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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貊國을 통해 살펴 본 春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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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貊 關聯 中國側 文獻史料 檢討 

중국 사료들을 보면 우리 민족을 지칭하는 명칭으로 濊와 貊이 韓과 함께 등장하고 있다. 예·맥·예맥의 명칭은 시대에 따라 지칭하는 지역이 달라져 왔다. 先秦時代의 예맥은 중국의 북쪽 지역에서 보이고 있으나 『三國志』나 『後漢書』 이전 기록에는 만주 지역을 중심으로 분포하고 있으며, 『삼국지』나 『후한서』에 이르면 한반도 중․동부 지역의 세력을 지칭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와같은 기록은 역사의 오기가 아니라 우리 민족의 일파인 예와 맥이 중국 북부 지역으로부터 한반도 중·동부 지역으로 이주하는 과정으로 살펴 볼 수 있다. 

맥에 관해 기록한 가장 오랜 사서는 『書經』이다. 맥은 『서경』에서 기원전 10세기 무렵 북방이민족을 통칭하는 용어로 사용된 이래140), 기원전 7~8세기에는 追와 貊으로 나누어 불려졌던 것으로 보인다. 追는 『詩經』「大雅」蕩之什〈韓奕〉편141)에서 보이고 있는데 내용상 其追其貊의 追가 연․한․맥의 근처에 있었으며, 음운상의 유사성을 들어 그간 여러 연구자들이 濊로 해석하여 왔다142). 『孟子』에서도 맹자와 백규의 대화에서 제후인 백규가 20분의 1을 세금으로 받고 싶은데 맹자의 견해는 어떤지를 묻는 대화 과정에서 맥추가 언급되고 있는데 이를 통해 당시 맥과 추(예)에 조세제도가 자리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143). 추를 예로 보는 것이 맞다면 기추기맥의 문구는 예와 맥을 구분하여 표기한 것이 된다. 당시 연나라가 하북지방에 있었으므로 맥과 예는 하북지방과 인접한 지역으로 볼 수 있다. 

『山海經』「海內西經」에서는 맥국이 한수 동북쪽에 있는데 연나라와 가까워 연이 이를 멸했다고 기록144)하고 있는데, 이는 곧 맥을 종족이 아닌 국가로 지칭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앞에서 살펴 본 맥은 중국 북방의 미개종족을 거론 할 때 빠짐없이 등장하고 있다. 이는 자신들이 주류라고 생각하는 중국측 입장에서 맥을 미개종족으로 부를 수 있었을지 몰라도 분명한 사실은 맥이 중국 동북방에서 큰 세력을 형성하였고, 국가로 존재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연나라의 침입 이후 일부 세력이 한반도 쪽으로 이동하였을 개연성을 이미 보여주고 있다. 

최초 맥으로 기록된 맥족 관련 기록은 이후 추(예)․맥․대맥․소맥․맥국 등 여러 명칭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맥과 예맥이 혼용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기록은 대략 기원전 7세기경부터 기원전 3세기 정도까지 맥만 등장하나 기원전 3세기 이후부터는 예맥이 함께 쓰이기 시작하였음을 『史記』『漢書』『三國志』『後漢書』등을 통해 알 수 있으며, 이들 사료를 바탕으로 예․맥․예맥의 위치가 어떻게 비정되고 있는지와 그들의 생활상까지를 함께 파악해 볼 수 있다.

『史記』「匈奴列傳」145)과 「貨殖列傳」146)의 기록을 보면 예맥은 상곡의 동쪽에 있었고, 부여․예맥․조선이 독자적으로 있음을 살펴 볼 수 있다. 아울러 기술상의 순서로 보아 중국과 예맥이 바로 접하고 그 옆에 조선이 있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漢書』에는 高帝때 북맥이 한을 도와 싸운 내용147)과 武帝때 동이예군 남려가 28만 명을 데리고 투항한 내용148), 王莽이 고구려를 공격하려 할 때 부여와 예맥이 군사를 일으킬 것을 걱정하는 기록149) 등이 보이고 있다. 한 고제기의 기록은 초나라와의 치열한 전쟁 과정에 북맥 사람들이 기병을 동원해 고조를 지원할 정도의 무력을 갖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무제기의 기록은 예를 동이로 명기한 것으로 보아 예와 맥이 모두 동이의 한 종족이며, 28만명의 백성을 데리고 투항한 예군 남려의 사례는 예가 중국으로부터 君의 칭호로 불렸으나 이미 국가 단계에 있었고, 통치자를 薉君으로 불렀음을 알 수 있다. 왕망전의 기록은 고구려 유리왕 31년 왕망이 (고)구려 군사를 징발하여 胡를 치기 위해 (고)구려 군사들을 강제로 징발해 보내자 군사들이 국경 밖으로 도주해 변방에서 노략질을 하였고, 이에 주․군에서 그 책임을 (고)구려에 떠 넘기려 할 때 장수 嚴尤가 왕망에게 아뢰는 내용에 들어 있다. 이 기록을 보면 당시 부여와 예맥은 국가가 망하고 유민 형태로 있거나 또는 (고)구려 등 고대국가에 편입 또는 영향력 하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의 상황에 대해 『삼국지』는 동원된 군사를 고구려 군사로, 『후한서』는 구려 군사로 언급150)하고 있으나 동원된 종족은 모두 예맥 사람들이었음이 분명하다. 

『三國志』「魏書」〈東夷傳〉은 夫餘·高句麗·東沃沮·濊·韓·辰韓·弁辰 條에 예맥과 관련된 여러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동이전〉 부여 조151)를 보면, 부여의 건국지 일대가 모두 예와 맥이 거주하였던 곳이고, 부여왕은 다른 지역에서 이주해 온 유이민 이었음을 살펴볼 수 있다. 〈동이전〉 고구려 조 기록152)은 고구려 남쪽에 예맥이 있는데 나라에 왕과 관직이 있고, 사직에 제사를 지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부여와 같은 종족이며, 처음 나라를 세울 때 소수 일대에 거주하였던 맥족이 나라를 세웠기 때문에 소수맥이라고 불렀고, 이후 세력을 확장해서 마침내 고구려가 된 것으로 유추해 볼 수 있다. 아울러 왕망이 건국한 新에서는 당시 고구려 왕인 대무신왕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侯로 불렀음을 알 수 있다. 〈동이전〉동옥저 조153)기록은 당시에 이미 예맥이 한반도 내 옥저 남쪽에 퍼져 살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한무제가 고조선을 정벌하고 그 땅에 한4군을 만들고 옥저성을 현도군 치소로 했다가 군을 (고)구려 서쪽으로 옮겼고, 광무 6년(30)에 기존의 동부도위를 폐지하면서 현 안의 거수를 현후로 하여 불내․화려․옥저 등 일곱 현을 후국으로 만들었으며, 후국을 폐지한 뒤에도 불내예후는 계속해서 공조와 주부를 두고 불내예를 통치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를 통해 불내예 역시 우리 역사에서 국가명을 쓰는 연맹왕국이나 고대국가로 성장하지는 못했지만 예족이 통치한 나라 중 하나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동이전〉예 조154)에 보면, 북으로 고구려․옥저와 접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동이전〉고구려 조와 동옥저 조를 보면 남으로 예맥과 접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예족과 맥족이 자리잡고 있었던 지역을 『삼국지』에서는 맥을 생략하고 예로 표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당시 맥이 낙랑의 예속하에 정치체제로서의 기능을 상실하였고, 영서 내륙에 흩어져 맥계말갈로 생활하거나, 일부 세력만이 춘천을 떠나 평창 등 일부 지역에서 맥국으로 체제를 유지하였기 때문에 존재를 인식하지 못하여 예로 표기된 것으로 보인다. 예는 호수가 2만 호인데 나라에 대군장이 없고 후․읍군․삼로의 관직이 있어 백성들을 다스렸으며, 구려와 같은 종족이라고 하고 있다. 한나라에서 4군을 설치한 이후 단단대령 서쪽은 낙랑에 속하게 하고, 동쪽 7현은 도위를 두어 다스리다가 후에 도위를 폐지하고 거수를 후로 삼아 다스리게 했으나 한나라 말 (고)구려에 속하였다. 한나라 정시 6년(245) 예가 구려에 복속했다 하여 낙랑과 대방태수가 침범하니 불내후 등이 항복하였고, 정시 8년(247) 그들이 공물을 바치자 다시 불내예왕을 삼았는데 수시로 군에 나와 조알하였던 것을 볼 때 일시적이지만 다시 한의 영향력 하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동이전〉한 조155)에 보면, 한은 마한, 진한, 변한의 세 종족이 있는데, 마한은 정착농경을 하고 신지․읍차 등이 다스리는 50여 나라가 있으며, 큰 나라는 1만여 호, 작은 나라는 수천 호로 모두 10여 만 호가 살고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후한 환제․영제 때 한과 예가 강성해져 군현이 통제하지 못하자 많은 백성이 (마)한으로 달아났으나 건안 연중에 대방군을 설치하고 한과 예를 정벌하니 옛 백성들이 다시 돌아 왔으며, 경초 연간에는 대방과 낙랑태수를 통해 몰래 (마)한의 여러 신지에게 읍군의 인수를 주고 읍장들에게도 인수를 주어 인수와 옷, 두건을 갖춘 자의 수가 1천여 명에 달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마)한의 여러 국가들과 유대 관계를 맺어 마한 사회를 분열시키고 영향력을 극대화 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마한 사람들은 국읍에 우두머리가 있어도 백성과 읍락에 섞여 생활하는데 집은 풀로 지붕을 잇고 땅을 파 무덤처럼 방을 만들고 문을 땅 위에 내 온 식구가 다 함께 그 속에 산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철기시대 수혈 주거지를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동이전〉진한 조156)에 보면, 진한은 기원전 3세기 무렵 진나라의 부역을 피해 도망한 사람들이 정착한 나라로 마한과는 언어가 다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로 미루어 당시 한반도 내에 예․맥족 이외에 중국인들도 부역이나 전란을 피해 다수 이주하였음을 유추해 볼 수 있다. 〈동이전〉변진 조157)에 보면, 여러 별읍을 신지․험측․번예․살해․읍차 등 거수가 다스린 것을 알 수 있다. 변한과 진한은 모두 24국으로 큰 나라는 4~5천 호, 작은 나라는 6~7백호로 총 4~5만 호이며 연맹의 맹주라 할 수 있는 진왕은 마한에서 승계한 것으로 되어 있다. 나라에서 철이 생산되어 한․예․왜에 수출하고, 낙랑과 대방에도 공급한 것으로 보아 육로와 해로를 통한 교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後漢書』는 「光武帝紀」와 「東夷列傳」夫余國·高句麗·句麗·沃沮·濊·韓 條에 맥·예·예맥에 관한 기록이 있는데 전체적으로 『삼국지』「위서」〈동이전〉과 내용이 유사하다. 「광무제기」158)를 보면 광무 25년(49) 맥인들이 우북평 등을 침범해 요동태수가 포위하고 항복시켰다고 기록하고 주석에 맥인은 예맥국인이고 통치자를 거수라 한다고 서술하였으나 같은 사실을 기록한 『三國史記』고구려 모본왕 2년 조에는 장수를 보내 북평 등을 공격했으나 요동태수가 은혜와 신뢰로 대하므로 화친하였다고 되어 있다. 이를 통해 광무제 당시 중국인들은 고구려를 예맥국 사람들로 구성된 새외의 맥인집단으로, 고구려 왕을 거수로 인식하고 있음을 유추해 볼 수 있다. 「동이열전」부여국 조는 부여가 본래 예의 땅임을 언급하면서, 남으로 고구려와 접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동이열전」고구려 조160)에 관한 기록은 그들이 부여와 같은 종족이며, 남으로 예맥과 접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동이열전」구려 조161)를 보면 그들을 맥 또는 소수맥으로 부르고 있으며, 왕망이 엄우를 보내 구려후 추를 살해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동일 기록에서 고구려왕을 하구려왕이라 낮춰 불렀다는 기록을 볼 때 구려는 별도 국가로 보기 보다는 고구려로 보는 것이 타당할 듯 하다. 이는 같은 내용을『삼국지』「위서」고구려 조에서 기록하고 있음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당시 (고)구려 주변에는 (고)구려에 편입되었거나 협조 관계에 있던 예맥족이 다수 살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는 (고)구려가 예맥과 함께 화려성을 공격한 것이나 중국 군현들이 연합하여 예맥거수를 참수하고 병마와 재물을 빼앗았다는 기록, 고구려 왕 궁이 마한․예맥의 기병 수천기로 현도를 포위하였다는 기록 등을 통해 살펴 볼 수 있는데 이를 통해 고구려가 장기간에 걸쳐 중국과의 대립을 지속하였음을 알 수 있다. 「동이열전」옥저 조162)를 보면 남으로 예맥과 접하고 있으며, 한무제가 옥저땅에 현도군을 두었으나 이맥에게 쫒겨 군을 고구려 서북쪽으로 옮기고 옥저를 현으로 하여 낙랑 동부도위에 속하게 하였으며, 광무제 때 도위를 폐지하고 거수를 옥저후로 봉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동이열전」예 조163)는 예의 북쪽에 고구려와 옥저가 있고, 남으로 진한과 접하였으며, 서쪽으로 낙랑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어 예의 위치를 살펴 볼 수 있다. 현도군이 옮겨간 후 옥저와 예맥이 모두 낙랑에 소속되었는데 동부도위를 설치하여 다스렸으나 건무6년(30) 도위를 폐지하고 거수를 현후로 삼아 조알하게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예 사람들은 고구려와 같은 종족이며, 후․읍군․삼노가 백성들을 다스렸는데 산천을 경계로 하여 부락마다 독립된 생활을 하였다. 그들은 동성간 혼인을 금지하고, 양잠을 하였으며, 무천제를 지냈고, 책화제와 같은 규범을 통해 사회 질서를 유지하였다. 예 사람들은 길이가 세길이나 되는 긴 창을 갖고 보병전을 잘 하였다고 하는 기록을 볼 때 기병전 보다는 보병전에 능숙하였음을 알 수 있다. 「동이열전」한 조164)는 마한 북쪽에 낙랑이 있고, 진한 북쪽에 예맥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후한서』「동이열전」예 조에서는 남으로 진한과 접해있다고 기록하고 있음을 볼 때 일반적으로 당시 우리나라 동부 지역의 예맥은 예로 통칭되었음을 알 수 있다.

140) 『서경(書經)』4주서」〈무성5

​141) 『시경』대아탕지십한혁.

142) 김상기, 1974,한예맥 이동고, 『동방사논총』, 서울대학교출판부, 357, 김정배, 1980,한국민족과 예맥, 『한국 민족문 화의 연구』, 고려대학교출판부, 23, 김정학, 1981, 중국문헌에 나타난 동이족, 『한국사』23, 국사편찬위원회, 김택균, 1983, 춘천 맥국설에 관한 연구, 강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5,문헌자료를 통해 본 춘천의 맥국,『춘천맥국의 역사적 연구』, 강원향토문화연구회.
143) 『
맹자6편 제2고자 장구-(告子 章句-.

144) 정재서 역, 1993,『산해경』, 민음사, 238.

145) 『사기110, 흉노열전50.

146)​ 『사기110, 화식열전69.

​147) 『한서1 고제기1. 삼국지 위지 동이전 부여조에 濊貊之地라는 기록이 나오고 있는 것을 볼 때 북맥북부여로 추정해 볼 수 있다.

148) 『한서6 무제기6.

149) 『한서99 왕망전69.

150) 『후한서85 동이열전75 구려.

151)​ 『삼국지』위서30 오환선비동이전30 부여.

152) 『삼국지』위서30 오환선비동이전30 고구려.

153) 『삼국지』위서30 오환선비동이전30 동옥저.

154) 『삼국지』위서(魏書)30.

155) 『삼국지』위서30 오환선비동이전30 .

156) 삼국지​「위서30 오환선비동이전30 진한.

157) 삼국지​「위서30 오환선비동이전30 변진.

158) 후한서1 광무제기1.

159) 후한서85 동이열전75 부여국.

160) 후한서85 동이열전75 고구려.

161) 『후한서85 동이열전75 구려.

162) 『후한서85 동이열전75 옥저.

163) 『후한서85 동이열전75 .

164) 『후한서85 동이열전7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