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문화
사이트 내 전체검색

2. 문헌자료로 본 맥국

$ar_it[$k]
윤용구(2016) 낙랑군호구부 25개 현의 구획
상세정보

본장에서는 맥국을 부정하고 영서예를 주장하는 논지의 핵심요소로 제시되는 1)단단대산령 2)예(濊)2만호 3)영서예와 영동예의 실체와 그 실상을 문헌적 검토를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 

지금 영서예를 주장하는 논자들은 태백산맥을 기준삼아 사용하고 있는 영서(嶺西)지역을 단단대산령을 기준으로 하는 영서(領西)지역과 교묘하게 등치(等値)시키고 있다. 이는 춘천을 중심으로 하는 영서(嶺西)지역을 단단대산령 영서(領西)지역과 등치시켜 영서(嶺西)가 영서예(領西濊)라는 가설(假說)을 꿰맞추기 위함에서 비롯되었다. 영서(嶺西)가 영서(領西)와 동일지역이라는 가설이 성립되어야만 춘천을 중심으로 하는 맥국설을 부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1) 단단대산령(單單大山領) 실체 

영서예(領西濊)는 영동예(領東濊)에 대한 대칭 개념으로 출발한다. 영동예가 성립하지 않으면 영서예도 성립하지 않는다.

김창석은 “고대의 영서 지역과 춘천맥국설”과 국립춘천박물관 강원연구원 강원학연구센터에서 주최한 제1회 강원고대문화연구심포지엄 『고대 강원의 정치체와 물질문화』 “맥족의 분포와 영서 북부 지역의 고대 정치체”에서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오환선비동이전(烏丸鮮卑東夷傳) 예(濊)조의 “自單單大山領以西屬樂浪 自領以東七縣 都尉主之 皆以濊爲民 後省都尉 封其渠帥爲侯 今不耐濊皆其種也”를 “單單大山領의 서쪽은 낙랑에 속하고, 그 동쪽의 7縣은 都尉가 주관했다. 그 주민은 모두 예족이었다. 뒤에 도위를 없애고 그 渠帥를 侯로 봉해주었으니 지금 不耐濊가 모두 그 종류이다.”라고 번역하고, 이에 대해 “단단대산령은 이설이 있지만, 낙랑군의 치소가 있던 평양과 함흥(옥저성)·안변(불내성) 사이를 가로지르는 준령으로서는 철령(鐵嶺)이 유력하다. 그 서쪽이라면 지금의 영서 및 황해ㆍ경기 일부에 해당한다. 낙랑군은 일찍이 철령과 이에 이어지는 태백산맥을 기준으로 서쪽은 직접 관할하고 그 동쪽은 동부도위(東部都尉)를 두어 관장토록 했다. 그런데 양편은 모두 예족 분포지였다. 따라서 4세기 말 고구려 그리고 4세기 중엽 이전에 백제가 점령하여 영유한 한강 이북과 영서 지역의 주민도 예족에 속한 집단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라고 하였다.

영서예(領西濊)가 성립하려면 영동예(領東濊)가 성립 가능한가라는 문제가 선결되어야 한다. 영서예(領西濊)와 영동예(領東濊)의 영(領)은 단단대산령(單單大山領)의 령(領)을 말한다. 단단대산령에서 령(領)은 고개를 뜻하는 령(嶺)과 쓰임도 다르고 의미도 다르다. 예(濊)와 낙랑(樂浪)지역을 구분하는 경계(境界)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보았을 때 단단대산령(單單大山領)의 ‘산령(山領)’은 ‘산들이 이어져 있다’는 ‘산맥(山脈)’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령(領)은 거느리고 있는 모양을 뜻하니 대산령(大山領)은 높은 산이 이어져 있는 모양이다. 그러므로 ‘단단대산령’을 철령과 같이 특정한 고개로 지칭했다고 보기 어렵다. 단단대산령은 예와 낙랑을 경계 지워주는 산맥으로 봐야한다. 철령(鐵嶺)이라는 특정 고개를 나라간의 경계로 지목하여 동서(東西)의 명칭을 붙여서 사용하는 것에는 일단 문제가 있다. 김창석(2009)은 이러한 점을 인지하였는지 모르겠지만 ‘일찍이 철령과 이에 이어지는 태백산맥을 기준으로’라는 설명을 덧붙이며, 단단대산령을 철령 아래로 이어져 있는 태백산맥으로 비정하고, 태백산맥의 서쪽이라면 지금의 영서 및 황해·경기 일부에 해당한다고 추론하였다. 

김재홍(2015)은 낭림산맥을 기준으로 영서예와 영동예로 구분하고, 강원북부 이남 예(濊)를 추가하여 삼분하였다. 이에 대해 김창석(2018)은 시간에 따른 예족의 확산 과정을 간과한 결과라며, 앞서 김창석(2009)의 주장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濊傳에서 예가 남쪽으로 辰韓과 접한다고 했는데, 만약 영서·영동예를 낭림산맥 남부를 중심으로 비정하면 진한 세력이 현재의 강원 북부까지 올라와 있었던 셈이 되어 버린다. 따라서 임둔 시기에는 현재의 평안남도 동부, 함경 남부가 중심이었으나, 3세기의 영서예는 경기 북동부와 강원 영서 북부를 포괄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단단대산령으로 영(領)의 서쪽과 동쪽으로 나눈 시기는 임둔 시기여서 현재의 평안남도 동부, 함경남부가 중심이어야 한다면서, 김창석(2009)은 태백산맥의 서쪽이라면 지금의 영서 및 황해·경기 일부에 해당한다고 서로 배치되게 언급하였다. 

한(漢)은 예지역에 설치되었던 임둔군을 BC 82년에 폐지하고 이를 낙랑군에게 넘겨 단단대산령을 경계로 하여 동쪽의 예지역에 동부도위를 설치한 시기는 BC 75년 이후이며 동부도위는 AD 30년에 폐지되었다. 김창석(2009)은 동부도위가 설치되었을 때 “이미 그 서쪽이라면 지금의 영서 및 황해·경기 일부에 해당한다.”고 하였다. 이는 김재홍(2015)의 주장과 동일하다. 김창석(2018)은 김재홍(2015)이 영서예 영동예 남부예 등으로 삼분(三分)해야 한다는 논지를 전개하자 김창석(2009)에서 주장하던 내용을 정면에서 뒤집어 상반된 주장을 하고 있다.

 

김창석(2018)은 단단대산령이 철령이고 태백산맥을 기준으로 동서로 나뉠 수 있다고 하였는데, 이 당시는 낙랑군이 25현(縣)으로 운영되던 때였으니 25현의 위치를 비정해 본다면 단단대산령의 위치를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박준형(2018)은 영(領) 동쪽의 칠현(七縣)은 낭림산맥의 동남쪽에 비정된다고 하며 단단대산령은 낭림산맥과 묘향산맥과 연계될 가능성이 높다고 하였다. 한편 김명우(1995)는 단단대산령을 낭림산맥의 설한령(雪寒嶺)으로 비정하였다. 두 사람 또한 단단대산령을 고개로 보고 있는데, 다만 단단대산령이 낭림산맥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었을 것이라 한 점에서는 일치한다.  

 

 

2) ‘호수(戶數) 2만’의 실체    

김창석(2018)은 “濊는 남으로 진한과, 북으로 고구려·옥저와 접한다. 동쪽은 큰 바다로 막혀있다. 지금 조선의 동쪽이 모두 그 땅이다. 戶數는 2만이다.”를 설명하면서 여기에 濊를 동쪽 바다에 접하고 있는 동예(東濊)로 보지 않는다며 다음과 같이 풀이하였다.    

 

위 기록에서 ‘조선의 동쪽이 모두 그(예의) 땅’이라고 했으니 예의 서변이 조선과 접한다는 말이다. 조선은 BC 108년에 설치된 樂浪郡을 일컫는다. 낙랑군의 首縣이자 군치가 朝鮮縣이었으므로 낙랑군 대신 그 이름을 썼다. 낙랑군은 BC 82년에 眞番郡과 臨屯郡이 폐지되고 BC 75년 玄菟郡이 이치되면서 그 관할 지역의 일부를 넘겨받아 영역이 확대되었다. 위 기록의 조선, 즉 낙랑군은 확대되기 전의 原 낙랑군이라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당시 예의 호수가 2만이라고 했는데, BC 45년에 작성된 「樂浪郡 初元四年 縣別戶口簿」에 따르면 동예에 해당하는 지역의 호수가 6,606호이기 때문이다. 

 

“濊南與辰韓 北與高句麗 沃沮接 東窮大海 今朝鮮之東皆其地也 戶二萬 (濊는 남으로 진한과, 북으로 고구려·옥저와 접한다. 동쪽은 큰 바다로 막혀있다. 지금 조선의 동쪽이 모두 그 땅이다. 戶數는 2만이다.)”는 진술은 진수가 삼국지를 작성하던 3세기 무렵의 예의 상황을 말한다. 김창석(2018)은 여기에 등장하는 조선을 두고 ‘조선(朝鮮)은 BC 108년에 설치된 樂浪郡을 일컫는다.’라고 하였다가 한 걸음 더 나아가 ‘확대되기 전의 原 낙랑군이라고 생각된다.’고 하며 그 증거로 당시 예의 호수가 2만이라고 하였다며, BC 45년에 작성된 「樂浪郡 初元四年 縣別戶口簿」를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이는 원문(原文)에 있는 ‘今’자를 주목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일어난 참극(慘劇)이다. 호 2만은 3세기 무렵의 예의 호구자료이다. 3세기 상황에 대한 근거를 BC 45년에 작성된 호구부에서 찾아내려고 하다 보니, 영(領) 서쪽에 영서예라는 지역을 만들고 이 지역의 호구수를 더하면 2만호에 가깝다고 하며 견강부회(牽强附會)하였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진수가 편찬할 때와 가장 가까운 시기의 자료를 찾고 자료 작성 시기와 편찬사이의 시간 간극을 고려해서 유추해 보아야 한다. 정상민(2018)은 AD 2년에 조사된 『한서』자료와 AD 2세기 경 작성되어 『후한서』 군국지에 기재된 낙랑군 호구수를 비교하여 영(領) 동쪽에 있었던 예(동옥저 포함)의 호수가 2만5천호에 이르렀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진수가 삼국지를 편찬할 당시인 3세기 옥저를 포함하는 영(領) 동쪽 인구수를 15만구(萬口)로 추산하였다.

김창석(2018)이 BC 45년에 작성된 「樂浪郡 初元四年 縣別戶口簿」를 가지고 3세기 무렵의 호구수에 직접 대입하여 단단대산령 동쪽의 부족분을 단단대산령 서쪽지역 호구수에 합하여 계산하였다는 점은 단단대산령의 동쪽과 서쪽에 예(濊)가 존재해야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비롯된 산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로써 단단대산령의 서쪽에 예를 만들어야 가설(假說)을 성립시킬 수 있었기 때문에, 문헌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영동예와 영서예를 조작(造作)해내었다. 

 

3) 영서예(領西濊) 영동예(領東濊)의 실체

단단대산령을 기준으로 서쪽과 동쪽에 예가 있었다는 주장은 『삼국지』 예(濊)조의 “自單單大山領以西屬樂浪 自領以東七縣 都尉主之 皆以濊爲民 後省都尉 封其渠帥爲侯 今不耐濊皆其種也”와 유착되어 있다. 그러나 『후한서』권85 「동이열전」제75 예조에는 “自單單大領已東 沃沮濊貊悉屬樂浪 後以境土廣遠 復分領東七縣 置樂浪東部都尉 自內屬已後 風俗稍薄 法禁亦浸多 至有六十餘條 建武六年 省都尉官 遂棄領東地 悉封其渠帥為縣侯 皆歲時朝賀”라고 되어 있다.

영동예를 주장하는 논자들은 『삼국지』 예(濊)조의 “自單單大山領以西屬樂浪 自領以東七縣 都尉主之 皆以濊爲民” 구절에 모든 역량을 결집하고 이를 금과옥조로 여긴다. 김창석(2018)이 번역하기를 “單單大山領으로부터 서쪽은 낙랑군에 속하고, 그 동쪽 7縣은 都尉가 주관했다. 모두 濊族이 그 주민이 되었다.”하고는 동부도위가 설치한 이후에 “예는 단단대령을 기준으로 하여 그 이서와 이동의 세력으로 구분되어 있었다.”하며 이를 근거로 영서예와 영동예가 존재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이서는 낙랑군의 직할을 받았고, 이동은 낙랑군치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 동부도위를 따로 두어 통제했다. 영서와 영동이 구분되어 있었으나 ‘모두 濊族이 그 주민이 되었다.’고 했다. 이 구절을 동부도위가 주관하던 영동 7현의 주민에게만 걸리는 것처럼 해석하는 경우가 있지만 그렇다면 낙랑군이 주관하던 영서 지역의 주민 집단에 대한 언급을 생략한 셈이 된다. 따라서 ‘모두[皆]’의 대상은 영동 7현과 영서 지역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두 지역의 주관 기구가 서로 달랐으나 그 주민은 공히 예족이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영서와 영동 양 지역을 포괄한 『삼국지』동이전의 편명이 ‘예’라는 것이 이를 웅변한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원문의 ‘自’자를 눈여겨보아야한다. 두 기록 모두에 단단대(산)령 앞에 ‘自’자가 붙어 있다. 여기의 自자는 ‘~로부터’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데, 이는 뒤에 붙어 있는 단단대산령이 남북으로 길게 이어져있는 산맥이기에 산맥 전체를 담기 위해 사용한 글자이다. 그러므로 원문의 령(領)은 특정한 고개를 지칭하는 령(嶺)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김창석(2009, 2018)처럼 해석하려면 한문구조가 “自單單大山領以西屬樂浪 而領以東七縣 都尉主之”로 되어야 한다. 이렇게 문장구조를 이루어야 “단단대산령(으로부터) 서쪽은 낙랑에 속하고 단단대산령 동쪽 칠현에 도위(都尉)를 두어 주관토록 하니 모두 예로써 백성을 삼았다.”가 될 수 있다.  

‘自’자에 유의하며 『후한서』 예조의 기록을 바탕으로 『삼국지』 예(濊)조를 보충하여 살펴보면 ‘단단대산령(으로부터) 서쪽은 낙랑에 속하였고, 단단대산령(으로부터) 동쪽에는 <낙랑에서> 일곱의 현(縣)에 도위(都尉)를 두어 주관하게 하니 모두 예(濊)로써 백성을 삼았다.’로 해석해야 한다.  

『삼국지』를 참고하여 뒤늦게 편찬된 『후한서』권85 「동이열전」제75 예조의 내용을 보면 영서예와 영동예가 존재할 수 없음이 증명된다. 관련 부분을 번역하면 “단단대령(으로부터) 동쪽에 옥저 예맥濊貊)이 모두 낙랑(樂浪)에 속하였고 뒤에 경토(境土:疆土)가 넓고 멀어져서 다시 영(領)의 동쪽을 일곱 개의 현(縣)으로 나누어 낙랑동부도위(樂浪東部都尉)를 설치하였다. <낙랑에> 내속(內屬:속국)된 뒤로부터 풍속이 조금씩 옅어지고 법으로 금함 또한 많아져서 육십(六十) 조(條) 남짓에 이르렀다. 건무(建武) 6년(六年:AD38)에 도위관(都尉官)을 없애고 드디어 영(領) 동쪽 땅을 버리고 모두 그 거수(渠帥)를 현(縣)의 후(侯)로 삼아 봉(封)하니 모두 세시(歲時)에 조하(朝賀)하였다.”이다. 

영동예와 영서예 조작의 시발(始發)은 『삼국지』 예(濊)조의 “自單單大山領以西屬樂浪 自領以東七縣 都尉主之 皆以濊爲民”구절 해석에서 비롯된다. 이에 상응하는 『후한서』 예조 부분과 대조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단단대(산)령(으로부터) 동쪽에는 옥저 예맥이 모두 낙랑(樂浪)에 속하였고 뒤에 경토(境土:疆土)가 넓고 멀어져서 다시 영(領)의 동쪽을 일곱 개의 현(縣)으로 나누어 낙랑동부도위(樂浪東部都尉)를 설치하였다.’이며, 원문은 ‘自單單大領已東 沃沮濊貊悉屬樂浪 後以境土廣遠 復分領東七縣 置樂浪東部都尉’이다. 『후한서』 예조의 기록을 분석하여보면, 단단대령 동쪽에 있는 옥저와 예맥은 낙랑에 속한다고 하여 예의 영역과 영토 귀속의 범위를 획정하고 낙랑이 영(領) 동쪽에 도위(都尉)를 설치한 상황까지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단단대령 서쪽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고, 단단대령 동쪽에 옥저 예맥이 있다고 하고 이 지역을 다시 일곱 현(縣)으로 나누어 동부도위를 설치했다고 하여 그 영토의 귀속 범위가 단단대령 동쪽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음을 분명히 하였다.  

김창석(2018)은 “이 구절을 동부도위가 주관하던 영동 7현의 주민에게만 걸리는 것처럼 해석하는 경우가 있지만 그렇다면 낙랑군이 주관하던 영서 지역의 주민 집단에 대한 언급을 생략한 셈이 된다. 따라서 ‘모두[皆]’의 대상은 영동 7현과 영서 지역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합리적이다.”라고 하였는데, 이 역시 영서예가 반드시 존재해야 내 이론이 성립할 수 있다는 선입견으로 형성된 가설(假設)에 사로 잡혀, 원문을 제대로 확인하지 못하고 확대 해석하여 생긴 심각한 학자적 무지에서 비롯되었다.  

“自單單大山領以西屬樂浪 自領以東七縣 都尉主之 皆以濊爲民” 구절에 이어지는 “後省都尉 封其渠帥爲侯 今不耐濊皆其種也”구절과 연관하여 살펴보면 김창석(2018)의 영서예와 영동예 가설이 틀렸음을 보다 명확하게 알 수 있다. 뒤 구절은 “뒤에 도위를 없애고 그 거수(渠首)를 후(侯)로 삼아 봉(封)하니 지금 불내예가 모두 그 종(種:종족)이다.”로 번역이 된다. 낙랑이 동부도위를 설치한 때가 BC 82이고 동부도위를 폐지한 때가 AD 30이니 뒤 구절의 첫 자인 ‘후(後)’자에 시간적 거리가 112년이 내포되어 있다. 동부도위를 설치할 때의 그 백성은 모두 예족이었고, 112년 뒤에 그 동부도위를 폐지하고 그 곳의 우두머리를 후(侯)로 삼았는데 지금도 (대표 예(濊)인) 불내예(不耐濊) 모두 (동부도위를 세울 때 종족이었던) 그 종(種:種族)과 같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皆以濊爲民’의 ‘모두[皆]’는 동부도위가 설치되었던 영(領) 동쪽의 일곱 현(縣)에만 걸어서 해석해야 한다. 

『삼국지』 예(濊)조의 “自領以東七縣 都尉主之 皆以濊爲民”구절에 대응하는 『후한서』 예조의 구절은 “自單單大領已東 沃沮濊貊悉屬樂浪 後以境土廣遠 復分領東七縣 置樂浪東部都尉”이다. 『삼국지』 예(濊)조의 인용부분은 영(領) 동쪽 칠현에 동부도위가 설치된 상태만을 기술하고 모두 예족으로 백성을 삼았다고 짧게 기술한 반면, 『후한서』 예조의 내용을 보면 ‘단단대령 동쪽의 옥저와 예맥이 낙랑의 직접 관할지였으나 후에 낙랑의 경계가 멀리까지 넓혀지면서 영(領) 동쪽은 낙랑이 동부도위를 설치하게 되었다’고 구체적으로 기술하였다. 이를 통해보면 『삼국지』 예(濊)조의 ‘自單單大山領以西屬樂浪’부분은 영(領) 동쪽에 동부도위가 설치되기 이전의 상황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즉 한사군이 설치된 BC 108년 이후부터 동부도위가 설치된 BC 82년까지의 상황을 기술한 것이다. 이를 통해보면 단단대산령은 예·옥저와 낙랑을 구분 짓는 경계로 표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김창석(2009)은 “고조선이 멸망하고 한나라는 함남 남부와 강원 북부에 임둔군을 설치하여 다스렸다. 그리고 BC 75년에는 임둔군을 대신하여 낙랑군이 영서예를 직할하고, 낙랑군 동부도위가 영동예를 그리고 낙랑군 남부도위가 진번 지역을 관할하게 되었다.(밑줄:필자) 한반도 중부 지역에 대한 지배체제는 크게 보면 임둔과 진번 지역으로 나누고, 뒤에 임둔 지역을 다시 영동예(일부 옥저 포함)와 영서예로 구분한 것이다.(밑줄:필자)”라고 하며, 논의를 확대하고 비약시켜 영동예의 상대 개념으로 영서예를 창안 도출하여 무리한 사실화에 이르게 된다.

김창석(2009)은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오환선비동이전(烏丸鮮卑東夷傳) 진한(辰韓)조 “나라에서 鐵이 나는데 韓, 濊, 倭가 모두 와서 이를 취한다. 물건을 사고파는 데 모두 철을 사용하는 것이 마치 중국에서 錢을 쓰는 것과 같다. 또한 이를 2郡에 공급한다.”를 인용하면서, 여기에 등장하는 예(濊)가 영서예이고 이를 중국의 2군(郡:낙랑군과 대방군-필자주)과 구분하여 서술한 것이라며, 3세기 전반에 영서예가 독자적인 세력으로 자리를 잡고 유지하였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점은 앞서 지적하였듯이 영(領) 서쪽의 예(濊)라는 것이 성립할 수 없음에도 허탄(虛誕)한 가설(假設)에 억지로 꿰맞추려 한 자의적(恣意的) 학문적 태도일 뿐이다. 진한조에 등장하는 한(韓) 예(濊) 왜(倭)는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오환선비동이전(烏丸鮮卑東夷傳)에 별도의 조(條)로 되어 있는 나라명이다. 그럼에도 『삼국지(三國志)』 예(濊)조에 나오는 예(濊)가 아니고 영(領) 서쪽의 예(濊)였으며 낙랑군과 대방군과 구분하려고 영서예(領西濊)를 예(濊)로 표기했다는 설명은 언급할 가치조차 없는 허망한 소설(小說)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