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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서예설(嶺西濊說)의 허구와 그 실체 영서맥(嶺西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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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고대사학은 많은 문헌의 소실로 인해 현존하는 『삼국사기』·『삼국유사』 등과 중국측 사서 그리고 고고학적 발굴성과에 상당부분 의존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그러므로 충분한 사료비판을 통한 검증된 문헌사학과 고고학적 발굴성과의 연결은 필수적인 바, 물론 여기에는 그에 대한 해석이 상이할 수 있다. 그러나 기초적이며 상식적인 시각과 해석은 대학자의 주장이라고 하여 무비판적으로 따르는 우를 범해서도 안 되며, 기존의 학설을 넘기 위한 논문을 위한 논문이 되어서는 더더욱 문제가 될 것이다. 물론 결론을 미리 설정하고 여기에 글을 맞추는 것은 더욱 안 될 일이다. 

한반도 중부지역의 정치세력으로 중국측 사서와 『삼국사기』 본기에 3회에 걸쳐 기록된 실체로서의 맥과 후대에 백제의 북부와 동부 특히 임진강유역에서 옆집 드나들 듯이 29회에 걸쳐 조우하는 동일한 실체를 명명했던 말갈 즉 고구려 계통인 맥계말갈을 고고학적 발굴성과(묘제)도 확연히 구별되게 나와 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영서예”라 불러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어떤 역사문화적 조어를 만들 때 그 조어는 반듯이 필요충분한 조건을 충족시킬 때만이 생명력과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다. 박순발은 토기의 유사성을 중심으로 ‘중도유형문화’라는 신조어를 만들었다. 그는 기존의 ‘중도식토기문화’로 통칭되는 고고학적 문화와 동일한 것이지만, 토기 이외의 여타 물질문화도 함께 포괄하는 용어로서는 ‘중도식토기문화‘라는 용어가 적절치 못하다고 판단되어 중도유적을 대표로 하는 일련의 유적들에서 드러난 물질문화라는 의미로서 “중도유형문화”(Archaeological Culture)로 부르고 있다.76) 물론 이 문화의 주체세력을 예 즉 “영서예”로 보고 있다. 이 논문 발표 이후 지리적 조건과 그 성격이 확연히 다르면서 북한강 유역에 근거하여, 백제와 상쟁하고 있는 세력에 대해 ’맥계말갈‘로 인식하고 있던 연구자중 일부가 정치한 사료비판 없이 “영서예”로 돌아서는 현실은 안타깝다. 그는 임진강 남한강 북한강 유역의 적석총, 토기류, 주거지 등의 특징적인 문화를 “중도유형문화”라 칭하고, 『삼국사기』에 말갈로 표현된 ‘예’와 연결 짓고 있다. 중도유형문화는 함경도나 영동지역의 문화 토기류 등은 같으나, 특히 묘제를 중심으로 한 모든 문화가 같다고 볼 수는 없다. 이에 대해 이동희는 한강하류유역까지 중도유형의 주거지가 발견되는 것은 이 유형의 주거지가 ‘예’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중부지방에서 광범위하게 쓰인 기층의 주거형식이라고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적석총은 중도형주거지가 발견된 영동지방뿐 아니라 동예의 본거지인 함남뿐 아니라 영동지역에서 발견되지 않아 예와의 관련성을 부인하고 있다. 무릇 하나의 문화권을 규정할 때는 그 규정의 명칭에 부합하는 공통분모인 교집합 위에서 만이 어떤 문화권도 설정될 수 있다. ‘중도유형문화권’ 역시 ‘예문화권’과 동의어로 쓰이기 위해서는 양 지역의 문화가 적어도 현재까지 발굴 보고된 모든 고고학적인 성과가 적어도 이질적인 요소를 갖고 있지 않아야함은 상식이다. 과연 영동지역과 영서지역은 그 문화에 있어 이질적 요소가 없는 동질의 문화적 교집합을 가지고 있는가? 그것도 가장 전통적 색체가 강한 묘제가 완전히 다르다면 ‘중도유형문화권’은 아무리 넓혀도 한강·임진강 일대로 그 문화권을 한정해야 했다.

더욱이 토기와 집자리의 일부 형태가 유사하다 하여, 변하기 어려워 더욱 중요하게 여겨야 할  묘제가 완전히 다름에도 불구하고 ‘중도유형문화’라는 이름으로 동해안 지역과 영서지역의 모든 문화가 같은 동일문화권인 것처럼 주장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 북한강과 남한강유역의 중부내륙지방〔영서〕에서 발견되는 ‘무기단식적석총’은 영동지방에서는 발견된 바 없는 묘제이다. 필자는 이 고구려초기 맥족의 묘제인 무기단식적석총이 북한강유역에 이르러 천석적석총으로 변하고 있으며, 맥족〔고구려〕의 무기단식적석총과 궤를 같이함을 논한 바 있다.78)

박순발은 즙석식적석묘가 임진강 및 북한강, 남한강 중상류 지역을 분포권으로 하고 있어 소위 ‘말갈’ 즉, 예의 묘제로 파악하였다(박순발 1994). 그런데 동예지역에는 소위 즙석식적석묘가 없다. 그런데 어떻게 임진강 북한강 남한강지역이 예의 문화권이 될 수 있는가? 그가 비록 문헌사학 전공자가 아니라도, 대학자인 다산 정약용의 학문세계를 존중한다 하더라도, 상식선에서 한번은 생각해 봤어야 하지 않을까? 물론 그는 『삼국사기』에 나타나는 말갈의 실체가 예라는 점은 이미 여러차례 지적된 바 있어(김원룡 1967 ; 박진욕 1978 ; 유원대 1979) 여기서 굳이 재론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고 하면서 전혀 이 부분에 대해 숙고하지 않았음을 시인하고 있다. 선학들의 견해를 존중하는 모습은 보여주고 있으나, 태백산맥을 사이에 두고 묘제에서 확연한 차이를 보여주고 있는 영서와 영동을 하나의 문화권으로 묶는 것은 상식적이지 않음은 물론이다. 더구나 백제와 접하고 있는 중부지역의 맥기록이 『삼국사기』 「본기」에도 3회, 중국정사인 『북사』와 『수서』에도 백제와 인접하여 맥국이 존재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삼국지』와 『후한서』에 「예전」은 있는데 「맥전」은 없는 이유는 단단대령의 서쪽에 있었던 맥은 낙랑에 속해 있어 「맥전」이 실릴 수 없었다. 이런 배경과 동사서에 등장하는 ‘예맥‘을 차분히 음미해 본다면 ‘중도유형문화권’과 ‘예문화권’은 문헌적으로도 고고학적으로도 교집합을 같이하는 동일문화권으로 볼 수는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문헌기록이나 지리적 위치로도, 묘제를 중심한 문화적으로도, 같은 종족으로 인식할 수 없는 ‘영서맥’과 ‘동예’세력을 하나의 문화현상이자 동일종족으로 견강부회하는 것은 일찍이 독일의 랑케가 ‘증명 고증되지 않은 사실은 사실이 될 수 없다’는 실증주의의 교훈을 생각하며 안타까운 마음을 지울 수가 없다. 박순발이 주장하는 “중도유형문화”의 핵심은 경질무문토기와 철자형 집자리 유적의 영서와 영동지역의 동일성이다. 중도유형문화의 특징적인 토기는 경질무문토기인데, 흔히 ‘중도식토기’로도 불리워지고 있다. 사실상 그의 이 연구의 핵심은 토기이다. 거기에 일부 유사한 呂자형, 凸자형 집자리를 더해 ‘중도유형문화’라고 스스로 명명했다.79) 이 집자리는 한강 남쪽에서도 나타난다. 이 ‘중도유형문화’는 엄밀히 말하면 원래대로 ‘중도식토기문화’가 적합할 것이다. 집자리도 육각형집자리는 영서지역에서만 발견되고, 영동지역에서는 거의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다.80) 토기나 집자리 등은 종족의 접촉과정에서 보고 생활에 편리할 것으로 판단되면 전파가 쉽고 용이한 것이다. 

그러나 묘제는 지켜야할 전통으로 변화가 어렵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며 현실인 것이다. 한발 양보한다면 영동지역에는 없는 즙석식적석묘를 고려한다면 ‘중도유형문화’라는 용어는 차라리 “한강문화권”으로 그 개념을 한정하거나, “한강 임진강문화권” 또는 “북한강 남한강문화권”으로 그 개념을 바꾸는 것이 합리적일 뿐 아니라 마땅히 그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니면 양 지역 문화에 있어 교집합에 해당하는 것에 한정하여 원래대로 “중도식토기문화” 등으로 그 개념을 명료하고 합리적으로 정정해야만 한다.

이들 말갈이 침입한 지점들이 주로 백제의 북변 또는 동변이었던 점도 재론의 여지가 없다. 백제는 한강하류지역인 서해 쪽에 치우쳐 있었던 나라인데, 태백산맥을 넘어 강릉 이북 안변에 이르는 지역에 위치한 동예가 옆집동네 드나들 듯이 주로 임진강과 한강 이북지역에서 접전을 벌이는 것에 대해 의문을 가지면서도81) 고고학계에서는 “영서예설”은 정설처럼 오늘에 이르고 있으니, 참담함을 금할 수 없다.

다산이 말갈을 동예로 적시한 이후 후학들은 거의 중부 북한강 남한강유역의 말갈이 『삼국사기』에 말갈이 등장하는 그 위치에 맥국이 『삼국사기』 「본기」에 3회에 걸쳐 나오고 있건만, 멀리 떨어져 있는 다산의 ‘말갈 옥저동예설’을 대부분 확실한 고증없이 그대로 이어 받고 있다. 다산은 존경할만한 대학자였고 존경받아 마땅한 분이나 다산 정약용의 ‘말갈 예설’은 많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어 검토와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신라본기」 유리니사금조에 “十七年, 秋九月, 華麗·不耐二縣人連謀, 率騎兵犯北境. 貊國渠帥, 以兵要曲河西, 敗之. 王喜, 與貊國結好”라는 예의 신라공격을 맥이 막아주고 있다. 맥과 예는 적대관계에 있다. 뿐 아니라, 「백제본기」에 등장하는 말갈과 「신라본기」에 등장하는 말갈이 상식적으로 같은 공동체가 아님은 그 들의 전투행위 대상과 영동과 영서지역의 묘제에서도 나타난다. 그리고 그들의 접전지역에서도 예와 맥의 적대성에서도 명확히 들어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주로 고고학계에서 많은 논리적 비약과 문헌기록의 무시 속에서 ‘말갈 동예설’을 금과옥조로 이어받고 있음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이들은 예가 저 동해안으로부터 북한강 남한강일대의 내륙까지 존재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런 기록도 고고학적 증거도 없는데 말이다.

김창석의 글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온다. 

 

“특히 낙랑이 영동과 영서로 나누어 구분했는데 벌써 이 시기가 되면 영동과 영서지역을 일원적 집단으로 파악하고 있음이 주목된다. 다만 한 군현의 입장에서 지리적 원근과 지형상의 구분에 따라 동부도위를 따로 두어 영동예를 다스리도록 한 것뿐이다. 근래 경기도 가평 대성리와 달전리에서 발견된 낙랑계 유물과 강릉 안인리 등 영동지역에서 출토된 낙랑 토기는 이와 관련된 것들이다.”82)

 

어느 대목이 낙랑이 영동과 영서를 일원적 집단인 “예”로 파악하고 있다는 것인지 알 길이 없다. 이 대목은 아마 낙랑이 단단대령(낭림산맥)의 동쪽을 서쪽과 구별하여 동부도위를 두어 통치한 것을 두고, 같은 종족인 예를 지리상의 관계로 동서로 나누어 통치한 것 때문에 그리 인식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것은 지역적 거리상의 나눔이지 종족분포의 나눔을 논하는 대목이 아니다. 특히 가평과 강릉에서 낙랑계 유물이 출토된 것이 영동지역과 영서를 일원적 종족으로 파악하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의아해질 뿐이다. 가평 강릉에서 낙랑계유물이 출토된 것의 의미는 이들과 낙랑과의 교류를 의미하고, 나아가서는 낙랑과 이들 세력의 관계 즉 예속관계를 나타내는 자료로 볼 수 있을 뿐이다.

다음에 동예지역인 영동에 천석적석총 소위 즙석식지석묘가 존재하지 않는 이유를 설명하는 것을 보자.

 

“한은 BC. 75년에 영동지역을 낙랑군 동부도위가 관할하고 영서는 낙랑군이 직할하도록 했다. 영동예와 영서예가 분기하는 계기는 이때 마련되었다. AD. 30년에 동부도위가 폐지되었지만 영서지역에 대한 낙랑군의 지배는 유지되었고, 이후 동예를 고구려가 복속시키면서 양 지역간 문화적 차이는 심화되어갔다. 凸·呂자형 주거지, 경질무문토기와 타날문토기의 동반 등 주요한 생활문화를 공유하면서도 영서지역에서만 즙석식적석묘가 조영되는 것은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통해서 이해해야 한다.”83)

 

영서지역의 즙석식적석묘가 영동지역에는 존재하지 않는 이유를 나름 설명해 보고 있다. 여기서 김창석의 논리대로라면 A.D. 30년에 동부도위의 폐지와 더불어 영서지역은 낙랑군이 직접지배하였다. 영동지역인 동예는 고구려가 복속지배했다. 그런데 고구려가 지배한 영동지역에서는 고구려 묘제인 즙석식적석묘가 전혀 존재하지 않고, 낙랑이 직접 지배한 영서지역에서만 즙석식적석묘가 조영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글은 논리성을 갖고 있는가? 

변화를 전제로 한다면 낙랑군의 지배를 받은 영서지역은 낙랑군의 묘제에 가까운 묘제로 변해 가는게 정상 일테고, 고구려의 지배를 받은 영동지역의 동예는 당연히 고구려적 요소에 영향받은 묘제로 변화하는 것이 그 이치요 상식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오히려 낙랑군의 지배를 받는 영서지역은 고구려의 초기 묘제인 무기단식적석총을 보여주고 있다. 당시 영서지역에 살았던 종족은 고구려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는 계통임을 말하고 있다. 이는 지리적으로도 압록강 일대를 주무대로 했던 고구려계인 맥족을 생각하면, 한반도내 맥족의 분포지역은 육로든 해로든 낭림산맥과 태백산맥 서쪽으로 퍼지는 것이 상식이요 합리적인 것이다. 영서지역은 낙랑의 지배를 받았음에도 고구려계통의 즙석식적석묘를 쓰고, 오히려 고구려의 지배를 받은 영동지역의 동예는 고구려적인 즙석식적석총이 발견되지 않는 것은 도대체 무슨 논리인가? 영동은 영서예에 대해 동쪽에 있어서 동예가 아니다. 만주지역의 ‘원예’세력에 대해 동쪽으로 이동한 세력을 ‘동예’라 하였다. 부여의 일단이 동쪽으로 이동하여 ‘동부여’가 되었듯이 말이다. 서해안 지역인 임진강, 한반도 중부지역인 북한강 일대에서 한강유역의 백제와 제집 드나 들 듯이 충돌하고 있는 말갈(맥계)이 어찌 동해안에 위치한 동예의 범주에 들어 갈 수 있겠는가?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는 한국사학계의 위말갈문제는 결국 말갈의 실체에 대하여 지금까지 여러 견해가 제기되어 왔으나, 크게 보아서는 함경남도 남부와 강원 북부에 걸쳐서 존재하였던 동예와 관련 있다는 정약용의 ‘위말갈설’에 대한 부정이나 보강에 다름 아닌 것이 되는 셈이다. 그러나 동예가 비록 추가령지구대라는 천연의 교통로를 이용할 수 있었을지라도 연맹체수준의 미약한 국가발전 정도에 머물렀음을 감안할 때 원거리의 백제에 심대한 군사적 압박을 줄 수 있었겠는가의 의구심은 남아 있다고 보고 있다.84)

그런데 최근에 박순발에 의하여 고고학적 자료를 토대로 하여 경기 동북부와 남·북한강유역 일대에 산재되어 있는 고구려계 무기단식 적석총을 말갈의 활동 근거로 바라 볼 수 있다는 견해 가 제기되었다고 전제하면서 남·북한강유역의 말갈세력은 『삼국사기』 「신라본기」에서 말갈로 지칭되는 동예와는 문화적기반과 세력 분포지를 달리하는 존재로서 문안식은 이를 잠정적으로 ‘영서예문화권’으로 명명하고 있다(문안식, 1996, 49). 문화적 기반과 세력 분포지를 달리하는 집단이라면 그가 그 전에 사용하였던 영서지역의 ‘맥계말갈’, 영동지역의 ‘예계말갈’이 합당한 명칭이 아닐까? 우리 한국고대사학계에 많은 족적을 남긴 문안식이 필자와 더불어 일찍이 제기하고 사용하였던 ‘맥계말갈’, ‘예계말갈’이 합당한 명칭으로 자리 잡는 것이 합리적으로 판단된다.

“중도유형문화”는 경질무문토기와 呂자 凸자 집자리 등 한정된 자료에 의해 문화의 개념을 적용하고 있는데 문화의 개념은 한정된 자료로 적용할 수 없다. 그러므로 ‘중도유형문화론’ 이라는 용어는 적합하지 않다.​ 

76) 박순발, 한강유역 원삼국시대의 토기의 양상과 변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