있다이 시기 백제를 공격한 말갈은 대단한 기세를 보이고 있는데 이는 당시 고구려의 팽창 정책과도 관계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낙랑의 멸망 이후 연합세력이 없어진 말갈의 일부 세력은 고구려의 압력과 회유에 넘어간 것으로 보이며백제의 북쪽 거점을 공격하는 대가로 반대급부를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무령왕 7(507)에는 남진정책을 꾸준히 추진해 온 고구려와 함께 백제를 공격하는 것으로 기록에서 사라졌다.

백제와 접촉한 말갈에 대한 기록이 백제 건국 초기부터 등장하고 있는데 비해 신라와 접촉한 말갈에 대한 기록은 祗摩王 14(125) 조에서 처음 보이고 있다이들 말갈은 삼국지』위서」〈동이전〉 등 사서에 기록된 沃沮와 濊 지역을 주 근거지로 하고 있었던 사람들로 보인다이 지역은 玄菟郡과 낙랑동부도위가 설치되었던 곳이다현도군은 한 무제 때 옥저에 설치된 후 토착민의 저항 등에 의해 폐지되어 고구려의 서북쪽으로 옮겨 갔으며낙랑동부도위는 현도군 이주 후 옥저와 예 땅의 7현을 다스리다가 광무제 6(30) 폐지되었다이후 이들은 스스로 낙랑이라고 지칭하기도 하나 儒理王 14(37) 이후 동해안 지역에서 낙랑의 호칭은 더 이상 사용되고 있지 않다옥저와 예 지역이 고구려에 복속된 후 동해안 지역에서 이들 지역과 관련된 사람들과 신라의 접촉은 88년 간 기록을 찾아 볼 수 없다.201)

동해안 지역에서 이들 지역과 관련된 것으로 추정되는 세력이 신라와 처음 접촉한 기록은 祗摩王 14(125) 조에서 찾아 볼 수 있다.201) 백제 온조왕 대부터 영서 지역에서 보이고 있는 貊系 靺鞨과 지역적 차이를 갖고 있는 이들 말갈은 沃沮와 東濊를 근거로 하고 있음에 따라 濊系 靺鞨로 부를 수 있다.202) 이 해 말갈은 신라의 북쪽 변경에 쳐들어 와 관리와 백성을 죽이고 노략질 한 후 다시 大嶺柵을 습격하고 남대천을 지나 쳐들어 오자 신라에서는 백제에 지원을 요청하여 이를 수습하고 있다이어 逸聖王 4(137) 長嶺의 목책 다섯 개를 불태웠으며, 6(139)에는 다시 장령을 습격하여 노략질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이에 따라 일성왕은 말갈의 주요 교통로로 활용되고 있는 장령에 목책을 세워 방어하는 한편말갈 정벌을 도모하기도 하였다이후 말갈의 신라 침입은 奈解王 8(203) 변경을 침범한 이후 190여 년이 지난 奈勿王 40(395)에 찾아 볼 수 있다이때 신라는 말갈을 삼척에서 크게 격파하였으며이후 말갈은 더 이상 독자적인 힘으로 신라를 침공하지 못하고 있다.

말갈이 다시 신라를 침입한 것은 慈悲王 11(468)과 炤知王 3(481)때이다이때 말갈은 남진정책을 펼치던 고구려와 함께 悉直城 등 북쪽 변경을 공격하고 있다이 기록은 말갈이 더 이상 독자적인 세력으로 존재하지 못하고 고구려에 흡수되어 부족이 전쟁에 동원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삼국사기에 등장하고 있는 맥국 관련 기사는 춘천에 있던 맥국이 평창 지역으로 옮겨간 후 신라와 관계를 맺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기원전 1세기 무렵 춘천에서 맥국의 주축세력이 떠난 후 그 자리에는 낙랑의 부용세력이 우두산성을 중심으로 자리잡은 것으로 보인다그들은 영서 북부 내륙의 貊系 靺鞨을 이용해 백제와 끊임없이 대립 관계를 이루었다낙랑의 부용세력으로 존재한 맥계 말갈은 백제와 가까운 지리적 잇점을 활용하여 수시로 침입과 약탈을 행하였다말갈의 백제 침입은 초기에는 영역과 주도권 싸움의 성격이 강했으나 시간이 갈수록 경제적 목적이 강했던 것을 알 수 있다古爾王 25년 맺어진 백제와 말갈의 화친은 그간 말갈의 배후세력으로 남아 있던 春川의 樂浪 牛頭山城이 더 이상 그 역할을 할 수 없는 상황에 처했음을 의미한다따라서 춘천 지역 역시 이때를 즈음해 백제의 영역으로 편입된 것으로 보인다.

165) 삼국사기권제35 잡지4지리2 삭주 .

166) 삼국유사권 제1 기이1 마한.

167) 삼국사기권 제37 잡지(雜志)6지리(地理)4 고구려(高句麗) 우수주(牛首州) : 우수주에는 42개 군현이 소속되는 것으로 되어 있으며, 이들 지명을 환원해 보면 강원 영서 대부분과 경기 가평, 함남 안변, 충북 제천 등지까지 통할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168)​삼국사기권 제23,백제본기1, 온조왕 13년조.

169) 도수희, 1987,백제지명 연구, 백제어 연구(1) -전기어를 중심으로-, 백제문화개발연구소. 201213.

170) 한글학회, 1967,한국지명총람2, 465.

171) 김택균, 1983, 춘천 맥국설에 관한 연구, 강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72) 이무상, 2007, 『우리의 소슬뫼를 찾아서』, 한결, 282283.

173) 최승순 외, 『태백의 설화()』강원문화총서4, 235236.

174) 평창군, 1979, 『평창군지』, 456457.

175) 이무상, 2007, 『앞 책』, 284288.

176) 삼국사기권 제1 신라본기1, 유리니사금 17년조.

177) 삼국사기권 제1 신라본기1, 유리니사금 19년조.

178) 최복규 외, 1986,평창지역의 선사사회와 그 문화, 『강원사학』2앞 논문. 예맥문화재연구원, 2008,『평창 평창읍 평창 강 수계 수해복구공사부지내 유적 발굴(시굴)조사 약보고서』.

189) 평창군, 1979, 『평창군지』.

180) 삼국지』 「위서(魏書)30 오환선비동이전(烏丸鮮卑東夷傳)30 동옥저.

181) 삼국사기권 제1,신라본기1, 유리이사금 14년조.

182) 삼국사기권 제23,백제본기1, 온조왕 4년조.

183) 삼국사기권 제23,백제본기1, 온조왕 8년조​.

184) 삼국사기권 제23,백제본기1, 온조왕 11년조.

185) 삼국사기권 제23,백제본기1, 온조왕 13년조.

186) 삼국사기권 제23,백제본기1, 온조왕 17년조.

187) 삼국사기권 제23, 백제본기1, 온조왕 18년조.

188) 유재춘, 2005,춘천지역 고대사와 우두산성,『춘천맥국의 역사적 연구』, 강원향토문화연구회..

189) 정약용, 『여유당전서6, 지리강역고, 낙랑별고.

          심경호, 1986,『다산과 춘천』, 강원대학교출판부, 44.

          ​천관우, 1976, 삼한의 국가형성(), 『한국학보』2, 403404.

          ​이무상, 2007, 『앞 책』, 190194.

190) 고구려 대무신왕 15년 조에 보면 옥저의 토착 세력이었던 최리가 낙랑왕을 칭하였으며, 낙랑동부도위가 폐지된 이후인 고구려 대무신왕 20년 조에도 낙랑을 멸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같은 기록이 백제 유리왕 14년 조에도 나오고 있다.

191) 김기섭, 1991,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보이는 말갈과 낙랑의 위치에 대한 재검토, 『청계사학』8.

          ​문안식, 2006,백제의 말갈지역 진출과 그 추이,『강원의 수부 춘천 맥국의 재조명』.

192) 이 때의 사실에 대해서는 삼국지』위서」〈조와 , 『삼국사기』고구려본기동천왕 조와 백제본기고 이왕 조에 각각 기록되어 있다.

193) 『삼국사기권 제23,백제본기1, 온조왕 2년조 .

194) 문안식, 1998, 삼국사기 라제본기 말갈 사료에 대하여, 『한국고대사연구』13, 181.

195) 『삼국사기권 제23,백제본기1, 온조왕 10년조 .

196) 『삼국사기권 제23,백제본기1, 온조왕 22년조.

197) 『삼국사기권 제23,백제본기1, 온조왕 40년조.

198) 『삼국사기권 제23,백제본기1, 기루왕 49년조.

199) 『삼국사기권 제23,백제본기1, 초고왕 49년조.

200) 『삼국사기권 제24,백제본기2, 고이왕 25년조.

201) 『삼국사기권 제1, 신라본기1, 지마이사금 14년조 .

202) 문안식, 2003, 『한국고대사와 말갈』, 혜안, 281,

         ----------, 2006, 앞 논문, 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