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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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서예설(嶺西濊說)의 허구와 그 실체 영서맥(嶺西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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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낙랑군 호구부’와 ‘맥국 인장’, 문화현상 

1) ‘낙랑군 호구부’ 에 나타난 동예의 호구수 문제

1992년 평양시 정백동(貞柏洞) 364호 나무곽무덤에서 발굴된 「낙랑군초원4년현별호구부」가 발견되었으나, 2007년에 비로서 북한 손영종에 의해 「새로 발견된 낙랑목간」이라는 논문이 발표되었다. 발굴시점과 목간발표 사이의 시간적 갭으로 논란의 소지가 있다. 『삼국지』의 찬자 진수는 태강(太康) 원년(280)에 진(晉)이 오를 멸하자, 위·촉·오의 사료를 체계적으로 수집하여 약 10년간 노력을 기울인 끝에 『삼국지』 65권을 찬술했다. 따라서 『삼국지』 「예전」에 나오는 인구 2만호는 진수가 사료를 수집하던 당시인 280년대의 인구를 말한다.

김창석은 『삼국지』 「예전」에서 당시(AD. 280년 전후) 예의 호수가 2만이라고 했는데, BC. 45년에 작성된 「낙랑군초원4년현별호구부」에 따르면 동예에 해당하는 지역의 호수가 6,606호이기 때문에, 2만에서 현별 호구부의 동예 지역 호수를 뺀 약 13,400호는 낙랑군과 동예의 사이에 낀 영서지역에서 찾고 있다.(김창석, 『고대강원의 정치체와 물질문화』, 국립춘천박물관, 2018, 80쪽). 그렇다면 BC. 45년에 작성된 “「낙랑군초원4년현별호구부」 6,606호에서 AD. 280년에 2만호로 증가되었다. 약 300년이 흘렀으니, 6,606호에서 2만으로 늘어난 것은 적정한 증가율이 아닌가?.

낙랑군은 25개현을 4개구역으로 편성했으며, 영동7현은 4구역으로, 단단대령 서쪽인 영서는 3구역(10238호)으로 편성되어 있어, 영서지역인 3구역에서 찾을 수 없음은 너무나 자명하다.(이성제, 『낙랑군 호구부』, 2010, 동북아역사재단, 214쪽) 따라서 영동지역인 4구역과 영서지역인 3구역은 서로 다른 구역으로 예인 4구역은 BC. 45년 6,606호에서 AD. 280년에 2만호로 증가되었다.

 

2) ‘맥국 인장’

특진관 윤희평이 아뢰기를, “북청의 무해대에는 귀화인이 많이 살고 있는데 이는 삼국시기부터 있었습니다. 지금 그들을 물리치고 6진을 설치하였지만 함경도는 본래 우리 땅이 아닙니다. 이른바 남옥저는 곧 오늘의 오도리(호의 일종임)이고, 예맥은 곧 오늘날의 강원도 땅입니다. 춘천에서 맥국의 도장을 얻었다고 하니, 이곳이 예맥의 땅인 것입니다.(중종실록 권 80) 맥국의 인장을 1535년(중종 30) 10월 9일에 춘천에서 얻었다고 기록하고 있음은 맥국의 인장을 확인했다는 점에서 1차 사료로 인정할 수 있다. 또한 윤희평은 맥국의 인장을 들어 춘천이 맥국의 땅임을 역설하고 있음도 볼 수 있다.85) 아래 인장은 중국의 상해박물관에 소장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래 인장이 상해박물관에 소장하게 된 연유에 대하여는 알려진 바 없지만 맥국의 수장에게 사여했다는 것은 맥국의 존재를 확인해 주는 금석문자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고대국가들과 교류가 활발했던 270~280년을 전후한 시기에 준 것으로 비정되고 있다. 이 인장이 어떤 경로로 상해박물관에서 소장하게 되었는지는 모르나, 이로서 적어도 ‘맥국’이 존재한 사실이 입증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상해박물관 소장 맥국 인장은 결국 윤희평이 중종에게 아뢴 사실과 부합됨으로, 윤희평의 말은 사실로 입증된 셈이다.

 

3) 춘천지역의 발굴현황과 맥국

춘천지역은 최근까지 실시된 발굴조사가 200건에 이르고 있다. 이중 철기~삼국시대에 해당하는 유적중에서 전반적 규모를 파악할 수 있는 유적은 우두동 유적 정도이나, 춘천분지 각 수계에 철기~삼국시대 취락의 존재를 파악할 수 있을 정도로는 조사되어, 이 지역의 당시대상의 대강을 파악할 수는 있게 되었다.86) 기존에 원삼국시대의 것으로 알려졌던 취락의 일부가 AMS자료를 재계산해 본 결과 4~6세기대에 해당되는 것으로 나타났다.87) 이는 춘천지역 공동체인 맥국세력이 적어도 신라의 북진시기까지는 그 정체성을 유지하며 존속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사례라고 생각된다.

최근 중도 대안에 위치한 근화동유적과 현 춘천역사에 대한 발굴조사결과는 비교적 이른 기원 2~3세기대의 주거지와 낙랑계 유물을 동반한 유적의 확인과 더불어 철기~삼국시대에 이르는 주거지가 다수 발견되었다. 이는 적어도 3세기대 까지는 이 지역이 낙랑에 부용되어 있던 맥국의 사정을 전하는 고고학적 증거라 하겠다. 그러나 춘천지역 대부분의 유적에서 낙랑계 토기가 출현하기는 하지만 이 지역의 경질무문토기 생산체제에 대한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지 못했다는 점에서 비록 낙랑에 속해 있었으나, 이 지역 공동체인 재지세력에 의해 지배되었던 ‘맥국’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보통 북한강 남한강 유역의 적석총은 낙랑계토기가 동반 출토되나, 중도 적석총은 낙랑계토기가 출토되지 않고, 한성백제토기가 동반되어 고이왕 이후 백제와의 교류 교섭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중도 서쪽에서 발굴된 토광묘에서는 철제이식, 인골과 더불어 중국 동북3성과 연해주에서 보이는 말갈토기와 유사한 토기 1점이 출토되었다. 이 토기는 최근 중도에서 확인된 고구려 석곽묘의 존재와 더불어 5세기대 이후 고구려의 남진으로 인해 이 지역이 고구려에 부용되는 현상을 보여주고 있다. 3세기 이후 각 취락 유적별로 동반되던 낙랑계토기가 사라지는 것은 낙랑의 쇠퇴현상을 보여주는 예가 될 것이다.

이와 더불어 중도 적석총을 비롯한 중도유적, 거두리 유적, 삼천동 유적에서 한성백제기 유물이 간헐적으로 출현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 외에 백제의 진출 양상을 보여주는 유적은 전무하다. 이는 ‘맥국’ 세력이 백제의 지배하에 있지는 않았다는 방증으로 보인다.

5세기대 이후 고구려의 남진으로 인해, 문헌기록에 의하면 말갈로 대체되어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맥국’ 공동체는 고구려에 부용되고 있으나, 주거유적에서는 이 지역사회의 전통인 呂·凸자형 주거형태를 6세기 후반대까지 유지하고 있다.(근화동유적) 이러한 사실은 춘천을 중심한 영서지역이 낙랑에 이어 5세기 이후 고구려의 영향권에 들어갔어도, 이들에 대한 지배형태가 재지세력에 의한 간접지배형태였음을 보여주는 사례가 된다.88) 

 

85) 홍성익, 맥국과 맥국 인장 진솔선견백백장동인의 검토, 『춘주문화』28, 춘천문화원, 2013, p.149~159.

86) 심재연, 춘천지역 철기~삼국시대 취락의 현황, 『동행』, 2015.

87) 심재연, 춘천의 철기~삼국시대 취락, 『고고학과 문헌으로 본 춘천문화의 정체성』, 2016, p.76~77.

88) 위 논문, p.84~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