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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서예설(嶺西濊說)의 허구와 그 실체 영서맥(嶺西貊)

상세정보
한반도 중부지역의 맥과 동해안에 위치한 예 즉 ‘동예’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서 볼 수 있다. 『후한서』는 『삼국지』보다 늦게 집필되어 열전 부분은 거의 전사하다시피하여 『삼국지』의 「예전」에 그 위치를 명확히 서술하고 있다.
“영서예설”을 주장하는 김창석은 “『삼국지』는 예를 통할기구에 따라 영서예와 영동예로 나누어 기술했다.”57) 고 한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어려워 삼국지의 원문을 보도록 하자.

“예남여진한, 북여고구려·옥저접, 동궁대해, 금조선지동 개기지야.” 

이 문장은 「동이전」 예전의 처음에 나오는 대목인데 그 뜻은 

“예는 남쪽으로는 진한과, 북쪽으로는 고구려·옥저와 접하였고, 동쪽으로는 대해에 닿았으니, 오늘날 조선의 동쪽이 모두 그 지역이다.”
 
이 문장은 예의 위치를 말하고 있는 바,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함경도와 강원도 동해안지역의 동예를 말하고 있으니, 예를 ‘영동예’와 ‘영서예’로 나누어 기술하고 있다는 말은 해당되지 않는다. 만약 그가 적시하는 것과 같이 예가 영서지역과 경기북부 나아가 황해도 일부지역 까지를 포괄하는 의미라면 예의 남쪽에는 진한과 마한이 있다고 기록해야 마땅할 것이다. 사실 이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기록된 ‘예’의 남쪽에 진한이 있고, ‘마한’이 있다는 말이 없는 것 하나만으로도 “영서예설”은 논의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의 논조처럼 만약 영서지역과 경기북부지역 황해도 일부지역까지도 예의 영역이었다면 예는 남으로 동예의 남쪽인 진한과 소위 영서예의 남쪽인 마한과 접한다고 했을 것이다. 이 『삼국지』와 『후한서』에 기록된 예의 위치문제 하나로도 ‘영서예설’은 논의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의 논문과 「예전」을 찬찬히 들여다 보면서 다음의 대목을 가지고 영동예와 영서예를 나누어 기술했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하여 원문을 소개하고 검토해 보자.

“正始六年(245), 樂浪太守劉茂·帶方太守弓遵以領東濊屬句麗, 興師伐之, 不耐侯等擧邑降. 其八年, 詣闕朝貢, 詔更拜, 不耐濊王. 居處雜在民間, 四時詣郡朝謁. 二郡有軍征賦調, 供給役使, 遇之如民.”

이 기사는 “정시 6년(A.D. 245) 에 낙랑태수 유무와 대방태수 궁준은 [단단대]령 동쪽의 예가 [고]구려에 복속하자, 군대를 일으켜 정벌하였는데, 불내후〔안변〕 등이 고을을 들어 항복하였다. [정시] 8년(A.D. 247)에는 [위나라의] 조정에 와 조공하므로, 불내예왕으로 봉하였다. [불내예왕은] 백성들 사이에 섞여 살면서 계절마다 군에 와서 조알하였다.”라는 내용이다.
추측컨대 낙랑태수와 대방태수가 (단단대)령 동쪽의 예라고 한 것을 서쪽(영서)의 예에 대한 동쪽의 예가 동예라고 보고 있는 듯하다. 그런데 동예는 만주지역에 있었던 “원 예”에 대해 동쪽으로 이동한 ‘예’를 의미하는 것이지, 어느 기록에서도 볼 수 없는 영서지역의 예에 대한 동예가 아니다. 이는 마치 ‘원 부여’가 동쪽 바닷가 쪽으로 이주하여 ‘동부여’라 불렸던 것과 같은 이치인 것이다.
『삼국사기』 지리지는 당대의 가탐이 집필한 『고금군국지』를 인용하여 춘천〔삭주〕을 맥국, 강릉〔명주〕을 예국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를 부정하며 ‘영서예설’을 주장하는 첫번째 논지는 가탐이 『고금군국지』를 집필한 연대인 801년이 시대적으로 너무 떨어져 있어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이다.58) 그러나 『삼국사기』에 예와 맥으로 불려진 동일한 실체가 7세기 후반까지 하나의 공동체로 존재하며 말갈로도 불려졌음은 이미 통설이 되었다.59) 그리고 『고금군국지』는 621년부터 636년 사이에 쓰여진 『수서』를 중히 여겨 참고하였으며60) 『수서』는 또한 『북사』를 깊이 참고하였다.
한반도 중부지역에 존재했던 맥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북사』에 수록되어 있다.61) 『북사』는 이연수의 아버지 이대사(570~628년)가 편찬을 시작했으나 아들인 이연수에 의해 643년에서 659년에 완성한 저술이다. 『북사』는 『위서』를 그대로 필사할 정도로 『위서』를 많이 참고한 책이다. 
『위서』는 북제의 위수가 북위 도무제 즉위(386)부터 동위 효정제(550)까지의 역사를 찬술한 기전체 사서이다. 위수(506~572년)는 551년, 문선제의 명으로 편찬을 시작하여 본기와 열전은 554년(천보 5)에 완성하였다. 『수서』에는 『북사』에서 말한 맥국의 지경이 빠져있다. 『위서』 「열전」의 ‘백제전’도 집필이 완료된 554년 이전에 쓰여진 자료나 정보를 가지고 집필했을 것이다. 『위서』는 맥국이 천여리의 지경을 갖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이미 『고금군국지』가 중요하게 인용한 『수서』는 『북사』를 인용하고, 『북사』는 『위서』를 필사할 정도였다고 하니, 적어도 『고금군국지』의 맥국관계 기록은 801년 당시 상황을 참고하였다고 하더라도, 500년대 중반 이전의 정보에 의하여 기록한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고금군국지』가 적시한 내용이 틀리지 않음을 증명하는 자료는 북명〔강릉〕인이 밭을 갈다가 “예왕지인”을 얻어 바쳤다는 기록이 여러 곳에 기록되어 있으니, 이것 또한 가탐의 『고금군국지』의 내용을 입증하는 자료가 된다.62) 가탐은 해당지역 사람 뿐 아니라 당대에 전해지는 숱한 자료도 열람하였으며 나름 정밀한 확인 고증의 과정을 거쳤다고 한다. 따라서 단순히 『고금군국지』가 801년에 쓰여져서 믿을 수 없다는 논리는 접어야 할 것이다. 이런 논리라면 1145년에 쓰여진 『삼국사기』는 신뢰란 의미로는 논의의 대상조차 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기록들은 당시 삼국의 정세를 생각하면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나, 『삼국사기』 「열전」 김유신조에 보면 고구려 백제 말갈이 국경을 침범하는 것을 보고 비분강개하여 중악 석굴에 들어가 제계하고 하늘에 맹세하는 대목이 나온다. 
또한 태종 무열왕 5년(658)기록에도 신라 왕 김춘추가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표문을 올려 “백제, 고구려, 말갈 등이 우리의 북쪽 국경에 침입하여 30여 성을 함락시켰다.”고 하였다. 즉 이 이해하기 어려운 ‘예’와 ‘맥계말갈’세력을 당시대 까지 말갈이라는 호칭으로 존재할 수 있게 한 것은  낙랑, 고구려등의 이들에 대한 지배방식이 직접지배가 아닌 재지세력을 통한 간접지배방식을 택한 것으로 밖에 해석할 수 없다. 이런 연유로 이들 ‘예맥계말갈’ 세력은 삼국통일기까지 『삼국사기』에 말갈이라는 이름으로 공동체를 유지하고 있다. 둘째는 『삼국지』 「위서」30 (동이전) 한조에 :

“ [후한의] 환제·영제 말기에는 한과 예가 강성하여 [한의] 군·현이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니, [군현의] 많은 백성들이 한국으로 유입되었다”. 

이 기록 역시 “영서예설”을 주장하는 측은 강성해진 ‘한예’의 ‘예’를 지금의 강원도와 경기도 북부 지역에 자리잡고 있었던 ‘예’라고 보고 있다. 그런데 이 기록을 자세히 보면 ‘한예’를 군현이 통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군현의 백성들이 ‘한’으로 유입되었다고 되어 있다. 백제를 중심한 한세력과 AD.30년에 독립한 영동지역의 동예세력이 중국의 세력변동의 시기에 한예가 강성해지자 불안을 느낀 중국정세의 변화로, 약체화 되어가던 군현의 백성들이 낙랑과 대방과 가까운 한으로 유입되었다는 뜻이다. 만약 강원 영서지역과 일부 경기북부지역이 예의 땅이라면 『삼국지』의 기록은 군현의 백성들이 ‘한예’로 유입되었다고 함이 마땅할 것이다. 한예가 강성해지긴 하였으나 예는 동해안 지역으로 멀어 한 군현의 백성들이 유입되기 어려운 여건이었으므로 한으로 유입되었던 것이다.
이를 다시 견강부회하여 강성해진 동예를 소위 어디에도 없는 ‘영서예’로 만들고 있다. 광개토왕비문의 ‘한예’의 ‘예’를 경기북부와 강원영서 나아가서는 황해도지역까지도 ‘영서예’의 영역에 넣어 비문의 수묘인 ‘한예’를 찾고 있다. 그는 수묘인 한예의 예를 ‘영서예’로 보아 고구려가 “광개토대왕비를 세운 5세기 초에 이를 ‘한'과 ‘예'로 구분했다는 것은 이 당시 고구려인들이 이 지역에 거주하던 주민을 자신과는 계통이 다른 두 종족 집단으로 인식했음을 뜻한다.”63) 보고 있다. 고구려의 종족계통인 맥에 대해서는 혈연적 유사성으로 수묘인 대상에서 제외되고 있음은 맞는 말이다. 이것 역시 ’영서맥‘이 수묘인의 대상에서 제외되는 하나의 요인이 될 것이다. 
고구려의 건국과 관계없이 고구려와 그 혈연적 계통을 같이하는 맥의 한 갈래가 이동하여 영서지역과 경기북부지역에 존재한 것이 사상의 맥이다. 고구려가 맥족임으로 ‘한예’로 수묘인을 삼은 것이라는 애기다. 이는 옳은 말이다. 그런데 북한강 남한강 지역은 광개토왕대에 고구려에 부용된 맥족이었음으로 수묘인에서 제외되었던 것이다. 이를 정약용이 입증 없이 이지역의 ‘맥계말갈’도 옥저 동예세력으로 지정하였고, 이를 후대에도 연구자들이 특별한 비판 없이 수용하는 데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특히 김창석은 이를 입증하기 위하여 노력하는데, 그러다 보니 무리한 비약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광개토왕이 백제와 접전한 지역, 즉 광개토왕의 백제 정복 루트는 예성강과 임진강 그리고 한강 하류지역임은 이미 많은 학자들에 의해 상식이 된지 오래이다. 그리고 이들은 영동지역의 동예와는 문헌적으로나, 고고학(묘제)적으로나 그 성격이 완연히 다른 집단임이 입증되었다. 그런데 그런 기록도 어떤 징후도 없건만 그는 광개토왕이 영서지역을 정토하였고, 그 때 잡은 포로가 예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 광개토왕의 수묘인 “신래한예”의 예는 본고에서 앞장에서도 설명했지만 광개토왕비문의 “신래한예”의 예는 광개토왕이 신라구원의 명분으로 신라로 진공하는 과정에서 동예지역을 통과하면서 획득한 포로 일 수도 있으나, 필자는 동부여(예족) 정토후 데려온 예일 수밖에 없음을 논한 바 있다. 그의 “영서예” 주장 논리 가운데 다음의 사실도 합리성이 있는가 보자.

“國出鐵, 韓·濊·倭皆從取之. 諸市買皆用鐵, 如中國用錢, 又以供給二郡.”

“나라에서 철이 나는데 한·예·왜가 모두 와서 이를 취한다. 물건을 사고 파는데 모두 철을 사용하는 것이 마치 중국에서 전(錢)을 쓰는 것과 같다. 또한 이를 2군(君)에 공급한다.”64)

김창석은 위 기록에 대하여 “변한 지역에 와서 철을 구해가던 예는 영동예도 불가능하진 않지만 해로를 이용해야 하는 난점이 있다. 이에 비해 〮육로를 통해 낙랑군으로의 철 보급도 가능하므로 변한의 철을 교역해 간 예 세력은 영서지역의 예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 
동예지역에서 해변을 따라 배로 내려간다면 쉽게 갈 수 있는 좋은 입지조건과 육로로도 해안을 따라 직선으로 내려갈 수 있는 길을 놔두고, 영서지역을 예로 상정하고 영서지역에서 멀고 위험한 육로를 선택하여 변진지역로 들어갔다고 보고 있으니, 어찌 견강부화라는 말이 떠오르지 않겠는가? 뿐만 아니라 영일지역까지 예의 활동영역이 “진솔선예백장인”의 출토로 확인된 상황에서 위 「동이전」 변진조의 예를 내륙 깊숙한 곳에 위치했던 영서지역으로 보는 것이 과연 합당할까? 이와 연관된 다음 기사를 보자. 『삼국사기』 「신라본기」 파사 이사금 23년 가을 8월, 

“음즙벌국〔안강〕과 실직곡국〔삼척〕이 강역을 다투다가 왕에게 와서 그에 대한 결정을 요청했다. 왕은 이를 곤란하게 여겨 “김관국의 수로왕이 연로하고 지식이 많다.”라고 하고서 그를 불러 물었다. 수로왕이 논의를 일으켜 다투던 땅을 음즙벌국에 속하게 했다.”

실직국과 음한벌국이 일으킨 분쟁의 원인은 표면상으로는 음한벌국이 강역을 놓고 분쟁을 일으키고 있다. 실직국은 강원도 삼척으로 비정되고, 음한벌국은 경주 부근의 안강에 비정되기 때문에 이들 소국간에 영토분쟁이 일어났다는 점은 상당한 의문이 따른다. 
창녕비에 의하면 ‘우추실지하서아군사대등(于抽悉支何西阿郡使大等)’65)이라 하여 6세기 중엽 진흥왕대에 하슬라를 비롯하여 삼척·울진 지역이 하나의 행정 단위로 편제되었고,66) 삼척 북방의 하슬라가 예계고국(濊系古國)67)이며 남방의 해아현〔포항시 청하면〕까지가 예의 관할지역으로 편제되었던 점68) 등을 참조하면 그 이전부터 강릉·삼척·울진 등에 있었던 소국은 진한계통이 아니라 예족계통의 소국으로 생각된다. 이들 소국의 분쟁에 대해서는 3세기 중엽의 철교역 기록, 즉 『위지』 「동이전」에 의하면 변한과 진한의 ‘소국들은 철을 생산하는데, 한·예 왜가 모두 철을 구입하였다고 하였다.’69)는 기록이 참조된다.
예가 진한과 경계를 접하고 있음을 미루어 보면, 3세기 중엽 이전부터 예족은 진한지역과 철을 매개로 교역을 전개하고 있었던 것이다. 실직국을 비롯한 예족이 남하하여 진한지역과 철을 매개로 한 교섭이 적극화되어 가면서 진한지역의 소국인 음집벌국과 갈등을 일으키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이 분쟁은 단순한 영토분쟁이라기보다 철을 매개로 한 교역과정에서 일어난 갈등으로 해석함이 보다 타당할 것이다.70)
예의 활동 영역이 남쪽으로 더 내려갈 수 있다는 사실은 1966년 경북 영일지역에서 출토된 “진솔선예백장인”이라고 새겨진 동인에서 그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이는 진대에 동예의 한 수장에게 백장의 관직을 제수하면서 보내온 인장으로 약간의 다른 유물과 함께 출토되었다. “진솔선예백장인”은 신라초기 기사의 신빙성 문제가 있으나, 『삼국사기』 「신라본기」 남해차차웅 16년조에 “북명인이 밭을 갈다가 예왕인을 주어 바쳤다”는 기록의 사실성을 입증해 준다고 하겠다.71) 이와 같은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변한과 철을 거래했던 한, 예, 왜세력 가운데 예는 동예였음은 재고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이 간단한 것을 억지로 “영서예”를 만들어 맞추려니 논리의 비약은 불가피한 것이다. 더구나 진한의 거수 염사치이 찾아간 낙랑은 평양의 낙랑이 아니라 진한과 인접한 낙랑의 한 현일 것이라는 견해는 거의 상식화 되어 있다. 이 현은 아마 ‘영서맥’지역으로 추론된다. 세번째, 『삼국지』 「동이전」 예조의 다음 기록을 보자.

“自單單大山領以西屬樂浪/ 自領以東七縣, 都尉主之, 皆以濊爲民. 後省都尉, 封其渠帥爲侯, 今不耐濊皆其種也”.
   
그의 해석을 보자.

“낙랑군은 단단대산령 인 철령의 서쪽 즉, 영서 및 황해·경기 일부지역은 직접 관할하고 그 동쪽은 동부도위를 두어 관장토록 했다. 그런데 양편은 모두 예족 분포지였다. 따라서 4세기 말 고구려 그리고 4세기 중엽 이전에 백제가 점령하여 영유한 한강 이북과 영서 지역의 주민도 예족에 속한 것이 합리적이다.”72)

라고 주장하고 있다. 위 대목을 찬찬히 해석하여 보자. 우선 김창석은 “단단대산령”을 “단단대산령”으로 보아 “철령”으로 보고 있다. “령”은 재를 말하나, “령”은 산맥을 말한다. “령” 즉 ‘산맥’을 “령” 즉 ‘재’로 보는 것은 사료를 비트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단단대산령”을 필자는 낭림산맥으로 보고자 한다.73)

“단단대산령으로부터 서쪽은 낙랑에 속하고 / 령(단단대산령, 낭림산맥)의 동쪽은 7현을 두어 도위가 주관하게 했는데, 모두가 예로서 민을 삼았다. 그 거수를 후로 봉하였으니, 지금의 불내예가 모두 그 종이다.” 
 
즉 단단대산령의 서쪽은 낙랑에 속하고 / 동쪽은 동부도위를 두어 다스렸는데 동쪽에 사는 이들이 모두 예민(족)이었다는 뜻이다. 낙랑에 속한 단단대산령의 서쪽에 사는 종족에 대해서는 낙랑에 속한다는 것 외에 어떤 언급도 하고 있지 않다.
“그런데 양편은 모두 예족의 분포지였다”는 대목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해석인지 아무리 숙의를 거듭해도 알 길이 없다. 이 대목에 대한 해석도 “영서예설”을 받침하는 중요한 단서로 이용하고 있다. 이 대목은 동예지역이 예족임을 명확히 밝히는 내용 이상이 아님은 물론이다. 따라서 이 대목으로 “영서예”를 적시함은 특정 목표를 향해 모든 것을 아전인수로 해석하고 있음을 들어내는 표상이 될 뿐이다. 낙랑이 261년 외이인 한, 예, 맥을 데리고 조공하여 왔다는 기록74)에서도 낙랑에 속해 있었던 한, 예, 맥을 볼 수 있다. 여기에서도 분명한 ‘맥’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지 않는가? 낙랑이 낙랑에 속한 종족을 데리고 본국인 위나라에 조공하러 갔는데, 한 예 와 더불어 ‘맥’을 같이 데리고 가지 않는가? 어찌 존재하는 맥을 사상에서 지우려 하는가? 이때의 ‘예’는 ‘동예’요 ‘맥’은 영서맥임은 물론이다. 한은 삼한의 일부일 것이며, 예는 동예, 맥은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2회75) 「백제본기」 1회, 「지리지」 등에 나타나는 영서지역의 맥임은 너무나 자명한 사실일 뿐이다. 이 영서지역에 위치하고 있는 맥은 『삼국사기』 「백제본기」에서 말갈로 등장하여 고이왕 25년(258) 말갈〔맥〕 추장 나갈(羅竭)이 양마 10필을 바치고 우호관계를 연 것을 제외하고는 주로 백제의 북변과 동변을 공격하는 기사이다.
중부지역인 영서의 맥은 『삼국사기』 「백제본기」에서 책계왕 13년(298) 한〔낙랑〕과 연모하여 왕을 죽이고 있다. 이 맥에 대체되어 나타나는 말갈기사는 「백제본기」에 29회에 걸쳐 나타는데 28회는 주로 적대적 기사이다. 반면 직접 국경을 바로 맞대고 있지 않는 신라와는 맥국의 이름으로 2회에 걸쳐 나타는데 모두 우호적이다. 하나는 유리왕 17년 화려 불내의 신라침략을 막아주는 기사이다. 화려와 불내는 영흥과 안변으로 동예이다. 이 기사 역시 동예와는 그 본질적 성격을 달리하는 공동체인 맥국의 존재를 알 수 있다. 이로서도 맥과 동예는 적대적 관계로 같은 공동체일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두번째 기사 역시 맥과 신라는 사냥한 짐승을 가져다주는 우호적 기사이다. 맥족은 『북사』에서 그 지경이 1,000리에 이른다고 할 정도로 넓은 지역으로 표현되고 있다. 후술할 고고학적 사실이 증거하듯이 고구려의 주구성원과 그 계통을 같이하는 맥족은 기원을 전후한 시기에 만주대륙의 어떤 변화된 사정에 의하여 남하하여 북한강과 남한강유역에 퍼져 살며, 삼한연맹체와 같은 부족연맹체로 독특한 그들만의 문화를 계승하며 생존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한반도 중부지역의 맥은 낙랑, 백제, 고구려도 맥의 재지세력을 인정한 간접지배방식을 지속하게 됨으로서 삼국통일기까지 말갈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지며 공동체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문헌적으로는 『삼국지』로부터 『북사』, 『수서』, 『고금군국지』 등 중국측 사서와 국내문헌은 『삼국사기』 「본기」가 맥국 또는 말갈의 이름으로 북한강유역과 남한강 일부지역에 존재했던 맥족의 존재에 대한 기록을 부인한다는 것은 위 모든 사서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길 밖 엔 없을 것이다.​

 

57) 김창석, 고대의 영서지역과 춘천맥국설, 『이태진교수 정년기념논총』, 2009, p.285

58) 김창석, 위 논문, pp.280~281.

59) 신라가 삼국통일 이후 신라의 9誓幢 가운데 하나인 黑衿誓幢을 말갈으로 구성했다는 사실은 7세기 후반대에 말갈인이라 불려지던 공동체가 평양과 원산 이남지역에 존재하였음을 말한다. 이들의 실체는 嶺西 貊嶺東인데 당시 신라의 북쪽에 말갈을 주구성원으로 하는 渤海가 있어 당시 신라인들은 신라 백제의 주구성원인 三韓과는 그 계통을 달리하는 북쪽의 호전적 존재로 인식하고 있었던 濊貊系를 말갈로 호칭하였다.

김택균, 삼국사기에 보이는 말갈의 실체, 『고구려연구』3, 1997.

삼국사기에 보이는 맥의 실체, 『백산학보』69, 백산학회, 2004.

문안식, 『한국고대사와 말갈』혜안, 2003.

60) 『수서』 「동이열전.

61) 『북사』 「열전.

62) ① 『삼국사기』 「신라본기.

② 『삼국지 부여전.

③ 『진서』 부여국전.

문헌에 나타난 濊王之印은 현재 존재하지 않으나, 1956中國 雲南省 晉寧縣 古墓 중에서 漢武帝西南夷滇王에게 수여한 滇王之印이 발견되어 濊王之印의 존재 사실을 입증해 주고 있다.

63) 김창석, 앞의 논문, 2009, pp.283.

64) 삼국지』30, 魏書30 烏丸鮮卑東夷30 弁辰.

​65) 한국고대사회연구소편, 『한국고대금석문』II(신라·가야) 서울: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992, p.55.

66) 이매훈, 신라중고기주의 구조와 성격, 『부대사학』12, 1988, p.29~30.

67) 삼국사기』35, 지리지2 계주조.

68) 삼국사기』35, 지리지2 빈주유인군조.

69) 삼국지』 「위지동이전 변진전.

70) 선석열, 신라국가성립과정에 있어서 소국쟁강, 『역사와경계』49, 부산경남사학회, 2003.

71) 김택균, 강릉 예와 관계 논문자료, 강원지역의 옛나라』, 2014.

72) 김창석, 앞의 논문, 2009, pp.284.

73) 사실 필자도 이전에 미처 확인하지 못하고 지나간 대목인데, 2018. 8.30춘천고대사 연구를 위한 학술포럼에서 발표한 논문 참고 (허준구, 문헌자료로 본 맥국연구, 『단단대산령의 실체』, 춘천문화원, 춘천역사문화연구회, 2018, pp.56~59.)

74) 삼국지』 권사 위서 사 삼소제기 제사

75)​ 삼국사기 신라본기

1) 유리니사금 : 十七年, 秋九月.

2) 유리니사금 : 十九年, 秋八月. 이 기사 역시 貊國과 신라가 매우 우호적이다. 이에 대하여는 김택균, 春川 맥국설에 관한 연구, 『백산학보』3031, 1985; 김택균, 삼국사기에 보이는 맥의 실체, 『백산학보』69, 백산학회, 2004. 참고.

삼국사기 百濟本紀. 백제와 과의 관계는 좋지 않아 樂浪에 속하여 항상 낙랑편에 서서 百濟를 공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