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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서예설(嶺西濊說)의 허구와 그 실체 영서맥(嶺西貊)

상세정보

“광개토왕은 생전에 교를 내려 말하기를 ‘선조 왕들이 다만 원근에 사는 구민들만을 데려다가 무덤을 지키며 소제를 맡게 하였는데 나는 이들 구민들이 점점 몰락하게 될 것이 염려된다. 만일 내가 죽은 뒤 나의 무덤을 편안히 수묘하는 일에는 내가 몸소 다니며 약취해 온 한인과 예인들만을 데려다가 무덤을 수호·소제하게 하라’고 하였다. 왕의 말씀이 이와 같았으므로 그에 따라 한과 예의 220가를 데려다가 수묘케 하였다. 그런데 그들 한인과 예인들이 수묘의 예법을 잘 모를 것이 염려되어 다시 구민 110가를 더 데려왔다. 수묘호를 합쳐 국연(國烟)이 30가이고 간연(看烟)이 300가로서 도합 330가이다.”45)

위 비문은 광개토왕이 본인 사후 묘지관리에 대한 그의 뜻을 생전에 밝혔고, 그 뜻을 받들어 아들 장수왕은 총 330가 가운데 관리의 편의를 위하여 1/3을 구민으로 하고 부왕의 뜻을 받들어 한과 예를 220가로 하여 합계 330가로 수묘인을 확정하였다. 차출해 온 ‘신래한예(新來韓穢)’에서 차출된 지역은 모두 36개소이다. 구민도 모두 정토지역에서 데리고 온 피정복민 이었음은 물론이다. 능비문이나 『삼국사기』에 의하면 광개토왕은 생전에 거란, 연, 패려, 숙신, 가야, 왜, 백제, 동부여 등을 정토하였는데, 그의 수묘인은 왜 한과 예로 제한하였을까? 물론 그 당시 오늘날과 같은 민족의식은 없었을 것이다. 광개토왕은 고구려인을 맥족, 부여인을 예족, 백제 신라 가야지역을 한족으로 호칭하고 있음을 알았다. 이들이 오늘날 우리민족의 주구성체가 되었듯이 당시에도 이들은 외형이나 언어에 어느 종족보다 상호 유사성이 있어 거란이나 숙신 등 다른 종족 보다는 친근성을 느꼈으리라 생각된다. 이러한 연유로 수묘인을 ‘한예’로 국한했으리라.

그러면 여기 수묘인에서 맥이 빠진 이유는 무엇일까? 당연히 광개토왕은 고구려인이 맥인이었으므로 동류의식이 있었기 때문에 북한강유역과 남한강유역에 살고 있던 맥은 수묘인 명단에서 제외될 수 있었다. 물론 이를 받침하기 라도 하듯 『삼국사기』나 광개토왕비문 어디에도 이 지역에 대한 정토기사는 없다. 뿐만 아니라 백제의 진사왕이 예성강 남안에 관방을 설치하자46) 고구려의 고국양왕은 군대를 보내 백제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백제가 강력하게 방어에 나서자 고국양왕은 백제의 주력 방어선을 피하여 예성강 상류에 위치한 신계의 수곡성에서 마식령산맥을 넘어 강원도 이천과 평강을 거쳐 북한강 유역의 말갈 세력에 대하여 영향력을 확대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백제의 영향력 하에 있던 말갈 세력의 동요가 일어나게 되었다.47) 이는 진사왕 3년(387)과 7년에 말갈이 백제를 공격한 사실을 통해 입증된다. 백제가 고구려에 맞서 구축한 전선을 약화·분산시키기 위하여 고구려가 맥계말갈을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48) 고구려와 맥계말갈은 부왕인 고국양왕때부터 우호적 관계였다. 광개토왕이 부왕대로부터 당대에 이르기까지 고구려를 돕고 있는 우군 세력을 정토했겠는가? 그것도 고구려와 계통을 같이하는 맥세력을 말이다. 이는 어느 기록에서도 고구려와 북한강유역의 맥계말갈세력과의 충돌이나, 불화적 징후를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이 신래한예지역 36개소는 광개토왕 6년에 정토한 58성 안에 있다는 연구자와 광개토왕 20년(410) 동부여 정토시 획득했다고 기록된 64성안에서 찾아야 한다49)는 연구자로 대별된다. 이 경우 백제를 정토하여 획득한 성이 64성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광개토왕은 평생 백제만 토벌한 왕으로 비쳐질 수 있다. 영토를 넓혀서 지은 대왕의 이름이 무색해진다.

58성 안에는 수묘인 차출지역 36개 가운데 적어도 24개 지역이 확인된다. 영락 6년조의 58성에는 포함되지 않으나, 두비압잠한(豆比鴨岑韓), 구저한(求底韓), 객현한(客賢韓), 파노성한(巴奴城韓), 백잔남거한(百殘南居韓)의 경우는 한족을 명기함으로서 백제나 가야지역임을 알 수 있다. 나머지 지역은 그 차출지역을 단정하기 어려운 지역이다. 수묘인 차출지 36개성은 오늘날 그 위치를 정확히 알 수 있는 곳은 거의 없다. 이 수묘인 차출지역은 백제와 고구려의 충돌지역 인근에서 찾아져야 마땅할 것이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나 「백제본기」에 나타나는 두 세력의 충돌지점은 예성강, 임진강, 한강일대임을 알 수 있다. 즉 황해도와 경기서북부지역인 서해안 루트에서 충돌하고 있다.50)

따라서 광개토왕의 전리품인 “신래한예”도 백제의 북부인 임진강과 예성강 유역에서 찾아져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신래한예”를 북한강유역에 있었을 것으로 유추하는 것은 광개토왕의 발길이 닿지도 않은 곳에서 포로를 데려오는 형국이 된다. 북한강 유역의 맥계말갈은 백제 고이왕에게 양마 10필을 바친 이후(258) 『삼국사기』 「백제본기」에서 고구려 고국양왕4년(397, 진사왕3) 관미령을 공격할 때까지 나타나지 않는다.

고이왕 이후 힘의 열세로 인해 백제와 우호적 관계에 들어간 맥계말갈세력은 적어도 고국양왕때에 이르면 고구려의 부용적 위치에 들어가는 것으로 판단된다.51) ‘맥계말갈’로 칭하고 있는 삼국시대 한반도 중부지역의 말갈세력은 고구려와 그 계통을 같이하는 맥족임은 『북사』, 『수서』, 『삼국지』 「동이전」, 『삼국사기』 등이 기록으로 증거하고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상세히 논하고자 한다.

영낙 20년 동부여 정토 후 기록된 64성도 대부분 영낙6년 조의 58성+6성=64성의 개념으로 이해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즉 64성을 백제정토로 보아 백제의 북동지역에서 찾고 있다. 이런 설정은 광개토왕의 평생 정토지역이 백제로 한정될 수 있는 우를 범하게 되어, 땅을 넓혔다는 의미로 지은 광개토왕의 이름을 무색하게 한다. 

신래한예 대상지역은 광개토왕이 몸소 군대를 이끌고 공략한 지역으로 한정된다. 그 대상은 패려(영락5년), 백제(영락6년), 백제·왜.가야 연합군(영락14년), 동부여(영락20년)등이 해당한다. ‘신래한예’는 이들 지역에 안에 거주하는 ‘한예인’이다. 따라서 위의 공략대상과 한예인이 겹치는 것을 구분해 내면 그 위치관계가 나타날 것이라 생각한다.

먼저 패려는 광개토왕의 서북방공략에 해당되는 지역이라서 한예인과는 관계가 없음으로 제외할 수 있다. 동부여의 경우는 그 실체와 위치 비정에 대해서 유력한 근거가 나타나지 않고 있어, 학자마다 의견이 다양한 실정이다.52) 고구려의 주구성체는 맥, 부여의 주구성체는 예, 신라, 백제, 가야의 주구성체가 한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따라서 광개토왕이 생전에 남긴 “신래한예”로 수묘인을 삼을 것을 유언한 대상은 영락 6년조에 기록한 백제정토지역 58성과 영락 20년(410) 본인이 직접 순행 정토한 동부여의 예족집단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즉 백제 정토지역인 58성에 없는 지역 가운데 두비압잠한, 구저한, 객현한, 파노성한, 백잔남거한으로 표기한 지역을 뺀 나머지 지역은 동부여 정토지역으로 봄이 합리적이다. 

광개토왕비문에 등재된 수묘인 36개 지역공동체와 백제 정토지역 58성 가운데 수묘인 차출지역에 포함되는 곳을 순서대로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표 > 영락6년 광개토왕 백제정토지역 신래한예 관련지명 기록 비교

 수묘인연호

영락6년

수묘인연호

영락6년 

 1. 沙水城

 

 

 19. 豆奴城

 

 23. 豆奴城

 

 2. 牟婁城

 

 

 20. 奧利城

 

 14. 奧利城

 

 3. 豆比鴨岑韓

 

 

 21. 須鄒城

 

 17. □□

 

 4. 勾牟客頭

 

 

 22. 百殘南居韓

 

 

 5. 求底韓

 

 

 23. 大山韓城

 

 28. 大山韓城

 

 6. 舍蔦城韓穢

 

 9. 古舍蔦城

 

 24. 農賣城

 

 22. 農賣城

 

 7. 古模耶羅城

 

 16. 古模古模耶羅城耶羅城

 

 25. 閏奴城

 

 51. 閏奴城

 

 8. 炅古城

 

 

 26. 古牟婁城

 

 50. 古牟婁城

 

 9. 客賢韓

 

 

 27. 瑑城

 

 20. 瑑城

 

 10. 阿旦城

 

 10. 阿旦城

 

 28. 味城

 

 

 11. 雜珍城

 

 13. 雜珍城

 

 29. 就咨城

 

 

 12. 巴奴城韓

 

 

 30. 彡穰城

 

 53. 彡穰城

 

 13. 臼模盧城

 

 2. 臼模盧城

 

 31. 散那城

 

 34. 散那城

 14. 各模盧城

 

 3. 各模盧城

 

 32. 那旦城

 

 35. 那旦城

 

 15. 牟水城

 

 

 33. 勾牟城

 

 15. 勾牟城

 

 16. 幹氐利城

 

 4. 幹氐利城

 

 34. 於利城

 

 21. 於利城

 

 17. 彌鄒城

 26. 彌鄒城

 

 35. 比利城​

 25. 比利城

 

 18. 也利城

 

 27. 也利城

 

 36. 細城

 

 36. 細城

 

 

광개토왕비문에 기록된 영락6년(396년)조의 백제정토기사는 58개성 700촌락을 정토하고 왕제 및 대신 10인과 포로 1,000인을 획득하는 전과를 올렸다고 한다.53) 비문에 등장하는 영락 6년의 58성 700촌의 정토는 영락 6년 1회의 전과는 아니다. 이는 『삼국사기』 광개토왕 1년 가을 7월에 남쪽으로 백제를 쳐서 10개 성(성)을 빼앗았다는 기록과54) 겨울 10월에 백제 관미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는 기록55), 그리고 영락 4년(394) 가을 8월에 ‘왕이 패수 위에서 백제와 싸워 이를 크게 패배시켰다. 사로잡은 포로가 8천여 급이었다.’56) 등의 전과가 비문에는 누락되어 있다. 

비문의 영락 6년조 기사는 영락 1년부터 이루어진 전체 대백제전의 전과인 것이다. 영락 6년조에 획득한 것으로 기록된 대백제전의 성과인 58성 700촌의 획득은 영락 1년부터 대왕의 일생동안 공취한 대백제전의 전과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이 58성에 기록되지 못한 12개 수묘인 차출지역은 그것이 한족이라 하더라도 꼭 백제계 주민으로만은 볼 수 없다. 영락 10년과 14년의 기사는 신라구원을 위한 진공과정의 전과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공격루트가 추가령지구대를 지나 동해안로로 진군했을 경우 동예지역 즉 ‘예계말갈’지역과 가야지역을 관통하는 과정에서도 포로의 획득은 가능하리라 생각된다. 그러나 수묘인 “예”에 관해서는 영락 20년 동부여 정벌에 그 가능성을 더 두고자 한다. 비문에 의하면 

 

“영락 20년(410) 경술 동부여는 옛적에 추모왕의 속민이었는데 중간에 배반하여 (고구려에) 조공을 하지 않게 되었다. 왕이 친히 군대를 끌고 가 토벌하였다. 고구려군이 여성〔동부여의 왕성〕에 도달하자, 동부여의 온 나라가 놀라 두려워하여 투항하였다. 왕의 은덕이 동부여의 모든 곳에 두루 미치게 되었다. 이에 개선을 하였다. 이때에 왕의 교화를 사모하여 개선군을 따라 함께 온 자는 미구루  압로, 비사마압로, 타사루압로, 숙사사압로, □□□압로였다. 무릇 공파한 성이 64개, 촌이 1,400이었다.”

 

이 정토기사의 공파한 성 64성 1,400촌은 백제정토지역 58성 700촌을 제외한 광개토왕 전생애의 정토지역인 영락 5년의 패려정토, 영락 8년(398)의 식신(숙신)정벌, 영락 10년(400)의 신라구원을 위한 백제·왜 가야연합군의 정토, 영락 20년(410)의 동부여 정토 등을 망라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즉 백제 정토지역을 제외하고 광개토왕이 전생애에 걸쳐 정토한 지역이 64성 1400촌이라는 말이다

이 가운데 수묘인 차출대상인 “신래한예”의 한이 차출된 지역은 영락 6년조 기사와 영락 10년(400)의 신라구원을 위한 백제·왜 가야연합군의 백제 가야지역 정토기사 내에 있다. 수묘인 예의 차출대상은 신라구원의 과정에서의 진공로인 동예 가야 신라도 해당될 수 있으나, 주 차출대상지역은 영락 20년(410)의 동부여(예) 정토기사가 그 대상이 될 것이다. 따라서 광개토왕비문의 수묘인인 “신래한예”의 예의 주 출신지가 동부여라면 영서지역을 예의 세력권으로 판단한 근거는 무용하게 된다.

 

45) 광개토왕릉비문,

46) 삼국사기』 「백제본기

47) 문안식, 『한국 고대사와 말갈』, 혜안, 2003.

48) 삼국사기』 「백제본기辰斯王 三年(387) 秋九月 : 秋九月기사와 辰斯王 七年(391) 夏四月 夏四月. 즉 백제 고이왕 25(258) 말갈이 백제에 양마 10필을 받친 이후 백제본기에서 말갈관계기사는 침묵하다가 고구려 고국양왕 4(387)7(391)에 고구려의 부용세력으로 다시 나타나고 있다.

49) 이도학, 광개토왕비문에 보이는 지명 비정에 대한 재검토, 『광개토왕비문의 신연구』, 1999.

50) 문안식, 『백제의 흥망과 전쟁』, 혜안, 2006.

51) 위의 책, p121.

52) 공석구, 광개토왕릉비의 동부여에 대한 고찰, 『한국사연구』70, 1990 : 그는 동부여의 세력권이 강원도의 북부지역까지 해당하는 것으로 이해한 바 있었다. 그렇다면 韓濊人의 거주 지역에 광개토왕이 親征한 동부여지역도 일부 포함시킬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53) 광개토왕비문영락 6.

54) 삼국사기』 「고구려본기광개토왕 1(391)

55) 삼국사기』 「고구려본기광개토왕 1(391)

56) 삼국사기』 「고구려본기광개토왕 4(3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