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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서예설(嶺西濊說)의 허구와 그 실체 영서맥(嶺西貊)

상세정보

예는 우리 민족이 국가를 갖기 이전에 불려 지던 우리민족의 종족 명칭인 , , 가운데 하나로, 논란의 여지는 일부 있으나, 훗날 예는 주로 부여로, 맥은 고구려로, 한은 고조선의 주구성체로 인식되어 왔다. 당 시대 이들의 활동무대는 만주를 중심한 지역이었다. 『후한서삼국지로 부터 등장하는 한반도내의 는 그 이전 만주지역에 나타나는 와 구별되어 동예로 불려져 왔다.

한반도내의 를 지칭하는 최초의 중국측 기록은 『삼국지』 「위지」 「동이전이다. 『삼국지』 「동이전예조에는

 

예는 남으로는 진한과 접하고 북으로는 고구려 옥저와 동으로는 대해에 이른다. 지금 조선의 동쪽이 그 땅인데 호수가 2만이다.”1)라고 되어 있다. 『후한서』 역시 삼국지를 거의 답습하고 있다.”

 

후한서에는

 

예는 북으로는 고구려 옥저와 남으로는 진한과 접하고 서로는 낙랑에 이른다. 예 및 옥저 고구려는 본래 모두 조선의 땅이다2)라고 하여 서쪽에 낙랑이 있음을 첨언하고 있다.“

 

이로서 삼국지후한서가 가리키는 예가 함경남도 일부지역과 강원도 영동지역 일대를 지칭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지후한서가 편찬되던 시기에는 이미 예가 동해안 일대로 고정되는데, 예전에는 맥에 관한 기록은 없다. 그러나 동일한 내용의 위치를 나타내는 기록인 삼국지고구려전에는 고구려가 남쪽으로 조선 예맥과 접하고옥저전에는옥저가 남으로 예맥과 접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3) 『후한서의 기록4)삼국지와 같다. 양서의 예전에서 밝힌 의 위치와 양서의 고구려전옥저전에서 밝힌 예맥의 위치는 동일하다. 따라서 맥전의 누락으로 볼 수 있다. 이는 당시 는 낙랑 동부도위 관할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위치에 있었으나, 맥은 낙랑의 예속하에 있어 독립된 세력으로 보기가 어려워 독립적인 예만 기록되었을 것이다.

이어 554년에 완성된 중국의 정사인 북사백제전에서 西行三日 至貊國千餘里云이라 기록하고 있다. 이어 636년에 편찬된 수서』 「백제전에는 百濟自西 行三日 至貊國云이라 하여 이 시기에 백제 인근지역에 맥국이 존재하고 있음을 증언하고 있다.5) 그간 우리학계는 수서』 「백제전의 맥국관련 해석을 백제로부터 3일을 가면 맥국에 이른다로 잘못 해석하여 왔다. 필자도 이 해석에 따라 백제는 백제의 왕성을 말하며 방향이 동을 북으로 잘못기재 된 것으로 보아왔다. 백제의 서쪽은 서해바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백제의 왕성에서 3일정도 가면 맥국의 본영이 나온다는 뜻으로 보아야 하고, 이 거리는 오늘의 춘천지역에 해당하는 것으로 이해하여 왔다. 또 다른 관점은 중국에서는 서와 북을 같은 개념으로, 동쪽과 남쪽을 동일 개념으로 인식하는 경우도 있어, 여기의 서는 북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여왔다. 북쪽의 서진과 남쪽으로 이동한 진()동진(東晉)’이라 이르는 것과 같이 말이다. 그러므로 양서의 백제전에 맥국이 등장하는 것은 백제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지근거리에 맥국이 존재함을 말해주고 있는 것으로 해석하여 왔다.

그런데 수서』 「백제전의 기록을 문법에 맞게 자세히 주목하여 본 허준구의 해석이 정확함으로 그간 필자가 주장해온 논리가 잘못되었음을 인정하고, “百濟自西 行三日 至貊國云백제 서쪽으로부터 3일을 가면 맥국에 이른다로 새롭게 해석하고자 한다. 이는 중국인이 중국에서 서해 뱃길로 당도한 백제의 서쪽으로부터 3일을 가면 맥국에 이른다는 당대 중국인의 입장에서 본 기록이다. 이렇게 보면 그간 이 대목에서 분분했던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 그 동안 필자의 이전 견해에 대해 일부 사료를 비튼다는 비판이 있어 왔으나, 새로운 해석은 이 모든 문제를 일축하고, 적어도 수서』 「백제전의 맥국 존재는 인정될 수밖에 없다.

우리 측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사서인 삼국사기에는 에 관한 기록이 고구려본기2회 신라본기27) 백제본기18)가 보이고, 예관계기록9)3번 보인다. 고구려본기의 기록10)은 모두 고구려의 주구성체인 만주지역의 을 가리키고 있어 여기서는 논지에서 벗어나므로 논외로 한다. 더불어 삼국사기』 「지리지에는 춘천을 '맥국'11)의 고지(故地), 강릉을 예국12)의 고지로 비정하고 있다. 그 외 지리적 전승이나, 고고학적인 특징 등은 강원 영서지역을 맥족의 영역으로 영동지역을 로 인식하는 근거를 제공하고 있다. 이에 대한 논증은 영서예설의 성립문제를 다루며 후술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이 중국측 정사삼국지』, 『후한서』, 『북사』, 『수서』 등 당시대를 기록한 모든 중국측 정사에 영서지역에 이 존재했음을 직간접적으로 알리고 있다. 위 중국측 정사를 모두 부정할 수 없다면 맥국적어도 이 영서지역을 중심한 지역에 맥국또는 맥족이 존재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뿐만 아니라 우리 측 정사인 삼국사기에 수록된 영서맥에 대한 고기록이 엄존함에도 불구하고 오늘 영서예설이 더러 인구에 회자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본고는 이 영서예설의 성립배경을 검토하고, 그 근거로 들고 있는 논점의 모순을 지적하여 고대 성현들이 기록한 정사가 결코 근거 없이 기록된 것이 아닐 뿐 아니라, 잘못되지도 않았음과 근래까지 발굴된 고고학적인 성과의 해석에도 문제가 있음을 밝혀 영동예설의 문제점을 적시하여 영서맥의 실체를 복원하고자 한다.

삼국사기에 나타나는 말갈 관계 기사는 만주지역의 말갈과 혼동되어 이 분야 연구자들에게 혼란을 주어왔다. 『삼국사기』 말갈관계 기사는 백제 온조왕때인 백제초기부터 통일신라기인 7세기말까지 연속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말갈관계 기사는 영역문제를 비롯한 신라, 백제의 사정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단서가 되고 있다.

삼국사기90여회에 걸쳐 주로 백제와 신라를 공격하며 관계하고 있는 말갈에 대해 최초로 관심을 보인 것은 조선후기 실학자들 이었다. 순암 안정복은 옥저와 예맥 사이의 한 종족이 있었을 가능성과 북방 말갈의 해로 침투 가능성을 지적하였다. 그는 별류일종(別類一種)불내예지류(不耐濊之流)로 파악하고 있다.13) 순암의 삼국사기에 나타나는 말갈에 대한 최초의 개념 도입은 높이 평가되나 만주지역 말갈과의 관련성을 탈피하지 못한 것은 그 인식의 한계성으로 지적된다.

다산 정약용은 백제와 신라 지역에 출몰하는 말갈은 위말갈로서 옥저지역의 불내예로 파악하고, 고구려본기의 말갈은 만주지역의 진말갈로 보았다.14) 다산은 위말갈이라는 명칭을 처음으로 도입하여 비로소 삼국사기에 나타나는 말갈문제에 대한 이해의 기틀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삼국사기』 등 고기에 언급된 예맥에 대하여 다산 정약용은 그의 예맥고에서 예맥은 본디 북적의 종족이니, 우리나라 영토 안에는 본디 이 종족이 없었다고 하여 기본적으로 예맥을 북적의 한 종족으로 인식하고 있는 화이관적 화이론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또한 해부루가 동부여로 옮겨간 후 북부여지역이 예맥으로 일컬어졌으며, 중국측 사서에 고구려가 에서, 부여가 에서 나왔음을 적시하고 있으나 석연치 않아 하고 있다. ‘맥국의 자취가 신라 백제의 역사에 겨우 한두 군데 나오는데, 이는 모두 낙랑의 딴 이름이지 두 나라가 아니다. 춘천을 맥이라고 이르는 것은 그 증거 할 것이 전혀 없고, 오직 가탐의 고금군국지에 그 설이 있다. 서한 말년에 낙랑지역에 예속된 춘천지역의 추장이 맥인과 관계가 있어 그대로 맥국이라고 일컬었다.”15)고 봄으로서 최초로 춘천지역 맥국설을 부정하고 있다.

그리고 다산은 삼국사기』 「백제본기29회에 걸쳐 주로 백제를 침범하고 있는 말갈에 대하여 북쪽의 만주지역의 말갈만을 의식하여 허황하다는 말만 장황하게 논하다가, 우연히 한번 침략했다고 해도 이치에 가깝지 않은데, 하물며 해마다 달마다 왼쪽으로 찌르고 오른쪽으로 내닫기를 마치 세집이 사는 마을에서 날마다 성내고 싸우듯이 했으니 어찌 이치에 맞겠는가?16)라고 하면서도 이 말갈을 한강유역의 백제와 동북쪽으로 멀리 떨어진 동옥저와 불내예로 보고 있는 모순과 시각의 한계를 보여주고 있다. 다산의 이 논리는 마치 세집이 사는 마을에서 날마다 성내고 싸우듯이 했으니 어찌 이치에 맞겠는가?라고 하여 백제와 동예가 지리적으로 멀리 있는 모순을 지적하면서도 말갈을 동예로 보는 너무나 비상식적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이어 다산은 발해(698~926)가 말갈이었으므로, 신라사람이 오랫동안 북방지역을 말갈이라고 하여 입으로 습관이 되고 귀에 익어, 북쪽 도적이 와서 침입하면 이를 모두 말갈이라고 이름 했던 것인데, 김부식은 이 사실을 살피지 못하고 이와 같이 편찬 기록했다17)고 하였다. 이 견해는 탁견이라 생각한다. 『삼국사기에서 예와 맥의 명칭이 말갈로 대체되어 나타나게 되는 이유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이에 대한 생각은 필자도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백제와 말갈의 29회에 걸친 공방에 대해 마치 세집이 사는 마을에서 날마다 성내고 싸우듯이 했으니 어찌 이치에 맞겠는가?”라고 말하면서 백제와 태백산맥을 사이에 두고 먼거리에 있었던 동옥저 불내예를 말갈로 적시한 것은 그가 살던 시대를 감안하더라도 상식과 논리에서 너무나 동떨어져 있음을 실감한다. 그런데 다산의 이 글은 오늘날까지 영향을 미쳐 다수의 연구자들이 삼국사기』 한반도내의 말갈을 대개 예로 보는 우를 범하게 했으니, 그 책임이 적지 않다 하겠다. 다산은 한반도내의 말갈을 로 보는데, 특히 강릉의 는 해부루의 와 연결되어 있다고 보았다.18) 『증보문헌비고도 정약용의 설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19) 다산 정약용의 예맥개념은 북적, 나아가서는 만주지역에 존재하며 고구려와 부여의 구성에 관여한 종족이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음을 볼 수 있다. 다산은 기본적으로 예와 맥을 구분하는 것이 별 의미가 없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이런 다산의 논리를 따르면 백제본기에 활동하는 말갈의 행태를 보면 마땅히 백제근처에 이웃해 있어야만 한다. 그런데 다산은 만주지역의 예와 맥을 심히 의식하여 설마 만주에 있어야 할 맥이 백제 인근에서 나타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동예와 옥저는 그 북쪽 한계가 만주지역에 닿아 있으니, 신라와 백제를 침략하는 말갈을 동예와 옥저로 볼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다산보다 앞서 살았던 안정복(1712~1791)‘『삼국사기에 기록된 맥관계기사를 사실로 보아 문헌통고를 인용하면서 대개 여러 나라가 난을 일으키고 부락이 흩어져 맥이 끝내는 지금의 강원도에 귀속되고 말게 된 것으로 보고 있다.20)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한반도 중부지역의 예맥기사가 중국의 동북부인 만주지역의 원 예맥에 대한 인식으로 인해 시대를 막론하고 독자들에게 혼란을 야기한 것과 같이, 6세기 대에 중국측 문헌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말갈기사가21) 한반도 중부지역에서는 기원을 전후한 시기부터 등장함으로서 말갈관계기사도 그동안 많은 의심과 논란의 대상이 있어 왔다. 근간에 이르러 이 말갈이 출현하는 지역이 예맥의 출현지역과 겹치고 있음에 주목하여 한반도내의 예맥과 말갈은 같은 실체로 인식하는 것이 통례로 굳어지고 있다.22)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말갈관계기사는 강원도를 중심한 삼국시대 한반도 중부지역의 잃어버린 역사를 복원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 말갈기사에 대한 인식이 다산의 인식을 이어 받아 영서예설의 주요배경 중의 하나가 되었으니, 그는 공적과 더불어 오늘 이 분야의 혼란을 야기 시키는 원인을 제공하는 데에 크게 기여하였다.

말갈관계기록을 검토해 보자. 『삼국사기』 말갈관계 기사는 백제 온조왕때인 백제초기부터 통일신라기인 7세기말까지 연속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말갈관계 기사는 영역문제를 비롯한 신라, 백제의 사정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단서가 되고 있다. 중국 정사에서 말갈의 명칭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북제서』 「무성제기하청 2(563)의 일이고, 말갈 별전은 수서에 이르러서이다.

원래 말갈 명칭은 만주지역 이민족의 호칭으로서 위대 물길의 후신으로써 숙신, 읍루의 계통으로 간주되어 왔다. 따라서 삼국사기에 그 이름이 90회 정도 나타나는 말갈의 실체가 의문시 되어왔음은 물론이다. 말갈 관계기사는 한반도 중부지역인 영서와 영동의 사라진 역사 뿐 아니라 영역문제를 비롯한 신라, 백제의 사정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단서가 되고 있다.

말갈이 한반도 중부지역에 존재했음은 남북조 시기의 신라가 구서당 가운데에 하나인 말갈세력으로 흑금서당을 설치하고 있는 데서도 알 수 있다. 이를 보면 분명 당시 7세기대인 통일신라시대에 말갈로 불려 지기도 한 세력이 존재하였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12세기(1145)에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저술하던 때에는 이 동일한 세력의 원 명칭인 예맥과 혼동되어 또는 통일신라시대 신라의 북쪽에 위치한 발해의 주구성체와 같은 계통의 종족인 말갈로 혼용되어 채록됨으로서 혼동을 야기하게 되었다.

이에 대한 일본 학자들의 견해를 보면 이 문제에 최초로 관심을 보인 [那珂通世]삼국사기의 말갈을 숙신과 연결되는 종족적 계승관계로 파악하였다.23) [津田左右吉]은 신라, 백제를 침략하는 말갈을 예로 보고, 특히 이들이 광개토왕기 이후 고구려에 부용하여 신라, 백제를 침입하는 말갈이라고 지적 하였다.24) 대체적으로 [津田]의 견해를 수용한 [鳥山喜一]은 이 말갈이 예족만을 지칭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 바 있다.25) 이는 단단대령의 서쪽인 영서지역에 백제와 접전하는 말갈()을 의식한 것으로 생각된다. 너무도 당연한 결과를 지적함으로서 다산의 시각에 대한 의문을 던지고 있다.

이후 신채호는 말갈을 예로,26) 이병도와 이용범은 동예로,27) 김철준은 예나 동옥저 세력으로,28) 천관우 역시 옥저를 포함한 예의 주민으로 파악함으로서 말갈을 동예와 옥저 세력으로 이해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29) 이 선학들은 모두 다산의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말갈문제에 관심이 증대되어 이 문제에 촛점을 맞춘 연구 성과들이 나타나고 있다. 처음으로 서병국은 삼국사기』 말갈을 백산과 율말 말갈의 한반도 남하로 파악하여 말갈을 동예로 보는 일반적 시각과 그 견해를 달리 하였다.30) 유원재는 무열왕대 신라가 당에 청병하면서 동예를 과장하기 위하여 말갈과 대치 시켰다고 봄으로써 위말갈설을 첨가하였다.31) 권오중은 말갈을 숙신, 읍루계 흑수말갈과 예계 발해말갈로 구분하고, 이 예계말갈을 부여, 옥저, 동예 세력으로 파악함으로서 기존의 추상적 개념에서 말갈의 개념을 구체화 시켰다.32)

이강래는 백제, 신라에 대한 말갈의 군사활동에 촛점을 맞추어 말갈을 예 세력으로 보는 기존의 입장을 고수하면서 말갈의 군사활동에서 낙랑과 고구려의 부용성을 강조하고 있다. 특히 [津田]의 설을 지지하여 니하(泥河)의 위치를 남한강 중상류로 비정하고 있다. 그러나 니하 비정에 대한 근거 제시가 미약하고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몇 가지 점이 지적된다.33)

한규철은 삼국사기의 말갈이 낙랑과 고구려의 변방 주민 또는 피지배민이라는 의미의 보통 명사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시사하고 있다.34) 이러한 한규철의 견해는 이후 확산되어 장원섭은 말갈을 단단대산령의 동서지역에 위치한 종족으로서, 그 명칭은 지역적 혹은 상대적으로 낙후된 집단에 대한 비칭으로 사용되었다고 보고 있다.35) 김기섭 역시 고유 명칭으로서의 말갈을 상정하지 않고 낙랑 혹은 고구려에 부용된 세력에 대한 일정한 의미의 범칭으로 이해하고 있다.36) 선석열도 말갈의 존재를 인정하면서도 그 계통에 대한 규정을 보류함으로서 한규철의 견해와 궤를 같이하고 있다.37) 종족적 개념에 집착하지 않는 점이 주목된다.

이들의 견해는 단단대산령의 서쪽인 강원 영서지역과 경기북부지역에서 백제와 충돌하는 말갈(영서맥)과 동해안로를 따라 신라와 충돌하는 동예계 말갈세력이 존재하는데, 이를 일원화하여 예계세력으로 보기 어려운 점을 감안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말갈이라는 호칭은 같으나, 영서에서 백제와 충돌하는 말갈과 영동지역에서 신라와 충돌하는 말갈은 우선 시공간적 개념에서 같이 다룰 수 없는 이질적 공동체이다. 백제와 충돌하는 영서 및 경기북부지역 즉 북한강 유역과 남한강 일대의 소위 말갈세력에 대하여 정사의 기록대로 맥계말갈세력과 주로 신라와 동해안로 상에서 충돌하는 예계말갈세력을 분리하여 보는 것이 합리적으로 생각된다.38)

삼국시대 초로부터 삼국 통일기까지 등장하는 이 한반도 중부지역에 존재한 세력집단의 성격에 대한 논의는 주로 크게 두 가지 학설로 정리될 수 있다. 숙신과 연결되는 진말갈위말갈설이다. 연구사를 보면 위말갈설이 통설화되어 있다. “위말갈설은 주로 이 말갈의 정체를 옥저나 예계말갈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이 경우 백제와 관계하는 강원 영서 및 경기북부지역의 말갈세력(맥계말갈)까지 예계말갈로 치부하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이는 다산처럼 설마 만주지역에 있어야 할 말갈이 한반도 중부 백제인근에 존재하는 것을 생각할 수 없어 옥저는 그 북쪽이 만주에 닿고, 동예는 말갈이 접전한 신라 백제와 그나마 근접하다는 인식의 소산이라 생각한다.

이에 대해 영서예문화권의 설정과 역사지리적배경이라는 논고를 통하여 영서예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한 문안식은 동예가 비록 추가령지구대라는 천연의 교통로를 이용할 수 있었을지라도 연맹체수준의 미약한 국가발전 정도에 머물렀음을 감안할 때 원거리의 백제에 심대한 군사적 압박을 줄 수 있었겠는가의 의구심은 남아 있다39) 고 보고 있다. 정상적 시각으로는 불가한 것이다. 따라서 그는 백제와 접전하는 말갈을 맥계말갈’, 신라와 관계하는 말갈은 예계말갈로 보는 합리성을 보인 바 있다. 권오영은 북한강과 남한강에 분포하는 무기단식적석총A.D. 1~2세기 경에 해당되며 3세기 이후로는 편년될 수 없고, 이를 축조 사용하는 집단은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북부와 동부로 표현된 고구려계유이민세력이라 하였다.40) 장원섭은 경기 동북부에 존재하는 고대 산성과 토기의 비교 연구를 통하여 3세기 중반경에 이르러서도 백제의 동계는 연천, 포천, 양주, 양평 그리고 여주군 일대를 연결하는 선에 머물러 있었고, 그 외곽지역은 맥계통의 말갈세력이 건재하고 있었다고 보고 있다. 그 역시 백제와 관계하는 말갈을 맥으로 보고 있다. 박순발에 의하여 고고학적 자료를 토대로 하여 경기 동북부와 남·북한강유역 일대에 산재되어 있는 고구려계 무기단식적석총을 말갈의 활동 근거로 바라볼 수 있다는 견해가 제기되었다.41) 이러한 고고학적 성과에 따라 문안식은 무기단식적석총의 문화권을 상성하여 보았을 때 경기 동북부의 집단은 말갈계와는 이동 경로와 남하시기를 달리하는 고구려계 남하세력의 일부로 하남 위례성으로의 천도 이전에 일시적으로 임진강 수로를 통하여 서해안 항로와 연결되는 이 지역에 거주하였다는 견해를 제기하였다. 1~2세기 경으로 추정되는 한반도 중부지역의 무기단식적석총의 조영집단은 예성·임진강유역의 초기 백제문화권과 남·북한강유역의 말갈문화권으로 구별하여 볼 수 있지 않나 하는 입론이다.

이와 같이 남·북한강유역의 말갈세력은 삼국사기』 「신라본기에서 말갈로 지칭되는 동예와는 문화적 기반과 세력 분포지를 달리하는 존재로서 이를 잠정적으로 영서예문화권으로 명명하고자 한다고 하였다. 문안식의 견해는 신라본기에서 말갈로 지칭되는 동예와 백제본기에서 말갈로 지칭되는 남·북한강유역의 말갈세력은 문화적 기반과 세력 분포지를 달리하는 존재로 인식하고 있다. 다만 이를 잠정 적으로 영서예문화권으로 명명하고 있을 뿐이다. 문안식도 영서지역의 문화와 영동지역 문화의 상이성을 거론하며 맥계말갈” “예계말갈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42)

이에 비해 영서예설의 근거를 적시한 논고는 김창석의 고대의 영서지역과 춘천맥국설이 있을 뿐이다.43) 소위 영서예설삼국지』, 『후한서』, 『북사로부터 수서』 뿐 아니라 삼국사기』 「본기3회에 걸쳐 직간접적으로 강원 영서지역을 지칭하는 맥기록과 지리지의 맥관계 기록 그리고 그간 진행되어온 고고학적 발굴성과와 전승 및 지명 등을 간과하는 우를 범하게 된다.44) 대체적으로 정약용을 비롯하여 그동안 예계말갈설을 주장한 학설은 대부분 이러한 역사적 맥락을 별로 의식하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김창석의 영서예설만이 비교적 논점을 적시하며 집중하여 그 근거를 제시하고 있는 유일한 논문이다. 이에 그 제시된 근거가 적절한 것인가를 검토함으로서 삼국지』, 『후한서』, 『북사』·『수서』·『삼국사기』 등에 기록된 맥관계기사가 잘못되지 않았음을 밝혀, “영서맥을 환원하고자 한다. “영서예설을 주장하는 근거는 크게 세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 광개토왕비문의 수묘인인 한예를 영서지역에 비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둘째, 『삼국지』 「동이전맥전이 없다는 것과 기타 중국측 정사나 삼국사기에 수록된 기록을 무시 부정 또는 자의적으로 해석한다는 점이다. 셋째, 고고학적관점에서 소위 중도유형문화가 영동 영서를 포괄하여 적용되어 영서지역도 예라는 주장이다. 이 논거를 3장으로 나누어 소개하고 그 문제점을 지적하여 영서맥을 환원하고자 한다. 

● 전 세경대 교수​

1) 삼국지30, 위서 제30, 동이전 제30, 예전.

2) 후한서85, 동이열전 75, 예조.

3) 삼국지』, 위서, 동이전, 고구려

4) 『후한서』, 동이열전, 고구려전.

5) 김택균, 춘천 맥국설에 관한 연구, 강원대 석사논문, 1983.

, 춘천 맥국설에 관한 연구, 『백산학보』30·31, 1985.

, 강원 예맥고, 『강원문화사연구』2, 강원향토문화연구회, 1987.

, 동예고-강릉 예국설과 관련하여, 『강원문화연구』16, 1997.

, 삼국사기에 보이는 말갈의 실체, 『고구려硏究』3, 1997.

, 삼국사기에 보이는 의 실체, 『白山學報』69, 白山學會, 2004.

6) 2018. 8.30일 춘천문화원에서 열린 춘천고대사연구를 위한 학술포럼의 토론과정에서 허준구가 지적한 이 부분의 해석이 문법적으로 또 문맥 면에서도 옳다고 인정되어 그간 제기한 필자의 견해가 잘못되었음을 인정하고, 그 해석을 수정한다.

7) 『삼국사기』, 신라본기.

8) 『삼국사기』​, 백제본기

9) 『삼국사기』​, 신라본기: 고구려본기.

10)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11) 『삼국사기5.

12) 『삼국사기34.

13) 안정복, 말갈고, 『동사강목』4, 경성 : 조선고서간행회, 1915, pp.415416.

14) 정약용, 말갈고, 『정차산전서, pp.877878.

15) 정약용, 『아방강역고』5, 예맥별고.

16) 위의 책5, 말갈.

17) 위의 책.

18) 정약용, 『아방강역고』5, 예맥별고..

19) 『증보문헌비고13여지고, 맥국.

20) 안정복, 『동사강목하권 지리고, 맥고.

21) 『북제서』7

22) 『삼국사기』 「백제본기신라본기에 보이는 소관의 실체에 대한 지금까지의 견해는 예맥계의 위말갈설, 예맥계의 위말갈설을 부정하는 견해, 이 말갈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여 숙신 다음의 명칭인 말갈로 그 종족계통이 연결된다는 견해 등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이에 대한 연구사적 정리는 한규철, 고구려시대의 말갈 연구, 『부산사학』14·15, 1988, pp.15~19 참조. 근간에 예맥계의 위말갈설로 보는 견해가 대세이다.

23) 那珂通世, 만주, 『지학잡지』205, 1907.

24) 津田左右吉, 호태왕정복지역고, 『진전좌우길전집』11, 동경 : 암파서점, 1964, pp.4751.

25) 鳥山喜一, 『발해사상제문제』, 동경 : 풍문서방, 1968, pp.5155.

26) 신채호, 『단재신채호전집, 서울 : 형설출판사, 1977, p.128.

27) 이병도, 『한국사고대편, 서울 : 을유문화사, 1959, p.356.

이용범, 삼국사기에 보이는 대외관계기사, 『한국고전심포지움』, 일조각, 1980, p.51.

28) 김철준, 한국고대국가발달사, 『한국문화사대계』1, 서울 : 고대민족문화연구소, 1964, p.501.

29) 천관우, 『한국문화사신론』, 서울 : 중앙대학교출판부, 1975, p.55.

30) 서병국, 말갈의 한반도 남하, 『광운전자공과대학논문집』3, 1974, pp.285295.

31) 유원재, 삼국사기 위말갈고, 『사학연구』29, 1979, pp.141.

32) 권오중, 말갈의 종족계통에 관한 시론, 『진단학보』49, 1980, pp.15.

33) 이강래, 삼국사기에 보이는 말갈의 군사활동, 『영토문제연구』2, 고대영토문제연구소, 1985, pp.3168.

34) 한규철, 고구려시대의 말갈연구, 『부산사학』14·15, 1988.

35) 장원섭, 백제초기 동계의 형성에 관한 일고찰, 『청계사학』7, 1990, pp.69120.

36) 김기섭,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보이는 말갈과 낙랑의 위치에 대한 재검토, 『청계사학』8, 1991, p.11.

37) 선석열, 삼국사기 신라본기 상대 말갈기사의 검토, 『부대사학』17, 부산대사학회, 1993, p.102.

38) 권오영, 초기백제익 성장과정에 관한 일고찰, 『한국사론』15, 1986, p.83.

     문안식, 『한국고대사와 말갈』혜안, 20003, p.281, “『삼국사기』 「백제본기신라본기의 말갈세력은 모두 동일한 집단이 아니라 영서지방과 영동지방에서 각기 별도의 세력을 형성하면서 6세기 중엽까지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하였다. 또한 신라본기에 보이는 말갈세력은 한 집단이 아니라 두 집단이 포함되어 있다 즉 삼국사기』 ·제본기에 보이는 말갈은 백제본기의 맥계말갈, 신라본기의 예계말갈, 그리고 이들의 해체 이후 새로이 고구려에 의해 도민되어 동해안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한 신말갈의 세계열이 망라되었다고 보고 있다.

     김택균, 삼국사기에 보이는 말갈의 실체, 『고구려연구』3, 1997.

    , 삼국사기에 보이는 맥의 실체, 『백산학보』69, 백산학회, 2004.

39) 문안식, 영서예문화권의 설정과 역사지리적 배천, 『동국사학』30, 1996, p.48.

40) 권오영, 초기백제의 성장과정에 관한 일고찰, 『한국사론』15, 1986, p.83.

41) 박순발, 한강유역 원삼국시대의 토기의 양상과 변천, 『한국고고학보』23, 1989.

42) 문안식, 위 논문, 1996, p.49.

43)​ 김창석, 고대의 영서지역과 춘천맥국설, 『이태진교수정년기념논총』, 2009.

44) 문안식, 영서예문화권의 설정과 역사지리적 배경, 『동국사학』30, 1996, “한편 문안식은 백제본기신라본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