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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춘천의 삼국시대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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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하면 각각의 국가가 영역을 확장해 나가는 과정에서 충돌하는 존재가 말갈이다. 

 

지마이사금 14년(125년) 봄 정월에 말갈(靺鞨)註 296이 북쪽 변경에 대대적으로 침입해 관리와 백성들을 죽이고 사로잡아 갔다.

 

일성이사금 4년(137년) 봄 2월에 말갈이 변경으로 들어와 장령(長嶺)의 5책(柵)을 불태웠다.

 

일성이사금 6년(139년) 8월에 말갈이 장령(長嶺)을 습격해 백성들을 사로잡아 갔다.

          겨울 10월에 또 왔는데 눈이 심하게 내리자 퇴각했다.

 

일성이사금 7년(140년) 봄 2월에 장령(長嶺)에 목책(木柵)을 세워 말갈을 방어했다.

 

일성이사금 9년(142년) 가을 7월에 여러 신하들을 불러 말갈에 대한 정벌을 의논했는데, 이찬(伊湌) 웅선(雄宣)이 불가하다고 아뢰어 중지했다.

나해이사금 8년(203년) 겨울 10월에 말갈(靺鞨)이 변경을 침범하였다.

 

내물이사금 40년(395년) 가을 8월에 말갈(靺鞨)이 북쪽 변경을 침입하였다. 군사를 내어 그들을 실직(悉直)의 들판에서 크게 물리쳤다.

 

위의 사료들은 신라본기 초기사료들이다. 특히 지마이사금이나 일성이사금 나해이사금 때의 사료는 비판적으로 살펴보아야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사료들이 보여주는 상황은 신라의 발전과정에 대한 정황을 추정하기 위해서 충분히 분석해 볼 가치가 있다. 우선 이 사료들의 공통점은 말갈의 공격에 대해 신라 측에서 지속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신라의 북불고 언급된 것은 말갈이라는 존재가 신라 북쪽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사료에 의하면 2세기부터 꾸준하게 보이던 말갈이 4세기말까지 신라의 북쪽 변경에 존재하고 있었음을 확인시켜 준다. 4세기말 신라는 낙동강 동쪽 지금의 경상북도 일대를 완전히 지배한 상태였다. 이러한 점에서 말갈은 경상북도 이북 강원도 어느 지역에 있던 정치체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백제와의 관계에서도 말갈은 더 많이 보인다. 백제본기에서 말갈은 자신들의 동쪽이나 북쪽에 있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북쪽은 황해도 지역으로, 동쪽은 강원도 지역으로 비정할 수 있다. 이렇게 보았을 때 말갈은 공통적으로 한반도 중부지역에 있던 세력으로 볼 수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와 백제본기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은 이들 국가가 영역을 확장해 가는 과정에서 말갈이 나타나며, 이들의 동태는 매우 공격적이라는 점이다. 이들이 공격적이라 함은 신라와 백제가 영역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충돌할 수밖에 없으며, 이는 자신들의 생존과 관련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한반도 중부 내륙에는 이들 말갈의 존재가 여러 세기 동안에 걸쳐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이들의 입지는 백제나 신라가 영역을 확장해 나감에 따라 상대적으로 약해졌을 것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위에서 본 것처럼 4세기말 경에도 말갈은 여전히 백제나 신라에 실체가 확인되고 있다. 

 

자비마립간 11년(468) 봄에 고구려와 말갈이 북쪽 변경의 실직성(悉直城)을 습격하였다.

 

이 사료는 내물마립간 40년 이후의 처음 보는 말갈관련 내용이다. 말갈은 한때 낙랑과 함께 백제를 공격한 내용이 보인 적이 있으나 그 이후에는 단독으로 공격을 시도했다. 이 468년의 내용은 고구려가 말갈을 동원하여 실직성을 공격하였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위에서 언급한 4세기말까지의 말갈 행동은 독자적이었다. 그런데 468년의 사료는 말갈이 고구려의 영향력 아래 편제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고구려가 말갈을 정복하여 자신의 영역에 편제시키고 군사행동에 동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말갈은 언제 고구려의 영향권 아래 들어가게 된 것일까.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한반도 중부에 존재하던 말갈과 고구려가 조우하게 되는 것은 대규모의 군대를 동원하면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동안 여러 차례 신라의 사신이 고구려로 오가는 과정에서 고구려도 역시 말갈이라는 존재에 관해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의 세력으로서 접촉하게 된 것은 광개토왕 10년(400년) 당시 신라를 구원하기 위해서 출병하였을 때였다. 당시 고구려의 군사력은 한반도 중부 내륙에 있던 말갈 세력을 제압하면서 교통로를 개척해 갔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말갈이 차지하고 있던 지역은 고구려의 영역에 편제되었을 것이다. 이를 통해서 고구려는 한반도 중부와 남부지역으로 진출할 수 있는 교통로를 확보하게 되었다. 이때의 루트는 중부 내륙과 동해안을 이용했을 것이다. 400년 당시 고구려는 평양지역을 남진정책을 수행하는 거점기지로 삼고 있었다. 이 시기 고구려가 신라를 구원하기 위한 구실로 경주지역까지 내려오게 된 것은 평양천도와도 맞물려 있는 전략이었다. 고구려군이 낙동강 유역에 진출한 것은 신라 구원이 명분이었지만 결국 한강 이남도 영역화하기 위한 의도였을 수 있다. 

고구려가 한반도 중부 내륙으로 진출하게 될 경우 거치게 되는 경로는 북한강 유역을 거쳐 남한강 유역으로 통과하는 과정이다. 일단 평양성을 거점으로 하여 군사를 동원하였다면 평양성을 중심으로 한 도로를 마련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도로는 평강을 거쳐 철원 쪽으로 내려왔을 것이다. 평강은 분수령이 있어 백두산 산맥이 여기에 이르러 동서 두 갈래로 나뉘어져 철원과 쉽게 연결될 수 있다. 철원에서는 북한강 수계를 따라 화천을 거쳐 춘천으로 이동할 수 있다. 이 루트는 물길을 따라 내려오기는 하지만 넓은 길을 확보하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고구려가 한강 하류의 백제 영역을 피해서 내륙으로 통하는 빠른 길을 선택하려면 북한강 유역의 수계를 이용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5세기 전반 당시 백제는 수세적인 입장에서 한강 하류지역의 방어에 급급했던 만큼 고구려가 한강 상류 방면으로 세력을 뻗쳐 이 지역을 영역화해 나갔을 것이다. 

고구려가 북한강 유역을 거쳐 춘천 지역으로 내려온 후에 일정기간 머물러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왜냐하면 이곳이 북한강 일대에서는 제일 평탄한 곳이기 때문이다. 춘천을 거치게 되면서 남한강 수계를 이용하기 시작하여 남쪽으로 내려가게 된다. 남하하는 고구려군은 이 지역을 확보하면서 도로망도 개척하였을 것으로 보인다.14) 북한강 수계에서 남한강 수계로 이어지는 교통로로는 강원도 서남부 지역으로 연결되었다. 홍천-횡성-제천을 지나 충주 지방으로 통하여 죽령을 넘었을 것이다. 이러한 교통로는 5세기 중반 이후 고구려의 남진로로 활용되었을 것이며, 또한 6세기 중반 이후 신라의 북진로로 사용되었을 것이다.15)

고구려는 확보한 교통로를 중심으로 이 지역을 영역화했으며, 자신들의 체제 안에 편입시켰다. 고구려의 지방통치체제는 간접지배 방식을 취하였는데, 고구려의 독특한 지방통치 방식이다. 춘천을 중심으로 한 북한강 유역 일대는 오랫동안 말갈로 인식될 정도로 독자세력을 유지해 왔으며, 경제적인 여건도 고구려에 크게 작용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점과 관련지어 생각해 볼 수 있다. 고구려는 이 지역을 자신들의 영역으로 확인하는 수준에서 확보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간접지배 방식을 통해 느슨한 형태의 통치를 행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추측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북한강 유역에서 볼 수 있는 유물과 유적의 형태이다. 고구려가 북한강 유역을 영역으로 확보한 것이 400년 광개토왕대이고, 백제와 신라가 한강 유역으로 확보한 것이 551년이다. 한편 신라의 진흥왕이 백제 성왕을 배신하고 한강 유역의 10군을 확보한 것이 553년이다. 백제와 고구려 그리고 신라의 영역에 편입되면서 춘천을 중심으로 한 북한강 유역은 신라의 통치체제 안에 편입된다. 

신라가 낙동강 동쪽의 경상북도 일대를 완전히 장악하던 때는 내물마립간 때인 4세기 후반 5세기 초이다. 신라는 국가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한 때 고구려의 영향력 아래에서 외교관계를 맺었다. 신라는 고구려의 남하정책과 백제와 동맹관계를 맺으며 영역을 확장해나갔다. 5세기 중엽 고구려와 신라는 지금의 강원도 삼척인 실직에서 대결 국면에 처하였다. 눌지마립간 때인 450년 고구려의 변방장수가 실직의 들에서 사냥하는 것을 하슬라 성주가 공격하여 변방장수를 죽인 사건이 발생했다. 이 일로 고구려는 신라를 침입하고 왕의 사과를 받고 물러났다.

신라가 중부 내륙으로 본격적으로 진출한 시기는 진흥왕 때이다. 진흥왕은 540년에 즉위하여서 36년간 통치하였다.

 

진흥왕 9년(548년) 봄 2월에 고구려가 예인(穢人)과 함께 백제의 독산성(獨山城)을 공격하였으므로 백제가 구원을 요청하였다. 왕은 장군 주령(朱玲)을 보내서 굳센 군사 3천 명을 거느리고 공격하였는데, 죽이거나 사로잡은 사람이 매우 많았다.

 

성왕 26년(548년) 봄 정월에 고구려 왕 평성이 예(濊)와 공모하여 한수 이북의 독산성(獨山城)을 공격해 왔다. 왕이 신라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다. 신라 왕이 장군 주진(朱珍)을 시켜 갑병 3천 명을 거느리고 떠나게 하였다. 주진은 밤낮으로 행군하여 독산성 아래에 이르렀는데, 그곳에서 고구려 군사들과 일전을 벌려 크게 이겼다

 

이 두 사료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6세기 들어 신라와 백제가 처음으로 고구려에 대해 공동으로 방어작전을 전개한 것이다. 이 작전을 나제동맹 기간 중 마지막 공동 방어작전이기도 하다. 신라 진흥왕이 적극적으로 중장기병을 동원해 백제를 구원하였다는 내용이다. 그 이유는 이 전투가 한강 유역에서 벌어졌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신라는 이미 5세기에 고구려에 종속적 관계를 맺고 있으면서 그후부터 중장기병을 도입하였다. 이처럼 신라는 고구려에서 도입한 철제무기와 무구(武具)로 중무장을 한 날랜 기병을 동원하여 백제를 구원하였다. 신라의 입장에서는 백제 독산성 전투 경험에서 큰 의미를 갖게 된다. 진흥왕은 자신감을 가지고 정복 사업을 추진하게 되었으며, 중부 내륙 방면으로 진출하게 되는 것이다.

신라가 중부 내륙으로 진출하던 551년에 백제는 한성 지역의 고구려에 대한 대규모 공격을 가해 6군을 빼앗았다. 이때의 승리로 백제는 475년 고구려 장수왕에게 잃었던 한수 이북 지역까지 완전히 수복하였다. 그러나 이 지역들은 신라에 다시 빼앗기고, 신라는 이 지역에 신주(新州)를 설치하였다. 551년 신라와 백제가 남한강과 북한강 및 한강 하류 지역의 고구려 세력에 대해 펼친 연합 공격은 신라의 영역 확장으로 귀결되었다. 신라의 영역 확장에 대한 의지는 이미 550년에 고구려와 백제 사이의 공방전을 틈타 도살성(道薩城)과 금현성(錦峴城)을 차지한 데서도 잘 드러난다. 도살성은 충남 천안이나 충북 증평으로, 금현성은 현재의 세종시로 비정하고 있다.​