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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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서예설(嶺西濊說)의 허구와 그 실체 영서맥(嶺西貊)

상세정보

7. 맺은말

한반도 중부지역인 북한강과 남한강 일대의 고대사회에 대한 역사적 접근과 연구는 1980년대만 해도 전무하다시피 했다. 당시 이 맥국관계의 중심에 있었던 춘천지역에서도 춘천사회가 고대에 맥국이었고 발산리 일대가 그 본거지였다는 정도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 당시 춘천지역에서는 맥국산, 우두산성 터, 궐터마을, 삼악산성과 맥국, 맥국군사들의 옷을 말렸다는 의암, 삼악산에 들어가 신라군과 대치과정에서 훈련을 했던 칼봉〔검봉〕, 삼악산성에 은거한 맥국군사들의 수를 불리기 위해 쌀 씻은 뜬물을 흘려보냈던 시궁치〔등선폭포〕, 중국측 사서에 고대에 맥을 ‘발’이라고도 불러 발산1리를 바리뫼〔발의산, 발산〕라고 당시까지 마을 사람들이 부르고 있었던 것 등의 전승이 산발적으로 전해오고 있을 뿐이었다. 이에 대한 종합적 연구나 의식이 부족하던 시절이었다.

이에 필자는 이런 전승을 수집하고 지명을 확인하여, 『삼국사기』에 기록된 맥의 관계기사를 당시 발견된 중도 말무덤(적석총) 등과 연결하여 「춘천맥국설에 관한 연구」라는 석사논문을 1983년에 발표한 바 있다. 그 당시 한규철교수가 중부지역에 등장하는 위말갈에 관심을 갖고 글을 쓰기 시작한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당시는 그 위말갈이 이 지역의 ‘영서맥’과 영동지역의 동예세력을 일컬을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말갈의 출몰지역이 ‘영서맥’과 ‘동예’의 출현지역과 일치함을 발견하고 쓴 글이 1997년에 「『삼국사기』에 보이는 말갈의 실체」라는 제목으로 『고구려연구』 제3집에 게재하였다. 훗날에 보니 문안식이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내용의 논문이 나왔고, 이후 말갈은 위말갈로 영서지역의 말갈은 맥계말갈, 동예지역은 예계말갈로 주로 인식되었다.

한편 이와는 다르게 다산 정약용의 ‘말갈 예설’을 계승하여 ‘동예’와 ‘영서맥’을 동일문화, 동일종족으로 보는 견해들이 나온 것 같다. 고고학계에 많은 업적을 남긴 박순발의 ‘중도유형문화론’은 ‘영서맥’의 존재를 지우고 ‘영서예’로 가는 선구자적 역할을 한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에 ‘영서예설’을 나름 논리적으로 정리한 것이 김창석의 논문들이다. 

본고는 그가 ‘영서예설“의 근거로 들고 있는 것이 첫째, 광개토왕비문의 수묘인으로서의 ’한예‘가운데 ’예‘가 ’영서예‘라는 점, 둘째, 가탐의 『고금군국지』의 저작년대(801)가 해당시대와 먼 점 등 문헌사학의 불신과 해석의 문제, 셋째, 다산의 ’말갈예설‘과 박순발의 ’중도유형문화론‘에 기초하여 ‘즙석식적석총’ 등 영동과 영서 즉 ‘동예’와 영서맥‘의 문화적 종족의 차이를 간과한 아전인수적 해석 위에 ’영서예설‘이 세워져 있다고 판단하여, 이에 대한 보다 객관적이며 정확한 시선을 통해 ”영서예론”의 문제점을 지적 입증하여 ’영서맥‘임을 확인하였다. 

따라서 그간 주로 고고학계에서 영서지역을 “영서예”로 호칭함으로서 혼란이 있어왔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제 부족하지만 이 논고가 이 논란에 종지부를 찍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논문을 쓰면서 문헌적으로, 고고학적으로, 이 지역의 전승 지명에서도 또 지리적으로도 영서와 영동지역은 교집합보다는 이질적인 요소가 많음을 확인하였다. 따라서 당 시대 영서지역에서 거주했던 ’영서말갈‘은 ’맥국‘ 즉 “영서맥”과 동일체임을 확신한다. 

간단히 요점을 정리하는 것으로 결론을 대신한다. 우선 광개토왕이 죽기 전 수묘인으로 유언한 광개토왕비문의 수묘인 ‘한예’는 대부분의 이 부분 연구자들은 공석구 등을 제외하고는 거의 백제지역에서 찾고 있다. 능비문이나 『삼국사기』에 의하면 광개토왕은 생전에 거란, 연, 패려, 숙신, 가야, 왜, 백제, 동부여 등을 정토하였는데, 그의 수묘인은 왜 한과 예로 제한하였을까? 물론 그 당시 오늘날과 같은 민족의식은 없었을 것이다. 광개토왕은 고구려인을 맥족, 부여인을 예족, 백제 신라 가야지역을 한족으로 호칭하고 있음을 알았다. 이들이 오늘날 우리민족의 주구성체가 되었듯이 당시에도 이들은 외형이나 언어에서 어느 종족보다 상호 유사성이 있어 거란이나 숙신 등 다른 종족 보다는 친근성을 느꼈으리라 생각된다. 이러한 연유로 수묘인을 ‘한예’로 국한 했으리라. 그러면 여기 수묘인에서 맥이 빠진 이유는 무엇일가? 당연히 광개토왕은 고구려인이 맥인이었으므로 동유의식이 있었기 때문에 북한강유역과 남한강유역에 살고 있던 맥은 수묘인 명단에서 제외될 수 있었다. 물론 『삼국사기』나 광개토왕비문 어디에도 이 지역에 대한 정토기사는 없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고구려와 우호적 부용적 관계로만 문헌에 등장하고 있다.

광개토왕의 이름은 땅을 넓힌 왕이라는 뜻인데 물론 생전에 백제와 전쟁을 많이 치룬 것은 사실이나, 수묘인을 모두 백제측에서 찾는 것은 무리이다. 백제는 왕족을 제외하고는 거의 한족이다. 그리고 광개토왕이 ‘영서맥’을 공략한 흔적을 찾을 수 없다. 광개토왕왕의 군대와 백제가 접전하는 지역도 대부분 예성강, 임진강, 한강하류지역인 서해안지역으로 ‘영서맥’의 거주지와는 관계가 없는 곳이다. 뿐만 아니라 고국양왕 말기(387)부터 ‘영서맥’은 고구려를 도와 백제를 치고 있다. 이어 광개토왕 원년이기도 한 391년 ‘영서맥’은 고구려를 도와 백제의 적현성을 쳐서 함락시키고 있다. 더구나 고구려와 전통적 무덤양식도 같았던 맥족이 고구려를 도와 백제를 공략한 ‘영서맥’을 공략하여 포로로 잡아가는 비상식적 행동을 했을까? 그 후에도 대부분 고구려 편에서 행동하는 ‘영서맥’을 포로로 잡아올 이유가 있었을까? 수묘인의 출신 지역은 36개 지역인데 광개토왕이 점령한 58개의 백제성은 다른 지역과는 달리 모두 기록되어 있다. 그것은 조부인 고국원왕의 죽음과 어떤 관계가 있으리라 생각된다. 36개 출신지 가운데 점령한 백제성에서 25지역이 보인다. 나머지 11지역 가운데도 58성 안에는 없어도 한족이 5개 지역에서 나온다. 그러나 이 한은 꼭 백제지역이라 단정할 수는 없다. 광개토왕은 신라를 돕는 명분으로 가야지역까지 진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첫째, 수묘인 ‘예’는 왕 20년(400)에 64성 1,400개 촌락을 공취하는 동부여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부여의 주구성체는 예족이다. 동부여의 위치에 대하여는 여러 학설이 있으나 두만강하류지역을 중심한 동해안 지역일 것이다. 즉 백제 점령지 58성에 포함되어 있거나 한이 명기된 출신지역을 제외한 수묘인 6개 출신지역은 예족으로 동부여 출신 수묘인이라 본다. 따라서 “수묘인 한예” 문제로 “영서예”를 주장할 수 없음은 물론이다.

둘째, 문헌사학의 해석문제이다. 『삼국지』와 『후한서』는 그 「열전」 고구려의 남쪽은 조선(낙랑)과 예맥이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 예맥은 물론 ‘영서맥’과 ‘동예’이다. 이외에도 태조왕대의 기록으로 마한 낙랑과 더불어 예맥이 몇 번에 걸쳐 나타난다. 논의의 여지없이 이 예맥은 ‘영서맥’과 ‘동예’임은 물론이다. 『삼국지』와 『후한서』의 해석을 통하여 ‘영서맥’과 ‘동예’의 존재를 완벽히 확인할 수 있었다. 이어 『북사』와 『수서』 「백제전」에 “백제자서 행삼일 지맥국운”은 “백제 서쪽으로부터 3일을 가면 맥국에 이른다”로 해석함이 옳아 필자의 견해를 수정하였다. 이와 같이 『삼국지』에서 『수서』에 이르는 당시대의 역사를 기록한 중국측 정사에 직간접적으로 영서지역에 “맥국” 또는 적어도 “맥족”의 존재했음을 확인해 주고 있다. 또한 『고금군국지』가 801년에 쓰여진 점 등을 들어 문헌사학에 등장하는 한반도 중부지역의 맥을 부정하고 있다. 『수서』에 맥의 위치가 나오는데 『수서』는 『북사』를 참고했으나 맥국이 천리에 이른다는 그 지경은 빠뜨리고 기록하였다. 『북사』 「열전」은 거의 『위서』를 필사했다고 한다. 『위서』 「열전」은 554년에 완성을 본다. 가탐 역시 당시까지 전해지던 이런 문서들을 참고했을 것임은 상식일 것이다. 따라서 단순한 『고금군국지』의 저작연대인 801년을 들어 사실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저술 당시 전혀 참고할 전적이 없다는 전제임으로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부족한 견해일 뿐이다. 더구나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2회, 「백제본기」에 1회에 걸쳐 한반도 중부지역에서 ‘맥’이 기록되어 있다. 백제와 접하고 있는 동일한 이 ‘맥’ 지역에서 29회에 걸쳐 백제와 주로 적대적 관계를 맺고 있는 말갈이 이 맥세력과 동일체임이 입증되었다. 따라서 문헌사학적 입장에서는 한번도의 중부지역에서 ‘맥’이 없었다는 것을 입증할 방법이 없다.

셋째, 고고학적 발굴성과에서 집자리의 구조면에서도 영동과 영서가 완전한 교집합을 이루지 못하고 있으며, 특히 ‘천석적석총’ 즉 ‘즙석식적석총’이 북한강·남한강·임진강 등 영서지역에서는 존재하나, 영동지역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은 ‘중도유형문화권’의 개념을 영서지역에 한정한 ‘영서맥문화권’으로 의미전환을 할 때에 만이 교집합적 의미를 갖는다, 박순발의 “중도문화유형론”은 영동지역과 영서지역의 공통문화로 경질무문토기와 凸·呂자형 주거지를 들고 있다. 경질무문토기는 한강하류지역인 백제 마한영역에서도 발견 보고 되고 있다. 육각형주거지는 영서지역에는 있으나, 영동엔 없다. 생활용구인 토기나, 집터는 편리 유용하다면 모방과 전파가 용이한 것 들이다. 그러나 무덤양식은 죽음에 대한 의례임으로 전통사회에서는 쉽사리 바꿀 수 없는 지켜가야 하는 전통적 문화현상이다. 그러므로 고대사회에서 묘제가 다른 사회를 같은 공동체로 보는 경우는 없다. 물론 오랜기간 선진사회의 문화가 전파 축적되어 변할 수는 있다. 영동 예와 영서 맥 사회는 선진과 후진사회를 논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다. 따라서 이 영동과 영서 두 집단은 고고학적으로도 동일 공동체로 설명될 수 없다. ‘중도유형문화권’의 개념과 정의가 ‘영서지역의 ’영서맥문화권’으로 의미전환을 한다면 ‘중도유형문화권’의 개념은 그 생명력을 가질 수 있다. 따라서 ‘즙석식적석총’이 영동지역에서도 영서지역처럼 나타날 때 ‘중도유형문화권’과 ‘영서예문화권’을 동일한 개념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이런 교집합이 이루어지지 않으므로 개념의 재정리가 요구된다.

이 외에 ‘낙랑군 호구부’에 나타난 동예의 호구수 문제에서 영동지역인 4구역과 영서지역인 3구역은 서로 다른 구역으로 예인 4구역은 BC. 45년 6,606호에서 AD 280년에 2만호로 증가 되었다. 예의 호수는 진수가 『삼국지』를 찬할 시점인 280년 2만호이다. 낙랑호구부는 BC. 45년에 작성되었고, 이때 호구수는 6,606호이다. BC. 45년에 6,606호였던 예지역인 4구역의 호구수가 그로부터 325년이 지나 280년 진수가 『삼국지』를 찬할 당시에는 2만호로 늘어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4구역인 예의 호수가 280년 2만호에서 동일한 4구역의 BC. 45년의 6,606호를 뺀 것이 3구역(영서지역)일 수 없으므로, 이를 통해 영서지역을 예로 보는 것은 불가하다.

또한 윤희평이 맥국의 인장을 얻었다고 기록한 중종실록의 사실은 상해박물관에 소장된 ‘맥국인장’이 그 실체를 확인해 주고 있다. 더불어 춘천국립박물관의 긴급 요청에 의하여 작성된 <「강릉 하시동 돌무지무덤[적석총] 소개와 역사성 검토」, 2017, 홍영호>는 1932년 9월 22일자 동아일보에 신라시대 석조고총으로 소개된 것을 춘천박물관에서 “강릉하시동 추정 적석총 GPR탐사 결과보고”로 발표하게 하였으나, 알 수 없다는 결론을 얻었다.

춘천지역의 유물발굴 결과는 이 지역이 기원후부터 3세기까지 낙랑에 속한 정황을 보여주고 있으나, 낙랑에 의한 직접 지배가 아니라 재지세력에 의한 간접지배방식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백제 고이왕이후인 3세기대 이후는 백제계유물이 미미하여 ‘맥국’공동체가 그 정체성을 유지한 채 백제와 교류 교섭하고 있었던 정황을 알려주고 있다. 5세기대 이후 고구려의 영향권에 들어서도 재지세력에 의한 간접지배방식이 통용된 것으로 파악된다. ‘맥국’공동체는 적어도 6세기대 까지 그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음을 춘천지역의 발굴결과가 보여주고 있다.

논고를 정리하면서 주류학계의 결론을 정해 놓고, 이에 맞추어 가려는 경도된 노력과 기존의 논문에 대한 새로운 이론을 제시하기 위한 논문을 위한 논문은 이제는 지양해야 함을 절실히 느끼며 결론을 맺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